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자기파괴(self-destruction)로부터: 행위-영상의 수행적 매개

OKULO 002: 이미지, 먼지와 기념비 사이(2016년 6월 20일 발행)에 수록.

 

2015년 6월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 잡은 신생공간 ‘지금여기’에서는 타임라인의 바깥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기획자가 주목한 것은 “작업의 과정이나 결과의 표면이 무의미해 보이는 작가들의 작업”임을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 무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전시가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선택된 몇몇 영상작업을 보면 무의미와 관련된 어떤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 강정석의 콩알탄사나이 교집합(2010)에는 허름한 양복을 입은 세 청년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상한 몸짓을 행하며 서로 뒤엉키다가 중간 중간 주머니에서 콩알탄을 꺼내 땅에 내던지는데, 화면은 이 장면을 클로즈업하고 느린 속도로 재생한다. 공석민은 두 개의 기록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화면 속에서 구로부터 영등포에 이르는 아스팔트길을 대걸레로 문지르거나(속임의 기술, 2014), 아무도 없는 넓은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Man on Wire, 2014).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행위자에게 투영시킨 것이라고 작업에 대해 설명한다. 즉 사회 속에서의 역할이 콩알만 하여 콩알탄 정도의 작은 소음만을 낼 뿐인 사람들이거나(강정석), 사회의 관심 밖에 있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사람(공석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설에 기댄다면 무의미는 단지 자본주의체제에서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무용함(useless)으로 비껴나가며, 등장인물과 그 행위는 세대론적 기표로 환원되어 프레임 안에서만 공회전할 뿐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프레임 내의 행위자에 대한 의미화가 영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로 진로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행위-영상2은 행위가 무빙이미지로 눌어붙어 이중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언어의 지시가 굴절됨에도 큰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테이트미술관(Tate) 퍼포먼스 분과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요나 웨스터만(Jonah Westerman)은 퍼포먼스란 것이 실제 행위(action)와 사진/영상 이미지 사이의 아주 세밀한 경계선 위에 있기 때문에 양가적 특성을 지닌 매체라고 말한다. 웨스터만은 거의 알아채지 못 할 만큼 극미한 차이를 뜻하는 뒤샹의 ‘인프라신(infrathin)’이라는 용어를 빌려 퍼포먼스를 ‘인프라미디엄(inframedium)’이라고 명명한다.3 이러한 관점에서 기술매체가 신체나 행위를 프레이밍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미지가 그 자체로 분열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언어의 관성은 편의상 프레임 내 가상의 주체를 의미화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관람경험을 제시할 뿐 이 분열적 상태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행위에 덧대어진 영상의 본질적 속성은 표면적 이미지와 신체의 행위를 정확히 구분하려는 언어적 지시를 무위로 돌리며 혼란스러운 의미체계를 생성하는 것이다. 결국 무의미의 발생이란 존재론적 차원에서 분열적인 행위-영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술적 효과 중 하나다.

자기반영에서 자기파괴로

행위-영상이 분열증을 예비한다는 사실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비디오 매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정립한 행위주체의 나르시시즘적 자기반영성에서 잘 드러난다. 크라우스는 비디오: 자기애의 미학(1976)에서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비디오 아트의 특성을 두 가지로 간추려 낸다. 첫째, 대상을 향한 카메라의 녹화와 모니터에서의 투사가 주로 편집되지 않은 채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둘째, 그 대상은 주로 작가 자신 혹은 관객의 신체라는 것이다. 이 두 특성으로 말미암아 카메라 앞에 선 작가/관객의 신체는 거울반사를 통한 모니터상의 이미지와 즉각적인 대칭성을 이루고 자아는 분열적으로 드러난다. 크라우스는 화면의 형상이 단지 표면적 재현이미지가 아니라 자아의 대체물이면서도 자기 자신과 하나로 묶여있는 대상이라고 말하며 비디오의 진정한 매체적 특성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 상황에 있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촬영과 편집에서 손쉽게 화면의 조작이 가능한 디지털 환경, 저장과 복제가 아주 저렴하게 이루어져서 신체와 행위가 더 이상 동시적으로 재생되는 모니터 위에만 존재하지 않고 편재하게 된 상황에서, 이제 철저하게 의도하지 않는 한 투명한 자기 반영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행위주체의 자아는 모니터에 반사되어 곧바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화면 안으로 더 깊이 투영되는데, 이로써 분열증은 행위주체의 정체성보다는 영상이미지의 존재론적 속성으로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실존적 주체가 상실된 자리에서 세를 넓히는 것은 대체된 삶의 형식이 아니라 분열적인 화면일 뿐이며, 신체와 행위를 담는 영상은 이제 나르시시즘적이라기보다 자기파괴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화면을 통해 서사를 직조하고 미장센을 구성한다 하더라도 정확한 지시가 불가능한 의미체계 안에서 실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은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얘기해 보면, 화면 내에 어떤 몸과 행위를 일종의 개념적 표상으로 등장시키는 것, 예컨대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 상황을 설정하고 개별적인 몸을 특정한 것으로 주체화시켜 데려다 놓는 서사화 방식은 관습적이기 때문에 이해되는 것이지 진정으로 비판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픽션임을 자처하지 않는 이상, 행위-영상의 돌파구는 어디인가.

