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왼발을 뒤로, 다시 오른발을 뒤로, 그리고 어둠을 껴안듯이

OKULO 006: 어둠(2018년 3월 2일 발행)에 수록.

 

프랑스 화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는 평생을 검은색을 사용해 추상회화를 그렸다. 어둠의 화가라고 불리는 프란시스 고야의 작품부터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라우센버그의 검은 회화(black painting) 등 검은색이 특징적인 회화는 셀 수 없이 많을 테지만, 술라주의 검은색, 특히 1980년대 이후 ‘우트르누아르(Outrenoir)’라 부르며 화면을 검은 물감으로 두껍게 바른 작업들은 그가 추구하는 미학에 대한 실험이 중요하게 결실을 맺는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랭 바디우는 『검정(Black)』(Polity Press, 2017)에서 ‘검정의 변증법’을 논하며, 1984년에 술라주가 자신의 우트르누아르 회화에 대해 언급한 말을 인용한다. “아주 초창기부터, 나는 이미지를 제거하는 회화를 그려 왔고, 나는 이것을 언어(의미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로 여기지 않았다. 이미지도, 언어도 아니다.” 즉 술라주에게 검정 회화는 모방을 통한 이미지의 생산이나 언어적 서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검정인가? 바디우는 술라주의 비색채로서의 검정은, 빛이 없음이 아니라 오직 빛만을 드러내기 위한 전제라고 설명한다. 즉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관객이 이리 저리 움직일 때, 매 순간 바뀌고 변하는 평면 위의 빛의 조형과 색채를 매개하는 ‘사물’로서 말이다. 술라주의 검은 회화는 그 어떠한 이미지, 이야기도 가두어 두지 않기에 유동적인 빛의 움직임만을 보여줄 뿐이며 그것은 관객의 시간 속에서만 드러난다. 우트르누아르라는 말이 검정의 너머(beyond)라는 뜻임을 떠올려 보자. 검정은 이제 매우 기능적인 것으로 다루어짐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문세린의 이름 붙여지지 않은 거울 작업들을 생각한다.(2014) 길가에 버려져 있던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거울은 그 표면이 연필로 빼곡히 칠해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 채 전시장 한편에 이러저러한 모양새로 배치된다. 연필을 움직이는 손의 노동 시간에 따라 검은 정도만 다르게 드러나는 표면은 그 어떠한 형상도 비추지 않고 이미지를 재현하지도 않은 채 단지 공간에 존재하는 빛에 따라 그 수작(手作)의 결을 내보인다. 검은 어둠은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것을 드러낸다. 대상을 향하는 시선의 기능에 복무하지 않게 된 거울은 묵직하고 내밀하고 사적인 몸의 흔적 혹은 현전이 될 뿐이다. 어둠 안의 몸을 보고, 어둠을 통해 몸을 드러내는 것은 문세린의 영상작업이 가진 하나의 특징이다. 2017년 9월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퍼폼플레이스의 스크리닝 행사 ‘섬광’(기획 송지현)에서 문세린의 영상 작업 세편(푸른호랑이(2017), 투명손(2016), 직전의 밤(2011))을 연이어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영상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빛의 감각’을 주목한 기획과는 반대로) 어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이 둘은 사실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빛을 더 잘 보기 위한 어둠이 아닌 어둠을 보기 위한 어둠. 어둠을 요청하는 스크린과 그 안팎에서 의문에 부쳐지는 계몽의 감각, 삶의 시간, 그리고 몸들. 문세린이 영상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루어 온 어둠이 가 닿는 곳은 어디인가?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해 보자. 문세린의 영상 작업에서 어둠은 인공적인 어둠이 아니라 자연적인 어둠, 즉 밤의 어둠이다. 그리고 주로 밤에 위치한 몸 혹은 행위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어둠은 은유라거나 의미로 환원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한 사회 혹은 인간 주체가 관계된 상황의 실제적인 조건이다. 직전의 밤은 여름밤 도심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나이트 러닝의 현장을 담은 영상이다. 그러나 영상은 이 행사를 다소 기묘한 것으로 비틀어 놓는다. 필시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을 어둠 속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군상의 움직임은 배경으로 삽입된 드럼 소리의 리듬에 따라 일촉즉발의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웅성거림이 되고, 출발선으로 향하는 일렬횡대의 발걸음은 결연한 시위대의 전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적지를 향한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 사람들의 머리 위에 얹힌 헤드랜턴이 켜지면, 건물 유리에 비친 촘촘한 빛의 점들은 낮의 시간이 다시 한 번 쉼 없이 반복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빛은 잠에 들어야 할 어둠을 뚫고 나와 깨어 있는 삶의 시간을 연장시킨다. 낮의 죽음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이미지로 전환됨을 통해서 말이다. 재난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으며, 오직 무수히 많은 빛만이 그 형상과 움직임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기에 관한 개인의 역량에 따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쏟아지던 불빛은 하나하나의 미약한 점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상 안에서 결국 그 어떠한 불빛도 끝내 결승점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직전의 밤은 빛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무한히 반복되는, 낮의 운동성이 지배한 풍경을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거꾸로 보면 이는 밤의 위상에 관한 이야기이자, 밤의 어둠에서만 볼 수 있는 기묘한 상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상이 도시의 어둠이라는 상태를 관찰하는 것을 넘어 비평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풍경 안의 몸을 빛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존재를 둘로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빛은 이미지로 나아가고, 몸은 어둠의 영역으로 다시 밀어 넣어져 식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즉 이 영상은 어둠에 대하여 동시에 두 가지의 기능을 가진다. 밤의 관찰자로서, 그리고 어둠을 생산하며 몸의 위치를 실종시키는 수행적 행위자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몸은 어디로 갔는가?

