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로고는 무엇을 하는가?: 부산현대미술관 M.I 개발에 관한 대화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부산현대미술관, 2023) 참여 작업 유동적 미술관: 개념과 체계 연구(강문식&이한범)에 수록된 대화.

 

이한범 부산현대미술관의 현재 로고에 대해서부터 얘기해 볼까요? 현재 로고는 을숙도에 찾아오는 철새 떼의 군상을 섬의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기후가 변해서 더는 철새가 을숙도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죠. 지방자치단체에서 흔히 하는, 철새를 지역 특산물처럼 상징화 했다는 것이 좀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로고가 변화하는 상황에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강문식 로고 자체로 상황을 규정하고 형태로 도출하는 것은 사실은 좀 옛 방식인 건 맞아요. 5년 전 미술관 개관 당시에 그런 방식으로 로고가 만들어졌고 지금의 미술관 상황엔 적용이 어려운 상태가 된 거죠.

이한범 네. 이 문제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러고 보니 이건 ‘정체성’에 관한 개념과 입장 자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더라고요. 우리는 정체성이란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정체성이란 무수히 많은 교차성을 통해 형성되고 또 끊임없이 무너졌다 형성되길 반복하며 흐르고 변화하죠.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의 일면만을 상징화하는 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강문식 그게 가장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순간에는 가장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방식이라서 그렇죠.

이한범 시간의 개념이 도입됐을 때 상징은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는 것 같아요.

강문식 그런데 어떻게 보면 현재 부산현대미술관 로고는 철새가 날아가고 있는 형태이니까, 철새가 떠난 지금 상황에선 거짓이 아닐 수도 있죠(웃음). 거짓말까진 아니지만, 철새라는 존재 자체가 큰 의미가 없어진 느낌이네요.

이한범 제가 현재 로고를 보면서 생각했던 다른 문제 중 하나는, 서울이 아닌 ‘지역’ 미술관이 가진 강박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대개 지역에 기반한 기관은 지역의 장소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수한 면모를 설정하고 강조하게 돼버려요. 하지만 장소라는 것 또한 정체성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지정학은 상대적인 것이잖아요. 지역을 장소화 하면서 이를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일은 일종의 덫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역을 구분 짓고 만들면 모순되게도 중심이 생겨나 버리는 꼴인 거죠. 상징을 둘러싼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저는 불편했어요. 물론 특수성을 찾아내서 표명하는 일이 중요한 기관들이 있어요. 그런데 현대미술관이라는 기관이 과연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요? 또한 물론 구체적인 현실의 차이들을 모른척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추상화 과정으로 생성되는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는 있어요.

강문식 제가 생각하기에는 행정 제도가 추구하는 편의성 때문인 것 같아요. 명분을 내세우는 것. 또 현실적으로 비용이나 운영의 측면에서 쉬운 접근이죠. 물론 관습적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큰 숙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실제적인 숙제. 지역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라면 그걸 안고 가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괜찮게 풀어내는 게 숙제인 거죠.

이한범 제가 현재 부산현대미술관 로고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던 이슈는 크게 이 두 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M.I.를 만드는 건 그저 단순히 로고를 만드는 일에 그치는 것은 아니잖아요. 미술관에 필요한 모든 시각 체계, 상징체계를 설계하고 운영 원리를 제안하는 일이죠. 현재의 부산현대미술관 또한 세부적인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전시를 기획한 최상호 큐레이터가 알려준 실상은 주먹구구식으로 전혀 체계 없이 운영되는 모습이었어요. 담당자가 문서프로그램으로 문구 써서 사무실 프린터로 출력해서 덕지덕지 붙여 놓은 땜빵 같은 안내 방식들이요. 이런 현상이 왜 발생했을까요?

강문식 저는 한국적인 문화인 것도 같은데, 시스템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운용되는 경험을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만들어 놔도 활용한다는 생각보다는 당장 내가 바로바로 할 수 있는 걸 먼저 찾죠.

이한범 사용자 조건에 비추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일까요?

강문식 그것보다는 디자인 체계와 그 사용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낮은 것 같아요. 틀을 만들어 놔도 그 틀보다 변칙이 더 먹히는… 규정대로 하다 보면 번거롭고 효율적이지 않으니까 바로 인간 대 인간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그 룰은 깨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자체가 기본인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어떤 일이 돌아가는 방식의 기본이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은 그저 시각적으로 조형적으로만 잘 만들어진다고 되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그걸 활용하는 사람들까지도 큰 합의 안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디자인에까지 포함되어야 하는데,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합의는 없는 상태에서 디자인만 돼 있으니까 적용이 안 되는 거죠.

