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Murmuring

10년 전 노엘 캐럴의 비평 철학을 읽었을 때, 불변하는 비평의 담론적 특징이 평가라는 그의 주장에 설득은 되었으나 동의하지는 않았다. 최근 이를 다시 읽으며 지금은 캐럴의 논의에 대체로 수긍하는 쪽으로 생각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동의하지 않았던 건 단지 이 주장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가는 비평의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심층적인 해석에 더 큰 열망을 가졌다. 그건 아마도 내가 비평의 감수성보다 미술의 역사와 이론들을 먼저 공부했기 때문이었을테다. 하지만 캐럴은 해석학적 접근을 두고 인문학적 관행이라고 말하며 이는 비평과는 다른 작업이라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비평을 위해 필요한 인문학적 사유를 가지는 것과 인문학적 작품 해석은 전혀 다른 작업이긴 하지. 평가가 비평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캐럴의 논의에 비추어 내 생각이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유를 추측해보면. 우선은 비평이라는 담론의 고유한 역할(내가 해야할 일)에 대한 재인식. 누구든 예술 작품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와 구분되는 비평은 예술 작품의 가치에 관한 논증이다. 이것은 학문적 지식 생산이나 취향의 분류와는 다른 작업이고, 캐럴이 평가라는 비평의 본질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는 요소다. 그는 “가치중립적 접근은 비평의 개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비평의 포기”라고 까지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평의 위기라는 지독한 클리셰는 현실이다. 특히 미술에서 가치는 언제나 아름다움의 문제와 관련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문제와 분리된 미술의 문제가 있는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규범의 경합 자체가 문제다. 제각각의 미적 성질들을 구분하고 각각에 대한 일관된 입장 없이 평가는 불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비판이라고 부르는 작업, 즉 현실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미술과 관련한 당대의 담론은 대체로 정치적 기획(을 위장한 이러저러한 주제들)만 난무할 뿐 미적인 것의 질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흐린 눈을 하고 쉬쉬거리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아마 그런 문제의식을 이유로 노엘 캐럴의 논의가 다시금 되돌아온 것이지 아닐까 생각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데모크라시, 리퍼블릭 그리고 캐피털리즘과 얽혀 있음을 묘사하며 교수는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 깍지를 꽉 끼었고, 그것이 우리가 독해해야 할 상태라고 말했다. 손가락이 몇 개 더 있었다면 그는 그 손가락들마저 다 썼을 것이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과학의 철저한 노력을 보고 있으면 지적인 열망이외에도 당장 어딘가로 떠나고싶은 묘한 감정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리나 그리고레는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아 태어나자마자 이웃집 집시 여자의 젖을 먹은 것으로 자기 삶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삶 전체를 세포의 교환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몸 외부에 쌓아올라간 무언가가 아닌, 의식하지 못한 채 스며든 세포들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을 생각하기. 그 내적인 것이 영원히 반복해서 재현된다. 그리고 그에게 영화와 다른 세계의 언어(일본어)는 그 몸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다. 최근 보았던 멋진 장면 둘. 모두 형식이 내용이 되는 순간들이었다. 어제 과기대 교양교육 심포지엄 연사로 참여한 김성은 학예사와 홍순재 실무관의 30여분간의 대화. 결론적으로 전해진 메시지는 미술관에서의 교양교육이란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예술에 관한 정보화된 지식의 공유가 아니라, 타자들을 환대하는 마음과 태도를 기르는 일이라는 것. 둘의 대화는 무척 묘했는데, 둘의 말이 내용면에서나 리듬 면에서나 아주 조금씩 엇박자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술관의 노동자라는 느슨한 공통점 밖에 없는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만났을 때 생겨나는 어색한 춤. 오늘 본 것은 리움에서의 동희 스님의 범패 공연. 범패는 생소했는데, 불교에서 제의 때 사용하는 음악이라고 한다. (참고: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마(brāhma, 신성한)’를 뜻하는 ‘범(梵)’과 ‘파타(pāṭha, 찬송/노래)’를 뜻하는 ‘패(唄)’가 결합된 말. 그 시원은 석가모니의 설법 음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 공연 중간에 있었던 성혜인 비평가가 진행한 대담이 공연을 더 집중해서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불심이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 범패는 그 뜻 자체. 비평가는 스님께 범패를 하는 마음과 태도에 관해 물었다.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걸 보니 내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무대에 올랐던 여러 스님들 중 한 스님의 잊을 수 없는 표정과 몸짓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중이다. 흐르듯 이어지는 몸짓과 춤사위에도 그의 눈은 언제나 약간 아래를 바라보며 고요했고, 표정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춤이나 음악이 아니라 어떤 상태였다. 몸이 만드는 말, 표현이 아니라. 윤향로 작가의 설치가 거기 있는 방식이 좋았는데, 내게 미술의 의미란 언제나 이런 교환의 장면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이 내용이 되는 순간이란건 너무 진부하고 게으른 표현이었나? 느리게 가는 낡은 기차의 철컹거리는 무거운 진동이 결국 우리를 잠에 빠지게 만드는 것과 같은.

