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확장된 영역에서의 픽션

광장세미나: 참여와 개입의 예술 실천을 위한 공론장의 세미나 내부 발표용으로 작성한 원고.

 

여타의 학문이나 지식 체계가 아닌 미술의 범주를 활동의 영역으로 확신하게 된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미술은 자연의 섭리와는 무관한 의지적 / 비의지적 선택들이 집적된 인공적인 체계이고,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세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개입하기 위한 방식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가시화(물질화)되는 것들의 총체이기에, 이 체계를 이해하는 일, 혹은 (이것이 너무도 막연한 것이라면)이 체계 안에서 집적된 사물을 이해하는 일은 당대의 앎의 생산 조건을 추측하기 위한 근거가 되며 가치는 이 추측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해라는 것은 사실 1만년쯤 뒤에 1억 광년 정도 떨어진 또 다른 은하계를 발견하는 순간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치란 현재의 시공간에서는 판단될 수 없으며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결론은 과정이 웅변하는 수사학이다. 수많은 가능한 결론이 사변적 상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 중 하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은 논증이다. 지금 현재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망원경을 통해 별을 바라보는 일이거나, 우주선을 쏘아 올리기 위해 궤도를 발명하고 내연기관을 디자인하는 일이거나, 도래할 외계 문명과의 조우에 대해 상상력을 총동원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우주 저편에 또 다른 은하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이다.

올해 초 나는 월간 미술세계로부터 3월호의 특집 “미술비평진단 1”과 관련된 설문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설문의 질문은 ①비평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②동시대 비평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진단하는가? 두 가지였다. ①번은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었고, ②번은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끊임없이 피드백해주는 것이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이 두 질문 모두에 대해 답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을 편집부에 회신 해야만 했다. 나의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다. 당시 나는 비평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라고 질문했을 때 비평은 모종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 몸을 뉘일 특정한 장소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보다 넓은 전체 안에서 하나의 위상을 가진다. 비평에 대해서 묘사하게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수행하는 비평을 모순에 빠뜨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이란 일종의 운동에 가깝지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다.

비평이 운동이라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냐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눈앞에 던져졌을 때, 혹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다르게 읽힐 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대상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는 사적인 행위에서 비평의 운동은 시작된다. 여기서 ‘꼼꼼히 살펴보는 행위’가 강조되기는 했지만, 미지의 것을 감지하고, 새로운 이해를 위한 과정에 진입하는 것, 즉 행위로 도약하기 위한 무의식적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히 해야 하겠다. 꼼꼼히 살펴보고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앎이 이루어지고 앎들이 재배치될 때, 그 일련의 총체적 과정을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은 그것이 주목하는 대상에 따라 문학비평, 미술비평, 이미지비평, 문화비평 등 이름이 달리 불릴 수는 있어도 그 시작이 앎과 앎의 재배치라는 근본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약간 비틀어 말해보자면, 비평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모든 세부적인 선택과 연결의 운동성일 것이다.

예술에서 마지막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은 작품이다. 예술 비평은 작품에서 시작하는 나선형의 운동이고, 반대로 작품을 향해 육박하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도화된 예술계에서 비평이 중요하게 자리 잡는 이유는 작품에 대한 가치 서술과 이에 대한 반박을 유도하는 사회적 과정을 생성하기 때문이다.1 작품이 이러한 사회적 과정 없이 유통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러한 작품은 대개 관습적인 합의에 기대어 있어서 불편함 없이 수용될 수 있거나, 작품 외적인 요인으로 상징성을 획득한 (혹은 이양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비평은 전자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밖에 없고, 후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해야)한다. 매우 적은 다른 예가 있다면 직관적으로 보편적 의식에 파고 들지만 비평마저도 그것을 가시화하고 구조화 할 도리가 없어 유예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비평은 그러한 시차적 사물을 현재에 마주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바쁘다.

담론은 비평의 각축장이다. 그러므로 비평의 자존감이 담론의 형성 여부에 뒤따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견고하게 형성된 담론과 어긋나 있거나 그것에 균열을 내고 반박하는 것이며, 그 빠져나감을 발견하는 일은 비평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그 발견을 위해서 비평은 담론에서 적어도 반발은 물러서 있어야 한다.

비평이 모종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비평의 위기는 운동하지 않는 비평 즉 비평인 척 하는 명령하는 형상들과 관련한다. 비평이 운동하는 제도에 부조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비평 자체의 문제라고도 할 수는 없다. 제도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비평으로 오해된 힘들이 권력화한 장소일 것이다. 비평은 오작동을 제안하고 비타협적인 길을 내기 위한 운동이지 무언가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해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어 텍스트의 외연을 한없이 확장시키는 유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때, 비평은 풍요로운 지형을 개척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다.

비평은 하나의 작품이 픽션임을 증언하는 일이다. 때문에 비평은 언제나 일종의 이야기를 생성하는 일이고, 따라 비평은 그 스스로가 또한 픽션이어야 하는 이중 구속의 상태에 있다. 픽션은 무엇인가? 손바닥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손바닥의 앞면을 볼 때 손등이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직접 볼 수는 없다.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손바닥의 측면에선 손등이 픽션이고 손등의 측면에선 손바닥이 픽션이다. 사실 픽션이란 이 상황의 총체성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평은 손바닥과 손등을 뒤집어볼 수 있음에 대해 제안하는 일이다. 나에게 중요한 비평적 문제는 작품의 픽션을 통해 나의 픽션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다. 작품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작품의 모방 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여러 동일 위상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그 작품의 짝패로서의 비평이 나의 자아가 투영된 것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수준으로 소통될 수 있는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내게 픽션이 중요한 이유는 또한 간명하다. 예술-작품의 기능은 자본의 기능의 부분집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픽션은 이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비틀림이다. 상상의 여분으로 남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는 것.

