Lee Hanbum

Engineering

새벽질주

작가 최혜미, 최윤, 신지영, 문세린, 박지무
기획 김민엽, 이한범, 장지한

  • 장소: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 기간: 2014년 7월 30일~8월 23일

curatorial

전시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동시대 미술의 갖가지 큐레토리얼 전략들이 유행을 넘어 진부한 것으로 전락해가고, 빠른 속도로 새로운 전시의 형식들이 개발되는 이곳에서 이 질문은 촌스러운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기보다 어떻게 ‘전시라는 매체’를 역동적으로 활용하고 그 안에 신선한 개념을 불어넣으지 고민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노력들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전시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 우선 전시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수많은 갤러리들이 문을 닫았고 작가들은 여전히 미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 정부의 계획에 미술은 없고, 기금을 관장하는 제도에 희망을 걸어볼 수도 없다. 심지어 예술가들은 사회의 정상적인 경로를 이탈한 주체들로 분류되고, 정부는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들을 제시한다.

전시는 이런 사실들을 은폐하는 기만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곳곳에서 전시는 진행되고 잡지는 발행되며 학생들은 미대에 입학한다.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삶을 위해 전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것이다.

삶이 아니라면 전시는 무엇을 위함인가. 90년대 이후 소휘 동시대 미술이라는 담론이 유행한 뒤로 그 중심에는 큐레이터가 있어왔다. 그들은 전시를 기획한다고 알려져있다. 기획자들은 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이 화이트 큐브의 내외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는지, 혹은 장소들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곳들을 다른 차원으로 변모시키는지 고민한다. 그들은 작가 못지않은 생산자로 인정받으며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미술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기획’의 핵심은 그들이 고심 끝에 선정하는 전시의 주제들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념적인 장치들이다. 전시의 주제는 어느 도시의 문제들부터 국제적인 정세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적인 모든 이슈를 넘나든다. 때로는 미술사를 재검토하기도 하며 새로운 형시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적절한 개념들이 발명되곤 한다.

작품들은 그 담론을 통과하면서 새 생명을 얻는다. 또한, 관객들은 그 담론을 통해서 작품을 비로소 독해하게 된다. 추상적인 이미지들도 그것이 자본주의를 겨냥한다는 도슨트의 실명과 함께 이해 가능한 논리적 언어로 치환되곤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전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들은 전시가 ‘전시의 주제’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작품들을 모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기획자가 텍스트를 쓰고 작가들과 대화하는 것은 전시가 어떤 주제를 향하기 때문이다. 담론의 질서 안에 전시가 기입된다는 사실은 전시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에겐 그다지 반갑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품은 전시의 담론을 통해 새롭게 독해된다. 물론 이 과정은 미술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거칠게 작품이 주제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작품들은 다른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생명을 얻을 필요가 없는 ‘자율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철학자들을 참조해 보자. 알랭 바디우는 ‘비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의 위치를 새롭게 만들어주려 했다.

“‘비미학’이라는 말은 척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관계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도 예술을 철학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미학적인 사변에 반하여, 비미학은 몇 가지 예술 작품들의 독립적인 실존이 만들어내는 순전히 철학 내적인 효과를 기술한다.”
• 알랭 바디우,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p.5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과 예술의 관계는 다소 거칠게 전시의 주제와 작품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작품들은 전시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담론을 위한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상하는 것’이며 ‘독립적인 실존’을 지닌다.

또한, 자크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한편 미학은 그것의 정치, 또는 그보다는 두 상반된 정치들 사이의 그것의 긴장을 갖고 있다. 예술로써 제거되면서 삶이 되는 예술의 논리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예술의 논리 사이의 긴장 말이다. 비판적 예술의 어려움은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미학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p.84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은 ‘그것의 정치’가 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또한, 예술이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 반드시 정치와 협상할 필요는 없다. 즉 예술은 전시의 주제와 관계를 맺으면서, 혹은 그것에 봉사하는 과정을 통해 비판적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무위오 함께 가능하다.

전시가 전시의 주제를 향한다는 문제의식이 왜 중요한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미술의 정치적인 가능성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진리의 생산절차 중 하나로 간주하는 바디우에게 예술은 ‘독립적인 실존’의 무엇이며, 미학의 정치를 고민하는 랑시에르에게 미학에는 ‘스스로의 정치’가 있다.

하지만 전시의 주제는 작품을 이야기에 봉사하게 만들고 이는 작품 스스로의 정치적인 가능성 혹은 독립적인 실존을 파괴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가 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시의 주제를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곧 언어의 부재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관습적인 전시의 주제를 비워내면서, 동시에 다른 약속과 가능성을 담은 언어로 그 자리를 채워 넣음으로써 폭력적인 담론이 홀로 차지하던 전시의 지분을 다른 곳으로 분배해내야만 한다.

지금의 풍경에서 큐레이터는 마치 ‘매체’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수많은 협업의 공식들과 다양한 직함의 큐레이터들은 기획자를 넘어 개념적인 장치이자 전시의 기술적인 지지체로 간주된다. 큐레이터라는 매체를 어떤 식으로 비틀고 확장하는지가 전시의 승패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저 무력한 방식으로 주제를 비워내고 그곳에 다른 언어를 채워내는 것은 사실상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그 언어로 ‘새벽질주’를 생각했다.
(장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