언젠간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나타나는 서점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 5년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목적과 이유 없이 2주를 머문 적이 있었다. 비엔나는 과거 제국의 중심이었던 탓에 어디에나 몰락의 흔적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낡은 건물 2층에 있었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중고서점에 들러 오래된 이야기인 것이 분명한 동화책을 몇 권 샀다.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그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서점들을 찾는다.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글자로 쓴 책들 뿐이지만 결정적 단서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한참 뒤 내가 자주 가게 되는 서점은 모두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책들 아니 강렬함을 가진 책들의 서점은 왜 계단을 올라가야 나타날까? 강렬하다는 건 그런데 뭘까? 언젠가 강렬함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 추측해보자면 그런 책들은 잘 팔리지 않으니 월세가 싸야만 했을 것이고 서점은 위로 더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모든 모험 이야기에는 모험을 모험이게끔 해주는 전이과정, 주인공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보내주는 문이나 길이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나타나는 서점은 이 세계의 거주자인 나조차도 언제나 이방인/방랑자가 될 수 있게 해줘서 좋다. 하물며 그 계단이 나선형이라면 너무나도 완벽하지 않겠는가?

불을 다루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불을 붙여 활활 태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채집해 땅에 묻어 저장하는 습속이 있었다. 불의 힘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를 움직여 가능한 멀리 떠나는 일을 부추겼고, 그렇게 탐험가가 된 이들은 멀리 보는 능력이 날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그들은 그들이 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지 잊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종이에 길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들은 수 만 가지의,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길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했다. 그렇게 불의 사람들은 눈과 선의 문명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

언젠가 불을 다루는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의 여정 끝에 얼음의 땅을 찾아오게 된 일이 있었다. 안개 자욱한 아침 그들이 발견한 것은 거대한 빙하로 뒤덮인 푸르스름하고 깊은 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일찍이, 만에 들어서기 한참 전부터 그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몰아치던 그 소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땅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하늘을 뒤덮는 듯하여 어디에도 숨을 수 없다는 절망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용기 있는 불의 사람들은 깊숙한 만을 지나 얼음의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돌아오지 않았으니 전설이 되었다.

그들의 머나먼 자손들 중 하나는 어느 날 해안으로 떠내려 온 새하얀 상자 속에서 텅 빈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해하지 못할 그림 한 장과 짧은 글이 써 있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지도는 우리가 떠나온 곳에서는 쓸모없을 것이다. 오직 이곳 얼음의 세계에서만 쓰일 수 있다. 우리는 얼음의 지도를 그리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우리가 공들여 온 완벽한 선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그리는 즉시 거짓이 된다. 불은 길을 만들었지만 얼음은 유령과 결탁했다. 눈의 능력은 무기력하다… 우리는 마침내 비밀이 소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를 듣지 않고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찾아올 때마다 길은 절벽이 되었다가, 파도가 되었다가, 개구리가 되었다가, 바위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 얼음의 주민들 또한 변신한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얼음의 사람을 만났지만 되돌아보니 그는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소리의 운명 속에서 살아갔다. 다정한 그가 우리에게 내어 준 것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완벽하게 비어 있는 종이였다. 그는 이것이 얼음 세계의 지도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거기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여기에 그려진 선은 우리의 부질없던 흔적이다. 이 지도를 발견하는 이가 불의 나라 사람이라면 주의하라. 선과 길을 믿지 말아라. 부디 처음의 텅 빈 지도를 상상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은 진실이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