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A의 규칙

아트인컬처 2018년 3월호에 수록.

 

최근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시각 예술에서의 작업 경향 중 하나는, 이제는 비평적 의미를 갱신하기가 묘연해 보이는 사진, 조각, 회화와 같은 전통적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다시)생산해내는 젊은 작가들의 모습이었다. 편의상 이들을 A라고 칭하자. 여기서 ‘이미지’라고 표현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이는 눈앞에 놓여 있는 작품이 그것에 대한 지각을 넘어 ‘읽기’를 강렬하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많은 작업들이 내어 놓은 다종다양한 결과물은 그것 자체의 조형만으로는 미학적인 가치를 담보하지 않고, 그보다는 결과물을 구축하는 데 소요된 프로세스, 규칙(혹은 세계관)을 중핵으로 삼는다는 암시가 강조되었다. 어떻게 보면 결과물은 자율적이라기보다는 그 프로세스, 규칙, 세계관에 의해 작동되는 장치이거나 부차적인 산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때문에 만약 규칙에 대한 비평적 읽기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건조한 덩어리로만 남을 것이다. 동세대를 주축으로 형성된 여러 온라인 비평 플랫폼이 이 시기와 엇비슷하게 조직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다.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 ‘읽기’의 대상이 앞서 언급한 경향의 작업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그 필연적 연관성의 윤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A의 작업은 각자가 독자적인 논리를 구축함으로써 다른 것으로는 명명되기 힘든 고유한 것, 특정적인 것으로 작동하며, 자기 자신의 좌표에서 확보할 수 있는 가시적인 항목들의 선택 과정을 통해 스스로(작가 자기 자신과 작품 모두)를 입체화시킨다. 그리하여 이들 작업은 하나의 위계에 놓이지 않고, 그 자체로 (세대론 이외에는) 담론화 되기 어려운 특이점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A에 대한 읽기의 과정에서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닳고 닳은 말일 수도 있는, 그러나 여전히 유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재현’이다. 기본적으로 A에게서 볼 수 있는 전반적인 태도는 재-현(re-present)에 대한 불신, 거부 혹은 무관심일 것이다. 이들은 무언가를 다시 보여주는 과정에 있어서 보여주는 대상 그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실제로 A의 작업은 대부분 의미가 합의되는 구체적인 형상을 구현하고 있지 않다. 무언가를 표상하고 있는 듯하지만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인지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조형되어 있다. 혹은 형상을 완전히 지운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형상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른 체계의 알레고리를 차용하면서 수반되는 것일 뿐, 재-현으로서의 도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아니면 그저 기존의 이미지를 전유하여 뒤섞거나 중첩시키거나 재배치한다. 이미지를 제작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특정)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반응이었으며, 따라서 이미지는 세계와 나란히 놓인다. 작업의 규칙(이미지)을 실제 세계 안에서 대표(represent)하게끔 의도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다시-현전시키는 것으로서의 이미지는 더 이상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공공연한 합의처럼 보인다(물론 그 대표가 유의미하게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필요하다).

이 배경에는 오늘날의 시각 예술가들이 처한 어떠한 곤경이 있는 것 같다. 이 곤경이란 미술 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이미지 제작이라는 특권이 상실될 수밖에 없는 당대의 보편적인 상황에서 기인한다. 이미지를 제작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는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 권한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실은 정말로 아득히 머나먼 얘기, 아니 거의 신화처럼 여겨지는 얘기일 뿐이다. 이제는 누구나 이미지를 제작한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제작할 수 있다. 나아가 진보된 기술은 자동화되어 인간보다 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사물과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술가의 특권이기도 했던 편집과 재조합 또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의 행위가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미지는 (아카이브보다는) 데이터베이스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곤경은 증폭된다. 요셉 보이스의 저 유명한 말을 떠올려 보자.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Every Man is an Artist)”(물론 ‘사람’의 자리에 ‘자본’이라는 단어를 대체해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조형하는 생산 행위 자체만으로는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당위를 얻을 수 없게 된 동시대의 이미지 생산자로서의 시각 예술가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만인이 예술가가 된다는 이 유토피아적인 언명은 언뜻 보면 이미지를 둘러싼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된 해방의 심상과도 겹쳐 보인다. 여기서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일 것이다. 더욱더 대중 속으로 스며들기를 기도하거나, 매체의 재발명을 촉구하거나. 현재의 시점에서 회화, 사진, 조각 등의 매체와 관계된 조건을 이용해 그 규칙을 처음부터 엄정하게 구축해 나가는 A의 경우에는 후자에 해당되는 듯하다(하지만 작가적 정체성의 위치는 어느 정도 중간쯤 위치한 것 같다).

