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시선의 교호와 사진의 내러티브

기슬기 개인전 Sub/Ob-Ject(두산갤러리, 2017) 도록에 수록.

 

아숄로뜰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수족관에 얼굴을 들이밀고, 홍채도 눈동자도 없는 황금색 눈의 신비 속으로 침투하려고 다시 한번 시도했다. 유리에 붙어서 미동도 하지 않는 아숄로뜰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보였다. 깜짝 놀랄 만한 그 어떤 과정도 없었는데 나는 유리창에서 내 얼굴을 보았다. 아숄로뜰 얼굴 대신에 내 얼굴을 보았다. 수족관 바깥에 있는 내 얼굴, 유리 건너편에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 훌리오 꼬르따사르, 아숄로뜰 중에서

 

Sub/Ob-Ject에는 20여점의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 이 사진들이 저마다 담고 있는 피사체는 꽤나 정성들여 연출되었고 사진은 이를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게끔 조형했다. 예를 들어 붉은 손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중인 듯 운동감 있게 찍힌 손의 모습,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굵게 말린 긴 머리카락만을 내어 놓은 모습, 맑은 하늘색 바탕 위로 체모라고는 전혀 없이 옆으로 누워 있는 깨끗한 맨다리를 무릎 위까지 담은 모습 등이다. 이 사진들은 하나도 크기가 같은 것이 없고, 제각기 다른 높이로 벽면에 부착되어 있어 전시장은 전체적으로 견고하고 명확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리듬의 감각에 불현듯 간섭하는 또 다른 리듬은 각 사진마다 미묘하게 다르게 재단된, 흰 인화지의 여분인 이미지의 프레임이다. 전시장의 세 면을 채운 사진들은 시작과 끝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횡축으로 정렬되어 순차적으로 훑어보게끔 동선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굳이 어느 방향이든 순차적으로 사진을 보아야 할 당위는 찾기 힘들다. 왜냐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노력한다 하더라도 사진과 사진 사이에는 언어적으로 납득될만한 연속성이나 유사성은 찾을 수 없고, 표면에 남겨진 질감을 넘어서는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내러티브가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전시장의 사진들은 그 이미지들이 구조적으로 위계를 가지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한 것으로서 독립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실은, 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사진들에는 분명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 주어진) 모종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시의 안내문에는 작가가 일본에 머물며 신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인터뷰했고, 그 과정과 연관된 이미지들을 수집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이 사진들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진의 본질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흔적이자 지표, 혹은 그 흔적을 상기시키는 통로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하나하나의 사진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혹은 그것이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고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지지만 이에 대한 명료한 대답은 사진의 내부, 즉 프레임 안의 이미지를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 전시에 포함된 사진의 집합은 우리에게 내러티브를 찾아 나서기를 요구하지만 그 단서는 거의 내어주지 않는 셈이다. 이로써 명백한 것은 Sub/Ob-Ject는 내러티브에 대한 의도적인 침묵과 사진이라는 실재적인 재현물이 전시장 안에서 만들어내는 리듬으로 서스펜스를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단지 이미지의 미감만을 소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사진을 둘러싼 (새로운)내러티브를 도출하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20여점의 사진이 드러내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다시 처음부터 톺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만약 마지막 질문을 긍정하며 그 지시에 따르는 이가 있다면,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이미지만으로도 세계를 모두 파악할 수 있고 그 안에 모든 사실과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가 재현의 급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상숭배자라면, 기슬기가 사진의 조건으로 구축해 놓은 전시 Sub/Ob-Ject는 그러한 신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전시에서, 사진의 모든 의미를 끊임없이 변주시키는 매개변수(parameter)가 있다면 바로 벽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시장 전체에 걸쳐 설치된 육중한 철망이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이 철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객의 시선과 동선을 제한하고, 설치된 사진을 맨눈으로 곧바로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든다. 이는 사진-이미지를 응시하는 과정이 완전히 투명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제도적, 문화적, 신체적 조건에 속해 있는 것임을 가시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진을 나의 시선에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을 빠짐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관성적인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하며 단지 무력한 관찰자로 자리매김 시키는 간격을 만드는 기능적인 역할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리 촘촘하지 않은 철망에 바싹 붙어 그리드를 눈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관람하는 신체에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힘을 들이게 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 전시가 구축한 게임의 규칙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철망이 사진 그 자체의 형식적 요소에는 포함되지 않은 조건이지만 전시에서 사진의 의미와 내러티브를 관장하는 주요한 매개변수로서 기능하며 이 제한을 충실히 따를 것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철망이 제안하는 규칙은 무엇인가? 이를 꼼꼼히 따져보자. 하나는 이미지를 온전히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나 충분히 상상 가능하듯 이 전시장에서 사진-이미지는 철망의 그리드를 거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인지되는 이미지는 그리드를 구성하는 경계선으로 인해 분절된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는 거리(distance)이다. 철망은 관객에게 사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끔 수행적인데, 이는 사진 관람을 위한 적절한 위치를 제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정 수준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보다 더 자세히 표면을 응시하려는 시도에 대한 방어에 가까워 보인다. 세 번째는 리듬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여점의 사진은 저마다의 크기와 높이, 그리고 프레임의 너비를 통해 복합적으로 시각적인 리듬감을 드러낸다. 철망의 그리드는 이 리듬을 법칙화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그 자체의 반복적인 형태로 인해 전체적인 리듬을 강화시킨다. 종합해 보면 이 세 조건은 환영적 이미지로의 몰입을 거부하면서, (리듬의 강화를 통한) 이미지 지지체로서의 사진에 대한 감각적 경험, 그 실존적 상태에 대한 인정을 공고히 하는 유기적인 벡터이다.

