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변형하는 시간

History in Motion: Time in the Age of the Moving Image(Berlin: Sternberg Press, 2013)에 수록된 스벤 뤼티켄의 글 Transforming TimeOKULO 003: 변형하는 시간(2016년 11월 1일 발행)에 번역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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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뤽 고다르, 필름 소셜리즘1

 

필름과 비디오 프로젝션을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전시 공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최근의 경향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었는데, 부분적으로 비디오 프로젝터 기기를 적당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 상영되는(looping) 방식이 필름 프로젝션의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 전시공간에서 필름을 프로젝션하는 데 이와 같은 기술적 시도는 흥행 요소가 되었고, 비디오에 비해 필름이 지닌 바로 그 한계들로 인해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네덜란드의 듀오 작가 예룬 더라이케와 빌헬름 더로이의 초기 작업 가짜 깃털을 빼앗긴 까마귀(The Raven Robbed of His False Feathers)(1988)는 촬영은 되었으나 아직 현상하지 않은 10여 분 길이의 필름이나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멜키오르 돈데코테르의 그림이 담겼을 것이라로 추측되는 닫혀 있는 필름 보관통이다. 1960년대 후반의 개념미술 작가 크리스틴 코즐로프가 뚜껑이 열려 있는 필름 통에 필름을 넣어 두고 이를 반투명하고 물질적인 매체로 보이게끔 강조했던 작업과는 반대로, 더라이케/더로이는 필름을 특권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강조했다.2 이후 이 듀오는 한정판으로 생산된 그들의 필름을 텅 빈 공간의 흰 벽면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상영했다.

전시장 안으로 필름 프로젝션이 들어오는 움직임은 이미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이후 서구에서의 주요한 예술적 경향은 마이클 스노우, 폴 샤리츠 등의 작가들로 손꼽히는 구조영화(Structural Film)와, 매체에 대한 탐구를 위해 유사한 방법론을 사용했던 마르셀 브로타스, 리처드 세라와 같은 시각 예술가들의 일련의 작업이었다. 전시 공간에서의 필름 프로젝션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몇몇의 전시, 예를 들어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Kunsthalle Düsseldorf)에서 열렸던 전망 71: 프로젝션(Prospect 71:Projection)(1971)전에서는 이들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러나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고 시장가치의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시공간에서의 필름 프로젝션은 상대적으로 예외적인 것이었다.3 몇몇의 작업이 직접적으로 영화사에 기대어 있었던 반면 대부분은 필름 매체의 물리적 속성과 시각적 기질(基質), 영사 기계, 그리고 지각에 집중했다. 이때 선택된 용어는 ‘영화(cinema)’ 가 아니라 프로젝션(projection)과 필름(film)이었으며, 필름은 구조적인 영화를 제작하는 포스트-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 탐구의 대상이 되는 매체였다. 1977년에서 1978년 사이에 열렸던 대규모 전시 필름으로서의 필름(Film as Film)은 191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절대(absolute)’ 영화와 구조영화의 연대기를 만들었다.4 그러나 이 전시는 여전히 순수한 매체라는 필름에 대한 개념에 반대하고 상업의 전당으로서의 영화를 지지했던 1920년대 후반 순수주의 네덜란드 영화연맹(Dutch Filmliga)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유지했다. 상업 영화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예술적 필름의 적절한 프로그램이 필요했다.5

1970년대 말, 루이스 롤러와 바버라 블룸과 같은 작가들은 필름이라는 매체 자체보다 극장에서의 스크린처럼 영화적인 것의 영역 안에 개입된 전반적인 장치들에 집중했다. 1977년 블룸은 하워드 혹스의 깊은 잠(The Big Sleep)(1946)과 장피에르 멜빌의 붉은 원(The Red Circle)(1970)을 상영하는 ‘늦은 밤 상영회’를 기획했다.6 이 프로젝트는 늦은 밤에 상영한다는 현상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필름이 아니라 필름 상영에, 화면 안의 대상이 아니라 프레임에 집중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블룸은 상영을 위해 광고 영상을 선별하고 영화의 짧은 클립들, 스틸 이미지 등을 상영되는 화면 중간 중간에 삽입시켰다.7 1979년 롤러는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A Movie Will Be Shown Without the Picture)의 첫 번째 버전을 산타모니카에 있는 에어로 극장(Aero Theatre)에서 무대에 올렸다.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1961)이 상영되었지만 작업의 제목이 시사하듯 관객은 이 영화를 들을 수는 있으나 볼 수 없었다. 영화는 말 그대로 ‘차단(screened)’되었다.8 이 시기 롤러의 실천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수행적 개입, 다른 맥락들과의 중첩으로 볼 수 있다. 블룸은 미술 관객을 영상 없는 상영회로 데려다 놓았으며, 이로써 상영회는 잠재적 이미지가 가득한 청각적, 사회적 행사가 된다.

실제 이미지를 없애고, 소리의 숲속에 놓인 관객의 상상에 집중함으로써 롤러의 작업은 영화가 어디에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의 작업은 필름을 상영하는 것이 문화적인 제의로 여겨지던 약 20여 년간의 시네필 시대 막바지에 위치한 것이었다. 블룸처럼, 롤러가 영화에 개입하던 시기는 내가 ‘영화적인 것(cinematic)’이라고 일컫는 것이 전통적인 영화의 환경에서 점점 분리되는 때였다. 1980년대가 도래하고 홈 비디오가 급속도로 일반화되면서 영화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더 빈번해졌으며, 이는 20년이 지난 DVD와 온라인 비디오의 시대―그리고 프로젝션을 현대 예술의 핵심적이고 편재하는 요소로 만든 새로운 영화적 예술(cinematic art)의 시대에 그 정점을 맞이했다.

장뤽 고다르에게 영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매체가 아니라 이제는 잃어버려 돌이킬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전체를 의미했다. “회화의 역사가 하나의 그림이 아닌 것처럼, 영화의 역사는 하나의 필름이 아니다. 영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9 만약 영화가 필름 생산과 분배에 관한 특정한 체계라면, 영화적인 것은 비유로나 주된 내용에서 문화적으로 연결된 체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적인 것은 물적 지지체로서의 필름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름이라는 매체, 장치들, 그리고 생산체계와 결별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시네마(post-cinematic)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영화의 역사에 속해 있다. 즉 필름의 이후로서의 포스트-시네마인 것이다. 장소로서의 영화와 장치에 대해 탐구한 블룸과 롤러는 필름으로서의 필름 전시와는 다른 접근을 시사한다. 작품에서 프레임으로, 에르곤(ergon)에서 파레르곤(parergon)으로. 즉 의미가 발생하고 사회적 상황들이 생산되는 생산 장소로서의 영화로 이동하는 것이다.10

1970년대 후반 이 장소는 변형되었는데, 돌비(Dolby) 사운드의 등장으로 이미지보다 사운드를 강조하게 된 것이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롤러가 2012년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1977)로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를 만들었을 때 반영되었다.)11 이러한 변화는 필름의 장소라는 영화의 개념을 무너뜨린다. 전에 없이 훨씬 자율적인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던 고다르는 경멸(Contempt)(1963)에서 이탈리아의 영화 제작 시설인 시네시타 스튜디오(Cinecittà Studios)를 유령도시로 보이게끔 하면서 일종의 영화에 대한 그의 애도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고다르는 물론 이후에 비디오를 사용함으로써 영화를 애도하고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에 새 삶을 부여했다. 1970년대에 고다르가 작품의 생산과 분배의 측면에서 비디오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져왔던 관심은 1980년대에 일어난 영화 관객의 침식과 상통하는데, 이는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제작자들에게 방송국은 매우 중요한 공동 제작자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공영방송에서 여러 일탈적 시도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미술계(artworld)가 또다른 포스트-시네마로서 시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블룸과 롤러는 영화적인 것이 자신의 자리, 즉 영화를 떠났을 때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몇 갤러리 기반 작업들을 통해 블룸은 특히 영화가 갤러리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이는 1990년대 영화적 예술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후 10여 년간 필름과 비디오로 작업하던 젊은 예술가들은 영화적인 것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고, 고다르, 크리스 마커, 샹탈 아커만, 하룬 파로키 등과 같은 베테랑 감독들 또한 점차 갤러리에서 설치 작업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술관을 필름과 결별, 또는 필름을 해체하고 재조직하는 전시용 영화들을 위한 대안적 공간―무빙 이미지를 전례 없이 조작 가능하게 한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상당 부분 영향 받은 몽타주의 공간―으로 재발견했다. 이 새로운 영화적 예술은 1960년대에 주목받지 못했던 시각 예술가들의 필름 실천을 재발견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는 폴 샤리츠, 토니 콘래드와 같은 작가-감독이 포함되는데, 이들의 플리커 영화는 전시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적 예술의 계보에 통합되었다. 이와 같은 작업들은 종종 플럭서스(Fluxus) 작가 딕 히긴스가 제안한 용어이기도 한 인터미디어(intermedia) 예술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샤리츠와 조지 마키우나스는 필름을 움직이는 배경 혹은 환경으로서, 즉 ‘필름 벽지’로 다루는 것에 관심 있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영화의 미술관화 과정에서 쉽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의 영화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것보다 전시에서 훨씬 많이 상영된다. 물론 워홀의 실천은 할리우드 스타시스템에 대한 갈망으로 읽혔다. 그는 자신만의 ‘슈퍼스타’를 만들었고 페티시적인 찬양으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미지를 느리게 만들고, 시간을 팽창시키면서 말이다.

패멀라 리는 그녀의 연구 저서 시간공포증(Chronophobia)에서 “시간공포: 시간과 그것의 측정에 대한 강박적 불편함을 갖는 것”을 “만연한 불안”이라 설명하며 이를 추적한다.12 1960년대 이 시간공포증은 마이클 프리드와 같은 형식주의 비평가들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듯했다. 프리드의 가장 유명한 글에 따르면, 진정한 모더니스트 회화와 조각은 사물성과 예술을 시간에 종속시키는 미니멀리즘 예술(Minimal art)의 연극적 ‘현존성(presence)’을 초월하여 그 자체의 현전(presentness)을 선언한다.13 그러나 패멀라 리는 심지어 모더니스트의 선언인 순수하고 불변하는 시각적 현전과 단절하는 작가들에게서조차도 특히 시간에 종속된 존재, 시간적 경험에 대한 심대한 불안이 감지된다고 분석한다.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워홀과 스미스슨이다. 이들이 시간 기반의 작업을 만든 것은 오히려 시간에 묶인 존재에 대한 깊은 우려 때문이다. 웨인 코스텐바움의 말에 따르자면, 워홀이 초기 영화에서 시간을 재배열한 것은 오로지 시간을 죽이기 위함이었다.14

그러나 1990년대 이후로 필름과 비디오 작업에서 느림은 시간 공포증의 증상으로서 시간을 죽이고자 하는 욕구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 그것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포함한 주류 시각 문화의 광적으로 빠른 속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대안이었다. 종종 이 새로운 예술은 시간을 그것의 도구화로부터 떼어낸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된다.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영화가 블록버스터 스펙터클에 묶여 있을 동안 필름/비디오 예술이 누벨바그(Nouvelle Vague)로부터 그 토대를 이어받는 것으로 계보화한다.15 어떻게 ‘해방‘이라는 수사가 시간공포증에 대한 미술사적 진단과 맞아 들어가는가? 시간 기반 예술의 모순과 잠재성을 탐구하기 위해, 특히 영화적인 것이라는 외피 속에서, 나는 겹쳐지고 또 마찰을 빚을 몇몇 필름과 비디오 아트의 연대기를 추적할 것이다. 나는 필름과 비디오 아트의 논리와 이율배반적 구조들은 이러한 연대기들의 성좌를 구성함으로써만 드러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보다 광범위한 시간의 정치경제적 변화들과 연관 지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시기 동안 서구사회는 점진적으로 포드주의적 생산-조립 라인의 사멸을 겪어 왔고, 노동과 ‘자유 시간’ 사이의 엄격한 분리가 붕괴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좋은 시간, 나쁜 시간