이한범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군요.

강문식 그런 전반적인 합의안에서 시각화되고 시스템이 짜여야 하는데, 그것 없이 시각적 결과물에 대한 용역만 있으니까 결국 적용되지 못하고 잘 붙지 못하는 것 같아요. 또 기관이 디자인 체계를 잘 이용하기 위해선 그것을 이끌어가는 누군가가 필요한데, 소수의 내부 디자이너들이 고군분투 하지만, 보통은 디자인 디렉터가 책임을 지는 디자인 부서가 미술관에 있는 경우를 한국에서는 아직 못 본거 같아요. 이것도 큰 이유죠. 디자인 팀에서 축이 되는 기준을 잡고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해 줘야 하는데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외부 디자이너들이 이런저런 미술관 이벤트와 관련해서 디자인을 하려 할 때 기존 시스템은 그냥 걸리적거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요. 물론 저는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제약이 디자인의 조건이 되는 게 재밌는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디자이너가 계속 그 룰을 어떻게 깰지 어떻게 피할지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이한범 보통 디자인 시스템을 개발하면 매뉴얼을 만들어서 엄격한 사용 규칙을 정해 놓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관과 디자이너 사이에 수직적 관계가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강제력이 완고하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그게 완벽하게 지켜지지는 못하잖아요. 언제나 오차와 실패의 가능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엄격하게 규칙을 설정해 놓게 보다는 열린 관계 자체를 규칙으로 포함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있을 때 뭔가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는 의지가 생기긴 하죠. 서울시립미술관이 얼마 전부터 새로운 로고를 쓰고 있는데, 디자이너들이 이 로고 사용하는 걸 난처해 한다고 들었어요. 예컨대 이 로고를 써야 하는 규정대로 포스터를 만들면 이런저런 조형적 시도를 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더라구요.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설명을 한번 살펴봤는데, 대표 로고가 하나 있고 그것을 기본 삼아 여러 분관마다 변형시켜서 쓰더라구요. 시립미술관은 산하에 기관이 아주 많으니까요. 이번 로고가 시립미술관이라는 그 기관의 구성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강문식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로고는 세로로 긴 형태여서 로고를 둘러싼 반경이 어느정도 비어 있어야만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기능할 수 있어요. 그 부분이 그냥 단순히 로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여백까지도 침범한다는 인상을 주죠. 그래서 새로운 디자인을 할 때 그 영역을 안고 간다기 보다는 피해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 고려할 부분이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이에요.

이한범 예전에 문식 씨가 보여준 예시가 어디 미술관이었죠? 포스터에 항상 세로선 두 개를 기본적으로 깔아 놓는…

강문식*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이요. 어떤 프레임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 선이 항상 포스터에 존재하는데, 그게 강렬하게 인식 되는 거죠. 제가 알기론 M.I. 개발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이 제안했던 것이 ‘프레임’이란 개념으로 알고 있어요. 미술관 자체를 프레임이라고 설정하고 그 안에 계속 변주되는 것을 가지고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켰어요. 그 선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프레임으로 규정되는 최소한의 연출인 것 같아요. 프레임이라고 해서 네모 박스로 해버리면 이게 조형적으로도 아름답지 않고 사용도 제한되고… 그래서 그렇게 풀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한범 형태가 완고하지 않아도 어떤 요소가 반복되면 아이덴티티처럼 인식될 수 있는 거네요.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의 M.I.도 저희가 자주 들여다봤던 작업이었죠.

강문식 휘트니미술관 M.I.의 경우 조형적으로 다른 것들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경쾌한 면도 있고, 좀 더 유동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로고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되어버리면 그건 그냥 하나의 조형물이 돼 버리는데, 휘트니 미술관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선은 조형물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이면서도 실질적 내용의 보조적 역할의 느낌이 더 강해서 사용자나 보는 사람에게 부담이 많이 없어요. 선들의 조합이 닫힌 형태가 아니잖아요. 단일폐곡선처럼 닫혀있지 않기 때문에 도형같이 면을 이루고 있지않아 더 유연하고 자유롭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요.

이한범 운이 좋네요. 이름의 첫 글자인 ‘W’가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강문식 재료가 좋은 거죠. 요리로 치면 너무 재료가 좋아서 그냥 소금만 뿌려도 맛있어지는 것처럼요. 재료가 좋았고 그것을 다루는 요리사도 훌륭했고… 그러니까 괜찮은 요리가 나온 게 아닌가… 재료가 살리기 어려운 상태일 때는 불가피하게 조미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게 경쾌함을 주진 않죠.

