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툴: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
curatorial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친 서구의 미술사에서 책은 미학적 실험을 위한 매체이자 미술 행위의 대안적 장소로서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티스트 북(Artist’s Book) 이라는 역사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 시각 예술가들의 출판 활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은 아티스트 북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각 예술가들의 출판에는 아티스트 북이라는 용어로 봉합될 수 없는 제각각의 형식적 특성과 욕망이 예술적 실천의 중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책이나 웹페이지 같은 독립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결과물의 형태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그것을 만들어 내는 ‘예술적 도구’로서의 출판은 책 그 자체보다 더 복잡한 문제이며, 선택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여기서 주어지는 과제는 그렇다면 과연 그 도구를 사용한다는 ‘제작의 행위’에 놓여있는 욕망의 자장에 대해 살피는 것이며, 그 결과물이 그것이 놓여 있는 체계와의 관계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시기적으로는 90년대 이후, 이와 같은 예술가들의 출판 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예술가들의 출판은 미학적 판단의 대상에 있어서 언제나 주류 매체로서의 작품과 전시에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 행위가 더 강조되며 비물질화 되어가는 예술적 경향과 기획자 혹은 매개자, 프로그래머로서의 예술가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출판은 주요한 매체로 환기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출판이라는 제작의 체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일 것이다. 출판은 기획부터 콘텐츠 선별, 형식에 대한 선택과 그 유통의 방식까지 전적으로 작가 자신이 관장하는 일종의 독립된 세계를 만드는 일이며, 이는 거의 모든 아방가르드 전략을 자본화하는 당대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된 픽션을 향한 의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결국 출판이라는 관점을 경유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예술가들이 어떠한 픽션을 욕망하는가 이며 이에 대한 읽기가 요청된다.
출판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이 전시는 동시대 한국 시각 예술가들의 출판을 논의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기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출판물을 조사해 목록화 했다. 그리고 이 목록이 일종의 아카이브로 기능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자의적인 규칙을 적용해 분류하고 전시라는 매체를 통해 이를 가시화한다. 이 규칙이란 ①책 자체를 미학화한 작업, ②연구(리서치)나 기획과 연동되는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는 것으로서의 출판, ③예술가의 잡지, ④콜렉티브의 출판, ⑤출판이라는 체계를 이용하는 예술가 등이다. ①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티스트 북에 가깝다면, ②는 출판 자체를 좀 더 능동적으로 사용하게 된 최근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①에서 ②로의 변화는 훨씬 더 파편화되고 정교해진 미술의 주제에 관한 풍경이다. ③에서 우리는 ①과 ②와는 또 다른 ‘시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잡지라는 매체, 즉 지속을 요청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 전시는 진지하게 고민한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소위 콜렉티브로 명명되는 한국 미술의 주체들은 대체로 사회와 관계 맺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그 고민의 주제와 이에 대한 태도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이들에게 있어서 출판이라는 행위는 공통적으로 주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출판이 관찰자이자 개입자로서의 위치가 요청하는 필연적인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시장이나 작품을 넘어 출판 그 자체를 경유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미학의 용어가 아닌 실제적인 이미지에 대해 묘사하고 그 기능을 밝힘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④는 그 주체의 운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이다. ⑤는 스스로가 출판사 혹은 출판인이 되는 작가들을 다룬다. 이들은 ‘책’ 보다는 ‘출판’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다룬다. 이 둘의 위상과 기능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이 전시의 목표 중 하나이다.
이 아카이브는 대상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를 요구하지만, 그 사용은 언제나 현재적일 수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아카이브는 여러 시간성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번 전시는 네 개의 장치를 고안한다. 첫 번째는 전시 중에서 계속해서 조사되고 추가되는 아카이브 목록을 실시간으로 최신화하기 위해 웹이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웹 아카이브는 또한 사용자들에 의해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웹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리서치가 수행되는 장소로서의 전시장이다. 웹의 즉각적인 시간성과는 변별되어, 전시 공간에는 목록화된 자료의 실제 결과물이 웹 아카이브와는 시차를 두고 지연되어 드러날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전시의 커미션으로 진행되는 박보마의 작업이다. 박보마는 자신이 지각하는 특정한 사물, 상태, 풍경과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감정적으로 환기되는) 개인적 감각을 재현하기 위해 출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 사물, 상태, 풍경, 감각을 정확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표상이나 지시와는 관계가 없으며, 그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총체적 경험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때문에 스크린 위에 즉각적으로 이미지를 기록하거나 사변적 내러티브를 향한 글쓰기, 일시적인 오브제를 다루는 등 전방위적인 제작의 행위는 바로 그 특정한 것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사변적인 차원에서만 구축되는 그의 재현 시스템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출판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어떤 증명이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대상에 대한 매우 다른 상태 사이를 널뛰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박보마의 픽션은 언제나 현재적이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전시장 아카이브의 시간성과는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며, 때문에 아카이브의 모든 범주에 속하면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아카이브의 규칙을 유린하며 그 사이를 유동할 것이다. 마지막은 프로그램이다. 네 번의 강연은 예술가의 출판과 그 출판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분류할 것인지,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할 것이다. 이 강연 시리즈는 90년대 이후 한국의 예술가 출판에 대한 주요한 시기적 변곡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것이다. 또한 출판을 주요하게 다루는 작가들의 워크숍 또한 마련되어 있다. 예술로서의 연구(아티스틱 리서치)를 기반으로 출판사를 운영해 결과물을 제작하는 이소요 작가와, 당면한 사회적 현안에 대한 뚜렷한 개입의 목적을 지닌 리슨투더시티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아카이브로서의 이 전시는 그 자체의 규칙을 제안하지만 아카이브 안과 밖에서 그 근거를 위협하고 의심하는 여러 조건들과 관계 맺으며 당위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역사적인 관점과 역사의 불가능성에 대한 관점을 병치함으로써, 이 전시는 궁극적으로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풍경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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