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사라지기 위하여: 박윤지의 작업에 대한 노트

박윤지 개인전 white nights(아카이브 봄, 2018) 도록에 수록.

 

불과 글, 신비와 서사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한 요소의 실체가 다른 요소의 상실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하고 부재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그림자와 추억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불가능한 과제 앞에 선 예술가의 상황을 단테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 중에서

 

광학 기계는 세계를 하나의 상(象)으로 재현한다. 만약 이 상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만큼 투명한 세계의 동일물(同一物)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이것을 여전히 이미지라고 부르고, 이것의 낯설음을 발견하며, 또 이것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려 하겠는가? 그리고 왜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어 서사로 구성하기를 시도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자각, 즉 이미지가 세계의 동일물이 아니라 등가물(等價物)임을 되뇌이며 서사에 소요되는 것으로서 다루는 일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 상실된 것, 그리고 망각된 것에 대한 자각이자 그 무언가를 불러 세우기 위한 의지일 것이다. 세계의 결핍이 이미지를 통해 추정된다면, 그 가능함의 조건은 어디서 생겨날 것인가? 질문의 또 다른 입구를 찾아보자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서사화함으로써 하나의 픽션이 되는가?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는 대지의 설산 위를 스치며(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을 덮어버리며) 안개처럼 육중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화면 안의 사물적 요소들이 모종의 사건적 요소로 전환되리라는 기대가 생겨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지속된다. 그러나 white nights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영상 중 하나인 the white nights를 보다 보면 화들짝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 멀리 있던 구름이 가까이 밀려와 렌즈의 심도 거리를 방해한 탓인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카메라의 초점이 난데없이 조정되는 때이다. 아마도 자동초점(autofocus) 모드를 사용하여 촬영되었기 때문일 텐데, 영상은 빠른 속도로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세 번 반복하고는 다시 태연하게 설산과 구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후, 화면은 그것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이물감으로 가득 찬다. 아지랑이 같은 대기의 떨림, 그에 공명하듯 핸드 헬드로 촬영되어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프레임의 불안함은 화면 안의 세계를 사실의 바깥으로 튕겨낸다(그리고 이것은 그 이미지를 망각으로부터 구원한다). 마치 더 잘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려는(혹은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종종 과도한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설산의 이곳저곳을 훑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응시하거나 형상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그 시간에 각인된 지문에 가깝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보는 도구가 아니라 쓰기의 기술이고, 질감을 더듬는 손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비로소 작가가 영상을 통해 매개하고자 하는 것은 산도, 눈도, 구름도, 바다도, 초원도 아니라는 사실이 환기된다. 우리에게 자명하게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있었음의 증명이 아니라 고도로 추상화된 풍경의 시간이다.

박윤지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기록하지만, 그 카메라에 담기는 피사체를 보여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분명 작가는 ‘본다는 것’에 대한 다른 믿음이 있다. white nights에서 6mm DV로 촬영된 네 편의 영상을 바닥에 설치하고 그 위에 다소 과해보이는 아크릴 원통을 얹어 제한된 관람을 의도한 것 또한 시각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일관되게 그 피사체의 이미지를 ‘통해서’ 무언가에 도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그는 카메라를 재현의 매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현으로 생산된 이미지 자체를 매체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이 ‘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위기(mood)나 양식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기능적인 측면 때문이다. 그러나 빛의 기입이자 형상의 발화인 사진적 이미지를 통해 멀리 돌아 다른 곳에 다다르고자 하는 열망은 그리 새롭다거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따져 물어야 할 것은,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무엇을’ 환기시키고자 하는가? 혹은 ‘어떻게’ 환기시키는가? 이다. 박윤지는 사진 작업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의 피사체를 연작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가 연작으로만 구성되는 것의 필연성은 그가 동형적인 것 안에서 동질적이지 않은 것을 찾고자하기 때문이다. 혹은 동형적인 것 중에서 동질적이지 않음을 드러내는 사물 혹은 상태를 찾는다. 따라서 그가 다루는 이미지는 오직 서사적 구성 안에서 차이의 발생을 통해서만 규정될 뿐이다. 차이를 통해서만 자기-규정된다는 점에서, 박윤지의 이미지는 공간적 배열이 아닌 시간적 연속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즉 박윤지의 사진적 이미지는 차이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매개자로 기능한다. 그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구성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시간이 구조화하는 차이이다.

어쩌면 박윤지의 영상이 원 테이크로 촬영되어 긴 지속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상 매체의 시간이 추동하는 움직임 자체를 이용하여 비동질적인 차이를 무한히 생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지속’ 그 자체를 미학화 했던 영화적 실천과는 변별된다. 미학화 된 지속이 대개 ‘지루함’과 같은 관객의 정동과 관계된다면, 박윤지의 영상은 정동적인 것과 그리 관련 없어 보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은 박윤지의 영상 이미지가 시간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구성되는 차이의 서사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그가 서사를 만드는 방식은 개별의 가상적 공간을 맞붙여 의미를 발생시키는 몽타주의 언어가 아니다. 박윤지는 오로지 카메라의 쓰기, 즉 자기 자신의 문체를 통해서 서사를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바르트가 플로베르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심급, 즉 “바로 작품의 목적 자체인 글쓰기”와 같다. 박윤지는 white nights의 영상을 촬영했던 그 장소에 약 2개월간 머물며 거의 매일 온종일을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담았다. 그 방대한 기록의 시간은 아마도 가장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는 사냥꾼의 기다림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장을 쓰고 고쳐 쓰고 다시 고쳐 쓰는 지난한 과정이었을 테다(여섯 편의 영상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구성된 작업 white nights가 완결되지 못한 중간적인 상태에서의 어떤 ‘멈춤’ 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작업은 원칙상 더 고쳐 쓰일 수 있고, 그 최종의 중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한계에서 비롯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의 영상 이미지를 산출하는 과정이자 작품의 서사를 조형하는 원칙이고 여기에 삶-존재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동시적인 행위이다. 바르트가 “플로베르에게 있어서 문장은 문체의 단위인 동시에 작업의 단위이고 삶의 단위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아감벤이 단테를 인용하며 쓴 “예술가의 떨리는 손”이란 양식을 초과하는 글쓰기이다. 그리고 그 양식을 초과한 여분의 것으로, 망각된 무언가는 간신히 은유될 수 있다. 박윤지의 영상은 단지 하나의 이미지를 위한 지난한 글쓰기이다. 그 글쓰기의 이미지는 풍경을 고도로 추상화시키고 곧장 이를 매개로 무한한 서사를, 형상을 넘어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픽션을 보여준다. 그러나 white nights의 이미지가 무엇을 매개하는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한히 미끄러지는 차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아마도 뒤이어 고쳐 쓰여질 풍경을 위해 소요될 것이다. 여기서 소요된다는 것은 곧 매개 이후에 사라짐을 뜻한다. 그의 이미지-서사는 언제든 차이를 환기시키고 사라질 것을 예비한다. 아마도 그러한 진정한 매개를 수행하기 위해 박윤지는 쓰기에 헌신하였을지도 모른다.


 

Yunji Park, the white nights, 12’21”, full hd, single channel video, 2016
© www.yunji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