이한범 휘트니 미술관의 M.I.를 보면, 디자인이 적용되는 상황마다 끊임없이 ‘W’의 형태가 변해요. 변화한다 하더라도 계속 ‘W’를 상기시키고 지시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요.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롭고 상쾌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디자인이 좋은 이유는 그저 영민하게 조형해서가 아니라, 디자인의 시스템 자체가 미술관의 분위기, 그리고 운동성을 환기해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 미술관은 어딘지 열려 있고 유연해 보인다, 그리고 정지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물론 정말로 미술관이 그러한지, 그러니까 M.I.와 실제 미술관의 실천이 일치하는지를 따져 묻는 건 다른 비평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겠고요.

강문식 휘트니 미술관의 디자인을 부산현대미술관의 맥락에서 풀어보면 여기서 쓸 수 있는 건 B인데, 사실 ‘부산’은 여기 미술관에서만 쓰는 용어도 아니라 대표성을 가지기가 어렵죠. 모카(MoCA, Museum of Contemporary Art)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상징의 문제도 있지만 모두 형태 자체를 활용하기가 어려워요. 글자의 형태에서 시작해서 그걸 다루는 것이 제한적인 거죠.

이한범 그래서 저희가 발견한 것이 ‘of ’의 ‘o’였죠. ‘B’, ‘M’, ‘C’, ‘A’같이 자기 충족적으로 의미를 가진 무거운 글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연결의 기능만을 시켜주는 요소…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전체의 의미가 바뀌는 그런 기능적인 매개변수(parameter). 그런데 사실 ‘o’를 디자인의 핵심으로 상정하고 다루게 된 건 타이포그래피적 관점에서 비롯한 건 아니었죠. 이 얘기를 하려면 저희가 ‘흐름’ 혹은 ‘움직임’에 관한 모티프로 삼았던 ‘바람’에 대해서부터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강문식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 참여자들과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미술관에서 첫 워크숍을 진행하고 나서, 단순하게는 그냥 ‘로고가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에 살 때 지나다니며 본 브루클린 음악원 (BAM, Brooklyn Academy of Music)의 간판이 기억나는데, 산세리프로 단순하게 쓰인 ‘B’, ‘A’, ‘M’이라는 글자가 하나씩 각자 돌아가는 움직이는 간판이었어요. 움직임과 관련해서 부산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바람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네요.

이한범 바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었죠. 다양한 흐름에 대한 상념.

강문식 움직임에는 바람이 개입된 경우가 많잖아요. 해변에 있으니 바람도 많이 불고… 해양 도시는 바람의 영향이 크죠. 오래전 외부에서 배가 들어올 때도 바람의 흐름에 따라 들어왔을 거고 을숙도의 철새도 결국에는 바람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을 거고… 항구에 정박했다 떠나는 배들,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그런 것들에는 바람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이한범 바다에 관한 사유는 많아요. 바다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이고, 아주 구체적인 경험이고, 무엇보다 어떤 영역으로 인식되니까요. 하지만 바람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존재지만 비가시적이고 형상 없이 유동적일 뿐이니까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힘이죠. 표현하기도 어렵고.

강문식 저는 바람을 생각하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엄청난 에너지임에도 불구하고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고이지 않기 때문에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 정착되고 고이면 권력이 되잖아요. 농사를 지어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고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전쟁이란 걸 하게 되는 것처럼요. 소유하지 않는 것. 저는 그게 현대미술관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한범 같은 맥락이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동시대 미술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소유라는 행위가 아니라, 외부의 크고 작은 움직임들, 여러 방향으로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현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진동으로서의 실재에 반응하고 그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해석하고 재생산해서 다시 흘려 보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주 작은 바람도 감지하고 또 모순된 흐름을 포괄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그것들을 힘써서 마주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어요. 미술관이 바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같은 큰 유동성을 계속 가시화하고 등장시켜 주는 역할. 바람이 미술관의 역할을 규정하는 사고방식에 도입되었을 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줘요.

강문식 바람에는 또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담겨 있잖아요. 온도, 거기에 실려 있는 냄새… 미술관이 어떤 감수성과 감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죠.

