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미술출판에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어떤출판연구회(김영글, 안유리, 한윤아)가 발행한 오늘의 예술출판에 관한 대화에 수록된 인터뷰.

edition notice

집필/편집 김영글, 한윤아
디자인 김민희

contents

1부 제작, 인쇄의 문화 다양성
내일을 위한 에코 출판 / 김보은, 김소은(어라우드랩), 김화용(‘제로의 예술’ 기획자)
소규모 출판의 방법, 리소 인쇄 / 오오프린트(강유라, 정희라, 황인서

2부 비평과 협업으로서의 출판
미술출판에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 이한범(나선프레스)
작은 출판사의 대안적 협업 방식과 시리즈 기획 / 김현우(읻다 출판사)

3부 출판 문화의 변화
해외 예술출판, 소규모 출판, 아트북페어의 맥락 / 임경용(더북서사이어티/미디어버스)
트랜스미디어로서의 출판-웹툰, 그래픽노블과 리틀 프레스 / 박인하(서울웹튼아카데미/만화연구자)

 

출판에서 ‘편집자’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원고를 다듬는 실무를 맡고 책의 구성과 문맥의 방침을 정하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고전적인 역할을 떠올린다. 그러나 편집자의 역할과 의미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디지털 출판이나 산업화된 웹 세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면 편집이라는 매개가 사라지고 중립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퍼블리싱이 작동하기도 한다. 미술출판이나 독립출판 등의 소규모 출판 시스템에서는 저자와 편집자의 역할이 겹치기도 하고, 편집자가 책에 담길 콘텐츠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현대미술에서 출판의 역할은 작지 않다. 일 년에도 수백 개의 전시가 열리는데 전시마다 도록을 찍어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관행이며, 공공미술이나 리서치 프로젝트 등 아카이브와 기록이 중요한 기획의 경우 대부분 출판물의 형태로 프로젝트를 갈무리한다. 또한 출판을 작업을 선보이는 주요한 방법론으로 삼고 독립된 작품의 일환으로 책을 직접 만들어내는 작가도 많다. 미술출판은 계속해서 외연을 넓히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기성 출판이 구축해온 제도나 규범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느낌도 있다. 어떤출판연구회는 영상비평지 오큘로 창간멤버이자 다양한 미술출판물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 1인 출판사 나선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한범 미술평론가를 모셨다. 미술출판에 대한 생각과 편집이라는 일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판사의 대표로서의 입장과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입장이 책에 개입하는 측면이 다른데 1인이 운영하거나 작은 규모인 출판사에서는 이중 삼중의 여러 역할이 겹쳐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외주 편집일도 많이 해오셨는데, 나선프레스는 혼자서 운영을 하는 걸로 안다.

출판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결국 굉장히 많은 선택의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출판이 끊임없는 선택의 행위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구체화된 질문들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지 못하는지에 관해서도. 그러면서 점점 더 나는 무엇을 선택해 나갈까 고민해나갔던 것 같다. 외주 편집은 주어진 장 안에서 선택지가 주어지는 게임인 반면, 출판을 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선택의 토대를 나 스스로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해서였다. 나는 편집 일을 하지만 아직은 스스로를 편집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통념상 출판업계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편집자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디어버스에서 편집자로 재직했지만 했지만 편집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는 일을 무엇이라고 이해해볼수 있을까 질문하곤 했는데, 최근 그것을 설계(engineering)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처음 잡지의 편집일은 언제부터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

학교 수업을 통해 만난 분들과 오큘로를 만들게 되었다. 오큘로의 경험이 예술에 관해 편집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영향을 많이 주었다. 오큘로를 통해 ‘비평’이 전체적인 미술 생산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편집은 내게 비평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평은 내가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실재를 다 다룰 수 없고, 그 경험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여 어떤 특정한 문제로 추출해서 다루는 일이다. 비평지를 만드는 건 그렇게 담론을 촉발하고 거기에특정한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인지를 하게 됐는데 미술출판 편집은 그와 비슷하게 예술의 문제를 다루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만들 때에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못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오래 가지는 게 나에게는 편집의 시작이다.

