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Engineering

Using Your Real Life

작가 조익정
기획 김민엽, 이한범

  • 장소: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갤러리
  • 기간: 2016년 5월 3일-5월 13일

curatorial

Using Your Real Life라는 전시에 대하여

Using Your Real Life는 전시라는 형식과 이름을 빌리지만 사실상 대화상태에 가깝다. 2016년 1월 30일 저녁, 나는 우정국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조익정 작가의 스폿을 보았다. 어슴푸레한 작가의 기억 속에서 꺼낸 하나의 사건을 30여분의 짧은 3막짜리 공연으로 재구성한 작업이었다. 딱히 ‘좋았다’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쉽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지인의 도움으로 조익정의 지난 작업들을 찾아 볼 수 있었고 나는 그가 작가 경력의 초창기부터 꽤나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작업의 중심소재로 말 해 왔으며 또 여러 방식으로 변주 해 왔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기이했다. 개인의 서사를 보고 듣는 일이 감정으로 가 닿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미학적 체험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내적 고백이 보편적 감각으로 치환되고 개인의 기억이 집단적 기억으로 가능할 때 예술은 분명 정치적인 것의 문을 열어젖힌다. 나는 조익정의 작업을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자전적인 그의 몇몇 작업이 왜, 어떻게 유효한지 밝힌다면 동시대성이라는 담론이 아주 미시적인 상태에서도 실천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조익정의 작업 중 사적인, 혹은 개인적인 서사가 주요한 골격이 되는 냉장고 네 대, LIttle Does She Know, 스폿 세 개를 중심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메일을 주고받았고. 여러 번 만나 질문하고 대답했다. 대화는 또한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된다. 개인에 관하여, 각 작업의 형식과 특성에 관하여, 그리고 미술의 역할에 관하여.

조익정이라는 개인의 미시적인 상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작업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익정이 작업을 위해 상황을 선택하고/말하고/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성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 주체성은 두 가지 의미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형성된 정체성(identity)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행동의 행위자(subject)로서의 주체성이다. 이 둘은 분명 분리시켜 볼 수 없는 복잡계의 요소일 것이다.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 중요했던 이유는 두 번째 갈래이기도 한 작업의 형식과 특성에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세 작업에서 조익정은 언제나 자신이 놓여 있는 여러 조건(사회경제적, 국가적, 또는 환경 그 자체와 주변인물)을 객관화여 그것과 본인이 관계 맺는 상태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 대해 발화하고 몸으로 재수행하며 번역한다. 그 재현의 방식은 프레임을 마주하며 말을 건네다가(냉장고 네 대), 특정한 상황의 경험을 상징적인 행동으로 드러내고(Little Does She Know), 종국에는 무대를 통해 육화시키는(스폿) 것이다. 작업의 이러한 일련의 형식적 특성은 수행성이라는 말로 거칠게 수렴될 것이다. 즉 조익정이라는 개인과 개인의 서사는 작품에서 내적인 화해를 통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외부상태를 상정하고 그곳을 향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대화의 갈래인 미술의 역할 혹은 그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실제 대화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향이 없었고 조익정의 작업을 매개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힘주어 다루던 대상과 언어에서 벗어나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주변부의 사소했던 것들, 예를 들면 작가가 소일거리로 만드는 뮤직비디오, 아무 의미 없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만드는 영상작업들이 의미의 안감에 덧대어 시침질되어있었다는 점이다. 그 발견은 주제에 매몰될 뻔 한 대화가 질식되지 않도록 해 주는 기대배반의 요소였다. 즉 조익정의 작업은 한 맥락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층위를 지녔으며, 역으로 이는 미술이 유의미할 수 있는 조건이 단선적으로 정립될 수 없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배면에 존재하던, 혹은 주목하지 않았던 ‘의미 없음’이 대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의미로 점철된 성급한 결론을 내는 것 보다 여백의 상태를 통해 복잡성을 더해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전시의 준비기간은 대화의 시간과 같았고 우리의 목적은 조익정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익정의 작업을 매개로 주변부를 탐색하며 애초에 상상했던 ‘가능함들에 대답’하려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기획자와 작가의 경계가 모호했기에, 역할을 구분하기보다는 대화의 ‘참여자’로 서로를 호명하길 원했다. 또한 자전적이라는 특정한 주제에 끊임없이 비스듬히 내려앉기 위해 전시의 제목을 (모순되게도) ‘Using Your Real Life’로 적나라하게 만들어 보았다.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가던 세 명의 참여자는, 짧게 오갔던 대화가 아득히도 먼 서로의 거리에 다리를 놓고 무언가를 길어 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다리가 제대로 놓였는지, 뭔가를 길어 올리긴 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되돌아보니 그 거리가 실상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Using Your Real Life의 전시장과 책자는 독립된 것이자 상보적인 것으로 기능하도록 기획하였다. 책자가 이한범, 김민엽, 조익정의 대화였다면 전시장은 그 대화가 불특정다수에게 분산되는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대화와 마찬가지로 전시장은 느슨하게 맥락화 된다. 이번 전시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기에 관람객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참여자들은 단지 최소한의 질문만을 던져 놓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구성할 지는 결국 또 다른 삶에게 이양된다.
(이한범)

