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멀리 선 식물학자

광대하고 느리게 : 권혜원, 박은태, 조은지(경기도미술관, 2021-2022) 도록에 수록.

 

권혜원의 두 작업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2021)과 급진적 식물학(2021) 사이에 서자, 나는 아주 작아진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급진적 식물학의 화면이 사람 크기를 훌쩍 넘어서는 무척 큰 크기로 프로젝션 된 이유이기도 했겠지만, 이내 나는 그것이 이 두 작품의 소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풀잎이 바람에 서로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것 같은 소리, 사부작대는 소리, 나무의 껍질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 홁길을 터벅터벅 밟는 소리, 가만히 흐르는 물 소리, 알 수 없는 다양한 마찰음들. 자연의 화이트노이즈를 배경으로 이 모든 소리가 가만히 뒤엉켜서 들려오고 있었다. 때론 분명한 자연의 소리같다가도 자주 그 정체가 모호해진다. 이 소리들은 주의를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면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 미시 세계의 소리다. 물론 여기서 작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크기를 기준 삼을 때의 표현이다. 오늘날의 청취 문화에서, 작은 소리는 특별한 주의집중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치기 쉽다. 상상의 정원급진적 식물학각각 4채널, 6채널로 구성되어 총 10개의 스피커가 내어 놓는 풍부한 여러 방향의 소리는 그 미시 세계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보다 강화하여 전시장으로 옮겨다 놓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마치 어느 거대한 숲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관객을 둘러싼 이 사운드스케이프는 ‘나’의 존재감을 축소시키며 상상적 상황으로 이끈다. 그곳은 아직 가꾸어 지지 않은 이름 없는 식물들의 정원이다.

하지만 관객을 그러한 상상적 정원으로 데려 갔다고 해서, 권혜원을 정원사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정원을 조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고, 그것을 잘 가꾸고 유지시키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식물학자라고 이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식물학자 마르 장송은 식물학자와 정원사를 구분한다. 정원사는 “식물의 성장에 함께하는 사람”으로, “식물을 보살피고 식물의 삶을 유지”시킨다. 반면 식물학자는 “식물을 자르고 식물의 죽음을 관찰해 생물계 속에 제대로 자리 잡게 만드는 사람”이다.1 물론 권혜원이 ‘자르고’, ‘관찰’하는 것은 식물이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기에 사전적 의미에서의 식물학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혜원이 해부하는 것은 식물이 아니라 식물을 둘러싼 것들이다.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이 식물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분류를 통해 식물의 사회적 의미가 만들어지고 정치화되는 장소로서의 정원을 다룬다면, 급진적 식물학은 지식화하기 위한 연구에 도입된 광학 장치와 시각성의 문제를 다룬다. 이 둘은 모두, 식물에 관한 인간중심적 지식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이루어진 각기 다른 역사적 장소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권혜원은 식물에 관한 지식에서 한 발 멀리 떨어져 움직이는 식물학자일 것이다.

3채널 영상 설치 작업인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의 초반은 일종의 역사적 부조리극으로, 대한제국 시기 구축된 덕수궁의 정원을 만들고 관리한 다섯 정원사들(세 명의 사람과 앵무새, 그리고 오브제들)이 등장인물이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정원사의 정원이 아닌” 이 정원은 일제 강점과 근대기의 복잡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태어나 온갖 정치적 함의로 가득하다. “어떤 나무를 심을 지 결정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이었어. 벚꽃 나무와 단풍나무를 좋아하더라고” 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덕수궁의 정원을 담은 오래된 사진과, 석조 건물 앞에 서구식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고 도열한 개화기 남성들의 기념사진이다. 그것은 역사로 기억되는 남은 이미지다. 익명의 정원사들은 거역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승리자들, 권력자들의 명령에 따라 잔디를 깔고, 수십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지만, 이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를 내비친다. 정원사인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오직 지배와 정복의 표상일 뿐 정원을 이루는 일과는 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원이 자연의 흐름과 이치에 따라 만들어지고 관리되어야 한다고 믿는, “정원사들은 별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봄에는 계곡에서 핀 모습처럼 바늘꽃을 가꾸고, 여름에는 파초를 심어 빗방울 소리를 듣고, 가을에는 오동나무에 달빛을 비추어 그림자를 보는 것을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정원이랑 새로운 곤충과 식물이 언제나 찾아오는 그런 장소이며 세계 그 자체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연극적 시나리오 안에서도, 역사적으로도 이루어지 못한 이중의 상상이다. 이 부조리극의 중간에는 준명당과 중화전의 오래된 기록 사진 푸티지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사진들은 갈라지고 깨져 온전치 못하다. 어떠한 형상이나 재현 없이 텅 빈 검은색의 자리가 바로 권혜원이 부조리극으로서 재구성한 익명의 정원사들의 무대일 것이다.

