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주제 지우기

푸쉬 풀 드래그(플랫폼 엘, 2017) 도록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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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없는 기획’이라는 문구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전시에서 주제를 비우겠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그것 스스로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를 재검토해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이는 분명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속한 미적 실천의 태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감각이 어떻게, 무엇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지가 놓인 상황은 복잡다단하게 중첩된 여러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큐레이터라는 형상을 떠올려보자. 하랄트 제만의 등장 이후로, 예술가를 넘어서는 창작자가 된 일군의 큐레이터는 자본의 글로벌리즘과 맞물리며 담론형성을 통해 거대서사 직조하는 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언어를 보충하기 위해 적절한 작품을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배열한 장소를 선보임으로써 지식생산자 지위를 얻었고 역으로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 취사 선택되느냐에 따라 평가 받게 되었다. 때문에 당대의 주제 중심 큐레토리얼 문화 안에서 작품은 충분히 가시적인 언어로 인지되고 직접적으로(그러나 직설적이지는 않게) 세계를 반영해야만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는 몰이해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작품이 전시 주제 혹은 담론 이외에는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공회전하게 될 때 작가(작품)는 소비되고 큐레이터와 기관은 전리품을 얻는다. 몰이해가 한없이 깊어지고 있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먼저 세워진 자리 주변에는 대체 가능한 것들이 일사분란하게 모여든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젊은~’의 수사를 접붙인 상/전시/행사일 것이다. 기존의 것에 대한 차이가 아방가르드로 뭉뚱그려져 이해될 때 ‘새로움’의 뉘앙스를 내포하는 ‘젊음’은 별다른 맥락적 이해 없이도 제도에 관성적으로 쉽사리 편입된다. 이것은 분명 한때는 급진적이었을 차이의 정치학이 물신화된 형태일 뿐이며 차이를 무한히 축적시킬 뿐 그 언어가 지닌 급진성의 재생산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예시처럼 손쉬운 선언적 명제를 이용해 급진성의 프레임을 짜는 것이 미술계의 비대한 몸집과 신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생산구조다. 어떤 ‘말’이 획기적이고 급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생산구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주제와 담론 중심의 기획 언어가 공고히 유지되는 한 작품은 맹렬히 돌아가는 쳇바퀴에서 언제 지쳐 쓰러질지 모르는 존재와도 같다.

네덜란드 작가 구이도 반 데어 베르베(Guido van der Werve)는 “이미 맥락과 내용이 정해져 있는 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 전시에서, 자신은 작가로서 매우 괴롭다…작품이 주제를 부연하거나 특정한 내용을 생성하도록 요청받을 때 작품의 자율성은 상실된다”라고 직언했다.1 특정한 언어적 형태의 지식에 소요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작품)이 더 이상 유효한 방식이 아니라는 판단은 공공연한 움직임이다.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르기예프가 도큐멘타 13과 제 14회 이스탄불 비엔날레를 통해 지식생산의 다른 방식을 실험했다면, 2017년에 예정된 제 57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주제를 버리고 개별적인 ‘작가’에 집중할 것임을 공표했다.2 서구의 미술사 연구는 동시대 로컬의 개별성에 집중하기 위한 방법론을 고군분투하며 고안하고 있다. 이는 맹렬히 덩치를 키워 오던 주류(글로벌리즘) 미술의 속도에 가려있던,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비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재고하려는 움직임이지 또 다른 새로운 시스템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중요해졌다. 개별적인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될 때, 급진성의 재생산은 가능해진다. 때문에 주제를 비우는 일은 단지 그럴듯한 큐레토리얼의 번외편 정도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동안의 상황을 재고하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미술이 이제 무엇을 다시 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원시주의적 회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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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제를 비운다고 해서 예술작품의 자율성이 즉각적으로 탈환되는 것일까? 그리 속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율성은 스스로의 완결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과의 배치 속에서 작품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파악될 때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가시화시키는 매체 중 하나가 바로 전시일 것이다. 전시는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픽션이다. 개별적인 작품들이 임의적 상황에서 발생시키는 갈등으로 탄생하는 픽션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 푸쉬, 풀, 드래그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과 사진, 회화, 오브제 등의 작품이 물리적으로 배치된 것 이외에 특이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푸쉬, 풀, 드래그는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드러나지 않은 픽션이다. 주제가 비워진 자리, 말을 덜어낸 그곳에는 더욱더 첨예한 갈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시장에는 ‘주제가 없다’는 제스처만 있을 뿐, 무엇이 쟁점이 되는 상태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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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설계된 지식이 일방적으로 유통되는 모델이 아닐 때, 작품을 둘러싼 모든 주체는 협상의 상태에 놓인다. 권력관계에 따르지 않는 비타협적 토론에 동참하게 되면, 작품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곳저곳에서 자율성을 획득할 개연성을 지닌다. 뒤집어서 얘기해보면 작품이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엄연히 유통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모종의 상징권력이 개입하게 된다. 2016년 이곳에서 곪을 대로 곪은 부분이 터져나간 것을 우리는 목도했고 나는 이것이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이전과 다른 미학적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힘만이 기능적일 수 있는 곳을 상상하는 일이 절실하다.


 


  1. Guido van der Werve, “Heavily curated biennales really bother me as an artist” link 

  2. link 

푸쉬 풀 드래그 갤러리 3 설치 전경
사진: 김재민 © 플랫폼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