이처럼 철망은 사진의 형식적 요소에 간섭하는 한편,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규칙을 하나 더 제안한다.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심리적인 것에 가까운데, 바로 사진에 관여되는 시선의 문제다. 여기서 시선의 문제란 사진을 응시하는 관람 주체의 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바라봄을 ‘당하게 되는’ 것을 뜻하며, 철망의 그리드는 그 심리적 작용을 가시화하는 것으로서 기능한다. 분절된 사진-이미지의 상을 통과시키는 그리드는 저 편의 대상을 이 편의 이미지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광학기계의 렌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그리드는 불가피하게 관음적인 관찰의 도구로서 작용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음은 언제나 응시함과 응시 당함의 동시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시장을 서성이며 철망 ‘안’의 사진을 보다 보면 문득 철망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나이며 오히려 철망 ‘밖’의 사진에 의해 관찰당하고 있다는 극적인 전환의 경험을 말한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그리 대단한 비약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기슬기는 Sub/Ob-Ject의 오프닝 행사 때, 직접 철망과 벽 사이 공간에 들어가 사진을 등지고 카메라를 들어 전시장 안을 서성이는 관객들을 촬영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는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바라보는) 주체와 (해석당하는) 대상이라는 고답적인 관계항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의미, 새로운 내러티브를 생성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것으로 읽힌다.

“응시하는 나머지, 그 자신이 응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혹은, 응시한다는 동사 속에서는, 능동과 수동의 경계가 불확실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롤랑 바르트는 이미 「정면으로 응시하고」에서 응시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이중성을 인정했다. 나아가 이 글이 다루는 핵심적인 문제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있어서 시선은 특권적인 의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선은 “불안한 기호”이자, (언어적) 기호를 범람하는 힘이다. 즉 “의미가 각인되는 작용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범람하고 확산시키는 무한한 팽창의 장”이다. 의미를 응시로 환원시키는 것을 통해 비로소 사진은 단지 표상되고 표현되는 것에서 나아가 실재하는 수행적 재현물이 될 개연성을 얻을 수 있다. 사변적 세계에 잠재된 무한한 내러티브를 불러 세우는 사진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진정한” 리얼리즘적 사진을 다시금 정초하는 일일 테다. 우리는 알아낼 도리 없는 사진의 깊이(없음)에 침투하여 눈속임의 환영을 좇기 보다는, 서로를 응시하는 거리에서 시선의 교호로 가능한 픽션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사진이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증거능력을 넘어서는 픽션을 생성하고자 한다면, 결국 역설적으로 사진을 내러티브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기슬기의 전시 Sub/Ob-Ject가 의도적으로 사진의 내러티브를 배제하고 시선의 교호를 위한 조건을 구축한 것은 바로 사진을 둘러싼 이러한 세계-내 내러티브를 촉발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것이 작가 자기 자신만은 이미 알고 있는 내러티브로부터 지대한 오차를 가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사진의 무한한 내러티브를 위한 외적 조건을 전시를 통해 일시적인 의사-형식으로 구축한 것이 이번 작업의 비평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진 외부의 범주를 강하게 암시하는 것은 전시장 한켠에 쌓여 있는 모래 더미이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 단단히 뭉쳐질 수 없이 서서히 흘러내리고 흩어지는 비정형의 더미는 사진이 붙어 있는 벽면과 철망 사이의 좁은 통로에 가장 명료하게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일부는 철망 너머로 넘쳐흘러 관객이 서성이는 영역을 침범했고, 반대쪽으로는 그 연장선상에서 전시장 밖의 거대한 쇼윈도를 가득 채운다. 지층을 만들며 켜켜이 쌓여 있는 쇼윈도의 모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모습을 바꿀 것이고, 사진 그 자체와 무관한 장소에서 태연히 무게감을 과시한다. 여기서 모래 더미는 물질화된 유동성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사진의 외부에서 조형되어야 하는 내러티브의 장소, 질감, 형상을 가시적으로 제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가시화되었을 때 다른 무엇보다 가장 추상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이다.

‘아숄로뜰’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짧은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실존하지 않는 생물로, 분홍색 몸통을 가졌으며 매우 작은 두 눈은 홍채도 눈동자도 없는 투명한 황금색으로 묘사된다. 이 글의 화자는 아숄로뜰을 우연히 본 이후 그것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관찰하는데, 특히 눈꺼풀이 없어 항상 뜨고 있는, 아득한 깊이를 지닌 황금색 눈에 매혹된다. 아숄로뜰의 눈을 응시하며 그 존재를 헤아리던 화자는 불현듯 아숄로뜰로 분하게 된다. 그것은 변신(metamorphosis)이라기보다는 눈-시선의 교환을 통한 의식-세계의 이동, 주체와 객체의 자리 바뀜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수족관 밖에 서 있는 (인간인)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아숄로뜰처럼 감각하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 한순간의 전환으로 인해 소설이 묘사하는 세계는 전적으로 어느 한편에도 속할 수 없는 중간적 상태, 상호적인 시선으로 유지되는 모호한 긴장의 지대로 변모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학의 환상적 상상력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그 시선의 뒤섞임이 소설 자체에 부여하는 새로운 내러티브에의 가능성이다. 표상과 읽기의 과정, 의사소통을 벗어나는 일상 너머의 세계를 확인하는 것으로서의 가능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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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Ob-Ject 전시 전경
Sub/Ob-Ject 전시 전경
기슬기 In the Sand 2017 혼합재료 240 x 700 x 20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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