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퍼포먼스 다시 쓰기

미술세계 2018년 1월호에 수록.

 

이동식 가벽을 이용해 여섯 덩이의 공간으로 구획된 공연장을 관객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으로 퍼포먼스 연대기라는 공연은 시작했다. 누군가가 삽을 관객에게 건넸고 삽이 관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것으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공연을 이끄는 네 명의 퍼포머와 연출을 한 송주호는 이미 군중과도 같은 관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와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퍼포머가 쇠줄자를 가능한 한 높이 뽑아내보려는 것으로 최초의 행위는 드러났다. 그 이후로는 공연장에 놓인 생수병이나 훌라우프, 우산, 양초와 같은 다양한 사물을 이용한 행위가 이어졌다. 테이프를 땅에 이어 붙이기도 하고, 종이비행기를 날리거나 껌을 씹어 가벽에 붙이기도 했으며, 색종이를 바닥에 타일처럼 구성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고, 관객은 그 행위를 함께하거나 아니면 그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루며 무언가를 하기도 했다. 이 시간은 편안했고, 놀이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 퍼포머들은 가벽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재빠르게 다른 공간을 만들어냈다. 다음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에는 퍼포머가 행하는 하나하나의 행위를 집중해서 보도록 연출되었다. 소실점이 생기도록 가벽을 세워 이목을 집중하게 만들고, 그 꼭지점 즈음에 앉아있는 여성 퍼포머에게 관객이 걸어가 옷을 자르고 돌아오는 상황이나, 네모난 구조를 만들고 바닥에 네모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여 그 위를 걷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세워 응시하려고 노력하는 행위, 자신이 가진(입은) 사물에 대해 얘기하며 하나하나 벗어 긴 줄을 이어 만드는 행위, 가벽에 등을 기댄 채 끈으로 묶이는 행위 등 퍼포머들은 다종다양한 행위를 보여주었다가 금세 사라지고는 했다. 마지막은 송주호의 몫이었는데, 공연장 한 벽면에 숨어 있던 객석이 밀려나왔고 퍼포머들은 그 위에 초록색 천을 뒤덮었다. 송주호는 객석의 꼭대기로 올라가 인사를 했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전체 공연은 거의 2시간을 넘겼다.

이 공연은 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고 퍼포먼스 연대기는 두 종류의 연출이 중첩되어 짜인 구조이다. 하나는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지난 과거의, 더 특정하자면 국내외 미술사에서 곧잘 회자되는 행위 작업을 재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공연이라는 형식 안에 재배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적인 행위 작업(퍼포먼스)은 하나의 공연(퍼포먼스)으로 재생산되며, 재연과 재배치의 예술적 효과가 으레 그렇듯 해당 행위 작업을 다른 경험의 차원으로 이양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공연이, 신체라는 매체가 예술적 양태로 다루어진 시각예술의 역사적 내러티브 자체에 대해 비평적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주로 시각적 이미지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화 된 행위 작업은 퍼포먼스 연대기의 공연장에서 그리 엄정하지 않게 재연된다. 그럼에도 공연장에서의 행위가 무언가를 참조한 재연임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일종의 가족-유사성의 효과 때문이다. 이는 기록된 행위 자체가 근본적으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으로 읽히고, 그 껍데기-이미지를 매개로 관객의 경험은 다시 조직된다. 해당 행위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은 것, 공연의 시간 동안 행위에 관객이 함께 참여하다시피 바투 잡아놓은 거리, 행위를 뒤죽박죽 동시다발적으로 섞어놓은 점, 관객의 어떠한 우발적 상황도 가능한 느슨한 연출, 가벽을 이용해 계속해서 뒤바꾸는 공간은 기존의 역사적 서술과는 어긋나게 만들기 위한, 껍데기-이미지를 재배치하는 연출의 전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공연으로 호출하고 그것을 재배치함으로써 비평적 질문이 관객에게 던져졌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비평적 질문은 실제 공연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먼저 이 공연이 비평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이 재연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에 대한 정보, 이를테면 행해졌던 시기라든가 지정학적 장소라든가, 행위 주체라든가 하는 정보가 있어야만 이 공연이 기존의 역사적 서술을 뒤섞어 놓은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어떠한 지식의 전제도 없다면,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퍼포머들의 행위를 호기심에 기대어 관찰해야 할 뿐이다. 즉 이 공연의 비평적 효과는 매우 한정된 조건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며, 발생한다 해도 이미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만약 어느 정도 비평적 질문을 이해한다면, 그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지루함이다. 눈앞의 행위가 어떤 역사를 참조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 관객은 해당 행위 자체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멀어지고 그 다음 어떤 행위가 이어질지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진다. 그보다는 그 행위가 어떤 내러티브로 다시 짜일지에 대한 기대가 생성되는데, 이 두 간극 사이에서 꽤 긴 지루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는데, 이 공연에서 선보인 재연 행위의 원본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인다. 왜 수많은 역사적 사례 중 특정한 것이 선별되었는가? 그리고 그 선별된 기록의 출처는 어디인가? 만약 이 공연이 퍼포먼스에 대한 특정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서술, 이를테면 한국의 1세대 행위 예술을 ‘실험미술’이라고 정의한 김미경의 『한국의 실험미술』 같은 연구를 향한 것이라면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며 비평적인 질문 자체가 당위를 얻었을 것이다. 비판은 자기 스스로가 비판하고자 하는 집합 안에 포함되어 있을 때에만 비평적 효용성을 가진다. 이 공연은 비평적 질문이 향하는 집합적 영역이 불분명하며, 만약 그것이 퍼포먼스에 대한 역사 그 자체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관객이 공연장에서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퍼포먼스라는 것에 대한 역사적 서술의 특이점을 주요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앞서 비평적 질문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퍼포먼스 연대기는 질문을 던지는 것 까지를 그 자신의 이번 임무로 상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자답이 아닐까.


 

김정현, 퍼포먼스 연대기(2017, 플랫폼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