덕수궁 프로젝트(2012)의 기획 글에서, 학예연구사 김인혜는 덕수궁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적 인식을 말한다. 그것은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도저히 역사적 서사 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대상을 마주하는 난처함에 대한 것이며, 그 상황을 마주하며 예술적 작업들에 다른 지식 생산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서울 도심의 소란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 뭔가 특별한 세계로 갑자기 진입한 것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결코 그 특별한 기운의 정체를 완전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기운’에 대해 모종의 ‘반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많은 사실이 명확해지기는 커녕 더욱 미궁에 빠져버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 기껏 100년쯤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을 둘러싸고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여전히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엄청난 의문들을 벗겨내는 일은 기본적으로 역사가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들 또한 우리 앞에 놓이 이 엄청난 유산에 대해 뭔가 다른 방식으로 발언할 수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역사가가 하지 못하는 어떤 영역을 건드림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시간과 더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는 없을까?”2

권혜원의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은 이와 엇비슷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연대기와 사연을 가진 개별 건축물에 비해 정원이라는 장소는 권혜원이 발견한 가장 익명적이고 모호한 역사적 흔적일 것이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인공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시간은 침묵 되어 있고 추측될 뿐이다.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의 정원사들의 연극적 배경이 된 정관헌 또한, 덕수궁의 여러 건축물 중에서 가장 의뭉스러운 존재다. 언제 지어졌는지,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역시나 정체가 묘연한 러시아 건축가 세레진 사바친이 설계한 건축의 양식 또한 서구적인 요소와 한국적인 요소가 절충된 기묘한 모습이다.3 2012년의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정서영은 이 정관헌을 무대로 알리지 않은 휴식(2012)이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는데, 정관헌 중앙에 있었던 가구를 치우고 등에 “지나가는 김씨를 붙들고 알리지 않은 휴식에 이야기하라.”라는 문장을 쓴 퍼포머가 누구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고 그 공간을 배회하는 작업이었다. 정서영과 권혜원의 작업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기획이 요구한 다른 명시적 지식 생산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덕수궁에 관한 역사적 서사나 지식을 대리하거나 보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그 장소의 여전한 모호함을, 그 난처한 상황 자체를 강화하고 명시화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서술하려는 의지라기 보다는 대상 자체의 상황을 그 어떠한 다른 지식 체계로 환원시키지 않고 직시하는 시도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권혜원의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을 구성하는 초반부의 부조리극은 정원이라는 구성물을 만든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상상이 아니라, 정원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힘에 의해 구성된 인공물이라는 점을 강화하고 그 역사적 형성이 가진 다공성과 모호함을 상기시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급진적 식물학은 식물에 관여하는 새로운 장치에 관한 제안서이다. 이 장치의 핵심은, 그간 인간 문명이 개량해온 보기의 방식, 즉 보다 정밀하게, 투시하여, 확대하여 보기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눈에 비친 것을 다시 보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보기로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과학적 엄밀성과 합리성이 아닌, 주술적 소환에 가까운 전환의 순간이다. 급진적 식물학은 크게 두 가지 시퀀스로 전개된다. 하나는 이 작업이 다루고 실험하는 광학 장치에 대한 소개와 사용법 안내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이 장치는 “식물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사용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장치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눈, 코, 입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아주 빠르게 식물을 보아야” 하고, 관찰자와 식물이 동시에 보이는 “특정한 각도”를 찾아야 하며, “특정한 각도의 빛만이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주어진다. 이 시퀀스 동안 영상은 보기의 장치를 클로즈업하여 천천히 보여주거나, 장치를 이용해 본 듯한 눈과 식물이 중첩(superposition)된 여러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변이 흐릿하기도 하게 보이기도 하고, 외부의 빛이 굴절된 프리즘 빛이 반사되기도 하고, 식물 피사체와 눈동자가 한 좌표 위에 겹치기도 한다. 이러한 시험의 과정을 보여주고 뒤어지는 급진적 식물학의 후반부는 이 장치를 통해 부단히 보기를 연습했을 때 생겨날 전환을 암시한다. 내가 식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 식물이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나의 피부는 푸르게 빛나고, 손 끝에서는 줄기가, 혈관 위로 열매가 자라날 것이라는 내레이션은 이 광학적 장치가 단순히 ‘보기’ 가 아닌 ‘되기’의 역능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식물학은 인간 되기를 강화하는 장치가 아닌 식물 되기를 요구하는 주문에 가깝다.

