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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edition notice

권영진, 김수자, 프란시스 모리스, 한주희
사진 studio_kdkkdk, 이민혁
편집 이한범
디자인 헤이조
한영번역 마야 웨스트, 한주희
영한번역 이재희, 홍정인
인쇄 문성인쇄
발행 재단법인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KoRICA)
발행일 2024년 8월 31일
ISBN 979-11-985567-2-1
정가 40,000 원

about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은 한국에서 아방가르드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전개되던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순수 추상을 추구했던 아그네스 마틴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한국에서의 첫 번째 미술관 전시이다. 순백색과 회색의 단색조 회화를 선호했으며, 명상을 통한 절제된 감정을 반복된 패턴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아그네스 마틴과 동시대 한국 미술가들 사이에는 내밀한 미학적 관계가 있다. 이 전시는 동양의 정신사적 관점에서 마틴의 작업을 바라보는 한편, 그녀의 실험적이고 명상적인 작업을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작업과 나란히 두고 상호 간의 동조적 관계성을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전시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그리고 개인에 소장된 마틴의 주요 작품들을 엄선해 한 자리에 모았다.

미술사적으로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은 1960년대 뉴욕에서 출현한 미니멀리즘의 맥락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작업이 지적으로 엄격했던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귀속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글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 마틴은 본인의 작업 과정을 명상적이며 직관적이라고 밝힌다. 그녀가 나고 자란 캐나다의 캘빈주의적 정서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시절 접한 동양의 선불교, 도교 사상이 이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뉴멕시코와 뉴욕에서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다양한 영적 종교적 깨우침을 얻은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아그네스 마틴의 창작 행위 근간에 흐르는 동양 철학적 사유에 주목하는 이번 전시는 시의적절하다. 서구적 관점으로 기술된 미술사의 지역적 경계를 없애고 학문 분야 간의 경계를 초월해 미술 현상을 다각적으로 읽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미국의 독자적인 미술이 출현하는데 있어서 동양의 선불교가 미친 영향은 이미 여러 학술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중국의 도교와 인도의 불교가 융합된 선불교는 그 자체로 담화와 번역을 토대로 진화한 혼합주의적 체계였다. 주류 너머의 실험을 모색하던 미국 예술가들에게 선불교는 새롭고 매력적인 사상으로 다가왔다.

1912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마틴은 열여덟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미국의 시민권을 획득했다. 아그네스 마틴의 작업 세계를 탐색하는 이번 전시는 1954년 구상적 회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마틴의 회화는 잭슨 폴록과 아쉴 고르키 등 초기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이고 생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좀 더 형식적이며 기하학적인 언어와 차분한 색상으로 옮겨간다. 이러한 아그네스 마틴: 들어가며 작업 덕분에 마틴은 뉴멕시코 타오스의 활기찬 ‘대안적’ 문화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보이며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인정받았다. 당시 마틴은 멀리 뉴욕의 예술가, 문화계 인사들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이어가며 뉴욕 문화계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1954년 마틴은 새로 설립된 월리처 재단의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해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지원서에는 미국 미술의 독자적인 쇄신에 기여하고 싶다는 야심을 당당히 피력했다.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은 아그네스 마틴이 자신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1954년 무렵 자연과의 관계성이 제거되는 과정에서부터 1957년 뉴욕으로 회귀한 이후 관찰되는 작품의 변화를 좇는다. 뉴욕에 정착한 마틴은 당시 미국 미술을 주도하고 있던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그리고 각별히 존경했던 애드 라인하르트 등의 미술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했다. 로어 맨해튼에 거처를 얻은 그녀는 그곳에서 장차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으로 미국 미술을 이끌어갈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엘스워스 켈리 등의 젊은 주역들을 만나게 된다. 전시는 이 시기 다양한 예술적 성향의 동료들과 소통하며 마틴의 대표적인 ‘그리드 회화’가 어떻게 진화해 가는지 탐색한다. 완숙기에 접어들어 제작된 작품은 대부분 크기가 큰 반면 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은 대체로 크기가 작은 편이다. 엄선되어 전시된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형태와 기법 실험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콜라주를 비롯해 마크메이킹 기법을 열정적으로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름모꼴과 원형에서 시작된 작품 속 형태는 점차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격자의 그리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며 전시의 도입부는 마틴의 대표적인 그리드 회화 〈나무〉(1964)와 함께 끝을 맺는다. 그리드가 나타나고 25년이 지난 후 마틴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연히 나무의 순수함을 생각하다가 그리드를 떠올렸다. 그것이 순수함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그리드를 그렸고 만족스러웠다. 이것이 나의 비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네스 마틴은 1967년 돌연 뉴욕에서의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여행을 떠났다. 몇 년에 걸친 여행을 마친 후 1974년 뉴멕시코의 시골 마을 타오스에 은둔하며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이때부터 2004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30여 년의 시간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마틴은 명상을 통해 얻은 ‘영감’을 회화적으 로 표현하며 고유한 이미지를 찾아간다. 작품에서 ‘완벽함’을 추구했던 마틴은 작품의 크기, 색상, 기법 등을 계획하고 그 안에서 색과 선을 무한히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화면을 채웠다.