전통적인 노동과 여가의 교대는 기 드보르를 경유하자면 의사-순환적 시간의 형태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가역적이고 역사적인 시간 체제에 속하는 농경 생활, 혹은 ‘신화적인’ 순환으로의 회귀인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그러한 역사적 시간이 물화된 형태, 즉 상품 생산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한때 역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의 역사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소유자 계급은 다른 모든 불가역적 시간에 의해 위협받을 것이기에 그것의 사용을 억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 소유의 전문가들 집합인 지배 계급―바로 이 점에서 사물의 소유물이기도 한―은 자신의 운명을 물화된 역사의 보존에 기대야만 했다. 즉 역사 안의 새로운 부동성을 보존하는 것에 말이다.” 16 이 부동성은 의사-순환적 시간, 즉 상품화된 시간성으로 나타나는데, 이 시간성은 균질하며 모든 질적 다양성을 억압한다. 또는, 기껏해야 거짓된 해방 속에서 앞서 말한 다양한 차원들을 모방할 뿐이다. 드보르에게 있어 1960년대의 시간-기반 예술은 앞서 말한 의사-개인적, 의사-해방적 순간들로만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보르는 “상품화된 시간”의 상태에 대해 “동일한 간격의 무한한 축적”이라며 비판한다. 또한 “불가역적 시간은 시간을 추상적으로 만들었고, 각각의 시간은 시계에 의해 측정된 오직 순수하게 양적인 부분만을 증명하면 될 뿐이었다. 상품화된 시간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그것의 교환 가능성만이 실재적인 것이다.”17 이와 같은 시간의 공간화, 즉 측정 가능하고 개별적인 무언가로 시간을 변형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들뢰즈를 비롯한 베르그송주의 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다양한 가닥들을 어느 정도 통합한 안토니오 네그리도 포함된다. 네그리는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모든 노동은 단순히 양적이고, 공간화되고, 수치화된 시간으로, 즉 “복잡성은 명료한 발화로, 존재론적으로 파편화된 시간으로, 그리고 조종이 손쉬워지는” 상태로 환원되었다고 주장한다.18 하지만 시대는 꽤 많이 변했다. 네그리의 작업은 다른 몇몇의 예술 작업이 그렇듯,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록 드보르는 그의 분석 대부분을 ‘고전적’ 산업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당시 발생하고 있는 변화를 엄밀하게 기록하지 않았지만, 계량화된 포드주의적 시간의 해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분명해졌다. 심지어 네그리를 비롯해 이전의 노동자주의자들(operaisti)조차도 이런 변화의 결과들을 시차를 두고 뒤늦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특정한 예술과 영화의 실천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는 단순히 특정 예술 작품과 사조로의 의사-순환적 회귀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재검토는 지연된 행동처럼, 또한 시간 속에서 시간과의 조우에 실패하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에 크리스 더콘과 같은 큐레이터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시네필 영화 문화가 침식된 이후 갈 곳을 찾던 영화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를 제공했다면서 미술계를 찬양했다.19 만약 영화가 더 이상 끊임없이 쿵쿵거리는 리듬과 도식적인 이야기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다양한 시간성을 제공하는 필름 본연의 실천 장소가 아니었다면, 미술은 역사를 수정할 수 있었으며, 필름에게 계속해서 예술로 발전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20 더콘을 비롯해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영화적 예술의 새로운 물결을 분석하는 중요한 도구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들뢰즈적 구분법, 그리고 영화 전반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영화의 변화가 인위적인 제한들로부터 ‘되기(Becoming)’―즉 존재 그 자체―의 해방을 위한 거대한 기획이 몸부림쳤음을 보여 주었다면, 1990년대의 미술계는 이 프로젝트가 지속되는 장소인 것처럼 보였다.

여러 측면에서, 들뢰즈의 시네마 Ⅰ』시네마 Ⅱ는 그의 이전 저서인 베르그송주의의 속편이자 응용이다.21 들뢰즈는 존재와 시간을 재현에 종속시키려는 인간의 경향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르그송을 참조한다. 재현은 시간을 공간화한다. 이 시간은 되기의 순수한 차이를 공간화된 것으로, 그리하여 단지 상대적인 차이로, 현대적 삶의 관리 가능한 시계의 시간으로 바꾼다. 역사의 개념, 역사적 시간에 대한 개념은 들뢰즈의 작업에서 매우 문제적인 역할을 한다. 이 개념은 시간의 공간화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역사는 주로 되기의 퇴보로 제시된다. 드보르가 비판했던 물화된 부동의 역사는 들뢰즈와 그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 말하는 역사와 동일한 개념이다. 가타리와 들뢰즈의 옛 동료 중 한 사람인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역사적인 것이 된 ‘되기’는, 차이를 적극적으로 포섭, 소멸시킨다.”22 영화에 관한 들뢰즈의 두 권짜리 책이 존재를 역사로부터 해방시키는 내용이라고 했을 때, 이는 사실상 “자연사적인 방식으로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인 에세이”인데, 왜냐하면 들뢰즈의 필름에 대한 분석은 베르그송의 ‘되기’와 ‘지속’에 대한 철학과 합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영화의 이미지는 (정신의) 재현이 아닌 “운동 속의 빛-물질”이며, “빛-물질의 사건들”이라고 분석한다.23

베르그송-들뢰즈적 자연사는 기억의 존재화에 기반한다. “모든 것은 마치 우주가 엄청난 기억인 것처럼 일어난다.”24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문화적인)기억은 필시 존재에 내재한 우주적 기억에 포함된다. “이것은 심리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태곳적 ‘기억’ 또는 존재론적 ‘기억’의 사건이다. 회상이 점차적으로 심리학적 실존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은, 일단 도약이 행해지고 난 다음일 뿐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부터 현실적인 상태로 이행한다. […]’”25 영화가 마침내 어떻게 시간-이미지의 해방을 구현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 들뢰즈가 전반적인 체계를 만들었음을 고려해 볼 때, 다소 모순적인 것은 베르그송적 ‘지속’은 연속보다는 동시에 존재함에 의해 더 잘 정의된다는 것이다. 가상의 상태에서 시간의 모든 층위는 동시에 존재하고, 현실로의 이행에 열려 있다. 누구든 이러한 현재적인 과거, 즉 영원에 접근하고 뛰어들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회상의 부름은 이 뛰어오름인데, 그것에 의해서 나는 잠재성 속에, 과거 속에, 과거의 어떤 지역 속에, 수축의 특정 수준에 자리 잡는다.26 이러한 방식으로 순수한 회상은 회상-이미지의 형태로 현실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인간의 두뇌에 의해 ‘존재’에게 부과된 비정상적인 정지된 재현에 직면하여 ‘되기’의 권리를 다시 주장하는 역사를 써 왔다. 이 주장은 예술과 영화의 과업 그 자체다.27 그리하여 영화의 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 고전 영화의 운동-이미지는 정지된 자세를 선호하여 움직임을 거부했던 서구의 전통적 재현을 흩트려 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운동-이미지는 여전히 감각-운동(sensory-motor) 기능에 의해 통제되고, 인간의 몸과 몸의 움직임, 정동(affect)의 지배를 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누벨바그의 시간-이미지에서는 이미지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되고 감각-운동 도식(schemata)에서 해방된다. 예를 들어 고전적 할리우드의 연기는 고다르의 영화에서처럼 카메라의 이동, 혹은 고정에 의해 대체된다. 그의 영화에서 갱스터 영화와 같은 고전적 장르의 관습적인 서사는 붕괴된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존재론의 많은 요소가 아무리 미심쩍다 하더라도, 이것은 강력한 서사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들뢰즈주의자들의 비난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들뢰즈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경제적인 명령에 따라 쓰이고 만들어진 특정한 형태의 역사를 역사 그 자체라고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되기’의 점진적 해방 역시 역사에 ‘되기’를 재주입한 것―가능성의 열어젖힘, 새로운 리듬의 발명―으로 볼 수 있다. ‘되기’의 해방은 그렇게 되면 또한 역사의 해방이자 역사적 시간의 해방이 될 것이다. 즉 드보르에 의해 맹비난을 받은 제약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1968년 5월 혁명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던 드보르 자신의 지나치게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같은 제약들로부터의 해방 말이다.

들뢰즈의 영화사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의 산물로, 그 순간은 1980년대에 이미 거의 지나간 것이었고, 들뢰즈는 당시 시네마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의 저작은 베르그송주의와 앙드레 바쟁과 같은 시네필 스타일을 결합시켰는데, 그때 당시는 스필버그나 루카스의 블록버스터, 그리고 변화한 영화 관람 습관이 등장하면서 바쟁과 같은 시네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던 영화들이 공격받을 때였다. 한때의 미래―해방된 시간-이미지―는 이미 영광스럽고 향수로 가득한 과거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시네마 Ⅰ시네마 Ⅱ에서 해방과 구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썼다. 이 이야기는 히치콕이 영화적 세례자 요한처럼 고다르에게 세례를 주었던 누벨바그 시기에 정점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다르 자신은 정작 시간-이미지를 애도의 예술로, 영화의 붕괴에 대한 애도로 여기기 시작했다.

들뢰즈와 고다르를 비교하는 손쉬운 방법은 히치콕에 대한 그들 각각의 견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들뢰즈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단절을 현기증의 스코티나 싸이코의 끝부분에 나오는 노먼 베이츠같은 히치콕 영화의 마비된 캐릭터를 통해 비유한다. 이러한 ‘경직(petrifactions)’은 행동-이미지(action-image)가 해체되고 시간-이미지 속의 인간 행위로부터 영화적인 시간이 점점 해방되고 있음을 드러낸다.28 반면에 고다르는 1998년 완성된 영화사를 통해, ‘되기’의 점진적 해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몽타주로만 묶일 수 있는 몇몇의 역사(histoires)들, 연관성 없는 이미지들로 녹아 들어가고 있는 급진적으로 어긋난 역사를 보여 준다. 고다르에게 있어서, ‘히치콕의 방식’은 탁월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고립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히치콕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사의 “알프레드 히치콕 방법론 입문(Introduction à la mèthode d’Alfred Hitchcock)”에서, 고다르는 “왜 자넷 리가 베이츠 모텔로 가는지”, 왜 이런저런 등장인물이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지,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우리는 “사막에 있는 차”, “한 잔의 우유”, 술병 거치대나 열쇠들을 기억한다. 고다르는 우리 기억에 잔여하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적 구축물인 내러티브가 아니라 연관성 없는 순간들과 정신적 기억-이미지라고 지적한다.29 우리는 사물들이나 장면들이 화면에 삽입된 목소리, 즉 보이스 오버에 의해 묘사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 이 몽타주에서 인과관계는 쉬이 만들어지지 않는다.30

영화사에서의 소리-이미지(sonimage) 성좌와 이에 관련된 에세이들에서, 고다르는 그가 보기에 가장 영화적이지 않은 매체인 비디오를, 필름을 전유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특이한 고다르의 실험들에 의해 존재론적인 기억의 개념이 끈덕지게 해체됨에도 불구하고, 이는 베르그송을 포함해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인용된 것이기도 하다. 비디오라는 매체는 영화의 박물관이 되었고, 박물관 그 자체는 비디오의 공간이 되었다. 2006년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전시, 유토피아로의 여행(Voyage(s) en utopie)에서, 고다르는 영화를 과거 위대한 예술의 합당한 계승자로 보여 준다. 하지만 고전 영화의 클립들이 다양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세 번째와 마지막 전시장은 영화가 거의 기억조차 아닌 것이 된 디지털 세계의 암울한 미래상이었다. 한 평평한 텔레비전이 테이블 위에 수평으로 눕혀져 외설적인 이미지를 보여 줄 동안, 침대 위에 놓인 다른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이 나오고 있었다. 고다르의 미술관에 대한 태도는 누벨바그와 그 적법한 계승자들인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미술관에서 그들의 피난처를 찾을 때 따랐던 낙관적 서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미술계를 좋은 시간-이미지의 안식처로 찬양하기보다, 역사의 잔해를 위한 창고로 드러낸다.

비록 드물긴 하지만, 누군가는 영화와 예술의 쇠퇴에 대한 고다르의 현명한 성찰들은 미술계가 영상(moving image), 구체적으로는 이전에는 영화였던 체계를 환희에 차 받아들이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궤를 같이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쨌든, 영화사의 작은 조각을 망각에서부터 구출하고, 적어도 몇몇 종류의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기억이 체계적으로 망각되는 것―주류 스펙터클과 그 스펙터클의 역사가 노스탤지어로 박제되는 망각―에 반대하는 것이 예술의 한 임무가 아닌가? 실제로 우주와 우주의 “광대한 기억”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고, 모든 일들은 마치 문화가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발생한다. 그러나 많은 영화적인 예술이 자신을 손쉬운 인용들과 결합시키며 현대 미디어에 의해 전파된 향수 문화의 고급 버전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반면, 고다르는 역사를 상실과, 발현되지 못한 잠재성에 사로잡힌 붕괴의 과정으로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급진적인 향수의 형식을 유지한다.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호들의 나열을 통해 역사적 상실(역사의 상실)을 감추기보다는, 고다르는 이 상실의 감각을 강화시키는 기호의 몽타주를 만든다. 비록 이러한 광적인 애도는 그 자체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것은 정제된 시간-소비를 위한 안식처로 미술계를 찬양하는 일에 대한 반가운 해독제이다. 한편 중요한 질문은 ‘시간의 해방’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선정적 문구 이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 수 있는가이다. 비록 일시적이고 간헐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갤러리 공간과 그것의 시간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결국에는, 바로 여기가 영화와 비디오 아트가 점점 제 역할을 하게 되는 장소이다.