오큘로를 만들 때 주제 기획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매 호마다 어떤 토픽을 잡아서 기획을 하는 건 결국 ‘해석’에 기반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현상을 매핑하고 소식을 전하는 게 아니라,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당대의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거리를 두어 뭐가 중요한가 묻고, 잡지의 입장에서 답을 건져내는 것이다. 이런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 비평이라는 것이 미술 생산 혹은 현장에 개입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미술출판 편집도 마찬가지다. 책은 예술 전체를 다 담을 수 없다라는 사실, 즉 작품이 책으로 그대로 전환되거나 도입되지 않는다라는 점이 내겐 중요했다. 편집은 어떤 작품이나 전시에서 특정한 면을 특수하게 전환시키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편집이 무엇을 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인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사실 책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제한 조건이라든가 한계가 많은 형태이기에 이걸로 작품(을 둘러싼 네트워크) 전체를 다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마치 도록이 전시를 온전히 다 담을 수 있는 장소인 양 여기는 관행들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직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수도 없이 본다.

도록은 많이 버려진다. 내가 이해한 이유는 굉장히 단순한데, 사실 그 전시에서 중요한 것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시 풍경이라는 표면을 사진 찍고 이리저리 배치 하는 행위를 통해서 책은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뭐가 중요했고 어떤 것을 추출할지에 대한 편집 행위가 없다면 그냥 사진과 글만 있는 상태인 것같다. 뭐가 가득해보이지만 사실은 텅 비어 있다.

작가 분들이 도록을 명함 같은 걸로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감한다. ‘책’ 자체를 만든다는 행위의 의미나 책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크다고 생각한다.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일했던 경험도 중요했다. 거기는 서점이다 보니 책 안쪽의 문제보다 책 바깥쪽의 문제가 중요하다. 편집은 책의 지면 안을 구성하는 데 몰두하는 행위지만, 서점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와서 어떤 책을 사가는지, 물건으로서의 책이 어디로 가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책이라는 생태계를 들여다보게 되며 책을 만드는 일이란, 안을 편집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책 바깥을 구성하는 문제까지 포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외부에 내어놓으면 내 의도와 달리 제 멋대로 살아나가는 부분도 있어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이 된다. 그래서 책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선프레스는 어린이 독자들을 생각하자는 모토가 있다. 어린이들한테 편집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해본 적이 있는데 “편집자는 책 만드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질에서 좀 비켜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하고 방향을 결정하고, 문제 해결 결과물로서의 사물로까지 이르는 과정을 편집이라고 해”라고 설명하면 어떨까. 만약 어린이들과 편집 수업을 한다면 책 만들기 워크숍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다.

내게 편집과 비평은 출발점이 같다.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비평은 글로써 해결하는 것이고 편집은 사물의 형태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필요한 게 사실은 비평적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비평적 능력이란 글쓰기 능력이 아니라 사물을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나 또한 책을 만들면서도 비평가로서 글쓰기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결국은 비평 훈련이 있어야만 너무 희미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은 이 세상에 너무 많고 내가 그런 걸 재생산하는 데 크게 보탬이 안 되어도 될 것 같다.

서두에 출판사를 하는 것과 편집을 하는 게 이중의 정체성 같다고도 말씀하셨는데 확실히 다르다. 내가 편집자로서책을 만들어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는 것과 내가 아닌 출판사라는 정체성이 책을 만들어가는 건 다르더라. 그래서 둘을 분리시켰던 것 같다.

분리가 잘 되는지 궁금하다.

한다고 하는데 외적으로 보기에는 아직 안 돼 있을 것 같다. 출판의 방향성을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의 바람은 나의 제어가 없이도 출판사가 자기 이념대로 굴러가게끔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 출판사를 만들 때 내 이념을 설정하는 게 아니라 이 출판사에 필요한 이념을 설정하는 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던 것 같다.

어떤 이념인가.