행위-영상의 매개 가능성

우선 몇몇의 작업을 살펴보자. 문세린의 모니터 요원(2014)은 갤러리 공간에 설치된 네 대의 폐쇄로 텔레비전(CCTV)을 4분할 화면에 보여 주는 3분 길이의 영상이다. 1번 화면은 아무도 없는 채로, 2~4번에는 검은 옷과 모자를 쓴 한 인물이 구석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상이 진행되면 이 인물은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걷다가 멈추어 서고, 동시에 모자를 고쳐 쓴 후 방향을 바꾸는 등 똑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면서 마치 동일인물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나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3번과 4번 화면의 인물이 다시 일어서는데 반해 2번 인물은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는 어긋남이 발생하면서 급격한 전환을 맞이한다. 이들은 갑자기 서로를 잡으려는 듯 숨 가쁘게 전시장 공간 안에서 원을 그리며 뛰기 시작하고, 비로소 1번 화면에 처음으로 인물이 포착된다. 총 네 명의 인물이 순차적으로 네 대의 CCTV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하고, 한순간에 사라지며 화면에는 정적만이 남는다. 이 작업은 행위-영상 이미지의 분열적 특성을 은유하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등장인물이 네 명이 되는 순간 한 곳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던 카메라 또한 서로 겹치지 않는 네 방향에 정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주의집중을 요하던 관찰자의 시선은 이제 불가역적으로 파편화되어 표상된 것들에 대한 의미는 영상의 마지막 장면처럼 텅 비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네 명의 인물이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성이 보장된 채로 나타나 분열의 상황을 매개한 이후 사라졌다는 점이다. 함정식의 (2009)에는 제목 그대로 오로지 삽의 움직임만이 나온다. 그러나 공중에 매달려 흔들리고, 아스팔트 위를 스쳐 지나가며 금속성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이 물체는 삽이라는 도구의 기능적 전형성을 거부한다. 언뜻 삽의 다른 사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삽 머리 바로 위에 부착된 카메라의 시선은 삽의 모양새를 완전히 낯설게 포착함으로써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삽의 자리를 비워내려 한다. 따라서 영상은 삽이라는 사물을 매개하는 것이 아닌 삽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사라진 자리를 매개하는데, 여기서 삽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드러내는 움직임이 주요하게 기능한다. 흐르듯 지면을 훑고 나아가는 움직임은 사물의 자리를 주변 환경과의 연동을 통해 동기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실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영상이 드러내는 진정한 효과는 삽이라는 행위자의 상황과 무관한 것으로, 삽이라는 기표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이미지가 관객의 기대를 계속 밀쳐내며 만들어내는 간극이다. 앞의 두 작업은 아주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음에도 이미지가 일종의 매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미지는 주의집중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 없는)움직임만을 남길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행위자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완전한 익명적 주체를 등장시킴으로써(모니터 요원) 의미를 내적으로 수렴시키려는 욕망을 제거하여 외재성이 편재하는 공간으로 관계망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화를 회피하려는 시도가 매개 가능성의 유일한 조건은 아닌 것 같다. 문세린의 다른 작업 도끼(2014)는 황량한 공사장 터 한가운데에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여 도끼를 매단 긴 줄을 점점 늘어뜨리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촬영하고 느리게 편집한 영상이다. 작가 개인을 둘러싼 물리적 요소들과 그 제약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과정이 화면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축을 담당하지만, 이 작업이 비평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전시장 내에서 설치되었을 때이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렸던 새벽질주전에서 도끼는 얇은 각목을 기둥삼아 허공에 떠 있도록 설치가 되었다.(그림 5)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도끼의 움직임은 평평한 화면에 한정되지 않고 프레임 밖의 물리적 공간을 상상적 감각으로 획득한다. 이를 통해 이미지는 내적인 서사로 종결되지 않고 공간을 향한 매개의 역할을 보다 더 강력히 수행한다. 그 때문에 쉽게 표상 될 수 있는 것들, 예컨대 공사장 터, 여성, 도끼, 동심원, 기다란 줄 등의 의미요소들이 언어로 축소되지 않고 관람의 조건이 되어 발산한다.