이한범 바람을 모티프로 삼은 이 생각이, 저는 부산현대 미술관이 지난 5년간 했던 작업과도 잘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보기에 이 미술관은 좀 유별나요. 지난 5년 동안 꽤나 강도 높게 현실에 대한 분석적 비판을 ‘전시 만들기’를 통해 수행해 왔어요. 제대로 표명된 적은 없었지만 아마 관객들은 경험적으로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감각이고 이해일 거예요. 부산현대미술관은 현실에 대해서 예민함을 곤두세우고 통상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주된 사회문화 형성 논리에 따르지 않고 현실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려고 노력하고 시도해 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공기같은 것,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곳은 이미 바람을 마주하는 장소였다고도 할 수 있죠. 저에게 부산현대미술관은 무척 거칠게 현실에 육박하는 감각으로 기억돼요. 전시를 언급하기는 했는데, 미술관이라는 특수성에서 바람에 반응한 결과는 바로 전시라는 형식으로 가장 자주 등장해요. 유의할 것은 전시란 것 또한 하나의 형식이자 방법일 뿐이지,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인 가능성을 가진 인공물이 아닙니다. 전시가 변화한 바람에 반응하기 어려운 형식이라면 미술관은 다른 형식과 방법을 발명해야 하겠죠. 그런 것을 일종의 매개물이라고 해보죠. 바람을 등장시키는 데 있어서 매개물은 사실 가장 핵심적인 조건입니다. 바람은 매개물 없이는 설명되기 힘든 존재죠. 손쉬운 예로 바람을 가시화하는 장치인 깃발이나 풍향계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들의 특성은 유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견고한 정육면체는 바람 속에 있어도 절대로 바람을 표현하지 못해요. 유동적인 물질성과 움직임의 가능성. 바꾸어 말하면, 미술관이 바람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도 하죠.

강문식 프로그램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산현대미술관에 대한 건축적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곳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이한범 맞아요.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저희가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죠. 이곳은 뭔가 움직임이 있다는 느낌이 안 든다고. 이 공간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걸으면서 그런 얘기를 나눴던 게 기억나네요.

강문식 그래서 사이니지 같은 안내 표식을 통해서 건물 공간 자체에 움직임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조형적인 움직임을 만들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 공간 안에 바람 같은 유동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좋겠다…

이한범 그래서 이다미 건축가를 섭외했죠.

강문식 맞아요. 단순히 사이니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디자인 하는 맥락으로 작업을 요청했죠. 다미 씨는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고,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와 작업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저희의 디자인 방향성에 따라 공간을 재생산한다는 맥락에서 사이니지, 즉 조형물 만들기를 수행하길 바란 거죠.

이한범 다미 씨의 사이니지 조형물 시안을 보면, 정지해 있는 물체인데 사건을 상상하게 만들어요. 바람에 날려갈 것 같거나 날아가는 중인 종이. 정지해 있지만 움직임을 만들고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고, 앞뒤로 이어지는 시간과 사건 전체를 환기한다는 것은 제가 봐 온 문식 씨 작업의 핵심과도 연결되는 점이에요. 저는 강문식이라는 디자이너의 작업은 그래픽을 통해 어떤 사건의 잠재성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여기서 잠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식 씨의 그래픽은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가 데려다 놓는 분명한 방향성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떤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 잠시 정지해 있는 순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그저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 방식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문식 씨의 작업을 보면서 디자인의 근원적인 의미로서의 설계(engineering)를 떠올리곤 해요.

강문식 저는 작업을 할 때, 디자인한 것이 스스로 움직이게끔 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이 다른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순간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요. 예를 들면 소비자들.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에너지와 움직임이 가정된 개념이잖아요. 내가 만든 걸 어딘가에 놓았을 때, 누군가가 그것을 소비하는 순간 자체를 상상해요. 매우 다양한 양태의 가능성이 있겠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거나 반대로 불편해 하며 못 받아들이는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작업할 때 그런 관계까지도 염두에 두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게 움직임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이한범 그렇죠. 결국 디자인이라는 것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서 작동하는 거니까.

강문식 그런 맥락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가 피슐리 & 바이스(Peter Fischli & David Weiss)의 동물(Animal)(1986)이에요. 이 작업은 적어도 제게는 동물의 형태 자체로는 완성되지 않고 허리를 숙여서 구멍을 통해 오브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까지 포함되어야 작업으로 성립해요. 내가 만든 것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소비자가 많다는 것은 작업이 사람들과 많이 맞닥뜨린다는 거고 변수가 늘어나는 만큼 재밌는 순간들이 많아진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건 제가 어느 정도 의도는 하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요. 그런 불안정한 상황 자체가 디자이너로서 흥미로워요.