사실 비평하고도 관련이 있다. 내가 썼던 글을 다시 봤는데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나의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비평이라는 것은 작품이라는 대상이 왜 중요한지 발견하고 그것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므로 그 문제를 명확히 설정하고 안내해야 한다. 물론 애써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실패는 불가능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읽기 어려운 나의 글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뭔가가 허술했고 기만적이라고 느껴졌다. 대체로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 하는 관성으로 쓴 문장들이었다. 말하자면, 나의 글쓰기의 나쁜 습관은 내가 글의 독자를 은연중에 ‘알 만한 사람들’ 즉 미술계의 사람들로 축소시키면서 등장하곤 했고 그걸 알게 됐다. 외부를 없는 듯 취급한 채, 작품의 의미를 내부화 하는 것은 습관이었고 이는 비평을 포함한 모두가 공모하고 있는 관행이었다. 이런 구조에서 탈출해야 내가 생각하는 기능적인 비평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과학계에서 블랙홀 사진을 최초 촬영하며 이슈가 됐다. 유튜브로 유럽 과학자들이 나와서 블랙홀 사진 보여주고 자신의 업무 영역에 있어서 이 사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마디씩 했다. 그런데 나는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과학적인 지식도 하나 없는데 너무 잘 이해가 되는 거다. 그러면서 내린 단순한 결론이, 예술에 대한 해석과 비평을 우리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서 이 ‘계’가 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좀 곱씹어 보게 되었다. 비평뿐 아니라 이 제도를 구성하는 전체적인 언어 행위 자체가 뭔가를 굉장히 배제시키고 있다라는 인식이 컸고 그러면서 어린이라는 추상적인 독자들을 생각하게 됐다.

어린이들이 어떤 예술 작품의 한 특성을 이해하고 새로운 앎을 얻어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성공적인 비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겁없이 했다. 그래서 나선프레스라는 출판사의 정체성을 어린이 책, 예술 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린이 독자나 청소년 독자가 능동적으로 세계에 다가갈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을 만드는 곳으로 설정했다. 당대의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이 이 기능을 활성화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지금 여기 내 주변의 현장 미술을 콘텐츠로 삼고자 했다.내 업은 비평가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미술의 어떤 부분들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전달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링크를 시켜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글쓰기 뿐만 아니라 상황을 총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고 출판은 내게 유용한 방법이었다.

나선프레스의 당위를 오랫동안 고민했고, 아젠다를 크게 세 가지로 설정했다. ‘다르게 보기’, ‘몸을 되찾기’, ‘어떻게 함께 할까’ 이 세 가지 주제를 출판 라인업으로 설정을 했다. 그 고민을 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처음에 갈피를 못 잡고 고민할 때 도움을 줬던 텍스트가 두 개 있다. 하나가 레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 인데 초반에 동화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동화에서는 열쇠를 물어다 주는 새와 같은 조력자들이 등장을 한다.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들이 있다면 동화는 항상 어떤 조력자의 서사가 등장하면서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 서사 안에서 성장을 하게끔 한다는 얘기였는데, 내가 생각하는 책의 기능이 딱 그거였다.

또 다른 하나는 김원영 선생님이 창비 어린이 64호에 기고한 글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이다. 노키즈존과 어린이 먹방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며 우리는 어린이를 혐오의 대상 아니면 귀여움의 대상 말고는 대하는 방식을 모른다는 얘기를 하면서,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딱 그 표현이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것 같다. 예술을 사이에 둔 동료 시민으로서 어린이들을 상상하기.그것이 미션으로 설정이 됐다.

자신과 자신이 차린 출판사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마인드가 독특하다.

그것도 일종의 글을 쓰는 경험 안에서 생긴 어떤 생존 본능 같은 건데 비평가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상징화되고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봤다. 글을 쓰고 뭔가를 퍼블리싱 한다는 게 사실 굉장히 파워가 있는 일이고 자칫하면 바로 권력 구조가 생기는 행위들인데 그런 작동 방식을 좀 예민하게 느꼈다. 계속 비평 활동은 하지만 비평이 권력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도망다니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좀 혼자 된 것도 있지만, 재밌는 건 그렇게 도망치던 사람들끼리 마주치는 순간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고 결국 소규모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그렇게 생기는 것 같다.