이 관찰과 개입이라는 이중의 기능에서 밤-어둠은 중요한 매개변수인데, 투명손에서 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서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한강을 따라 만들어진 트랙과 다양한 운동 시설은 오히려 밤중에 더 생동감을 지니는 곳이다. 이곳의 밤은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져 있고 여전히 밝은 도시의 불빛 아래 있다. 그러나 그 바로 옆,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가의 어둠에 파묻혀 가만히 그 어둠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밤낚시를 즐기는 중년의 남성들이다. 이들의 앞으로는 강물의 표면에 반사된 도시의 빛과 멀리서 터지는 불꽃놀이의 파편이, 뒤로는 걷고 달리며 일상의 운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지나쳐간다. 낚시꾼들은 명징한 삶의 영역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꺼슬꺼슬한 존재로, 화면에서 가장 어두운 검은 실루엣으로만 드러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들의 움직임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들이 사용하는 낚시 도구나 그들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이미지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의 시간은 어떤 장면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대비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상이 집중하는 것은 손이다. 검은 수면 아래에서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었음을 지각하게 해주는 것은 낚싯대를 쥔 손일 것이며, 결국 어둠 속의 형상이 요구하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포착되는 그 손의 즉각적인 감각이다. 영상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흰색 갑피를 두른 손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 상태를 표상하고 그것을 극도로 밀어붙이며 재수행한다. 손은 어둠 속에서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바위나 난간, 가로등 등을 때려 껍질을 부순다. 몸은 끝내 드러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어둠 안에서만 드러나는 몸,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빛의 시간에 존재했던 몸이 어둠이라는 조건에 속해 있을 때 드러내는 불명료한 주체성과 감춰진 감각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영상의 이미지로 되새기면서 몸을 은폐시키고 어둠을 확장시키는 것이 문세린의 작업에서 어둠이 다뤄지는 독특한 측면이다. 여기서 어둠의 확장이라는 언급은 꽤나 중요하게 곱씹어 볼만하다. 4분 30초가량의 짧은 영상 작업 Moonwalk(2011)는 헤드랜턴을 쓴 작가가 광활한 어둠 안에서 뒤로 걸어가는 모습을 찍은 단순한 모양새다.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머리 위의 광원과 그 빛이 가 닿는 땅 위의 작은 부분, 아슴아슴 비치는 상체만이 천천히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멀어져갈 뿐이다. 관객은 깊은 어둠을 응시하며 과연 그곳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끊임없이 상상하게 되는데, 그 상상은 곧장 상상되는 사물에 대한 질감으로 변주되어 끊임없는 이물감을 생성한다. 그리하여 이 영상은, 역설적으로 어둠이 뒤덮여 아무것도 없는(듯한) 상태를 통해 그 어둠 안에 웅크리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사물과 사건을 전면화 시키는 것이다. 또한 시각적 정보가 차단된 공간 안에서 거꾸로 걷는다는 불안한 행위로 인해 환기되는 것은 날선 긴장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날선 긴장은 화면 안에서 뒤로 걸어가는 사람이 겪는 그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어둠의 사용을 통해, 어둠은 관객에게로 직접 깊숙이 침투한다. 어둠은 전염된다.