이한범 움직임이라는 개념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일이 오늘날 더 중요해지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움직이는 그래픽을 통해 눈길을 사로잡는 일이 흔한데, 오히려 표면적으로 화려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외부적 움직임은 너무 단순하거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죠. 그런 역설적인 것이 상업적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 같고요. 다채로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인 비극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움직임이 넘쳐나는 곳에서,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정지된 것이 오히려 종종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아마 저희가 곧 전시장에 직접 가 작업하게 될 그리드 체계 연구: 벽화 드로잉도 이것과 연관될 수도 있겠어요. 엄격한 규칙을 가진 그리드가 오차를 포함하고 조금씩 무너져나갈 때 그게 어떤 미묘하게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강문식 그래픽을 움직이게 만들면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에 한계를 만들 수도 있죠.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이들에게 동화를 보여줄 때, 항상 소리를 먼저 들려준대요. 그러면 자기만의 상상이 생기니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는 감각을 더 귀하게 여기는 거죠. 또 다른 어떤 분은 동화책을 만드시는데, 텍스트나 특정한 형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색이 변주되는 지면을 보여주면서 어린이들이 자기 식대로 상상하고 그 각각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세요. 이것도 좀 비슷한 개념이고 지향인 것 같아요. 상상의 여지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흥미로운 부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마련하는 것이 미술관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상상은 일종의 기대감이고 기대감은 즐겁게 살아가는 원동력이기도 하잖아요.

이한범 그걸 제 방식대로 생각해 보자면, 제가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디자인이 가진 픽션 능력 때문이에요. 어떤 감각을 자극해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대안 현실을 구성하는 체계를 설계하고 가능 현실을 구체적으로 물질화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요.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이 그런 식으로 디자인을 다뤘죠. 그런데 픽션 능력을 발휘하는 디자인, 허구를 환기시키는 실천들이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사변적 탐색보다는 가시성에 더 몰두하죠. 물론, 이건 저의 관심 영역이지 모든 디자인이 픽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말은 아닙니다. 픽션 능력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인 것 같아요. 강하거나 약하거나.

강문식 저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걸 작업을 좋아하는데, 그러면 관람자가 창작자의 일부가 되거든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에서는 그 여지를 제한해야 더 많고 빠른 소비가 일어나요.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상상 능력이 없어지고… 예컨대 지도라는 이미지가 능동적으로 공간을 탐험하는 것을 부추겼다면 내비게이션은 아주 분명하고 효율적으로 목적지로 우리를 안내하잖아요. 지도와 비교해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고도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만약 어느 순간 디지털 정보가 사라진다면…? 상상을 제한할수록 스스로 뭔가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도 제한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한 상상하기를 점점 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이한범 픽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에는 형식이 중요한 거 같아요. 예컨대, 어린이들의 장난감은 매우 단순한 모양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야 이러저러하게 가지고 놀게 되니까요. 형식은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고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관객의 참여와 능동성, 그러니까 해방적 주체성을 제안하고 주장하는 작업이나 전시는 많지만 정작 그 수행적 가능성을 열어 두는 형식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는 잘 보지 못했어요. 사실 그건 실현하기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능동성과 상상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잘 설계해야 하는 건데…

강문식 사실 그런 것들은 실패의 위험성이 크잖아요. 미묘한 거고 다루기 어렵고…

이한범 여지를 열어 두면 안정성이 떨어지죠. 유의미한 결과나 의도한 결과가 도출될 확률이 낮아져요.

강문식 저는 꼭 필요한 일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합리적이지 않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여지가 사회적으로 마련되면 좋은데. 지금 시대는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가성비’가 가치 설정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것처럼요. 싼값에 만들어진 물건은 가성비가 좋은 대신 사물로서의 역량에 한계가 있죠. 다양한 사물이 만드는 다양한 경계를 가진 사회가 좀 더 즐겁지 않을까…

이한범 동시대 미술관이란 스스로가 그런 상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겠죠?

강문식 상품으로서의 물건은 상업적인 맥락에서 당연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산될 수 있지만, 미술관은 비합리적인 것을 위한 장소여야 하는거 같아요. 비합리적인 것을 구현하기 위해 최대한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공간.