정지 영화

영화사의 히치콕에 관한 도입부에서, 영화의 푸티지는 때때로 정지 이미지들의 연속이 될 만큼 속도가 느려진다.(특히 나는 결백하다(1955), 현기증 장면의 경우에 그러하다.) 영상의 스틸 이미지가 삽입된 영화사의 책 버전은 바로 이 과정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고다르의 후기 작업은 영화가 1960년대 초기보다 더 일상적인, 그러나 주변화된 문화를 반영한다. 1960년대의 다양한 물결이 쏟아져 나오던 문이 닫히면서, 블록버스터 영화의 우세는 필름의 문화적 권력이 시들어 감을 의미했다. 그러나 필름의 역사는 전에 없이 수많은 출판물, 특히 비디오를 통해 만들어졌다. 시네필과 영화사적 출판물들이 스틸 이미지에 대한 어떤 관심을 환기시켰다면, 비디오는 영화제작자뿐만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프레임을 집어내어 영상의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작가들이 영화의 스틸 이미지를 사용했던 것은 1960년대 처음 등장하여 비디오가 승리를 쟁취했던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절정을 맞이했다. 여러 측면에서, 작가들이 스틸 이미지를 선택해 사용했던 것은 1990년대에 영상이 갤러리로 이주하게 되는 기반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 미니멀리즘과 초기 개념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머이브릿지의 동체사진법은 강렬한 관심의 대상이었다(이는 더콘이 스틸/노벨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관심의 결과물 중 하나는 댄 그레이엄의 1969년 글 움직임 사진(Photograph of Motion)으로, 여기서 그레이엄은 뒤샹과 같은 “처음으로 움직였던 작가들”의 경우 초기 영화라기보다는 머이브릿지나 마레가 관심 가졌던 “움직임의 분석”에 가깝다고 말한다. 즉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No.2)(1912)는 후자에 해당되는 입체파적 변형이다.31 마레가 동작의 여러 위치를 통합시켜 하나의 줄거리를 지닌 이미지로 제시했다면, 머이브릿지는 단지 정지된 움직임의 파편들을 격자 위에 놓아두었다.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한다. “한 순간(숏)에서 다른 순간을 분리시키는 것은 간단히 사물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다. 각각의 숏(순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앞서거나 뒤 선 것들과의 관계없이 읽힐 수 있다. 사물은 다른 사물들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물은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프레임 가장자리에 따라 스스로 교체될 뿐이다.”32

유리에 세로로 평행하게 붙은 긴 필름들이 뒤에서 불을 비추면 다채로운 색상의 모자이크처럼 뵈는 폴 샤리츠의 1960년대, 1970년대의 작업 정지된 필름 프레임(Frozen Film Frames)의 의미는 정확히 자신의 형식을 통해 선언된다. 이 작업은 토니 콘래드가 플리커(The Flicker)를 위해 만든 ‘노출시간차트’처럼 추상적인 그리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콘래드에 따르면 이 차트는 사실 플리커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필름에 내재한 패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리기 위해서였다.”33 샤리츠는 그의 필름 작업을 위한 ‘시각 악보’를 만들었던 것으로, 여기서 정지된 필름 프레임이 만들어졌지만 이 작업은 필름 프로젝션의 재현이 더 이상 아니며 스스로 특권적인 필름 오브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좀 더 자율적인 것이다. 샤리츠는 이 작업이 시간의 악보이자 자율적인 드로잉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악보는 책처럼 왼쪽 위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 한 줄 읽힌다. 그리고 이것은 드로잉처럼, 전형적으로 동시적인 구조로서 읽힌다.”34 하지만 이 작업들 앞에 서면, 도식적인 이분법은 무너진다. 누군가 악보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비선형적으로 ‘읽기’시작한다면, 이것은 결코 동시적으로 읽히지 않는 회화나 드로잉이 된다. 즉 몇몇 색면 회화(Color Field) 혹은 하드 엣지(Hard-Edge) 페인팅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상징적 체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머이브릿지의 격자가 해부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표였다면, 샤리츠의 정지된 필름 프레임은 색채 분포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서 보는 행위의 시간성을 강조하는 시각적 물결을 만들어내며 움직임을 생산한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머이브릿지의 연속적인 움직임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 시간적인 행위이지만, 이 시간성에 대한 경험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머이브릿지의 기술은 움직임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순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정지된 필름 프레임의 개별적인 프레임은 어떠한 정지된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는 추상적인 모노크롬이지만, 이들은 함께 모여 시각적 움직임으로 가득 찬 색채 격자를 형성한다. 이처럼 샤리츠가 특별한 추상적 모노크롬 필름 프레임들을 사용하는 동안,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사진적 영화 스틸 이미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그레이엄과 다른 이들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예술 형식인 머이브릿지의 작업에 매료되었다면, 누군가는 이 시기 영화 스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비슷한 관심에서 야기되었다고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작가들과 이론가들은 영화 스틸 이미지에서 말해지지 않은 많은 것, 잠재적 사건들을 발견했다.

영화 스틸 이미지의 중요한 형식 중 하나는 전문 사진가에 의해 연출되어 찍히는 홍보 이미지다. 이와 반대로, 프레임 확대(enlargement)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의 장면으로부터 이미지를 가져온다. 이 프레임 확대가 바로 롤랑바르트가 그의 1970년 에세이 제 3의 의미에서 칭송한 것이다.35 여기서 바르트는 스틸 이미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the filmic)”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선언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본질적으로 영화적인 것(filmic)은 움직임 안에 있지 않으며 관습적이고 코드화 된 “명백한 의미”와 구별되는 “무딘” 의미(sens obtus), 둔한 의미에 위치한다는 것이다.36 바르트의 후기 저작인 카메라 루시다』에 다시 등장하는 푼크툼과 마찬가지로 이 ‘무딘 의미’는 이미지의 기능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잉여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도드라지는 손짓, 기묘한 미소, 명백한 가짜 수염과 같은 몇몇의 세부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디테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스틸 이미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스튜디오에서 연출된 촬영이 아닌 프레임 확대로, 전자가 작은 결함들이나 우연적 사건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면 후자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지님으로써 매우 암시적인 것이 된다.

바르트는 시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스틸 이미지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자신이 “영화적인 문화”를 결여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한다.37 하지만 움직이는 이미지를 정지된 장면으로 축소시키려 하기보다, 바르트는 프레임 확대가 영화를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읽게 하고 또한 영화를 분해, 대체하며, 영화의 “논리적-시간-순서”인 선형적 내러티브를 무화시켜 다른 이미지의 흐름, 즉 “반-내러티브”를 허용함으로써 주어진 순서대로 영화를 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38 사진에 관한 바르트의 글을 꾸준히 인용하는 크리스티앙 메츠는 “상당히 큰 투사력”을 지닌 “내레이션과 허구의 예술”로서의 영화와 단지 시간의 정지된 한 시점만을 보여 줄 뿐인 사진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강조한다.39 영화적(filmic) 이미지는 내러티브와 투사력을 통해 풍부한 외화면(hors-champ)을 지닌다. “영화의 화면 밖 공간은 ‘상당히’라 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étoffé)’. 반면 사진의 화면 밖 공간은 ‘미묘하다’. 영화는 프레임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고 카메라는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러한 복수성과 더불어 배우의 움직임 때문에 주어진 순간의 화면 밖 인물, 혹은 사물은 내가 일부러 과장해 말하는 ’회전문(turnstile)‘ 원칙에 따라 바로 그다음 순간에 프레임 안에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40 메츠는 또한 사진에서 “화면 밖 공간의 감각을 수반하는 유일한 부분은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이며, 이는 “작은 트라우마의 갑작스럽고 강렬한 감정의 지점이다. 그것은 사소한 디테일일 것이다.”41

한편 카메라 루시다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제 3의 의미에 대한 내용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제 3의 의미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유명한 개념쌍인 스투디움과 푼크툼보다 더 흥미로운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카메라 루시다에서 ‘일반화된’ 의미의 스투디움과 정착되지 않은 의미인 푼크툼 사이의 구별은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의 내적인 것이다. 반면 제3의 의미에서 사진은 영화에 잠입하고 그것을 변형시킨다. 왜냐하면 영화의 프레임은 우리로 하여금 내러티브를 다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의 시각적 무의식, 즉 그것의 푼크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화의 외화면은 그러므로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 매개물에 의해 진정으로 펼쳐진다.

바르트가 그의 글을 쓸 때 즈음, 몇몇의 작가들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스틸 이미지를 사용하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라멜라의 영화 각본(의미의 조작)(1972)은 하나의 영상 프로젝션과 세 개의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영상은 작업이 상영되던 갤러리 곳곳에서 갤러리 직원이 주역이 되어 촬영되었고 각각의 슬라이드 프로젝션은 그 영상에서 추출한 스틸 이미지를 보여 주었으나, 다른 순서로 구성되거나 혹은 생략된 상태였다. 가장 바르트적인 방식으로, 영화 각본은 선형적 시간, 행위/이미지의 관습들, 심지어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의 급진적인 시간-이미지들로부터 이미지를 해방함으로써 스틸 이미지와 그것의 새로운 질서를 찬양했다. 이후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회화와 오브제를 향한 새로운 관심이 일시적으로 네오아방가르드 영화적 실천의 많은 양상들을 망각하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영화 스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1977년 더글라스 크림프의 그림들(Pictures) 전시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지속된다. 스틸 이미지의 영화적 특성에 대한 이 관심은 이미 역사가 되어 버린 고다르의 영화 세계에 경의를 표하거나 그것을 검토하는, 정확히 그 방식이 아닌가? 결국 스틸 이미지는 영화적인 것의 저장소이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영화의 다음 생이다.42

영화 스틸 이미지는 크림프가 쓴 두 버전의 그림들(Pictures)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글은 원래 동명의 단체전(1977) 도록에 처음 실렸지만 1979년 옥토버(October)지에 대폭 수정되어 실린다. 두 번째 버전의 글에는 로버트 롱고가 영화에서 가져 온 스틸 이미지를 사용한 것에 대한 발언에 더해 신디 셔먼의 무제 연작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바르트의 제3의 의미를 인용하며, 크림프는 “이와 같은 아주 특별한 그림에 내재한 정신적 충격은, 일반적인 영화의 상영의 시간과 비교해 정지 화면이 (문법적인) 통사적 연속체 속에서 괴리를 발생시키는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내러티브 시간의 포기 선언은 ‘읽기’를 간곡히 요청하는데, 이 읽기는 그림 안에 머물러야 하지만 파편일 뿐인 시간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43 크림프는 롱고의 작업이 이 “시간성의 혼란” 안에 위치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스틸 사진의 필름 프로젝션으로 이루어져 실상은 포토몽타주인 사운드 디스턴스 오브 굿 맨(Sound Distance of a Good Man)(1978)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 논의한다.44 이 이미지는 돌로 만든 사자 조각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앞에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미국인 병사(1970)에서 총에 맞는 주인공의 모습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파스빈더의 스틸 이미지는 롱고의 작업에 그대로 반영된다. 미국인 병사사운드 디슨턴스 오브 굿 맨은 롱고의 초기 부조 작업을 통해 매개되는데, 이 부조는 앞서 말한 영화의 스틸 이미지를 참조하여 만들었다. 그 이미지는 파스빈더의 흑백 누아르의 마지막 부분, 즉 주인공이 슬로모션으로 죽는 장면에서 가져온 것이다.

1977년에 쓴 그림들에는 정지화면(freeze frame)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서 정지화면은 실제 영화에 침투하는 스틸 이미지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이야기된다.45 비디오 기술은 정지화면과 슬로우 모션을 더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었는데, 인생(1980)에서 고다르는 비디오의 정지화면과 극도의 슬로우 모션을 영화에서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그보다 10여 년 전 미국인 병사는 좀 더 제한적인 방식으로 슬로우 모션을 사용했지만 쓰러지는 몸의 곡선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형상을 만들었다. 이 모습은 슬로우 모션에서 정지화면으로, 스틸 이미지로의 이동을 비유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 장면은 다양한 속도를 획득하여 스틸 이미지와 무빙 이미지 사이를 손쉽게 이동하는 전에 없이 유연한 이미지의 시대를 예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벨바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서는 연출된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홍보 스틸 이미지가 영화의 실제 이미지와 완전히 구분되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에는 점점 더 바르트가 분석한 프레임 확대를 모방했다. 즉 프레임 확대와 연출된 홍보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극도로 좁혀졌다.46 실제로 스탠리 큐브릭은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홍보 목적으로 프레임 확대를 사용하기 시작했었다.47

홍보 스틸 이미지가 더 일반적인 형식이 되기 시작하자, 그 이미지와 영화 사이에서 새로운 차이가 나타났다. 롤러는 1983년 뉴욕에서 상영될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의 포스터를 위해 경멸의 홍보 이미지를 사용했지만, 그 스틸 이미지는 브리지트 바르도가 주겐 프로크노에게 키스하던 영화의 실제 장면과 유사하지 않았다. 고다르의 연출 장면은 사진보다 더 거리가 멀었고, 관습적이었다. 이와 반대로, 롱고는 앤드류 사리스가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에 쓴 기사에서 파스빈더 영화의 스틸 이미지를 발견하고 사용했는데, 영화의 장면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이 이미지는 아마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 찍힌 것으로, 촬영 카메라 아주 가까이에 위치한 사진가가 찍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48 그러나 롱고는 파스빈더의 스틸사진을 재연출하고 편집함으로써 홍보 스틸 이미지의 ‘자연스러워짐’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이 방법은 크림프를 바르트주의적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그토록 정교한 이미지의 조작은 진정으로 그것을 변형시키지 않는다. 단지 물신화한다. 그림은 욕망의 사물이고, 그 욕망은 부재한 것으로 알려진 의미를 향한다.”49