그간 내가 써 왔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니, 가장 많이 썼던 용어는 형식, 매체, 그리고 기능, 수행 같은 것들이었다. 픽션에 관한 한 대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픽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지점이 거기에 있는 듯합니다. 픽션이 유의미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사물과 사물의 위치에 대한 통상적 이해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사물이 어떻게 꺼슬꺼슬한 세계의 잔여로 남는지, 그것이 어떻게 모종의 작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불현듯 환기시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의 경우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적인 측면은 모든 작품 자체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픽션으로 드러나게 되는 실제적인 조건은 분명히 있다고 보는데, 결국은 그 조건에 대한 이해는 매체와 매체의 형식에 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나는 픽션이 시작하는 곳에는 매체를 재발명하고 형식을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급진적일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내용은 언제나 상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고 거짓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혹은 너무 자의적이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반면 형식과 매체의 문제는 실제적이고 유물론적이다. 형식이 비틀림으로써 기묘한 감각은 생성되고 다른 서사가 만들어진다. 나의 비평적 관점은 바로 이 형식과 매체의 사용에서 시작된 파장을 읽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픽션이 어떻게 세계에 틈입하게 되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과 매체에 천착한다는 것은 고루한 것이 된 시대이고, 더 좋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더니즘이라는 유령을 호출할 개연성이 크다는 데 있다. Art Since 1900의 마지막에는 할 포스터, 이브 앨랑 브와, 로잘린드 크라우스, 데이비드 조슬릿, 벤자민 부흘로 등 70년대 이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좌파 미술사학자-비평가의 라운드테이블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포스트구조주의, 개념 미술, 뒤샹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비디오 아트의 등장 이후 매체라는 개념이 해체된 것에 대해 문제라고 지적하고 매체의 중요성에 대해 옹호한다. 그러나 이외의 비평가들은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적인 매체로의 회귀는 납득될 수 없는 주장이며,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기 어려운 시대이며 상황은 변했다고 입을 모아 비난에 가까운 반박을 한다. 현재의 미술이 놓인 위치(글로벌리즘과 로컬리티의 긴장)와 관심(디지털과 비판 이후 사변세계의 자율성)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고, 오히려 형식과 매체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제 모두가 주력하는 것은 데이비드 조슬릿이 After Art에서 시도하는 것처럼, 폐쇄적인 매체 개념을 벗어나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와 결별하는 대신 그들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음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창했던 앨런 캐프로처럼, 형식과 매체는 일종의 유산으로써 변형되고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형식 실험과 매체의 재발명은 미술이 당대의 반영으로만 그치는 것에 머물지 않는 자율성을 위한 숨구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개념을 전환시켜 이해해야 할 필요는 분명해 보인다. 출판물을 다루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며 확장된 생각은 작품 바깥이라는 장소의 형식에 대해서다. 이전에는 작품 자체의 매체와 내재적인 형식에 대해서 살펴봤다면 이제는 그것이 유통되고 사용되는 방식까지 형식의 범주로 포함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술복제시대의 산물인 책의 핵심적인 가치는 무한히 증식하고 불특정하게 유통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그 매체의 속성에 포함되는 중요한 형식이다. 기술복제의 관점에서 책과 가족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상에 대한 비평적 관점도 새롭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이라는 매체의 핵심적 가치는 손쉽게 편재하게 됨으로써 가능한 공동의 경험을 생성하는 데에도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비가시적인 외적 맥락을 간파하고 능수능란하게 이용한 이가 뒤샹일 것이다. 그리고 세스 프라이스는 뒤샹이 수행한 전유의 방법론을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갱신한다. 작품 내외의 형식적 조건 안에서 매체는 보다 유연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이중의 형식 안에서 매체는 어떻게 유동하며, 이 움직임이 어떤 픽션으로 기능하는가? 라는 질문은 결국 하나의 예술 실천이 어떤 전술을 구사하는가에 대해 파악하기를 요청한다. 때문에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시대의 감각을 반영한다거나 시대의 시각장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품에서 멀어진다. 혹은 이 이중의 형식을 면밀히 따져보았을 때, 모호한 수사적 담론에 가려져 있던 진부함이 제 몸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을 논의하는 방식에 대한 한계에서 기인한 생각인데, 단순히 시대의 새로운 매체적 감각이나 세대적 경험이 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성급하게 전환되어 논의를 닫아버리면서 진정 중요한 예술적 효과와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이 과도하게 미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경계한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이 미학적 규준이 된다면, 그것은 다음 세대가 출현하면서 즉각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꼴이 된다. 중요한 것은 당대에 갱신된 형식의 조건과 매체의 사용을 통해 생성된 픽션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형식주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변증법의 질서 아래에서 판별할 때 가능할 것이다.


 


  1. 이 기능을 대리할 수 있는 힘의 작용은 자본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