기존의 식물학은 식물 또한 ‘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식물학자 대니얼 샤모비츠는 “식물은 우리 인간을 본다.” 고 단언한다.4 물론 여기서 ‘본다’라는 개념이 동물이 무언가를 본다는 것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시각 체계가 빛이라는 신호를 이미지로 변환시킴으로써 ‘보기’가 성립된다면 식물은 이를 생장 체계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반면, 파란색을 흡수하는 크립토크롬을 통해 생체 시계를 조정한다는 공통점 또한 있다. 샤모비츠는 이 경이로운 공통점이, 진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생명 진화 초기의, 즉 동물과 식물이 분화하기 이전 단세포생물 단계에서부터 발달한 생물학적 특성임을 주장한다.5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권혜원의 새로운 광학 장치는 ‘전환’보다는 분기 이전을 기억하는 ‘통합’에의 제안일지도 모르겠다. 권혜원이 이러한 진화론에 입각한 식물의 시각성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새로운 광학 장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분의 보기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기계 장치 하나만을 발명하는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는다. ‘보기’가 역사적인 구성물이라는 사실이 말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힘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힘은 장치를 경유하지만 장치를 초과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식물학은 다분히 공상과학적이다. 복잡하고 유구한 역사적 힘을 역형성했을 때 도달할 어떤 전환 상황으로서의 미래를 그린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기대하고 또 참여해야할 것은 그 공상을 어떠한 서사로 구성해야 할 것인지, 지금은 텅 빈 그 자리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마르 장송은 식물학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발굴자’라 표현한다. 물론 그 표현이 내포한 개척가적 속성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 말이다.6 식물학자의 연구 대상인 식물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큰 차이가 없는 개체들의 집합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시대에 움직임 없는 그 대상은 아무런 비밀을 간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정원, 숲, 자연 등 다양한 범주의 집합적 차원으로도 또한 존재하는 매우 유동적인 대상이자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풍부하게 존재해서, 거기에 어떤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개별적 의미가 희박한 그저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인 대상이다. 권혜원은 그러한 대상을 둘러싼 또한 복잡한 문명적 풍경을 추적하는 일을 이번 작업을 통해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발 멀리 선 그가 다다르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 보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1. 마르 장송, 샤를로트 포브 지음, 박태신 옮김, 보따니스트: 모험하는 식물학자들, 도서출판 가지, 2021, 140쪽.  

  2. 김인혜, 덕수궁 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2012, 9쪽.  

  3. 안창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202-209쪽.  

  4. 대니얼 샤모비츠, 권예리 옮김, 은밀하고 위대한 식물의 감각법, 다른, 2019, 15쪽.  

  5. 앞의 책, 40~41쪽.  

  6. 마르 장송, 위의 책,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