유사한 물신화 과정은 바버라 블룸의 흑백사진 연작 25개의 가능한 영화 장면(25 Possible Film Scenes)(1970~1979)50에서도 나타난다. 이 연작에서의 몇몇 이미지는 그의 ‘가짜 영화 예고편’인 다이아몬드 길(The Diamond Lane)(1981)에서 가져왔다. 즉 25개의 가능한 영화 장면에서 블룸은 그가 만든 영화의 스틸 사진에 유럽과 미국 영화들, 특히 고다르의 작업들에서 발췌한 스틸 이미지를 합쳤는데, 이 중 몇몇은 블룸이 직접 영화관에 가서 찍거나 출판물을 재촬영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연작의 사진 중 하나는 고다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대사기꾼(Le Grand Escroc)(1963)에서 진 세버그가 허먼 멜빌의 사기꾼 프랑스 번역본을 읽는 장면을 가져와 고다르에 관한 잡지 기사의 일부와 함께 보여 준다. 이 작업에서 홍보용 사진과 사진으로 재촬영된 영화 장면은 원본 영화의 서사 바깥 영역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가능한 영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1978년 다이아몬드 길을 만들기 위해 제출했던 지원금 신청서에 블룸은 “여러 버전의 영화 내러티브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썼다. 그리고 매우 바르트적인 이 목표는 25개의 가능한 영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51 그러나 블룸은 그의 작업에 모델이 축 늘어진 포즈를 취한 패션 광고를 포함시켰고 이는 그 안에서 다른 경향성을 강화시켰다. 바로 누벨바그의 시각적 비유를 트렌디한 소외의 광경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옥토버(October)가 지지하는 ‘하드코어’ 회화 작가들보다 데이비드 살이나 에릭 휘슬과 더 친하게 지냈던 블룸의 작업은 1970년대 담론 상황을 특징지은 영화에 대한 두 개의 다른 독해의 교착상태를 만든다. 즉 해방적 잠재성을 지닌 것으로서의 영화와 자본주의 시각경제에 각인된 영화를 맞붙이는 것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주체, 특히 여성을 소비자의 시선에 제공되는 페티시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신디 셔면의 무제 스틸 이미지 연작과 미묘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르며, 크림프는 이를 그의 옥토버 버전 에세이에서 다룬다.52 셔먼 작업의 몇몇 중요한 지점은 묘사된 여인의 내적 상태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은 강조를 하면서도 ‘표면으로서의 여성’이라는 페티시적 연출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셔먼 작업의 여자 주인공들의 총체는 수심에 잠기고, 자기 성찰적 사색, 의심, 후회, 그리고 두려움의 상태인 갤러리와 맞닿는다. 이는 한 여자가 어두운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무제 영화 스틸 #56(Untitled Fim Still #56)(1980)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점에서, 조금은 덜 히치콕적인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들뢰즈가 누벨바그 시대의 고전적인 행위-이미지가 해체된 것을 의미화한 것으로 보는 ‘방랑’과 ‘마비’를 상기시킨다. 셔먼은 그리하여 바르트적 프레임 확장이 상정하는 열린 결말과 비유적인 등가물을 공들여 만들어 냈다. 물론 프레임 확장이 암시하는 시간성과 잠재적 내러티브에 대해서도 말이다. 셔먼의 작업은 코드화 됨과 열려 있음, 명백한 것과 무딘 것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연출한다.

셔먼의 결정적인 작업이 만들어지고 몇 년 뒤, 영화 스틸 이미지는 귄터 푀어크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푀어크의 1980년대 전시는 (벽면)회화와 완전히 영화적인 큰 사이즈의 사진이 결합된 전형적인 설치(installations)였다. 사진은 추상적인 환경이자 전시 공간 안에 삽입된 영화 스틸 이미지로 기능하였다. 푀어크는 계속해서 카프리의 빌라 말라파르테(Villa Malaparte)의 옥상 계단 사진을 찍어 왔는데, 이곳은 고다르의 영화 경멸에서 프리츠 랑의 영화 촬영팀이 그들 각본대로의 오디세이(Odyssey)―고다르가 운동-이미지의 화석화를 은유하는 조각상을 통해 재현했던―를 찍고자 했던 그 장소이다. 푀어크의 사진들 중 가장 영화적인 사진은 (뒷모습만 보이는)한 여자가 계단을 뛰어올라 가는 장면인데, 비슷한 시점(vantage point)에서 촬영된 관련된 영화의 장면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나아가 그의 가장 건축적인 사진들에는 거주민이 등장하지 않는다. 흑백이든 채도가 낮은 컬러이든 그의 사진은 모두 본인의 소재(건축물) 선택에 의해 이념적, 정치적 모호함이 더욱 강조된 모더니즘 건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사진은 극도로 세밀한 구르스키(Andreas Gursky) 스타일의 풍경 사진은 아니지만, 거칠고 가끔은 약간 흐릿한 모더니즘의 기억-이미지였다. 때때로 사진이 찍힌 앵글은 주관적인 관점과 찰나의 흘끗 봄을 암시하는데, 이는 관객을 영화적인 것의 목격자로 만든다.

푀어크의 사진들은 이미지들 사이를 거니는 관객들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미지들이 놓인 공간은 벽면 색에 의해 변형되었고 또 한편으로 유사-영화적 사진의 공간을 향해 열려있다. 게다가 사진을 덮은 유리 커버는 그 장소를 반사시켜 설치 안에 관객이 있다는 암시를 강조하고, 대형 오브제를 유령적 이중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이 효과는 사진, 벽면 회화에 더해 실제 거울을 함께 사용한 것에서 더 두드러졌다.531990년대 초부터 푀어크의 작업은 지금은 주로 분리되어 보여지는 다른 예술의 영역들, 예를 들어 회화, 조각, 그리고 사진을 병치시키는 좀 더 보수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1980년대의 푀어크의 작업이 보여주고 행한 것은 (고다르적 방식으로) 영화를 역사적 기억으로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시공간에 설치로 보여 주고 관객의 역할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자신이 스틸 이미지를 선호하는 이면에 자리한 그의 영화적 문화에 대한 부족함을 걱정했다면, 푀어크의 설치는 영화적인 것의 문화 그 자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영화가 정지화면이 되고 해체되거나 재조립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전시 공간에 의해서 재맥락화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푀어크는 그가 1986년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선보인 것과 같은 설치작업들을 본인 스스로 1990년대에 등장하는 필름/비디오 설치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자취로 인식하였다. 영화의 정지된 기억들은 포스트-시네마로 넘어가는 구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갤러리 공간이라는 메타-미디엄은 영화나 극장과는 다른 종류의 경험과 시간성을 요구하고 또 생산해 낸다고 주장해 왔다. 비디오 설치가 일반적인 형식이 되기 이전에, 1989년 세르주 다네는 텔레비전 시대의 근본적으로 변화한 미디어의 사용에 대해 말했다. “전환이 일어났다. 사태를 간소하게 축약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점점 더 부동적이게 된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매우 유동적이게 된다.”54 좀 더 최근에, 보리스 그로이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문화는 우리에게 시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통제방식을 제공한다. 하나는 미술관에서 이미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관에서 관객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모델은 영상이 미술관으로 들어왔을 때 무너졌다.”55 필름/비디오 작업의 일반적인 전시 방식은 영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도록 설정해 놓는 것인데, 관객은 끊임없이 언제 이동할지, 계속 볼지 말지를 결정하며 영상이 프로젝션되는 전시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다. “미술관의 맥락 속에서 영상 이미지가 예술적으로 적응한 것, 바로 그것이 이미지를 어떤 불분명한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영화-이론적 담론으로 연결시켰다.”라고 주장하며, 그로이스는 영화적 예술이 비디오와 DVD 기술에 영향을 받은 좀 더 일반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DVD의 오디오 코멘터리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잠재적으로 끊임없는 담론의 연속을 필름 이미지에 덧붙임으로써 이미지를 열어젖힌다.56

그로이스는 “현대 시기 삶의 진실은 더 이상 철학적 탐구에서가 아니라 실제 삶의 역동성, 정치적 실천, 몸, 그리고 성적 욕망, 스포츠,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류 영화는 “구시대엔 삶의 가장 고귀한 모습을 표상했을 수동적이고 낡아빠진 사색적 태도를 구현하지만, 대중의 마음속에서 그런 태도는 이미 환상의 영역에서나 소비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이야기로의 퇴보로 보일 뿐이다.” 라고 과감히 주장한다.57 만약 누군가 이 말을 맑스적 용어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는 드보르의 영화에 대한 비판에 거의 근접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갤러리에서 관객의 ‘동원’이 ‘현대화’를 뜻한다면, 노동이 점점 더 ‘창의적’이게 되고, 추상적 노동력(노동자로서의 관객을 포함하여)의 판매는 더 이상 충분한 것이 아니며,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그들의 개성을 투자해야 하고 근무시간 이후에도 기술을 계속해서 계발해야 하는 포스트-포디즘 시대 주체의 ‘동원’에 관객을 예속시키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이것이 심지어 쉴 수 있는 인공적인 공간조차 파괴하는 전에 없는 시간의 식민화로 보일 지라도, 이 식민화 역시 진정한 시간 해방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탈리아 (포스트)노동자주의(operaismo)의 핵심적인 교리이다. 적어도 그들의 오래된 형식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여전히 얼마나 타당한 연관성을 지니는가? 갤러리에 자리 잡은 영화의 사후적 삶은 향수 이상이 될 수 있는가?―하지만 가슴 아픈 상실의 향수 그 자체는 이미 고다르적 형식과 같은 과격함에 있다.

해방된 지속

고다르가 영화의 영광스러운 지난날―실현되지 않은 잠재성, 악몽과 같은 20세기 역사를 규탄하고 구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과업의 실패, 그리고 영화의 성취까지―을 애도할 동안 시각 예술가들은 ‘원시적’ 영화라고 불릴 만한 고전적 영화 이전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벤야민의 낡은 것들에 대한 개념과 그것의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잠재성을 환기시키면서,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이어 붙여진 균질하지 않은 노출과 깜빡거리는 걸음걸이와 같은 초기 영화의 원시적 모습”을 모방한 마르셀 브로타스의 작업을 분석하는데, 크라우스에 따르면 그의 작업은 “태초의 영화에 안겨져 있던 ‘행복의 약속(promesse de bonheur)’으로의 회귀”이다.58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수많은 실천에서 나타났던 이 시대착오적인 충동은 지난 15년에서 20년 동안 다시 나타났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영화적 예술을 등장시켰던 작업들 중 하나인 스탠 더글라스(Stan Douglas)의 서곡(Overture)(1986)은 초기 영화에서 가져온 ‘팬텀 라이드(phantom ride)’ 푸티지를 반복해서 상영하는 것이었다. 이 푸티지는 로키산맥에서 운행되던 기차의 앞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기차가 무한히 터널에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입부를 읽는 화면에 삽입된 목소리는 깨어 있음과 잠이 든 것 사이의 음울한 상태에 대해 숙고한다. 영상과 사운드의 길이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성이 빛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형상이 발생하는 장소라면, 더글라스의 작업은 영화가 신화가 들끓었던 태초부터 바로 그 이성의 인공적인 반-수면상태를 만들어 내는 한계(限界)적 경험임을 암시한다.

초기 영화의 ‘행복의 약속’은 이미 1920년대에 과거로 스러져 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영화의 관객이기도 했던 작가들은 초기 영화에 내재하는 약속이라고 간주하던 것을 되찾기 위해 시도했다. 프랑스 다다와 초기 초현실주의의 활동 중 중요하지만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영화관 방문이었는데, 그들에게 영화관은 예상치 못한 비현실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낭트에서 자크 바셰(Jacques Vaché)와 나누었던 우정에 대해서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회상했다. “자크 바셰가 어느 순간이든, 뭐가 상영되든 영화관에 들르는 것을 그 무엇보다 즐겼고 또 조금이라도 지겨울(혹은 뭔가 넘칠) 기미가 보이면 곧장 다른 영화관으로 들어가던 것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었다.[…] 그건 가장 즐거운(매혹적인) 일이었다. 우린 영화의 이름조차 모르고 자리를 떠나던 때가 허다했다.”59

이는 일상적이던 한 풍경이 급진적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영화 비평가였던 질베르트 셀데스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영화가 거의 반쯤 끝났을 때 영화관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미스터리물에서 막 악당이 체포되려 할 때 들어온다. 그들은 앉아서 같은 장면이 다시 나오길 기다리고, 그들이 들어온 그 시점의 장면이 지나면 자리를 떠난다.”라고 기록했다.60 이런 일반적인 행동은 실용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브르통과 바셰처럼 이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영화상영 와중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행동은 매혹적인 이미지, 발작적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전쟁 후 브르통이 조직한 초창기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은 브르통과 바셰와 같은 영화보기 방식을 대체로 따랐을 것이다. 이후에 만 레이는 그가 봐 왔던 영화 중 가장 최악은 경이로운 10~15분을 지녔으며, 최고는 단지 10분~15분의 ‘타당한’ 혹은 그런대로 괜찮은 시간을 보여 줄 뿐이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앞선 초현실주의자들의 방식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61