아그네스 마틴은 타오스의 작업실로 돌아오기 한 해 전인 1973년 30점의 실크 스크린 연작을 선보였다. 〈어느 맑은 날〉이라는 제목의 작품에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각기 다르게 배열되어 있다. 전시에서는 실크 스크린 연작과 함께 마틴의 작업 생애 두 번째 시기를 대표하는 두 개의 작품군 또한 선보인다. 첫 번째 작품군은 1977년에서 12 13 1992년 사이 마틴이 오랫동안 이어온 회색 모노크롬 회화이다. 이는 마틴의 전체 작업들 중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전시되는 여덟 점의 작품은 작가가 부여한 제약 안에서 각각의 형태, 색조, 질감이 무한히 변주하는 것을 생생히 드러내며 미학적이고 정신적인 감각을 전달한다. 이 시기의 작업에 대해 마틴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대상도 공간도 선도 무엇도 없이, 어떠한 형태도 지니지 않는다. 형태를 무너뜨리며 융합과 무형성을 다루는, 빛과 가벼움의 작품들이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서는 마틴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몰입한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마틴은 1993년부터 뉴멕시코 타오스의 어느 노인 주거 단지에서 생활한다. 거처를 옮긴 후에도 매일 작업실을 찾아 붓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약해지면서 예전처럼 큰 작품을 그리지는 못했고 그림의 크기가 조금 줄어 들었다. 마틴의 생애 마지막 작품들은 고요한 명상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하얀 젯소를 캔버스 표면에 바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연필로 선을 그어 밑그림을 그린 다음, 즉흥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흐르듯 넓은 붓으로 색의 띠를 칠하였다. 자신의 원칙을 엄격히 지킨 가운데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 빛나도록 아름다운 수십 점의 그림이 이 마지막 10년 동안 탄생했다. 농도를 달리해 투명할 정도로 옅어진 원색과 흰색을 사용해 수직으로 붓을 움직여 띠를 그렸다. 흥미롭게도 전시에서는 캔버스를 90도 돌려 띠들이 수평이 되도록 했다. 수직과 수평이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기법이다.

1999년 제작된 여덟 점의 연작 〈순수한 사랑〉은 아그네스 마틴의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회색의 모노크롬 작품들과는 달리 〈순수한 사랑〉 연작의 화면에는 반투명한 광채가 깃들어 있다. 작품의 제목에도 삶에 대한 기쁨과 예찬이 담겨 있다. 2015년 아그네스 마틴의 전기를 출판한 낸시 프린센탈은 이 연작에 대해 “터무니 없이 아름답다”는 역설적인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순수한 사랑〉과 함께 마틴의 예술적 여정이 막을 내린다.

2002년 메리 랜스는 아그네스 마틴의 작업 세계를 담은 한 편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발표했다. 전시에서는 랜스의 영화와 함께 탁월한 문학적 감성이 담긴 마틴의 글도 만날 수 있다.

아그네스 마틴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느린 보기의 기회를 선사한다. 침묵, 씻겨 나간 색채, 부드럽게 흐려지는 그림의 테두리, 열정적인 연필 자국 등 세심한 과정과 놀라운 존재감의 증거를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 아그네스 마틴은 항상 본인의 작품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작품을 자전적 경험과 의미, 혹은 삶에 대한 통찰과 관계짓기를 꺼렸다. 그녀는 오히려 ‘미술의 가치는 보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했고, 자신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한 편의 작품을 보는 경험에 대해 마틴은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바다의 파도나 하늘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구름처럼 항상 변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에 비유한다. 그것은 곧 반복적이고 사색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행복을 자아내는 그리고 아그네스 마틴 자신과 관객에게 ‘완벽의 순간들’을 창출하는 경험이다.(프란시스 모리스)

contents

아그네스 마틴: 들어가며…프란시스 모리스
작품 및 전시 전경
번뇌 없는 마음…아그네스 마틴
소거된 몸의 현전…김수자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프란시스 모리스
즉각적 깨달음과 점진적 수련의 추상…권영진
아그네스 마틴의 생애…한주희
전시 작품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