가만히 보면 계를 이루는 이들은 대체로미술 내 역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나도 현장에 대한 감각이나 인지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끊임없이 그 미술이라는 것을 외부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미술 안에서의 문제를 미술 안에서 해결하기보다는 계속 미술의 문제가 결국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는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책을 계속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책은 인간 문명에서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책이 미술에서 특수한 게 아니라 미술이 책에 비교해서 훨씬 더 마이너하다. 책은 거의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인 형식이고 물건이다. 사실 전시나 영화관 같은 곳은 굉장히 특수한 장소인데, 작품이라는 유령적 대상이 특수한 매질보다는 보편적인 형식으로 유기적으로 전환되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나선프레스를 구상하던 당시, 조국 사태가 터지며 조민 씨의 삶의 행적이 드러나게 됐는데 그걸 보며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자본의 세습이 아니라 문화 권력의 세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최상의 교육과 양질의 경험만 해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다. 나는 그것이 부의 불균형과 맞먹게 중요한 앎의 불균형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현실 인식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했는데, 그때 책이라는 사물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예를 들어 교육적 인프라가 부족한 시골 학교의 한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는 행위를 상상하게 되었다. 내가 자본이나 앎의 불균형을 제도적으로 현실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앎의 사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이 그에게 어떤 사건이 될 수 있다면 수천만 원 들여서 레슨을 받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그 편차에 현실적으로 징검다리를 놔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은 싸고 멀리 갈 수 있고 우연치 않게 볼 수도 있고 친구한테 빌려서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책의 사물적 특성이 굉장히 매력적이고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데에는 기질의 문제도 있다. 전시도 몇 번 만들어봤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너무 힘들기도 하고 일단 그렇게 전시라는 큰 규모의 일은 너무 많은 사람들과 관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표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많아진다. 그런데 책은 단순하게는 작가, 나, 디자이너만 있으면 된다. 소수의 사람들이 내밀하게 대화를 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시간이 나에게는 훨씬 행복했다. 일정 기간 유지시키다가 없애버리는 공간을 만드는 일보다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사물을 만드는 게 나에게는 더 스릴 있었다. 공간보다 시간을 만드는 일을 택한거라 생각한다.

그간 외주로 작업한 미술 책이 많다. 미술책에서 편집은 어떻게 다르다고 보나.

초반에는 문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등 여타의 출판물 편집에 비해 미술 편집을 하는 것의 특수성이 이미지랑 텍스트를 다루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미술출판은 책이 작품인 경우, 작가나 기획자의 프로젝트가 책이 되는 경우, 연구나 비평 텍스트 자체가 책이 되는 경우 등 다양하다. 도록 같은 경우에는 전시가 책이 되는 경우겠고, 전시랑은 조금 다르지만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책이 되는 경우 등도 있다. 내가 했던 작업들을 안에서 세분화 하다 보니까 미술출판이라는 말로 얽힌 것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전시를 도록으로 만드는 일이랑 작품으로서 책을 만드는 일은 완전히 프로세스가 다르고 개념도 다르다. 세분화 없이는 그냥 굉장히 형식적인 편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이게 미술 편집의 특성인 것 같다. 작품과 전시가 뭐가 다른지를 이해하며 시작하지만, 다시 미술의 총체성을 그 안에서 다루게 되는 일인 것 같다. 결국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것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편집은 가능해진다.

전시의 결과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작업으로서 책을 만들 때는 편집자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나.

책마다 다르지만 나의 큰 지향 같은 건 있다. 그건 한 작품에 내재한 여러 모습과 가치 중 작품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측면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작가와 작품에 가능한 충실하고자 하는데, 그건 역설적으로 강한 해석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나선프레스에서 나온 박민하 작가의 책 비밀 호수와 더스트 데블는 이미지가 중요한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이유와 중요하게 되는 방식을 설정하는 것이 또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는 박민하 작가는 멋진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가가 아니라 이 이미지가얼마나 의심스러운 이미지냐를 묻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도 그런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간단히 설명하면 최첨단의 과학적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판타지적인가 되묻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멋진 사진집처럼 보이면 안 됐다. 멋있는 사진처럼 보이면 우주개발을 두둔하는 발전주의적 교육을 은연중 수행할 것이다. 이 책의 방향성은 그런 이미지를 한번 의심하라고 부추기는 기능이 있다.