이처럼 짧은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단편 혹은 중편 길이의 영화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합쳐져 상영되던 1910년대 영화 상영 방식의 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의 방식이 정착되어 갈 때 즈음, 그것은 더 긴 길이의 장편 영화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서사 영화의 고전적 수사가 등장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하나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널뛰듯 이동했다. 그럼으로써 로트레아몽 백작(Comte de Lautréamont)의 저 유명한 시구인 우산과 재봉틀의 조우처럼 우연한 병치를 만들어 내는 생생한 몽타주의 효과를 내는 것을 통해 (의도되지 않은)난해한 아름다움의 순간을 탈문맥화시키고자 했고, 속박들로부터 영화적 시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스 리히터는 파리 다다 이외에 초현실주의자들의 탄생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정오 이전의 유령들(Vormittagsspuk)(1928)은 만 레이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영화와 함께 파리에서 전시되었다. 정오 이전의 유령들―영어로는 ‘아침 식사 이전의 유령들(Ghosts before Breakfast)’로 알려져 있다. 리히터는 ‘정오 이전의 유령들(Ghosts before Noon)’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했는데, 이 번역이 더 정확하다.―은 그 당시 르네 클레르의 후기 다다이즘 영화 막간(1924)을 떠올리게 했다. 전후 미국에서 인화된 리히터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나치는 이 영화의 사운드가 포함된 버전을 ‘퇴폐미술’이라는 이유로 파괴했다. 이는 심지어 사물도 통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62 논의가 되고 있는 이 통제는 주로 시간인데, 들뢰즈가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물의 저항인 것이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정오를 향해 돌아가는 시계를 정면에서 마주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낚싯줄에 매달려) 날아다니는 중절모의 이미지, 한 남자가 크라바트를 매려 하지만 크라바트는 저절로 풀리고 그다음 춤추듯 저 혼자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이미지, 리볼버 권총과 표적의 이미지, 표적 안에 한 남자가 있고 머리가 떨어져 나와 빙글빙글 도는 이미지가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네 남자가 점심식사를 위해 한 테이블에 모여 앉는데, 식탁은 마술과 같은 영화적 기법에 의해 차려지고 네 남자의 머리 위에 중절모가 날아와 앉는다. 정오 이전 유령의 출몰은 이렇게 끝이 난다. 영화 초반 중절모가 계속해서 이상한 비행을 할 동안, 소방호스는 저절로 풀려나가 뒤뜰의 잔디밭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모자 하나를 향해 물을 쏘고 그것을 젖게 만든다. 이 장면은 한 소년이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정원사에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담은 프랑스 슬랩스틱 영화의 시초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물 뿌리는 정원사(L’Arroseur Arrosé, the Sprinkler Sprinkled)를 떠올리게 한다. 서사 영화의 관습이 점점 더 만연해질 때―그리고 유성영화가 이를 악화시켰다.―리히터는 주의집중을 얻기 위해 여러 매혹들이 경쟁하던 매체의 초창기를 상기시키는 반-영화를 제시했다.

톰 거닝은 초창기의 ‘매혹적인 것들의 영화’를 그리피스 덕분에 주류가 된 1910년대의 ‘서사 통합의 영화’에 대비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63 이 주장은 이후 문제화되고 검토되었기는 하지만, 아방가르드에게 있어 ‘시간의 해방’은 어느 정도 명백히 영화를 ‘서사 통합’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고, ‘순수’와 매혹의 몽상적인 스펙터클로의 전환이었다. 예를 들어 조지프 코넬에게 ‘유성 영화’는 특히 모욕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지와 상상에 대해 내러티브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 로즈 호바트(1936)에서 코넬은 지금은 잊힌 여배우 로즈 호바트를 캐스팅한 할리우드 영화 보르네오의 동쪽(1931)의 장면들을 사용했다. 유성영화를 무성영화로 바꾸면서, 코넬은 대부분의 대화 장면을 배제하였다. 대신 클로즈업 된 호바트의 얼굴에 집중하였으며 보르네오의 동쪽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가져 온 풍경 장면을 함께 배치했다. 결과물은 음악 반주와 함께 상영되었고 또한 파란 유리를 거쳐 투사되어 비현실적이고 기묘한 향수효과를 만들어 냈다.64 또한 코넬은 로즈 호바트를 느린 속도로 재생시켰는데, 일반적으로 유성영화가 1초에 24개의 프레임(frame per second)이 재생되는 것과 달리 1초에 16~18프레임이 사용되었고, 이는 무성영화의 재생 속도였다. 16fps의 속도로 로즈 호바트를 상영함으로써 코넬은 영화의 비현실적 측면을 강화시켰다.65 오래전 유행했던 화려함의 기이한 모습을 탐구하면서, 코넬은 또한 새로운 것을 인위적으로 과거의 것으로 바꾸어 놓는 실험을 했다. 즉 로즈 호바트에서의 필름 매체 사용은 격렬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의 신념에 따라 코넬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시간은 유한하나 영원은 무한하다. […] 삶은 신(divine Mind). 삶에 제한은 없다.”66 코넬은 그의 작업인 박스 조각과 영화 모두에서, 현현(ephiphany), 혹은 ‘영원의 날(eterniday)’의 감각을 만들어 내는 영원의 순간적인 시선을 보여 준다.67 코넬의 영화에서 할리우드 유성영화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로즈 호바트는 이후에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예를 들어 앤디 워홀은 1960년대의 영화들을 무성영화의 속도로 느리게 재생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서서히 진행되는 ‘비현실 효과’를 만들어 낸다.68 최근의 많은 영화와 비디오 아트 역시 코넬이 유성영화에 반대했던 것처럼 액션으로 가득 찬 블록버스터 영화에 반대하여 느림과 사색을 택한다. 워홀이 노먼 베이츠가 피해망상적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사이코의 마지막 순간을 택한 것은 화면에서 움직임을 거의 최소한으로 없애기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장면의 정지된 카메라는 ‘원시적’ 영화를 호출하는데, 들뢰즈에 따르면 고정된 프레임에 움직임을 담았기 때문에 ‘원시적’ 영화는 영화의 고유함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다고 말한다.69

코넬처럼, 워홀은 그의 초창기 영화들을 통해 시간 해방의 서사가 자기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임을 암시했다. 즉 영화의 끝이 영화의 처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초기 영화의 “고정된 샷의 재발견”인 시간-이미지에 대해서, “그리하여 운동은 제로점을 지향할 수도 있고, 또 인물 혹은 숏도 그 자체로 고정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70 그러나 워홀의 원시주의는 들뢰즈가 시간의 해방자로 칭송한 영화감독들의 영화보다 좀 더 극단적이다. 영원함이 되고자 하는 시간-이미지를 만들면서, 워홀은 그 만의 팝(pop)적인 ‘영원한 날(eterniday)’을 고안했다.71 코넬과 워홀 모두 들뢰즈주의자들의 서사를 복잡하게 만들고, 이에 의해 들뢰즈의 순수한 지속과 공간화된 시간, 역사와 되기, ‘크로노스(Chronos)’와 ‘이온(Aeon)’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운동-이미지를 반대했다.72 공간화 된 시간, 일상적인 시간에 대한 혐오는 들뢰즈가 고전적 존재론에서 비판한 그 시간성에 대한 부인을 숨기는 가면이 될 수 없나? 지속은 ‘영원’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없나? 앞선 두 작가 모두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간 죽이기를 시도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시에 그들의 모호한 이미지는 규범적인 장편 극영화의 시간경제로부터 일탈하기 때문에 시간의 해방으로써 여전히 기능한다. 1963년 만들어진 키스(Bela Lugosi)의 큰 버전의 회화가 극미한 움직임의 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한 개의 영화 스틸 이미지를 번지게 하는 방식으로 반복한다면, 같은 시기 워홀의 영화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시간을 가늠케 만드는 지시들을 서서히 사라지게 하는 방식으로 (초당 프레임의 속도나 총 러닝타임 모두에 해당되는 의미로) 시간을 늘인다.

디드리히 디더리센은 토니 콘래드의 황색 영화(Yellow Movie)(1973)에 대해, 이와 같은 작업들은 “측정할 수 있는 가능성 너머의 것: 지속”을 암시하며, “측정되지 않는 지속은 원칙적으로 수용자와 그들의 주체성이 지배하는 영토/왕국이다.”라고 말했다. 73콘래드의 황색 영화는 유화액으로 뒤덮인 희끄무레한 흰색 위에 검은색 테두리로 사각형을 그린 그림으로, 검은 테두리 안의 흰색이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황색으로 변하는 유사-회화 연작이다. 워홀보다는 좀 더 명확하게도 콘래드는 인간이 지각하기에는 너무 짧거나 너무 긴 것 사이의 간격에 관심이 있었다. 황색 영화 연작에서 점진적인 변화는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 볼 수 없다.(기껏해야 상상을 자극해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플리커와 콘래드가 관여했던 드론 음악(drone music)에서처럼, 계량된 시간(time-as-measure)은 일반적으로 영화제작에서 시간을 유지하기 위한 관습적인 것들을 관객에게서 빼앗을 때 약화된다.

좀 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이는 명백히 시간공포에 의해 만들어진 로즈 호바트엠파이어에서 벌어진 상황과 같다. 선형적 시간과 수치화 된 시간의 파괴는 지속 혹은 영원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을 향해 열린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원과 지속은 이제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일찍이 1958년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 개설되었던 존 케이지의 전설적인 작곡 수업에서는 ‘측정되지 않는 지속’에 관한 초기 실험이 있었다. 조지 브레히트는 각각의 퍼포머에게 불특정한 두 가지 행동을 시킨 뒤, 그 일이 모두 완료되면 끝나는 작품을 썼다. 그때 당시의 학생이던 딕 히긴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케이지는 우리가 이 작업을 어둠 속에서 해 보기를 제안했다. 작업이 끝나는 것과 상관없이 시각적으로 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보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해 보았고, 결과는 무척 매혹적이었다. 의도했던 원래 목적에서도 그렇지만 작업이 끝이 났는지 아닌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등등을 우리가 궁금해 할 때 물결처럼 일어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강렬함 때문이었다. 작업이 끝난 직후 우리는 얼마동안 암흑에 있었던 것 같았는지 추측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대답은 4분에서 25분까지 다양했고 실제로 지속되었던 건 9분이었다.”74 어떻게 보면,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예상했던 시간도 (어쩌면 9분이라고 말해진 것보다 더) ‘실제적인 지속’이었을 것이다. 브랜든 W. 조지프는 케이지의 원숙한 미학 이론과 실천에 담긴 베르그송적 요소들에 대해 논의했으며, 빛을 제거한 브레히트 작품의 퍼포먼스는 프로젝터의 빛이 훼방 놓던 어둠 속의 다양하고 유연한 지속들에 대한 정교한 증명처럼 보인다고 말했다.75 케이지 수업의 다른 참여자였던 알 한센은 이 수업이 그로 하여금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이 언급했던 것처럼, 필름 프레임 안에서는 다양한 예술 형식들이 조우하지 않지만 관객의 안구와 마음속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76 영사된 이미지는 단지 진실되고 내적인 시간-이미지를 위한 계기―일련의 암시―일 뿐이다.

만약 한센이 말한 것처럼 몇몇의 작가들에 의해 행해진 지각적 탐구가 사진과 영화적인 것을 넘어서는 실천이었다면, 19세기에 발명된 시각적 장치들과 요하네스 푸르키에가 행했던 망막에 남는 잔상에 대한 연구 또한 되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견 포스트-시네마의 영역으로 보이는 것에서 매혹적인 약속, 즉 초기 영화가 다시 한번 귀환한다. 브라이언 지신의 드림머신(1961)은 기다란 구멍들이 뚫려 있는 원통형의 회전 장치인데, 원통 안에서부터 나오는 빛은 눈을 감은 관객의 망막 위에 규칙적인 패턴의 진동을 남긴다. 이 장치는 지신이 버스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햇살을 등진 나무가 점멸하는 듯 뵈던 경험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1920년대, 그러니까 그가 아직 어린 아이였던 시절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영화의 화학적 구성요소는 “영화에 마법 같은 빛을 주었고, 각각의 이미지의 프레임에 의해 스트로보스코프처럼 깜빡거렸다.”77 이후 시대에 나오는 활동요지경(zoetrope)처럼 턴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드림머신을 경유하면 영화적인 것과 원시적인 영화, 그리고 포스트 시네마는 포개어진다. 왜냐하면 스토로보스코프의 빛은 망막과 뇌에(추측컨대 뇌의 알파파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스틸 이미지 사용의 사례들처럼, 본질적으로 필름적인 것(filmic)이라고 생각되던 대부분의 것들을 무효화시키는 영화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업은 시간의 측정이 붕괴하고 있는 체제와 관련을 맺게 된다. 포스트-포디즘의 ‘비물질 노동’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고전적인 여덟 시간의 일상적 노동이 시들해져 가게 되면서, 점점 더 스스로를 모든 것이 노동이 되는 사회 안에서 발견하게 되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의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생산력으로서의 노동에 집중(누군가는 물신화라고 할지도 모르는)했다.78 1980년대에 맑스를 다시 읽으며, 네그리는 자본주의가 시간을 규제하고 추상적인 수치로 축소시켰지만, 전체 사회, 모든 삶이 극단적으로 일이 되는 시점에서 이것은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구조가 될 정도로 시간 그 자체는 물질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생산의 관계망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노동의 상품, 즉 시간적 존재와 같은 것이다. […] 자본주의 시스템의 제도적인 발전이 삶 전체를 배열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간은 삶의 단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79

