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천사들이 말하길…

불완전 운동(더레퍼런스, 2022) 전시장에 놓인 글.

 

만약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둔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명백히 드러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전통에 따르면 우리 위에 천사들이 있어.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전통을 좇아 강과 바람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미셸 세르, 『천사들의 전설-현대의 신화』 중에서

 

기술이라는 말은 이제 기계 장치 대신 데이터, 가상현실을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이와 비슷하게 물질은 더 이상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물질적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고 그 세계의 규칙을 자의든 타의든 기꺼이 훈련하고 있다. 그 질서에 따라 사물은 노스탤지어로서, 마치 우리가 떠나온 장소로서, 이제는 우리와 크게 관계없는 것으로서 지금 여기에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것들은 사물로서 남기 보다는 점점 더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른 한편의 누군가는 사물을 대상화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여기는 역사적 관성에 반대하며 그것의 주체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관심은 빠른 속도로 윤리적인 연대의 논의로 전환된다. 그것과 함께 하기 위한 앎의 형식을 발명하기보다는 반성을 위해 그것을 자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는다. 사물에 비친 얼굴은 또 다른 상상계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목격하고 있는 한 풍경이다. 여기서 자꾸만 텅 비게 되는 자리는 그것의 존재론이다. 과연 사물은 어떻게 있는지, 어떻게 행위 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여전히 거의 알지 못한다. 노스탤지어와 윤리는 사물의 존재론에 대한 우리의 탐색을 너무 이르게 봉합해버린다.

현재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것 같지만, 이는 우리가 여전히 사물들과 함께 있고 함께할 것을 잊은 데서 생기는 오해다. 사물은 사물 자신의 삶을 살고 형태와 움직임을 바꾸어가며 다음으로 삶을 전승한다. 때문에 사물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은 이미 낡고 유효하지 않은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는 일이다. 왜 오래된 것을 말하느냐 질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그간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는가, 무엇이 그것에 관해 말하지 못하게 했는가 묻는 정치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것들이 수행하는 존재 자체로서의 발화를 왜 우리는 인지하지 못했는가 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제인 베넷은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에 대한 자신의 탐구가 “정치적 기획”으로서 “생동하는 물질 및 활기 넘치는 사물과 더 지적이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도록 장려하는 것”이라고 밝히고1 질베르 시몽동은 “문화와 기술 사이에, 인간과 기계 사이에 세워진 대립”은 “인간의 노력들과 자연의 힘들로 풍부한 실재를 감추고 있다.”고 말하며 그 실재를 구성하는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을 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일종의 의무로 여긴다.2 이처럼 우리가 사물들과 함께 하기 위한 인식론의 발명, 그리고 그 지식을 구축할 방향 없는 지도 만들기와 배회하기는 과거가 아니라 조금 더 미래를 염두에 두는 일이다.

미셸 세르가 “우리의 세계가 메시지 전달체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천사들은 무수한 형태로 존재한다.”3고 주장하며 사물을 총체성 안에서 지식화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대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란 다르게 말하면 사물을 편협하게 축소시키는 역사적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세르는 경계를 가로지르며 “국지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연결”하는 천사들의 능동성과 유동성을 강조한다. 물론 세르가 말하는 천사는 인간의 형상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파동, 기류, 빛의 깜빡거림… 심지어 비행기조차” 천사다. 우리는 천사들의 말을 청취하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천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의 존재론에 관여하는 방식일 것이다.

사물의 편에서 생각해본다면 예술가를 창조자라고 여기기보다는 전달자, 운반자 즉 말을 전하는 천사로서 여기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언제나 자신을 유동성 속에 두고 스스로 움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사물을 알아차리고, 사물을 가져와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 나는 여기서 18세기 유행했던 자동인형을 언캐니의 형상으로서 호출한 초현실주의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할 포스터는 초현실주의자의 두 가지 경이에 대해 설명하는데, 하나는 “생명이 있는 상태와 생명이 없는 상태의 언캐니한 뒤섞임”으로서의 발작적 아름다움이며, 다른 하나는 “뜻밖의 만남과 발견된 오브제 속에서 드러나는” 반복 강박의 언캐니이다. 초현실주의자는 이와 같은 경이를 내포한 것으로서 자동인형을 재발견했으며, 20세기 초반을 구성했던 자본주의적 사물의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그 오래된 물건을 가져온다.4

보이지 않는 천사들은 자연과 문화, 사물과 작품을 끊임없이 교통하고 사라진다. 그 길 위에서 천사들은 끊임없이 음악을 연주한다.5 그러면 우리가 천사와 조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청취, 보다 적극적인 청취. 완전히 다른 것을 듣는 청취다. 청취는 사물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실재로 우리를 이끄는 안내자들을 따라가 보면, 우리 또한 누군가를 모든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사물을 자라게 하는 작품만을 만들어 내자.”6

천사들이 말하길…


 


  1.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8-9쪽. 

  2.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2011, 9-10쪽.  

  3.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천사들의 전설-현대의 신화』, 그린비, 2008, 299쪽.  

  4. 할 포스터 지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팀 옮김,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아트북스, 2005.  

  5. “천사들이 왜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곡하면서 보내는지 알고 있어? 이 음악은 울려 퍼지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고, 말하지 않은 채 진동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크게 외쳐 대. 우리는 이 음악이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해. 이 음악은 뭘까? 정념, 황홀, 고통, 천둥? 가볍고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이 음악은 가능한 것의 전 범위를 춤추게 하지. 이 음악은 정해진 의미를 결코 갖지 못하는 음표들을 이용하여, 의미를 갖는 말 이전에 나타나는 보편적 실재들을 표현해.”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앞의 책, 129쪽.  

  6. 앞의 책, 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