가장 최근작인 푸른호랑이는 어둠과 어둠 안의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이전 작업들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여기서는 사람의 몸 대신 한밤중 동물원의 우리 안에서 사자가 잠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물원의 대기를 채우는 통속적인 음악과 어린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화면 밖의 세계가 어떠한 모습일지를 쉽게 상상하게 해준다. 그곳에는 시간이 지워진 채 한밤의 낮을 향유하려는 경쾌함과 들뜸이 있을 것이고, 몸을 일깨우는 인공적인 빛의 강렬함이 있다. 그러나 분명 본연의 삶에서는 야행성이었을 사자들은 더 이상 밤에 깨어 있지 않다. 인간과는 달리 한밤에 생생한 그 야생의 삶을 관찰하러 온 관객들은 필히, 어떠한 스펙터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나른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야생성 혹은 자기 자신의 시간이 거세된 이 육식동물은 권태롭다. 기묘한 전치이자 명백한 실재다. 이전의 작업들이 거의 완전한 어둠 혹은 빛과의 대비를 통해 형상의 표정을 지우고 윤곽만을 보여주었다면, 푸른 호랑이는 잠자는 사자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표정을 보기 위해서는 (기계장치의 성능에 따라 그 조건은 바뀔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필연적으로 관객의 시공간 자체를 어둡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밝은 곳에서는 잘 포착하기 힘든 어둠 속의 시선과 표정은 관객의 시선을 다른 빛으로부터 차단시킬 때 비로소 포착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푸른호랑이의 어둠은 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관객에게 어둠을 요청하고, 그리하여 어둠은 스크린의 밖으로, 보다 실존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 인공 어둠은 환영적 내러티브와 빛으로 주조된 가상의 이미지를 위한 영화관의 인공 어둠과는 다른 위상에 놓인다. 후자가 시각에 의해 배제된 장소, 빛을 위해 할당된 망각의 영역이라면 전자는 어둠을 보기 위한 어둠이자 어둠 안의 희미한 몸을 감각하는 분배된 시각의 자리이다. 그런데 돌연 영상은 깨어있는 수사자와 그 무리를 보여주는 약 3분의 지속시간 동안 어두운 푸른색으로 화면을 덮어버린다. 그리고 이후 카메라는 다시 검은 어두움으로 돌아와 텅 빈 동물원의 사자 우리 곳곳을 보여준다. 푸른 호랑이는 지나간 시간의 잔상으로 기억 속에만 흔적을 남겨두었고,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떠났다.

시각이 제한될 때 다른 감각이 강화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얘기는 아니다. 다만 시각적인 매개가 현재의 사회를 구성하는 알고리즘이 된다는 차원에서 그것이 없으면 무척이나 불편할 뿐일 테다. 그러나 그 편의와 매끄러움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몸은 어떤 주체가 되는가? 끊임없이 깨어 있고 노동하는 명징한 생산의 장소에서 몸은 주어진 자리를 확정하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빛의 너머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어둠의 너머에는 몸의 현존이 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것, 감춤으로써 드러나는 것은 결국 감각의 주체일 것이다. 더 이상 오늘날 도깨비불을 상상하는 미신은 없다. 대신 계몽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엇보다 명백하게 실존적 주체의 목숨을 위협하는 약자를 향한 범죄만이 있을 뿐이다. 도깨비불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 홀로 세계를 대면했을 때만 떠오르는 허구이다. 모든 것이 낱낱이 비춰지고 데이터로 환산되는 여기 이곳에서, 모든 것이 바라봄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나를 나 자신으로 수렴시키는 매개의 장소는 드물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어둠이 필요하다.


 

문세린, 직전의 밤 The Night Just Before, 7분 05초, 2011, 스틸컷
문세린, 투명손 Invisible Hands, 11분 33초, 2016, 스틸컷
문세린, 투명손Invisible Hands, 11분 33초, 2016, 스틸컷
문세린, Moonwalk, 4분 35초, 2011, 스틸컷
문세린, 푸른호랑이 Blue Tiger, 12분 58초, 2017,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