‘공간화’된 시계장치의 시간은 이리하여 생산적인 지속이 된다. 그러나, 네그리가 해방된 시간을 “생산적 합리성, 정확히 말해 이 합리성을 분석하고 삶의 시간으로부터 이것을 왜곡시키는 명령으로부터 분리된 바로 그러한 생산적 합리성”이라고 정의 내릴 때, 혹자는 수치로의 종속으로부터 생산적 시간이 해방되는 것은 완전할 수도, 비가역적이지도 않다고 말할 것이다.80 또한 수치로서의 시간이 삶의 시간에 의해 대체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이 둘은 좀 더 복잡한 변증법을 만들어 낸다. ‘존재론적’으로 현재의 시간은 거의 완전하게 측정의 형식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지만 이 측정의 형식은 그 모습을 바꾸어 보다 점점 유연해지고, 위상학적 변이를 일으킬 개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시간성이 어떠한 해방적 가능성을 지녔다 해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더 극단적인 식민화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변증법, 부정, 그리고 내재성의 철학에 맞서 싸운 들뢰즈와 가타리에 동참했던 맑시스트로서, 네그리는 계량된 시간을 되기(becoming)에의 침범, 말하자면 집단적 창조에의 침범이라고 경멸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내재성(immanence)을 실재적이라기보단 이상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부정(negation)의 역사적 실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유연한 지속을 지닌 포스트-포디즘은 부정 그 자신의 내재-되기(becoming-immanent of the negative itself)로, 우리 존재의 구멍으로 스며드는 유연한 지속의 침투로 규정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논의 하에서, 세리스 윈 에반스가 다시 만든 지신의 드림머신이 미술 기관들에서 순회하게 되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81 1960년대의 중요한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드림머신은 한참 뒤에나 네그리와 다른 이들에 의해서 그 영향이 이론화되었던 시간성의 변형에 참여했다. 드림머신에 의해 만들어진 지속은 또 다른 시간이 가능함을 강력하게 암시하지만, 이것은 원래 공간화 된 시간의 추상적이고, 환각으로 향하는 현실 도피적 부정이었다. 즉 점멸 효과의 영화적 특성은 부차적 특징이었던 반면 빛의 번쩍거림은 뇌파를 조작하는 주요한 장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드림머신은 포스트-포드주의적 주체성들을 만드는 프로그래밍 장치로서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을 위한 완벽한 기계처럼 보인다. 필름의 점멸은 시간을 변형하고, 우리 삶을 수치화하는 점점 더 유연해지는 리듬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리듬을 만드는 자율적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전시 공간에 드림머신이 자리 잡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신은 그 기계를 대량생산하고자 했었다.82 파인 홈의 모양이 단순화 된 1961년 버전은 그와 그의 동료 이안 좀머빌의 글과 함께 잡지 올림피아(Olympia)의 지면에 인쇄됐었는데,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이후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것들보다 더 적절한 결과물이었다. 즉 제도화될 수 없는 시간을 실험하기 위한 기계였다는 측면에서 말이다.83 그와 반대로 미술관은 그 스스로 일종의 포스트-포디즘적 꿈 기계로 변형되었는데, 그곳에서 관객은 그들의 시간 감각을 변형시키는 깜빡거리는 이미지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윈 에반스의 새로운 드림머신은 제 집을 잘 찾은 셈이었다.

원시주의자들은 잃어버린 ‘행복의 약속’으로 되돌아갔고, 이는 포스트-시네마 체제 등장에 일조했다. 더 ‘정적인’ 이미지로의 회귀는 새로운 시간적 경험을 열어젖히고 이 경험은 몇몇의 방식으로 그 경험과 시간의 사용을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은 또한 경계가 없는 노동에 의해 현재적 시간이 전례 없이 식민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 미술관은 노동과 여가가 의사-순환적으로 교체되던 공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토 슈타이얼은 미술관이 이제는 포스트-포디즘의 사회적 공장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슈타이얼에 따르면 사회적 공장은 “전통적인 경계를 벗어나 거의 모든 것으로 넘쳐흐른다. 지각, 감정, 그리고 주의집중뿐만 아니라 침실과 꿈에도 모두 똑같이 스며든다.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예술이 아니더라도 문화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감정을 생산하는 공장이다.”84 계속해서 말하길, 전시 공간은 “공장이며, 동시에 슈퍼마켓이다. 여성 청소부나 블로거 같은 이들이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도박장이자 예배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제에서는, 심지어 관객조차도 노동자가 된다.”85 물론 좀 더 오래된 산업, 그리고 전근대적 리듬은 쉬이 변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존속한다. ‘적기-공급(just-in-time)’ 생산의 등장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수치화 된 산업적 시간이 증가하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위한 유연한 지속으로 대체된다면, 이것은 재영토화되지 않고, 분절되고, 다수의 기한에 의해 수치화되는 새로운 시간성인가?86

당대에 만연한 사회적 공장의 특성은 영화적인 것의 요소들과 레퍼런스들을 재구조화함으로써 스탠 더글러스의 여러 작업들에서 가시화된다. 필름 설치 작업인 공포의 여정〉(2001)은 약 15분 길이의 영상으로 계속해서 반복 재생된다. 사운드트랙은 총 625개의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어 전체를 다 재생한다면 157시간이 소요된다. 멜빌의 사기꾼(The Confidence-Man), 오손 웰스의 공포의 여정(1942), 다니엘 만이 만든 동명의 1975년 리메이크 영화에서 가져온 장면들이 전형적으로 몽타주 된 더글러스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영화에는 화물선을 배경으로 두 주인공, 그레이엄과 뮐러가 등장한다. 이상하게 배열된 두 등장인물의 대화는 그들이 마치 일(business)이라는 것이 고갈되지 않고 반복되는 사기극임을 뜻하는 세계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소위 신경제(New Economy)라는 것의 지지자들은, 우리가 영속하는 현재에 살며 과거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미래에도 관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공포의 여정은 끝이 없는, 순환하는 여행이다. 그러나 이것의 구조를 점점 알아가게 됨에 따라, 관객은 적어도 직관적으로 미래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알아차린다.”87 작품이 반복되는 와중 관객이 어느 시점에 그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지에 따라 이 과정이 일어나는 시간의 길이는 들쭉날쭉했다. 관객의 경험은 인간인 한 전체에 모두 참여할 수 없는 보다 긴 지속 사이에 틈입된다. 이리하여 더글러스의 작품은 끝나지 않은 일로 남아 관객을 따라 문밖으로 나간다.

1990년대와 그 이후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영화적 예술은 미술관을 ‘느린 예술’의 천국으로 물신화 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제는 더 이상 제자리에 있지 않은 시간의 체제를 탐구하기 위해 영화의 오래된 방식들을 사용한다. 가장 최상의 경우에, 이와 같은 영화적 예술은 다른 형식들, 장소들, 그리고 생산의 시간 사이의 결합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리듬들 사이에서 변주를 만들면서 말이다. 1995년의 비디오 에세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서―바로 이 해에 최초로 2채널 프로젝션 설치작업 schnittstelle/section을 만들었다.―하룬 파로키는 영화(특히 할리우드)가 공장을 떠나 걸어가는 인물들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예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인물들은 공장에서 나와 복잡하고 나눠진 건물로부터 멀어졌고(이는 시각화하기 힘든 것이다.) 예측컨대 좀 더 영화적일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향했다.88 쾰른의 공영 방송국인 서부독일방송(WDR)과의 협업을 통해 만든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서, 파로키는 뤼미에르 형제의 신화적인 ‘최초의 영화’에서 영화의 등장을 알린 첫 장면의 다양한 ‘리메이크’들을 헐리우드와 이전 동구권을 포함한 유럽전역의 영화에서 수집했다.

미술 역시 공장과의 거리를 유지해 왔는데, 심지어(그리고 특히) 전시 공간이 산업적 장소로 전환될 때조차 그래 왔다. 하지만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미술은 역시 공장이다. 즉 미술은 그것이 상부구조(superstructure)인 것만큼, 토대(base)이기도 하다. 미술과 영화는 단지 경제적 토대를 ‘반영’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이렇게 지적한다. “영화가 상부구조(적 현상)인가? 대답은 어떨 때는 ‘그렇다’이고, 어떨 땐 ‘아니다’이다.”89 전시공간을 위해 만든 하룬 파로키의 110년 동안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2006)은 파로키와 그의 조사원들이 수집한 영화의 파편들이 일렬로 늘어놓은 모니터에 재생되는데, 관객은 직접 채널을 바꿈으로써 자신만의 몽타주를 만들 수 있다. 여기 무한히 반복 재생되는 노동자들은 절대로 떠나지 못하며, 관객 또한 ‘사회적 공장’, 즉 예술을 관람하는 것이 상부구조적 활동인 만큼 하부구조적인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인 만큼 이것은 생산적 노동인 것이다.

‘최초의 영화’에 대해 다시 검토한 또 다른 중요한 (초기의) 예는 앨런 세쿨라의 슬라이드 프로젝션 무제 슬라이드 연작(Untitled Slide Sequence)(1972)이다. 이 작업은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으로, 카메라에 다가오고 또 지나쳐 가는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물결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흑백 이미지들이다. 뤼미에르의 영화와는 다르게, 세쿨라의 작업은 고정된 프레임을 불안정한 시점으로 전환한다. 각각의 사진은 고용된 사람이 공장 앞 계단의 맨 위 층계에 올라가 아주 약간씩 다른 지점에서 찍었다. 세쿨라에게 초기 영화는 ‘행복의 약속’이라기보다는 근대 공업생산 형성과정의 한 순간이자 “분리되고 변형하기 쉬운 시간”의 체제였다. 그러나 최초의 영화에 나오는 생뚱맞고 큰 공장 출입문 장면을 사람들이 꽤나 이상해 보이는 카메라를 지나쳐 떠가는 것으로 보여 주는 연속적인 슬라이드로 변형함으로써 세쿨라는 산업적 시계장치의 시간을 변형한다. 삶에 대한 그 시간의 영향을 부인하지 않은 채 말이다,

무제 슬라이드 연작의 좀 더 발전된 최근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웬덜린 반 올덴보흐의 2009년작 탈환 이후, 점령(Après la reprise, la prise)을 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슬라이드가 프로젝션되는 방식인 이 작업에서, 하나의 슬라이드는 다른 슬라이드와 섞이고 희미해진다. 이러한 효과는 프로젝터 세 개를 겹쳐 놓아 사용한 결과이다.90 사용된 슬라이드는 대부분 실제로 작가 자신이 찍은 영상의 푸티지로, 영상과 함께 나오는 파편적인 대화들 또한 이 푸티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슬라이드는 지금은 폐쇄된 리바이스 청바지 공장에서 일을 했던 두 여인이 벨기에 메헬렌의 한 지역에 있는 기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강제적으로 영원히 공장을 떠나게 되면서, 그 여인들은 공장의 폐쇄 이후 잇따랐던 파업과 다른 사건들에 관한 연극을 하며 여행을 했다. 그 연극은 여인들을 그들의 산업적 과거에 대한 포스트-포디즘적 연기자로 변형시켰다. 한편 감독은 그들의 대사를 바꾸어 자신과 타인의 뒤섞임을 연기하게끔 했다. 급여는 아주 최소한이었고, 배우라는 새 직업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으로 삶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몇몇의 숏은 재봉질을 가르치는 곳으로 쓰였던 교실을 보여 주는데, 여인이 말하길 그곳의 장비는 리바이스 공장의 것과 아주 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교실은 곧 철거될 예정이다. 학생들이 더 이상 재봉질에 관심이 없으며 그들 자신만의 포스트-포디즘적 꿈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꿈은 리바이스 공장의 노동자였던 여인들의 일화가 보여 주듯, 환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슬라이드가 서로 오버랩 되고 사라지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탈환 이후, 점령은 질적으로 저하된 형식의 현대판 판타스마고리아, 여행영화를 상기시킨다. 이는 1990년대 이래로 대부분의 유럽에서 특히 유행한 것으로 이국적인 지역을 극도로 사실적이고, 강렬하고, 아주 잠깐 동안의 유쾌한 것으로 보여 준다.91 이와 같은 물신화, 탈맥락화된 이미지들의 연속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차단하고 언제나 날씨가 좋아 보이는 가짜 영원성 속에서 시간들을 지워 버린다. 반 올덴보흐는 이와 같은 형식 속에 시간적 긴장을 기입한다.(그의 사진들은 세쿨러의 것보다 덜 규칙적으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A가 어떻게 이미지 B에, 혹은 사운드트랙의 목소리와 연관되는지 불명확할 때, 관객-청중은 수상하다고 느끼게 되고 다소 짜증이 난다. 산업적인 연속적 질서는 신기하게 굽어진 시간으로 변형된다. 수치화 된 시간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을 만들어 내는 대신, 이 작업은 시간을 펴고 확장시킨다. 역사로부터 해방될 속박되지 않는 상태로의 즉각적인 도약과 즉각적인 영원을 제시하는 대신, 반 올덴보흐는 존재하는 시간의 모순들을 끌어안으며 시간의 해방을 추구한다.