이상의 예에서 살펴 본 문세린과 함정식의 행위-영상작업은 구체적인 (사물)신체나 행위를 화면 내에서 의미화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히려 의미를 흐리는 장치를 통해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외재적 세계와 매개되는 개연성을 열어두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재적 세계는 사실적 정보가 축적된 현실계를 뜻하지는 않는다. 박재용은 「퍼포먼스가 영상이 될 때,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될 때」 라는 글을 통해 프레임 안에 천착하는 고답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퍼포먼스 영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실제 세계로 시야를 확장하길 제안하며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를 드러내는 기착지로 영상을 활용” 한 작업들을 예로 든다.5 그러나 프레임 밖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영상을 파악한다 해도 앞서 말한 분열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분열증은 모방의 속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기에 어떤 사실의 발견을 통해 이해의 보충물이 더해지는 것으로 해소되는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윌리엄 포사이스와 티에리 드 메이의 하나의 평평한 것, 다시 제작된이 퍼포먼스의 재현이 아니라 안무원칙의 재현임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분열증을 심화시키는 형국인데, 영상이미지가 몸, 행위뿐만 아니라 텍스트에도 눌어붙어 있을 개연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서울 데카당스의 화면 속 퍼포먼스가 대체물임을 인정하고 진짜 의미는 원본을 상상할 때 가능하다는 요구에는 실상 원본과 모방물의 우위관계를 설정하는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이는 영상이미지가 달라붙는 신체를 향한 시선의 각도가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열증을 지닌다. 즉 행위-영상의 분열증은 지식의 증감을 통한 교육적 효과와는 무관한 것으로 언어체계를 등에 업은 해법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미적 체계에 속해 있다. 행위에 눌어붙은 영상이미지는 기표일 뿐이다. 하나의 기표가 모방을 통해 생성된 또 다른 기표를 지시한다고 해서 의미가 안착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표면적 이미지에 대한 기의를 재현의 체계 안에서 찾는 것은 무용한 노력이다. 그리고 기표가 안착해야 할 곳은 기의가 아니다. 앞서 말한 외재적 세계란 단순히 프레임 밖의 현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주어진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분열증이 향하는 외부는 아직 몸체를 형성하지 않은 구체성을 결여한 상태, 단지 수행적 매개를 통해 새롭게 얽히게 되는 관계성을 뜻한다. 분열증 자체는 증상일 뿐 해방구가 될 수 없고 그것이 예술로 가능한 조건이기 위해 필요한 논점은 기능의 문제로 전환된다. 여기서 오래 전 조르주 뒤아멜(Georges Duhamel)이 무빙이미지로서 영화의 지각적 특성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벌써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이미지가 나만의 생각을 대체해 버린다.”라고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6 분열증이 행위-영상의 무빙이미지를 매개로써 기능하도록 조건 지운다 했을 때, 기존의 사고를 멈추게 하는 것은 의미로 파악되지 못하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추상성이다. 분열증을 배태하는 모방은 단순히 형상이동의 차원에서 합의되는 말이 아니라 미메시스(mimesis)로 나아간다. 박준상은 미메시스는 보이는 외현에 대한 복제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허무는 공동적인 것, 상호주관성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몸에 관한 그의 사유는 행위-이미지의 실천에서 적절하고 중요하다.

“문제가 되는 몸은 결국 보이는 몸이 아니다. 보이는 몸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형되어 남은 몸의 리듬, 몸의 음악 또는 음악적인 몸이다. 모든 음악의 근원으로서의 몸, 어떠한 내면보다 더 내적인 정념의 파동, 보이는 몸을 매개로 전파되는 보이지 않는 몸, 감각기관들(가령 오감)의 구체적, 생물학적 몸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 몸이 추상화되어 남은 장소 없는 몸(온몸, 온몸은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정할 수 있는 장소를 갖지 않으며, ‘온몸으로 느낀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모든 구체적인 감각기관을 떠나 있다), 오히려 ‘나’의 외부를 지정하고 그 외부로 향해 나아가는 몸, 리듬의 몸, 그 몸은 타인의 몸과 접촉하고, 그 안에서 공명을 가져온다. 몸과 몸의 교차, 어떠한 관념이나 사유보다도 더 보이지 않고 더 내적인 정념의 교호, 바로 그것이 시원적 미메시스가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주목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바로 거기에 여전히 예술이라는 물음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주목을 요구하는 점이 있다.”7