curatorial note

Using Your Real LIfe(2016)라는 전시를 위해 처음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나는 전시공간으로 쓸 복도갤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설명했다. “전시 공간은 ‘복도갤러리’라는 곳인데, 말 그대로 기역(ㄱ)자로 꺾어지는 복도를 전시공간으로 씁니다.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아 조밀한 기획이 어울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실제로 전시장을 여러 시각적 결과물로 채워나가면서 이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복도를 오가며 수많은 전시를 보았다. 주제나 기획의 방향을 떠나서, 노트북과 책과 필기구와 담요를 바리바리 싸들고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게 만들었던 이런 저런 작업은 대부분 벽에 단정하게 걸려 있는 작은 드로잉이나 회화, 사진과 같은 평면작업이었다. 방형(方形)을 중심에 두기는 하지만 길고 긴 회랑을 따르는 움직임의 관성은 동선을 이미 어느 정도 결정하는데, 이리 저리 ‘배회하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인 복도에서 오브제는 기이할 정도로 힘을 잃어버렸다. 또한 몸을 운신할 수 있는(시선이 가질 수 있는) 너비가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형(形)이 강한 힘을 지니는 작업보단 가까이서 조곤조곤 살펴볼 수 있는 작업들이 언제나 기억에 남았다.

때문에 나는 늘 복도갤러리에 어울리는 작업은 슴슴한 이미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작고 약한 이미지가 구축하는 사소하고 힘없는 풍경이 여러모로 이 장소에 적합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작품과 공간의 외관상 조화로울 수 있는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복도갤러리는 이론과 학생들이 ‘전시’를 ‘기획’하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와 기획은 이제는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너무도 첨예한 대립의 상황이기도하다. 말로 건설되는 기획은 작업의 미적 실천과 영구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기획이 필요하다면, 그 조건은 무엇일까? 기획이란 것을 작품이 놓이는 또 하나의 ‘장소’라고 본다면, 그것은 작업에게 일종의 허구를 부여함으로써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전시가 기획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작업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갈등의 상황을 요청한다는 말과도 같다. 때문에 기획은 전시와 작업이 ‘말이 안되는’ 묘한 긴장을 연출할 때 어느 정도 유효한 지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이 호출하는 갈등이 어떻게 당대와 당대의 주체에게 접속될 수 있을지(혹은 그 작업이 어떤 갈등을 호출할 수 있는지) 면밀히 파악하고 가시화시키는 것이 기획자의 실천일 것이다. 약한 이미지의 힘없는 풍경이란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작업의 스펙터클이 전면화되는 것도 아니고, 기획의 언어가 상황을 매끈하게 봉합시키는 것도 아니라, 모종의 갈등 그 자체가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말이다.

종종 복도갤러리는 전시를 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공간이라는 얘기를 듣는데, 아마도 관습적인 태도로는 전시를 만들기가 무척 애매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도갤러리는 작업이 가능한 미적 실천을 물리적인 장소를 통해 실험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그리고 거대한 주제나 담론이 들어오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 두 가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 이 장소의 욕망은 다른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Using Your Real LIfe 전시를 꾸리면서, 확실히 이곳에는 작고 약한 이미지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지만, 공간이 그리 크지 않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코너를 돌아 복도의 끝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가시적으로 포착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이었던 것이다. 작은 것들이 슴슴하게 들어선 것만으로는 이 공간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덩치 큰 작업이나 의미 없이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더욱 더 강력하고 첨예하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의미 있게 남는 것은 바로 그 ‘연결’이다. 때문에, 어쩌면 복도갤러리는 이론과의 ‘전시 기획’공간으로 제법 어울리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