상영 시간은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After the séance is before the séance)

에릭 데 브로인은 탈환 이후, 점령에 대한 분석에서 소위 자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요소를 강조한다. 바로 노동자들이 연기자가 되어 자신들의 예전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92 반 올덴보흐의 다른 작업들에는 이런 행위의 모호성에 기반한 연극이 있다. 여기서 행위자들은 때때로 1인칭으로 쓰인 역사에 관련된 글을 읽는가 하면, 또 다른 때에는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대사를 한다. 탈환 이후, 점령에 나오는 여성들은 한때 반복되는 업무를 수행하는 충실한 포드주의적 노동자였다. 포스트-포드주의적 프리랜서로서 그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더 이상 추상적인 노동 가치가 아니라 감정을 이입한 역할-수행으로써 평가받는다. 더욱이 그들이 연기하는 역할은 그들 자신에 기반하는 것이다. 즉 자아(self)와 역할(role)이 불가분하게 서로 얽힌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변화는 또한 포스트-시네마적인 ‘리얼리티’ 텔레비전 포맷을 반영한다.

탈환 이후, 점령의 무대는 반 올덴보그의 후속 슬라이드 작업인 알파빌의 페르티노(Pertinho de Alphaville)에서 브라질로 옮겨 간다. 이 작업은 상파울루의 두 장소인 의류공장과 오피시아나 극장(Teatro Oficiana) 사이의 몽타주를 만든다. 리나 보 바르디가 디자인한 오피시아나 극장은 전통적인 극장이라기보다는 마치 양쪽에 상점가가 늘어선 길거리에 더 가까운데, 이러한 공간 디자인에 의해 연기자와 관객의 구별이 흐려지며 이 극장은 바로 그러한 종류의 아방가르드 연극이 펼쳐지는 장소이다. 이전에는 다국적 기업을 위해 생산했지만 이제 지역 시장에 집중하는 의류공장에서, 구경하는 쇼핑객들은 일을 하고 있는 재봉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은 전시된다. 오히려 이 작업은 Apres la reprise, la prise에서 보다 리얼리티 텔레비전 쇼와의 유사성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비록 그런 쇼들이 보다 흥미진진하고 ‘남성적인’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탈환 이후, 점령알파빌의 페르티노 같은 작업들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상영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이나 비엔날레에서 개장시간 내내 반복해서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논의되고 있는 영화적 예술은 포스트-시네마 체제의 예술이다. 이는 포스트-시네마 체제에서는 많은 관객을 영화관에 한날한시에 모아 놓고 관람하게 하는 전통적인 영화 상영이 더 이상 지배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와 같은 상영방식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30년대에는 ‘비극장용’ 영화 (대부분이 16mm인)가 폭발적으로 퍼지는 것을 목격했고, 뉴욕 현대미술관(New York’s Museum of Modren Art)에 필름 분과가 탄생했다.93 그 이후 여러 필름 관련 미술관과 시네마테크가 잇따라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대안적 모델들조차도 대부분 극장 상영 방식 혹은 상영시간(séance)―필름 ‘세션’을 일컫는 프랑스 용어‘séance’를 사용했다―을 중심에 둔 변형일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문화에 살고 있다. 하이디 와슨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항상 발생하고 있다.”94

물론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다. 영화는 더 이상 반드시 정해진 상영시간에 맞춰 여러 사람이 집단적으로 모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 몇몇의 결정적인 실천들이 바로 이 상영시간-이후의 시간성을 드러내는지 보아 왔다. 1990년대와 그 후의 좀 더 ‘관계적인’ 실천들 중 일부는 특정한 관람 조건을 만들어 냄으로써 흩어져 버린 영화적 이미지의 특성을 보상한다. 헬리오 오이시티카는 슬라이드 프로젝션과 해먹을 함께 공간에 설치해 그가 ‘유사-영화’라고 이름붙인 것을 최신화하고 일반화시켰다. 이는 더글라스 고든, 비디오 프로젝션으로 검열된 영화의 장면들을 보여 주었던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시네마 리베르테/바 라운지(Cinema liberte/Bar Lounge)(원작 1996)에서의 빈 백 소파부터 앤디 워홀의 을 틀어 놓고 참여자 혹은 관객들이 드러누워 그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던 비크 반 데 폴(Bik Van der Pol)의 나와 함께 잠을(Sleep With Me)(원작 1977)의 침대까지 아우른다. 비크 반 데 폴의 작업은 그 자체로 워홀의 영화가 점점 더 영화관에서 전시장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일반적으로는 이 영화들이 마치 갤러리를 방문한 관람객이 얼마간 서 있다가 지나쳐 가는 프레임 지워진 회화처럼 전시되었다면, 이제 몇몇의 전시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을 위해 라운지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관람경험을 구체적이고 (잠재적으로는)사회적인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 편안하고 위화감이 덜 드는 소파를 가져다 놓을 것이다.

롤러의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는 이미 관객을 강조했다. 롤러는 관객을 행위자(actant), 배우의 위치에 둠으로써 관객은 그들 스스로에게 할당된 역할을 검토하게 되었다. 보여지지 않는 영화의 시간성은 다르다. 많은 장면들은 들리지 않고, 배경에 깔린 소음과 음악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리의 풍경과 관객의 시간―앞서 언급했던 존 케이지의 수업에서 실시했던 실험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매우 주관적인―으로 녹아드는 영화적 몽타주는 영화적 시간을 가려 버린다. 영화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관객은 그들 자신을 보고 다른 관객을 보고 그들은 서로를 본다. 관객은 행위자가 되고, 상영시간은 그 자체로 관람 시간동안의 퍼포먼스가 된다. 상영시간이 모든 곳에 있고 또 어디에도 없는 포스트-시네마의 문화에서, 퍼포먼스는 전례 없는 형식과 전례 없는 중요성을 취한다.

토머스 엘세서는 활동사진 상영회의 조시 아저씨(Uncle Josh at the Moving Picture Show)(1902)와 같은 초기 ‘촌뜨기 영화’를 다시 검토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 남자는 영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착각하는데, 엘세서는 이를 두고 “능동과 수동, 조작하는 자와 조작되는 것의 경계에 (주인공/관객의)몸을 장애물이자 조력자로서, 실패이자 승리의 원천으로 삽입하는, 자기 반영적 또는 자기 참조적 영화의 장르 혹은 실천”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95 과거와 공명하고 그것을 참조하는 영화를 위한 새로운 문제적 장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영화적 예술은 우리를 21세기 초반의 미디어 풍경을 반영하는 촌뜨기로 만든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를 능동적인 관객의 역할에 위치 지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말이다.


 


  1. 고다르는 그의 2010년 영화 필름 소셜리즘에서 ‘나바호(Navajo)’ 영어라고 이름 붙인 자막을 사용한다. 이는 등장인물이 말하는 모든 대사를 그대로 텍스트 자막으로 옮겨 적지 않고, 몇몇 단어를 생략하여 부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2. 코즐로프의 이 이름 붙여지지 않은 필름 보관통 작업은 루시 리파드가 1973년 미술의 급진적인 ‘비물질화’에 관해 쓴 글에 서술되어 있다. Lucy Lippard, Six Years: The Dematerialization of in the Art Object from 1966 to 197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31. 이 책에서 리파드는 코즐로프의 투명필름이 담긴 두 번째 통(Transparent film #2)의 사진을 요셉 코수스의 개념으로서의 개념, 개념으로서의 미술(Art as Idea as Idea) 중 ‘사물(object)’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적힌 이미지와 함께 병치시켜 놓았다. 그러나 이후 코즐로프는 개념미술에 대한 서술에 편입하지 못하고 점점 관심을 잃어가게 된다.  

  3. 필름 프로젝션이 전시공간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초기의 모습은 에릭 데 브로인이 현재 진행 중인 연구의 주제이기도 하다.  

  4. 비르기트 하인과 불프 헤어조겐라스에 의해 기획된 이 전시는 1977년 <도큐멘타 6(dOCUMENTA 6)〉 때 쾰른미술협회(Kölnische Kunstverein)를 비롯한 여러 독일 기관과 런던 헤이워드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선보였다. Birgit Hein and Wulf Herzogenrath (eds.), Film als Film, Cologne: Kölnische Kunstverein, 1977. 

  5. 1927년 발간된 필름리가(Filmliga) 1호 표지 뒷면에 수록된 암스테르담 영화연맹 선언(Manifest Filmliga Amsterda)을 보라.  

  6. 붉은 원의 ‘늦은 밤 상영회(Nachtvoorstelling)’는 프로젝트였던 16 Dagen의 일환으로 흐로닝언(Groningen) 주에 있는 스튜디오 시네마(Studio Cinema)에서 1977년 8월 18일 열렸으며, 깊은 잠은 블룸이 드 아펠(de Appel)과 함께 기획하여 1977년 10월 13일 암스테르담의 영화극장에서 진행되었다. 필자와 에릭 데 브로인이 주관했던 라이덴 대학과 VU 대학에서의 2011년 가을 학기 세미나 ‘상영 시간(séance)’에서 마요레인 반 데 벤이 블룸의 이 프로젝트에 관해 글을 썼다.  

  7. 붉은 원 행사에 관한 리뷰는 블룸이 행한 개입들에 관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Erik Beenker, “Filmkeuze Barbara Bloom maakt ingrepen overbodig,” Nieuwsblad van het Noorden, August 19, 1977.  

  8. 롤러는 이후 다른 버전의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내가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협업 그룹인 ‘만약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나는 너의 혁명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If I Can’t Danced,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와 함께 진행했던 리서치 프로젝트의 주제이기도 했다.  

  9. 장뤽 고다르, 다니엘 컨벤디트와의 인터뷰 중. “A Smile That Dismisses the Universe,” Craig Keller (trans.), Cinemasparagus, May 16, 2010, http://cinemasparagus.blogspot.com/2010/05/jean-luc-godard-speaks-with-daniel-cohn.html.  

  10. 롤러의 작업은 크레이그 오웬스의 글에서 논의된다. “From Work to Frame, or, Is there Life After ‘The Death of the Author’?,” Beyond Recognition: 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pp.122~139. 

  11. 롤러는 2012년 토요일 밤의 열기(1977)로 영화는 그림 없이 보여질 것이다를 다시 만들었다. 이 작업은 앞서 언급한 ‘만약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나는 너의 혁명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의 커미션으로 이루어진 나의 리서치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2. Pamela M. Lee, Chronophobia: On Time in the Art of the 1960s, Cambridge, MA: MIT Press, 2004, xiv.  

  13. 마이클 프리드, 미술과 사물성,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형식주의, 맑시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이영준 옮김, 이영철 엮음, 시각과언어, 1995, 161~185쪽.  

  14. Wayne Koestenbaum, Andy Warhol,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2001, p. 1.  

  15. 2006년 로테르담에 자리 잡은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에서의 발표는 1990년대에 등장했던 주류영화와 영화적 예술 사이에 만들어진 대립을 보여 주는 예가 될 것이다. 미술관은 ‘슬로우 모션’이라는 프로그램의 주제 아래 수집한 필름, 비디오, 사진 작업들을 선보이며 이에 대해 “속도를 늦춤으로써 미디어 이미지의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비-사건”에 집중하며 관객을 “강화된 시각의 형식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이와 다른 맥락에서, 미술관의 전 관장이었던 크리스 더콘은 이렇게 말했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느림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졌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그 즐거움은 돌아왔다. 그 이상으로, 느림은 새로운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Chris Dercon, “Gleaning the Future from the Gallery Floor,” Senses of Cinema, no. 28 (September-October 2003), http://sensesofcinema.com/2003/cinema-and-the-gallery/gleaning_the_future

  16. 기 드보르, 유재홍 옮김, 스펙터클의 사회, 울력, 2014, 147쪽.  

  17. 앞의 책, 153쪽.  

  18. Antonio Negri, “The Constitution of Time”(1981/82), Time for Recolution, Natteo Mandarini(trans.), New York: Continuum, 2003, p. 49. 강조는 본문.  

  19. 더콘의 1996년 프로젝트 “스틸/노벨(Still/A Novel)”[이 프로젝트는 비테 데 비트(Witte de With)에서의 전시와 비테 데 비트의 출판물인 노트들(Cahiers) 시리즈, 그리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망라했다.]은 영화와 미술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가장 설득력 있고 잘 정리된 사례 중 하나다. (비테 데 비트(Witte de With)에서의 전시와 비테 데 비트의 출판물인 노트들 시리즈, 그리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망라한 더콘의 1996년 프로젝트 “스틸/노벨(Still/A Novel)”은 영화와 미술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가장 설득력 있고 잘 정리된 사례 중 하나다.)  

  20. 레이몽 벨루는 이론적으로, 역사사료로도 중요하다. 필름과 다른 매체 간의 상호연결에 관한 그의 분석(주로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작업에 초점을 맞춘)은 비디오 아트와 미술계가 누벨바그와 영화의 적법한 상속자라고 제시한다. 다음을 보라. Raymond Bellour, L’entre-images: Photo, Cinéma, Vidéo, Paris: Éditions de la Différence, 1990.; Raymond Bellour, L’entre-images 2: Mots, images, Paris: Pol, 1999.  

  21. 베르그송주의는 1966년 처음 발간되었으며, 시네마 Ⅰ시네마 Ⅱ는 각각 1983년과 1985년에 발간되었다.  

  22. Franco “Biofo” Berardi, Félix Guattari: Thought, Friendship, and Visionary Cartography, Giuseppina Mecchia and Charles J. Stivale (ed. and tran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8, p. 58. 

  23. Jaques Rancière, Film Fables, Emiliano Battista (trans.), Oxfford: Berg, 2006, p. 109. 

  24.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6, 105~106쪽.  