사실 아티스트북이라기보다는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재구성해낸 새로운 작업처럼 보여서, 이런 방식의 책들을 부를 이름이 따로 필요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판이란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협업 작업이다. 여기서 크레딧보다 더 중요한 건 계약 문제다. 예를 들어 이 책을 조형한 건 디자이너인데 왜 디자이너는 저작권이 없을까. 이를 정식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봤는데 판면권이라고 판의 면을 구성을 한 저작권이 편집자랑 디자이너한테 귀속되는 개념이 있었다. 그런데 판면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별로 없고, 한국에서도 판면권을 인정해야 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대체로 디자이너가 아닌 출판사가 판면권을 가져야 된다는 논의였다. 협업에 참여한 주체들에게 어떻게 정당한 자리와 수익 분배가 가능할까. 그게 고민이다.

디자이너와는 어떻게 작업하나.

나선프레스는 책을 만들 때 디자이너한테 1%에서 최대 3% 저작료를 준다. 이건 아주 임의적으로 설정한 건데, 그래서 사례를 좀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디자인 표준 계약서의 경우 내가 원하는 방식의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디자이너가 의뢰인에게 저작권을 넘기는 형태로 관계를 규정해 놨더라. 그래서 계약서를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하는 필요를 느꼈고 법률 전문가분께 자문을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출판권 설정 계약은명시적으로는 이 책의 생산에 참여한 사람은 저자밖에 없다. 책을 만드는 데 투여된 온갖 종류의 노동이 다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나름의 형태로 보수를 받지만, 창작물에 대한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지 않나. 나선프레스와 작업하는 작가들에게는 꼭 디자이너에게 일정 부분 저작료를 지불한다는 것을 알린다. 디자이너의 작업에 따라 그 생산물의 의미가 현격히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고 또 그런 협업에 열려 있는 이들이어서 아직까지는 이게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소설도 알고 보니 한 문장 한 문장 그대로 살리는 게 아니라 편집자의 역할이 큰 것 같더라.

번역도 옛날에는 고전적으로 번역자가 유령처럼 드러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게 윤리였는데 이제는 번역 주체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냥 까놓고 말해서 책은 진짜 다 같이 만드는 일이 맞다. 그런데 명시적으로는 모든 게 저자한테로만 간다. 그래서 계약 문제를 해결하는 게 되게 중요한 이슈인 것 같다.

계약에 관해서는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인지 더 설명한다면?

협업이 쉽지는 않은데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결과물의 퀄리티보다는 결국은 생산 조건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계약이 배분의 문제라면다른 하나는 출판사가 어떤 자본과 소스를 사용해서 책을 낼 것인가의 문제도 분명히 있다. 가능하면 예술제도 기금을 받아서 책 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기금에 너무 구속이 되고 호흡도 잃게 될 것 같아서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일단 이걸 낼 수 있는 돈을 모으기까지 책을 안 만드는 게 낫지 빨리 내려고 돈을 막 구하러 다니고 이러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이 나한테 중요한 것은 미술이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적이어서인 것 같다. 미술 작업이 기능을 발휘하는 멋지고 신비로운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그걸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미술 작가는 굉장히 소중하지만 그 외 다른 면면은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기능적이게 되는 책들을 만드는 게 목표다. 사실 아까 말한 출판사 아젠다에 따라 프로덕션을 시작한 책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함께 작업 중인 이들이 책을 만들던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자기가 작업하던 방식대로 몸을 움직이다가 책을 만들려고 몸을 움직이니까 다들 너무 어색해했다. 그래서 사실 몸 풀기만 하는 데 1년이 걸렸다. 그런데 기다려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얼마 전에 편집자의 일이 얼마나 돌봄 노동의 총체인지를 길게 얘기한 포스팅을 읽었는데 그 뒤로 상황이 변한 건 없지만 많은 게 좋아졌다. 편집 노동은 사람과 물건과 사회와 늘 함께 하는 작업이고때문에 강도 높은 돌봄 노동을 하는 거라고 이해를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무언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편집자가 그 정도로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편집자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협업은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사실은 좀 늘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기도 하다.