이한범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가 지금 만들고 있는 M.I., 그러니까 이 디자인이 제안하는 전반적인 작동 체계는 불안정성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 불안정성을 전제하고, 불안정성을 축으로 전개되고 불안정성을 안정화 하려는 게 아니라 불안정성을 확장하려는 시스템. 보통 우리는 노이즈는 정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보이론에서는 사실 노이즈가 가장 풍부한 정보를 지닌 상태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일 뿐인 것이지… 보통의 상징이 노이즈에서 형상을 추출하는 일이라면 저희의 작업은 반대로 노이즈로 나아가려고 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아마 이건 보수적인 제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감수할 게 너무 많고 관리하기가 너무 골치 아프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게 여기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수용될 가능성이 비교적 크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 방향성에 내기를 걸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미술관의 지난 실천들을 보면 현실 변화의 의지를 강하게 품고 있어요. 기존 미술 제도의 관행 자체에 대해서도 강하게 재고하려는 시도도 여럿 있었고요. 이 미술관의 작업들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미래’는 그저 기획의 용어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비장하게 다뤄지고 있어요. 부산현대미술관이 끊임없이 제안하는 대안 현실은 크게 세 축으로 상상되고 있어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 기술에 대한 성찰, 생태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 현실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미술관이라면, 저희가 제안하는 이러한 불안정성에 기반한 유동성 높은 상징체계를 수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현실의 견고함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견고함을 강화하려는 제도들에서는 절대로 수용 못 할 것이죠.

강문식 그게 일종의 리스크니까요.

이한범 급진적인 미술관들은 항상 스스로 리스크를 감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반 아베 미술관이 이스라엘의 예술가 그룹 퍼블릭 무브먼트(Public Movement)의 배치(Positions)(2009)라는 작업을 소장한 방식이에요. 배치는 매년 그해의 주요한 사회정치적 이슈를 살피고 이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광장에서 시민과 주고받는 퍼포먼스인데, 반 아베 미술관은 이 작업을 소장하는 계약을 하면서 매년마다 미술관이 직접 정치적 질문을 탐색해야 하는 임무를 떠안게 돼요. 그러니까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수행’하는 역할을 자처하게 되는 거죠. 배치는 참여자를 능동화하는 역량을 지닌 퍼포먼스이고, 미술관은 여기에 참여하기를 결정하면서 스스로가 능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겁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작품의 운동적 역량을 미술관이 알아채고 그 운동성이 미술관을 움직이게끔 하도록 한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미술관이 급진적이기 위해선 말만 그럴듯하게 급진적일 게 아니라, 안정화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운동성을 발명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 사례였습니다.

강문식 예측성이 떨어질수록 불안정성이 높아지는데, 그것을 감수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자칫 촌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한범 미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여러 잠재적 가능성들 중에 어떤 것이 현실화하는 일이고, 현재의 관성과는 다른 힘에 의해서 등장하는 현실이 대안적인 미래라고 한다면 분명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선 다른 운동성을 도입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디자인이 그런 운동성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술관을 해석하고 대상화 하면서 상징화 하는 방식은 많았지만, 이렇게 미술관의 운동성 자체를 제안하고 그걸 미술관이 수행하게끔 하는 사례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희가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 운동성, 다른 윤리와 원리에 기반한 체계라고 이해하는 편이 적확할 것 같아요.

강문식 이 디자인 시스템이 그리드뿐만 아니라 그리드가 비정형으로 확장하고 변주되는 것까지를 포함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서, 단순한 형태를 최소한으로 유지한다면 그것이 변주되고 변화하더라도 크게 보면 변화와 변주의 역량을 내재한 것으로서 인식되면서 아이덴티티처럼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러니까 사용에 따라 정체성이 계속 만들어지고 또 변화하는 거죠. 바람에 따라 확산하고 이동하는 것처럼… 그러면 ‘◦’ 라는 형태는 확장 가능성과 변화 가능성의 상징으로서 인식될 수 있겠죠. 변화가 다양할수록 오히려 더 의미심장한 일관성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한범 맞아요. 일관성을 그런 개념으로 다룰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외적 형태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사실 그걸 추동하는 힘을 의미심장하게 관리하는 것. 힘의 일관성.

강문식 로고에 포함된 ‘◦’ 이 하나의 구멍처럼 바람이 나오는 점이 되고, 계속 바람이 통과하면서 연결되는 걸 엮어내는 그런 개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이라는 형태가 저는 사실은 이미 미술관 M.I.에 많이 사용되어서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런 관점과 접근이라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흥미로워요.