  25. 앞의 책, 76쪽. 

  26. 앞의 책, 85쪽.  

  27. 자크 랑시에르, 영화 우화,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11, 190쪽.  

  28. 앞의 책, 196-197쪽.  

  29. 히치콕 부분은 책과 DVD 버전의 영화사 모두에서 4a 섹션에 포함되어 있으며, 제목은 “세계의 조정(le contrôle de l’univers)”이다. Jean-Luc Godard, Histoire(s) du cinéma, vol. 4, Paris: Gallimard, 1998, pp. 76~93. 랑시에르는 히치콕의 ‘경직’에 관한 고다르와 들뢰즈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이 둘을 동등하게 여겼다. 랑시에르, 앞의 책, 197~198쪽. 

  30. Steven Jacobs, Framing Pictures: Film and the Visual Art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pp.159~160. 

  31. Dan Graham, “Photographs of Motion,” Articles, Eindhoven: Van Abbemuseum, 1978, p.14.  

  32. 앞의 글.  

  33. Branden W. Joseph, Beyond the Dream Syndicate: Tony Conrad and the Arts after Cage, New York: Zone Books, 2008, p.291.  

  34. Paul Sharits, “Regarding the Frozen Film Frame Series: A Statement for the 5th International Experimental Film Festival, Knokke, December 1874,” Paul Sharits, Yann Beauvais (ed.), Dijon: Les presses du reel, 2008, p.131.  

  35. 이 글은 1970년에 “제 3의 의미(Le troisième sens)”라는 제목으로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 실렸으며, 영어 번역은 1973년 1월 아트포럼(Artforum) 11호에 실렸다.  

  36. 롤랑 바르트, 제 3의 의미, 김인식 편역, 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5, 155~180쪽.  

  37. 앞의 책, 177쪽.  

  38. 앞의 책, 173~174쪽.  

  39. Christian Metz, Film Language: A Semiotics of the Cinema, Michael Taylor (trans.), Chicago: Universiy of Chicago Press, 1991, p.6, p.19.  

  40. Christian Metz, “Photography and Fetish,” October, no.34 (Autumn 1985), p. 86; 강조는 본문. 

  41. 앞의 글, p. 87 

  42. 동시대 미술에서의 영화 스틸 이미지에 관한 내용은 역시 다음을 보라, Jacobs, 앞의 책, pp. 121~148. 

  43. Douglas Crimp, “Pictures,” October, no. 8(Spring 1979), p. 83.  

  44. 앞의 글. 

  45. Douglas Crimp, “Pictures,” Pictures, New York: Artists Space, 1977, n.p. 

  46. 서로 다른 종류의 스틸사진들을 구별하는 더 많은 분석은 Winfried Pauleit, Filmstandbeilder: Passagen zwischen Kunstt und Kino, Frankfurt am Main: Stroemfeld, 2004.  

  47. 프로듀서인 마이크 카플란이 작성한 증언을 보라. “스탠리(큐브릭)는 이 영화 스틸 이미지는 화면 위에 장면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고 믿었다. 우리 스튜디오는 영화에서 스틸 이미지를 가져오는 전례없던 그런 방식을 사용했다. Mike Kaplan, “Inside the First Screening of A Clockwork Orange,” Moviefone, January 30, 2012, http://www.huffingtonpost.com/mike-kaplan/a-clockwork-orange_b_1241336.html

  48. 이 이미지는 쓰러지는 ‘병사’의 몸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잘려졌다. 브라이언 왈리스가 엮은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Art After Modernism)에 실린 크림프의 1979년 그림들 버전의 사진은 롤러가 편집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똑같은 이미지가 사용되었지만, 약간 덜 잘려져 나갔다. 이것은 롱고의 사운드 디스턴스 프롬 굿 맨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실제 영화의 프레임과 비교해 보면, 전경에 자리 잡은 병사와 조각상의 배치가 다른데, 시점 위치가 살짝 더 오른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을 보라. Brian Wallis, ed.,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New York;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1984, p.182.  

  49. Crimp, “Pictures,” 1979, p.83.  

  50. 이 작업은 네덜란드 시각예술계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Beeldende Kunstenaars Regeling) 수십년 간 수장고에만 머물러 있다가, 암스테르담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in Amsterdam)에서 2011년 “템포러리 스테델레이크 3(Temporary Stedelijk 3)” 동안 전시되었다. 

  51. 프로젝트 지원금 신청을 위한 지원서. Barbara Bloom, “Korte projektomschrijving,” de Appel Archive, Barbara Bloom file, 1978.  

  52. Crimp, 앞의 글, p.80. 

  53. Dirk Pültau, “Günther Förge, Zwillinge, 1986,” De Witte Raaf, no. 59 (January-February 1996), pp.14~15.  

  54. Serge Daney, “From Movies to Moving.” Brian Holmes (trans.), documents2, documenta GmbH (ed.), Ostfildern: Haje Cantz, 1996.  

  55. Boris Groys, “On the Aesthetics of Video Installations,” Stan Douglas: Le Détroit, Peter Pakesch (ed.), Basel: Kunsthalle Basel, 2001, n.p.  

  56. 앞의 글. 

  57. 앞의 글. 

  58. Rosalind E.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London: Thames & Hudson, 2000, pp.43~44.  

  59. André Brton, “As in a Wood”(1951), The Shadow and Its Shadow: Surrealist Writings on Cinema, Paul Hammond (ed. and trans.),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1978, pp.42~43. 브르통은 이와 같은 영화 감상이 1950년대에는 너무 비싸졌다고 말했다.  

  60. Gilbert Seldes, The Movies Come from Americ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7, p.102.  

  61. Man Ray, “Cinemage,” Hammond (ed.), The Shadow and Its Shadow, p.84. 또한 다음에 실린 루이스 부뉴엘의 글을 보라. “Cinema, Instrument of Poetry,” Hammond (ed.), The Shadow and Its Shadow, p.67.  

  62. 영화에 관한 리히터의 다른 서술은 루돌프 E. 쿠엔즐리가 인용하여 다음 책에 소개되었다. Dada and Surrealim Film, Cambridge, MA: MIT Press, 1996, P.6.  

  63. 거닝의 1986년 글을 보라. “The Cinema of Attraction[s]: Early Film, Its Spectator and the Avant-Garde,” The Cinema of Attractions Reloaded, Wanda Strauven (ed.), Amsterdam: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6. 같은 책에 실린 스트라우벤의 서론과 거닝의 “Attractions: How They Came into the World”도 보라.  

  64. 이는 로즈 호바트가 뉴욕의 줄리앙 레비 갤러리(Julien Levey gallery)에서 1936년 겨울 상영될 때의 방식이었다. 1968년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는 컬러 프린트를 만들었는데, 푸른 유리를 사용했던 첫 상영과는 달리 컬러 프린트에서 코넬은 보라색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을 보라. P. Adams Sitney,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 Joseph Cornell, Kynaston McShine (ed.),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80, pp.75~76, p.88.  

  65. 그러나 코넬은 때때로 로즈 호바트를 1초에 24프레임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66. Richard Vine, “Eterniday: Cornell’s Christian Science ‘Metaphysique’,” Joseph Cornell: Shadowplay…Eterniday, London: Thames & Hudson, 2003, p.42.  

  67. 앞의 글, pp.35~49.  

  68. 키스(1963), (1963), 그리고 엠파이어(1964) 같은 영화들은 모두 16fps나 18fps속도로 재생되었다. 이와 같은 워홀의 ‘원시주의’ 는 다음을 보라. Yann Beauvals, “Fixer des images en mouvement,” Andy Warhol: Cinema, Paris: Éditions Carrée, 1990; 그리고 같은 책의 다음 글을 보라. Adriana Aprà and Enzo Ungari, “Introduction à la méthode Warhol”. 

  69. 질 들뢰즈, 시네마 Ⅰ: 운동-이미지, 시각과언어, 유진상 옮김, 2002. 50~51쪽.  

  70. 질 들뢰즈, 시네마 Ⅱ: 시간-이미지, 시각과언어, 이정하 옮김, 2002. 259쪽.  

  71. 가발부터 타임캡슐까지 그는 70년대 초반부터 계속해서 사물을 그러모았다. 워홀은 시간, 그리고 시간의 파괴에 대항했지만, 역사, 미술사,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자리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을 유지했다. 이 명백한 모순은 명백히 기독교의 방식과 공명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지만 역사에 마침표를 찍을 종말론적 미래를 기대한다. 워홀의 타임캡슐 27은 그녀의 어머니인 줄리아 워홀라로부터 온 리플렛이 담겨 있는데, 이 리플렛은 이른바 마리아가 포르투갈의 파티마 지역의 아이들에게 예언했다고 전해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은 파티마의 성모마리아가 아직 시간이 존재 할 동안에 당신이 하도록 요청한 것을 여전히 하고 있는가? 타임 캡슐 27의 내용물은 2003년 MMK 현대미술관(Museum für Moderne Kunst)에서 열린 앤디 워홀의 타임 캡슐(Andy Warhol’s Time Capsules)전에서 전시되었다.  

  72. 크로노스와 이온의 구분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8.  

  73. Diedrich Diederichsen, “Time and Dream: Tony Conrad’s ‘Yellow Movies,’” Tony Conrad: Yellow Movies, Christopher Müller and Jay Sanders (eds.), Cologne: Galerie Daniel Buchholz, 2008, p.16.  

  74. Dick Higgins, “Boredom and Danger”(1966), Foew and Ombwhnw: A Grammar of the Mind and a Phenomenology of Love and a Science of the Arts As Seen by a Stalker of the Wild Mushroom, New York: Something Else Press, 1969, p.101. 

  75. Branden W. Joseph, Random Order: Rober Rauschenberg and the Neo-Avant-Garde, Cambridge, MA: MIT Press, 2003, pp. 47~48. 

  76. Al Hansen, A Primer of Happenings and Time/Space Art, New York: Something Else Press, 1965, p.94. 

  77. John Geiger, Chapel of Extreme Experience: A Short History of Stroboscopic Light and the Dream Machine, Brooklyn: Soft Skull Press, 2003, p.11. 

  78. Antonio Negri, “Politiques de l’immanence, politiques de la transcendence: l’enseignement de Spinoza” (lecture at the Bijlmer Spinoza Festival, Amsterdam, June 26, 2009).  

  79. Negri, “The Constitution of Time”, pp.34~35.  

  80. 앞의 책, p.120. 

  81. 윈 에반스는 1982년 지신과 함께 드림머신을 만들었다. 그의 최근 드림 머신 작업들은 앤트워프현대미술관(MHKA)에서 2006년 말 진행된 “프로젝션 프로젝트(The Projection Project)”에 포함되어 있다 . 

  82. Geiger, 앞의 책, pp.63~69. 

  83. Brion Gysin and Ian Sommerville, “The Dream Machine: A Hallucinating Gift to the Readers,” Olympia, no.2(1963), pp.33~36. 

  84. Hito Steyerl , “Is a Museum a Factory?”, e-flux journal, no.7 (June 2009), http://www.e-flux.com/journal/is-a-museum-a-factory

  85. 앞의 글. 

  86. 네그리는 자본주의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더 완전하게 다시 한번 존재론적 시간을 수치화된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87. Stan Douglas, “Journey into Fear”, in Stan Douglas: Journety into Fear, London: Serpentine Gallery, 2002, p.138.  

  88. Harun Farocki, “Workers Leaving the Factory.” Nachdruck/Imprint:Texte/Writings, Susanne Gaensheimer and nicolaus Schafhausen (eds.), New York: Lukas and Sternberg, 2001.  

  89. 테리 이글턴, 이데올로기 개론, 여홍상 옮김, 한신문화사, 1994, 114쪽.  

  90. 이 작업의 제목은 자크 빌몽트의 공장에서의 작업 재개(La reprise du travail aux usines wonder)(1968)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파로키의 110년 동안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 포함된 영화 중 하나이다.  

  91. 피터 휘슬리와 데이비드 바이스의 작업 가시적 세계(Visible World)(2001)는 이 현상과 좀 더 명백하게 연관된다. 

  92. Eric de Bruyn, “Intermittent Conversations on Leaving the Factory,” Texte zur Kunst, no.79 (September 2010). 

  93.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Haidee Wasson, Museum Movies: The Museum of Modern Art and the Birth of Art Cinem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94. 앞의 책, p.19. 

  95. Thomas Elsaesser, “Archaeologies of Interactivity: Early Cinema, Narrative and Spectatorship,” Film 1900: Technology, Perception, Culture, Klaus Kreimeir and Annemone Ligensa (eds.), Eastleigh: John Libbey, 2009, p.17. 

Ian Sommerville and Brion Gysin with Dream Machine
Louise Lawler, A Movie Will Be Shown Without the Picture, 1979
Louise Lawler, A Movie Will Be Shown Without the Picture, 1979
Voyage(s) en utopie, Jean-Luc Godard 1946–2006. Installation view, Centre Pompidou, Paris, May 11– August 14, 2006. Image courtesy of Centre Pompidou, Mnam/Cci-Bibliotheque Kandinsky, JP Planchet.
Joseph Cornell, stills from Rose Hobart, 1936.
Tony Conrad, Yellow Movie(1972)
Bik Van der Pol, Sleep With Me, installation view, Rooseum(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