미술출판은 일차적으로는 미술애호가들이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벗어나서 독자를 확장한다고 한다면 어떤 노력들이 요구되는데 내 독자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출판 시장의 원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어떤 시장 전략을 세워서 어떻게 홍보하고 어떻게 침투할까 이런 걸 못한다. 그래서 쉽게 포기한 면이 있는데 그 대상은 너무 거대하고 막연해서 내가 아무리 내 수준에서 뭔가 노력한다 해도 도진개진일 것 같고 어차피 내가 지금 내가 뭘 해도 효과적으로 침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즉 나의 일종의 무능력을 인정해야겠다는 것이다.

초반에 출판사 규모를 설정할 때 진~짜 대박 나면 만 부 정도 파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다, 이렇게 설정한 게 있다. 학교 다닐 때 한 반에 서른 명이 있으면 한두 명 정도는 구석에서 책 보거나 쉬는 시간에 도서관 가는 애들이 있다. 좀 다른 거 보고 찾아 듣고 하는 애들. 수많은 모든 보편 독자들을 내가 다 설득할 수는 절대 없을 것이고 그래서 100만 부 팔 책을 만들 생각을 하면 애초에 불가능하고 프로덕션에서도 개념이나 입장 자체가 달라져야 되는 것이다.

책이 좋은 점은 그냥 아주 오래오래 묵혀놔도 상관 없다는 점 같다. 출판 시장이 대체로 한 달 안에 승부 못 보면은 안 된다고들 하지만. 그래서 자꾸 미래라는 시간성을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안 팔리더라도 내가 노력을 해서 어떤 가치가 형성이 될 수 있으면 오히려 나중에 이 책들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소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래서 시간을 조급하게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꾸 어린이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사의 아젠다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어린이에 대한 관념이 흥미롭다. 그림책이나 그런 쪽에서도 독자로서 어린이를 염두할 때 조카 때문에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이런 사적인 계기들이 있기도 한데 얘기를 듣다 보니 근데 나선프레스가 상정하는 어린이는 좀 다른 것 같다.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도 썼는데, 아주 관념적이고 독립적인 어린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계신 것 같다.

사실 어린이책 저자나 편집자들이 보면 나선프레스의 책이 무슨 어린이책이냐고 할 수도 있다. 내게 어린이 책이라고 했을 때 책이 얼마나 그들에게 적합한가보다는 그들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최근에 acc에서 강독 프로그램을 하나 기획해서 했는데 도서관 환상들분더 카머 두 권을 다뤘다. 책이 얼마나 우리를 능동적으로 사물에 접근하게끔 하는가가 기획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지식의 형태나 뭔가 다른 배움이 있으려면 어쨌든 누군가를 능동화시키는 장치들을 발명하는 게 필요하다. 박민하 작가의 책 같은 경우 지금 당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최첨단 과학들이 얼마나 사실은 판타지인지에 대해서 한번 의심을 해봐라 이런 결을 따라갈 수 있게끔 책에 장치를 많이 심어놨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는 사실 어린이가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에 준비하는 책은 어떤 책인가.

다이애나 테일러라는 뉴욕대 퍼포먼스 학과 교수가 쓴 퍼포먼스에 관한 책 퍼포먼스 퍼포먼스이다.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쓴 책은 아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쉽게 쓴 책이고 청소년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주로 북미 남미의 퍼포먼스 작업들을 다루고 있는데, 퍼포먼스 작업들을 다루다 보니 쎈 이미지가 많이 있다. 학부모들이 보면 난리가 날 수 있겠다고 잠깐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중학교 책장에 꽂혀 있으면 좋겠다. (웃음)


 

on-art-pulbishing.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