이한범 그렇죠. 저희는 ‘◦’ 을 굉장히 기능적인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뭔가로 변하거나 어딘가로 이동하기 직전의 예비적인 상태로 바라보는 거니까. 당장이라도 뭔가로 변신하고 움직이고 바뀔 수 있는 그런 가능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 이지 다른 어떤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죠. 그래서 로고 시안이 아주 담백하지만 묘한 긴장감을 주는 모습으로 나온 게 저는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사실은 제일 설득력 있는게 오히려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뭔가 캐릭터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 체계 바깥에 대해 큰 관심이 있어요. 얼마 전 극작가이신 김연재 작가께서 제게 메신저로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는데요, 그리스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 원판이었어요. 상형문자가 나선형으로 배치된 이 문자 체계는 여지껏 전혀 해독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 체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형성된 문자 체계이기 때문에요. 김연재 작가가 사진과 함께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의 글도 보내주셨었는데, 거기서 브라운은 점토 원판은 ‘반영적 표상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 우리는 ‘투영적 표상세계’에 속해있다고 말해요. 이런 고고학적 대상을 볼 때면 저는 사실 아주 먼 과거가 미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오늘날의 타이포그래피가 특정 문자 체계(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역사에 기반한다면, 그것을 벗어난 세계에서의 문자 체계와 관련한 타이포그래피를 상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것은 어떤 가능한 미래의 구성 원리를 제안하고 실험하는 강력한 픽션 역량으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문식 그것을 비단 어떤 문자를 개발한다는 관점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을 조금씩 다르게 접근해 보는 것도 역시 상상일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여지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타이포그래피나 언어로 그런 형식적 실험을 한 사례는 많긴 하죠. 특정한 형태를 새롭게 읽는 방식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름의 경계심을 안고 계속 조금은 빗겨 난 상태를 고민해 보는 다양한 실험을 하는 것 자체가 상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저희의 작업 시간을 돌아보면, 큰 바람이 한번 몰아친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뒤섞이고 논의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정해진 것 없이 헤매는 느낌이어서 굉장한 불안감이 있었던 반면 또 즐거운 마음으로 문제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단계들을 넘어가면서, 처음에는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던 아이디어가 작게나마 구체화되고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이 개념을 정리하기 위한 다양한 작업은 돌이켜보면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와는 달랐어요. 불안정성 속에서 무언가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 자체가 저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한범 맞아요. 저도 이 작업에 몰입했던 시간이 무척 즐거웠어요. 그런데 이 즐거움은 저희가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마련했던 연구 조사 과정과 생산 방식에 기인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저희 둘이 작가주의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단독으로 만들려 하기 보다는,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참여시켜서 계속 서로를 살피며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양한 형태 변화와 힘의 작용, 흐름의 모델을 조사하기 위해 강수연 작가, 안유민 디자이너, 이효준 디자이너와 긴 시간 드로잉 워크숍을 진행했고, 이다미 건축가와는 공간을 움직이는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고, 문식 씨는 최석훈 디자이너와 새로운 서체를 천천히 함께 만들어 나갔죠. 저는 정소영 소설가에게 어린이들을 독자로 상정한 글을 한편 의뢰하기도 했고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민형 디자이너, 진새롬 디자이너, 제이콥 페인 바버가 각각 만들고 있는 영상 작업도 최종적으로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돼요. 저희의 생각과 제안을 각각의 창작자들이 자율적으로 해석하고 탐색하면서 만들어 낸 이미지와 조형, 텍스트는 일종의 예술적 조사(artistic research)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시는 이 연구 조사 과정의 중간 정리 단계일 것이고… 그래서 자연스레 저희의 전시장은 각종 디자인 어플리케이션 시안이 아니라 이 디자인의 핵심적인 운동성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이미지, 텍스트, 사물 등의) 파편들을 배치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번 전시는 최종에 가까운 시안을 경연하는 자리가 아니라 미술관의 정체성과 디자인의 관계에 관한 복잡한 문제를 다루며 미술관 그리고 시민들과 이 일에 관해 대화하는 장소라고 그 기획의도를 해석했어요. 그래서 전시장 벽면을 결과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저희 디자인의 핵심적인 콘셉트인 ‘변화 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기회로 삼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이제 곧 부산으로 내려가 그리드가 변형되는 시퀀스를 직접 손으로 그려 나가 볼 텐데, 벽화가 어떻게 나올지 정말 기대가 되네요.