미메시스가 “눈으로 보는 행위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서 유래하는 이해(인식)가 정립하는 모든 의식적이자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모든 위계질서를 작품을 통해 천천히 그러나 순간 와해시키는 ‘자연’의 움직임이 된다.”8라는 박준상의 판단은 정언적 명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개별 예술작품이 가능한 효과에 대한 서술로 독해된다. 그러나 하나의 예술작품이 미메시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해 불가능한 여분의 감각만을 생성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미술작가 힐러리 로이드(Hillary Lloyd)는 일상적 오브제와 풍경, 인물을 재생속도 바꾸기, 초점 흐리기, 클로즈업과 같은 편집기법을 사용하여 무빙이미지로 제작하고, 그 이미지를 광범위한 공간 차원에서 지각하도록 제시함으로써 이미지가 포함하는 대상과 이미지에 대한 경험-기억을 재구성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일상적 오브제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함정식의 과, 관람의 경험을 공간으로 확장한다는 차원에서는 문세린의 도끼와 일견 섞여 들어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힐러리의 작업에서 움직이는 것은 화면 속 깊이 투영된 몸이 아니라 표면 이미지의 연속적 흐름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니멀리즘의 전략을 차용해 영상이미지를 사물로 치환시키고 지각의 환경을 구성하는 것에 방점을 찍으며 무빙이미지와 그것이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조절한다. 비평가 커스티 벨(Kirsty Bell)은 그의 작업에 대하여 “무빙이미지에 의해 포착된 (화면 안의) 신체, 구조는 전시장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관람자의 신체와 공명한다.”9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명(echoed)은 질적인 차원에서 미메시스적 공명과 다르다. 미메시스가 상호적인 것이라면 여기서의 공명은 감각경험에 따른 관객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다. 새로운 감각적 경험이 미학의 가능성을 대체한다는 수행성 담론은 현대미술의 지나친 낙관주의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은 아트리뷰(ArtReview) 2014년 9월호에 관계 없는 예술(Art Without Relations 이란 글을 통해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리즘을 리터럴 아트(Literalist art)라고 칭했던 것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밝힌다. 하만이 지적하는 문제는 사물을 그대로 제시한다는 의미의 ‘리터럴’이 연극성(theatrical)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물의 효과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리터럴은 관계적(relational)이다. 반면 연극적인 것은 비관계적(nonrelational)인데, 연극에서의 관객은 연기자의 미메시스로서 바로 그 공간에 틈입해 있는 또 다른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터럴은 연극적인 것과 대척점에 서 있다. 하만은 미술이 리터럴 아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프리드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사물을 그대로 제시하지 말아야한다는 논리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품과 관객 모두 고정되고 특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성되는 유기체이고, 미적인 가능성 또한 내재한 것이 아닌 발생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미술의 생태계는 비관계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10

