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Engineering

How to Move the House

발행 나선프레스
글쓴이 최빛나, 김그린, 이한범, 오석근, 박가희, 손혜민, 이현인, 오쿠이 라라, 치아 니 리, 신현진, 사우빈 얍
편집 손혜민, 이한범
번역 유소윤, 신현진
발행일 2020년 4월 17일
크기 182 x 257 mm
페이지 96
디자인 신신(신해옥, 신동혁)
ISBN 979-11-965400-5-0
가격 10,000원

about

“어떻게 함께 할까?”
이 책은 함께 하기의 의미와 그 가능함의 조건에 대해서 탐구해 온 손혜민 작가의 질문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 작가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빙자하는 커뮤니티(Pseudo-Community)를 조직하고, 고통로용(Gotong Royong)의 흔적을 찾아 말레이시아로 집을 옮겨 간다. 작가는 빙자하는 커뮤니티의 구성원들과 함께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인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손혜민 작가에게 예술이란 임시적인 집을 세우고 다시 허무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면, How to Move the House는 그 집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시간이다.

부록으로 수록된 망고마을의 움직이는 나무집은 집을 옮기기 위해 필요한 공동의 (어긋나는) 몸짓에 주목하는 짧은 동화로, 이 책 전체에 걸쳐 탐구하는 함께하기에 관한 핵심적인 생각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contents

5 빙자하기
10 준비하기
14 이사하기
34 (캠프) 수행하기
55 춤춰주기
66 해체하기
72 숨 고르기

책 속에서

빙자하는 커뮤니티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인간의 신념이나 이념이 아닌 인간 외의 객체와 행위를 중심에 놓아라.” 예를 들자면 교류도 없고 뭘 하는지도 당최 모르겠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모여 앉아있는 고양이들의 집회와 같은 것을 떠올려도 좋다. 이러한 ‘빙자하는 커뮤니티’에 대한 시대적 공감대는 지난 몇 년간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나부끼는 고양이 집사 연대의 깃발을 봐도 알 수 있다(그리고 또한 나부끼는 온갖 빙자의 깃발들!).

  • 최빛나, 빙자하는 커뮤니티, 6-7쪽

고통 로용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네이, 싱가포르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사회적 개념으로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을 하는 것 혹은 상부상조를 의미한다. 흔히 캄풍(Kampung, 마을) 스피릿(Spirit, 정신) 이라고 표현되는 이 가치는 지역 커뮤니티의 공적 및 사적 영역에 근간을 이루었고, 1960–70년대 지역 정화 및 경제적 활성화를 목표로 정치적 정책과 때로는 결합되기도 했다. 현재에 이르러 고통 로용이라 하면 마을 정화 활동으로 주로 생각된다. 공익을 위해 개인이 모여 함께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심화됨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어느 정도 조정과 불화를 예상한다. 특히 이 공익이 자치적인 것이냐, 정책적인 것이냐에 따라 고통 로용은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고통 로용은 또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 혹은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자치적인 공동의 목적을 만들어 내거나 나와 마을의 이익, 더 나아가 사회의 이익, 지구의 이익으로 이 개념을 확장시켜 볼 가능성도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많은 미술작가그룹은 고통 로용을 하나의 콜렉티브의 작동 방식 혹은 기조로도 삼고 있다.

  • 손혜민, 말레이시아의 고통 로용(Gotong Royong), 19쪽

디제잉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처음에는 서로 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훈육된 몸동작을 취한다. 수평적 형태의 댄스 플로어는 상호 관찰이 가능한 무대 또는 광장이다. DJ의 역할과 위치 그리고 높이에 따라 댄스플로어의 성격은 변하기도 하는데,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주체들을 위한 공간에서 DJ의 위치 또한 댄스플로어와 동일한 높이에 위치해 있다. 이 안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며 계급 논리는 존재하기 않는다. 때문에 수평적인 댄스플로어는 사회적 규범으로 물신화된 다양한 신체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변화를 실험하기에 적합한 장이 된다. 예열은 교육에 의해 규범화된 개인과 미디어에 의해 자본화 된 신체를 인지하고 이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한다. DJ는 이를 위한 촉매 역할을 한다. DJ가 다양한 음악을 리서치하고 이를 재맥락화하여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은 큐레이터가 전시를 준비하고 펼쳐내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DJ는 리서처, 아키비스트, 큐레이터 그리고 뮤지션이다. 디제이는 한 곡 안에 여러 요소들, 예컨대 형식, 정서, 이야기, 시대 등을 다른 곡과 엮어 맥락을 만든다. 충돌을 통한 변증법, 섞고 엮어서 허무는 과정은 유연하고 창조적인 사고와 행위이며 이는 댄스플로어의 감상자로 하여금 그들의 훈육 된 신체를 유연하게 만드는 데, 또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데 도움을 준다.

  • 오석근, 예열, 디제잉, 긴장 완화, 56-57쪽

사건 현장에서 달아난 범인을 잡기 위한 수사망은 하얗고 커다란 흰색 게시판 위에 단서들이 하나 둘 쌓여 나갈수록 좁혀진다. 수사관은 사건과 관련된 온갖 단서들을 그러 모아 분류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러저러하게 연결시켜 보며 임의적인 인과 관계를, 일종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 이 때 ‘온갖 단서’란 단지 시각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의 체취, 그것의 감촉, 그것의 목소리, 그것에 대한 오래된 기억, 때로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것을 되살릴 필요도 있고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을 찾아 헤맬 필요도 있다. 수사관은 그리하여 하나의 형상을 지시하기 위한 일종의 허구를 구성하는 사람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완벽히 가려져 있는, 언제나 비가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범인의 형상을 ‘포룸(forum)’으로 불러 세우기 위한 방법이다. 과학 수사를 뜻하는 포렌식(forensic)의 어원은 바로 사건의 범인을 선언하는 장소인 광장(forénsis)이다. 만약 범인을 추적하여 비로소 그의 형상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 게시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는 범인이 범행 현장과 관련하여 운신했던 자취와, 세계 혹은 사물과 맺었던 관계의 지도다.

  • 이한범, 게시판, 37-38쪽
all photos by 함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