강문식 어떤 리스크를 안으면서도 협업을 시도하는 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목표를 향해 직진하기보다는 살짝씩 빗겨 나가면서 서로 다른 여러 움직임이 만들어지게 된 것 자체가, 이번 디자인 시스템의 개념이 실제로 적용되고 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개념을 던져 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방식으로 계속 상상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어야 하는 게 맞는 거죠. 이 짧은 시간 안에 한다는 것이 굉장히 리스크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모든 변수 자체가 사실은 이 작업이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아이덴티티일 수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동양적인 것 같기도 하고 유기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시스템 안에서 규정된 것을 수행해야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변하더라도 거기에 따라 서로가 맞춰지고 변화해 가는… 공기나 물 같은 어떤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일하는 방식이 저희가 제안한 아이덴티티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일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이한범 생산 방식, 생산 과정이 어떻게 설계되느냐는 정말 중요한 것 같기는 해요.

강문식 빠른 성장과 가시적인 성취를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그게 하달되고 예상대로 생산이 될 때 가장 효율이 좋고 완성도도 높은데, 어떤 위험성을 안고 가지 않으면 새로운 걸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이 작업이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 자체가 저에게는 새롭고 의미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그래서 디자인을 하면서 재밌었어요. 이런 과정이 결과적으로 M.I.로서 구현이 되고 미술관이 실제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계속 확장되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또 생겨요. 이런 방식이 기획자, 예술가, 디자이너, 혹은 어떤 이들에게 전달되고 연결된다면 상상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현상의 가교 역할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한범 외형적인 건 바뀌어도 그걸 떠받치는 운동성의 원리가 DNA처럼 전승되고.

강문식 보통 기관의 책임자들이 바뀌면 모든 것들이 새로 바뀔 수 있기 마련인데, 아주 단순한 ‘◦’이라는 형태와 미술관의 역할이 바뀌지 않고 계속 전달된다면 이 미술관의 전체적인 정체성은 크게 봤을 때는 새로운 형태가 나올수록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변화가 굉장히 심할수록 오히려 더 재밌게 일관적으로 유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한범 유동성이 큰 상태 말이죠.

강문식 유동성이 크면 클수록 기존 시스템에서는 그게 완전 전복이 돼서 다른 게 돼 버리는데 이 개념 안에서는 변화가 크면 클수록 더 흥미로운 확장이 된다, 이런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한범 저희 이 프로젝트가 그런 불안정성의 체계를 한 기관이 실제로 사용하도록 정밀하게 설계하고 마련하기까지는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문식 함께 협업한 사람들이 이번 작업을 통해서 자기만의 상상을 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이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사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 같기도 해요. 저희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증명이기도 한 것 같고요. 상상의 여지를 공유했을 때 다들 좀 기분 좋게 작업에 임했던 것 같네요.

이한범 그렇네요. 지금 예술 제도의 경도된 문화에서는 생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가 쉽지 않죠. 이건 정말 중요한 면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 알게 된 것은 이후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연결되고 어떠한 결과물로든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문식 저는 이런 걸 항상 상상하긴 했지만, 구현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예산이 있었고 참여자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프로젝트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보는 것을 비로소 시도해 볼 수 있었어요. 분명 어떤 성취가 있는 건 맞고… 특히 전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게 저에게는 좀 재밌는 기획이에요. 보통은 평면적 결과물만을 생각하면서 시안을 만들어 보여주는데,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입체적인 공간에서 펼쳐 놔야 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개입이 필요해지고 네 팀이 각각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 것 같은 예상을 하는 거죠. 보통의 디자인 일에서 하나의 축이 더 생겨버린 것이니까. 그래서 이번 일이 재밌게 느껴져요.

이한범 저희가 이번 과업을 비롯해 전시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시안을 보여주는 일보다는 콘셉트를 감각적으로 제안하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강문식 그게 저희가 해오던 훈련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상상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이한범 만약 저희가 선발된다면 이 다음 단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근육을 써야겠죠. 선발되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보다는 다음 단계에서 맞닥뜨릴 많은 문제들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 해결하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설레요. 기대가 되고요.

강문식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종이 위에 계속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저는 계속 동그란 원을 일정하게 그려 나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중간에 조금씩 어긋나게 되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근육을 많이 쓰게 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심점에서 중간쯤 갈 때까지는 컨트롤이 안될 것만 같고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감이 큰 상태에서 원을 그렸는데, 종이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서 그리기가 다시 컨트롤되면서 안정감이 되찾아지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면서 깨달았어요. 원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운동이 어느 정도까지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안정성이 떨어지는 일이지만, 즉 가장자리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예측할 수 없고 흥미롭게 진행되다가, 틀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아, 결국에는 틀이 없어야 하는구나, 왜냐하면 틀이 있음으로써 다시 안정이 주어지니까요. 이 틀을 없애 보는 것, 이게 다음 목표가 되어야 하겠네요. 공간의 열린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