재-현에 대한 불신을 전제한다고 했을 때, A가 작업을 통해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사-지우기, 형상의 왜곡, 제거, 혹은 형상에 대한 무관심, 비인칭적 공간에의 개입 혹은 공간 비틀기와 같은 방식을 강조하며 새로운 작품 자체에 대한 혹은 관객에 대한 수행적인 규칙을 시간 안에서 구축하는 것이다. 규칙은 그것이 실제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작업의 필수적인 매개변수로 삼는 것’은 A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하나의 재현은 디지털 기기에서 운용되는 소프트웨어나 스크린-기계를 기반으로 사용되는 데이터를 실제 공간에 ‘육화’시키는 것이다. 이 재현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납작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납작하다’는 것은 이중적인 임무인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스크린 혹은 평면 매체의 지지체가 제 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편편함을 실제의 부피로 환원시키거나 연동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스크린 기반의 이미지로서, 즉 납작한 표면으로만 지각되고 유통될 수밖에 없는 당대의 시각장에서 그 납작함에 어떻게 환영적 깊이를 부여할 것인지의 문제이며 이 두 의식은 양립해 있다. 물론 이 사이를 가로지르며 납작함 자체를 무한히 두꺼운 표면에 레이어로 중첩시키면서 비평적인 서사 혹은 풍경-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결국, 인지되는 세계가 그러하든 구현의 도구로 삼는 매체의 조건이 그러하든, 표면으로서의 납작함은 A가 자기 스스로의 규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변수이고 A는 그 납작함들 사이에서 열병에 시달리는 주체들처럼 보인다.

A에게 있어서 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주요한 시각적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납작함(평면의 납작함과 껍데기-기표로서의 세계상)이 상호적으로 연동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왜 새로운 규칙을 정립해야 했는지는 개별 작업들을 경유하며 더 꼼꼼히 따져 물어야 할 문제이다. 여기에는 분명 (사회학적 문제와는 다른)2000년대의 서울이라는 시공간의 특수성이 있을 테다. 서울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차원에서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A의 작업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는 건축물, 공간 그 자체 혹은 도시(군상)의 풍경, 그리고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통속적인 기표와 같은 물리적으로 감지되는 시각성이며 그것에 연동된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내러티브이다. 다른 하나는 재-현을 거부하고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에 대해 믿지 않으며 새로운 규칙을 조직해보려는 논리와 연관된다. 비표상을 경유하는 A의 규칙은 일종의 유동성을 전제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개연성을 얻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아방가르드적 예술의 전략마저도 상품화시키는 자본의 유동성에 맞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 운동성은 개입과 수행에의 의지라기보다는 자기 방어적인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거의 모든 것을 기표로 만들어 소비해버리는 시스템으로부터 실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저항이자, 내용과 깊이 없이 껍데기만 갈아 끼우며 유지되는 이 거대한 의사-역사적 도시에서 비껴서기 위한, 거푸집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A의 규칙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의 시공간을 차지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에, 즉 현존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호한 것은, 이 이미지가 가진 욕망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외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이 이미지는 욕망이 없다고. 즉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the caretaker, evertwhere at the end of the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