통제된 몸

영상의 발명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예술작업의 무빙이미지에서 움직이는 몸이 등장하는 형식은 거의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마다 비평적 가치를 획득하는 층위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미 19세기 말 무용수 로이 풀러(Loie Fuller)의 춤을 카메라로 포착하였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신체를 기술매체로 기록하여 무빙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은 20세기 모던의 중요한 지각방식 변화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11 크라우스는 비디오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예술가로 하여금 작품을 재생산하길 요구함과 동시에 즉각적인 재감상을 통해 기억된 예술이 예술로서 인식되는 대중매체 환경에 부합하는 미적 형식이라며 그 상관성을 지적한다. 나는 앞서 당대의 기술, 환경적 조건과 기록 방식의 조작으로 인해 행위-영상이 더 이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자기 파괴적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신체성분을 화면 깊이 던져 놓으면서도 그 몸의 전면을 관객에게로, 세계로 내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표면적 풍요로움 아래 거대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수도 없이 꿈틀대는 당대의 구조적 모순은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태를 정확히 향하여 마주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의사소통 불가능의 징후이기도 하다. 자기파괴는 프레임 내에서의 삶의 구성과 삶으로의 지시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미지가 무한히 유포, 저장되어 도처에 존재하게 된 상황에 따른 수동적 결과이이지만, 오히려 그 상황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가능성을 배태한다. 즉 프레임 안의 신체, 신체를 담은 프레임의 이중구조는 징후임과 동시에 이를 마주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정치다. 스스로를 화면 안에 통제하면서도 삶의 감각을 생성하기 위해 표면을 뚫고 나오려는 시도는 이중적인 태도로 비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존재로의 회귀로 읽힌다. 의미체계 위에서 납작하게 환원 될 삶이 익명의 형식으로 대체되어 언어와의 대칭성을 거부하는 순간 이미지는 감당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포화상태를 벗어나 삶과 의미를 외재성으로 내어 놓는 매개물로써 기능한다. 그러므로 삶이 휘발된 삶, 이미지의 잔여분으로 남은 움직임은 표현이 아니라 잠재성이다. 그리고 당대의 정면성(frontality)이다. 평평한 화면에 음각된 뒤틀린 몸은 세계를 마주하되 구체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때문에 중요한 질문은 화면이 어떻게 프레임 내의 삶을 조형하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구체적 삶, 즉 편재하는 외재성을 어떻게 조형하려 하는가 묻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실제로 변형된 세계에 대한 관찰로 갈음되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분열적인 행위-영상이 매개적 차원에서 기능하려 시도함으로써 당대의 가능한 예술실천을 우회한다고 보는 생각은 단순히 매체적 문제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제 하나의 구체적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상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이미지의 위상을 향한 사유이기도 하다. 웹이라는 유체(liquid) 위에 떠다니는 영상 이미지는 단순히 기술매체에 의한 복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열증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기존의 행위-영상의 분열증이 만들어 내는 텍스트의 이동과 변이가 물리적 공간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웹 위에서의 분열은 그 이동 과정이 불투명하고 정확히 파악될 수 없다는 점에서 텍스트를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초단발활동의 작업 생산 방식은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춰 적절한 대처처럼 보인다. 매 활동에서 그들은 관객을 두지 않거나 비인간 관객을 상정하여 행위를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곧바로 웹에 게시한다. 또한 작업의 생산에서 물질화 과정이 없고 행위를 향한 구체적인 지시가 없이 웹 이미지는 인덱스로만 기능하기에 의미 작용 가능한 텍스트는 공유되지 못한다. 그들의 행위는 완전히 장소를 상실하여 깊고 어두운 심연에 가라앉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표면의 이미지는 물결에 일렁이는 잔상처럼 가시적이길 포기한다. 이와 같은 처지의 이미지가 제작자와 관객 모두를 떠나 진정한 자율성을 지닌 해방적 주체가 될지, 더 얄팍한 표면으로만 남을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겠다. 이미지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은 윤리적인 것을 넘어 이제 아주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익명성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가능성은 그것 스스로의 임무로 남겨진다.


 


  1. 타임라인의 바깥, 공간 지금여기. link 

  2. 일반적으로는 퍼포먼스 영상이라고 통칭하지만, 퍼포먼스가 상당히 광범위하고 모호한 용어이기에 행위라는 말로 대신한다. 여기서 행위는 화면에 신체가 등장하거나 무언가를 행하여 화면에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3. Jonah Westerman, “Between Action and Image: Performance as ‘Inframedium’,” January 20, 2015. 

  4.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October, Vol. 1. (Spring, 1976), pp. 50~64. 

  5. 첫 번째 예는 2000년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가 안무를 맡아 2000년에 무대에 올린 하나의 평평한 것, 다시 제작된(One Flat Thing, reproduced)을 티에리 드 메이(Thierry De Mey)가 영상으로 다시 제작한 동명의 작업(2006)이다. 박재용은 이 영상이 무대 위의 공연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시 연출하고 화면을 편집함으로써 이미 독립적인 작품으로 기능한다고 평하면서도, 퍼포먼스와 영상 모두 실은 포사이스의 안무 원칙을 다시 재구성한 것일 뿐임을 밝힌다. 두 번째 예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 중인 P라는 인물이 진술서 읽는 연습 과정을 담은 옥인 콜렉티브의 영상 작업 서울 데카당스(2013)이다. 일견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으로 보이지만 실제 퍼포먼스는 영상이 모두 제작된 이후 재판장에서 이루어질 것이기에 화면에서 보는 것은 도래할 사건의 예비일 뿐 부재한다고 파악한다. 박재용, 퍼포먼스가 영상이 될 때,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될 때, 인문예술잡지 F 10호, 2013, 147~159쪽. 

  6.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길, 2014, 142쪽. 

  7. 박준상, 떨림과 열림: 몸, 음악, 언어에 대한 시론, 자음과모음, 2015. 40쪽. 

  8. 앞의 책, 56쪽. 

  9. Hilary Lloyd, Balfour”, Sadie Coles HQ. 

  10. Graham Harman, “Graham Harman: Art Without Relations,” ArtReview, September 2014. 

  11. Erin Brannigan, Dancefil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p. 19~38. 

강정석, 콩알탄사나이 교집합,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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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민, Man on Wir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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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린, 모니터 요원, 2014
함정식, , 2009
문세린, 도끼, 2014, 새벽질주(2014, 윌링앤딜링) 설치 전경
힐러리 로이드, Things, 2011 © Artist Sp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