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2022 서울국제 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

2022 서울국제 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 글로컬/장편 부문 심사평 & 프로그램 노트.

 

review

심사를 진행하는 동안, 두 질문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첫째, 네마프(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는 무엇을 기대하는 장소인가? 둘째, 영상 예술과 그 작품은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가? 수많은 작품들 중 몇몇을 가려내는 일은 이 질문에 대답하고 또 질문을 포개어 보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두 질문 모두에서 ‘기대하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나는 ‘대안’이라는 것을 무언가를 기다리기, 나아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불러 오기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무언가’라는 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 바깥의 것들을 뜻하고 그런 것이어야만 ‘대안’과 ‘기대하다’의 관계는 성립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영화가 어떻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영화를 통해 기대를 하는’ 작품들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이런 행위들이 보여지는 장소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되돌아 숙고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rogram note

트리 하우스

민 키 쯔엉 Minh Quy Truong
2021 Singapore 84min Color Sci-fi, Documentary

트리 하우스는 집에 관한 영화다. 보다 세심히 말하자면, 집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묻고 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영화다. 숲, 동굴, 무덤을 집으로 삼는 이들의 문화는 자연과 인간, 산 것과 죽은 것, 몸과 영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의 세계 안에서 통합한다. 벽이 기둥을 감싸고, 지붕이 벽에 얹혀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모든 것들에 열려 있기에 집은 가능하고 열려 있어서 이야기가 끊임없이 새로운 기억을 생성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또한 그런 것이어야만 하지 않은가, 고민한다. 하지만 숲과 동굴과 무덤의 거주자들은 누군가에게는 집이지만 그들에겐 집이 아닌 곳으로 이주되는데, 그들을 끌고 나오는 것은 군인들과 카메라다. 그렇다면 지금의 영화란 사실은 불에 타고 남은 숯더미가 된 집인 것이 아닐까? 트리 하우스가 2045년 화성으로 이주한 공상적 인물을 도입한 것은 영화로써 집을 말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득히 먼 거리에서, 잃고 잊힌 것으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이다.

 

더 스카이 이즈 온 파이어

에마뉘엘 판 데르 아우에라 Emmanuel Van der Auwera
2019 Belgium 14min 38sec Color Experimental

더 스카이 이즈 온 파이어는 디지털 환경의 기술적 장치와 데이터가 어떠한 기억을 재생산하는지를 탐색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일종의 폐허와 같은 리얼리티다. 스마트폰의 앱을 사용하여 스캐닝한 마이애미의 뒷골목 풍경은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한 도시 같다. 한편으로 이것은 지금의 시대가 고고학적 발굴의 대상이 되었을 때, 아주 먼 미래의 누군가가 재구성할 현재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표면만 남아 엉겨 붙은 스산한 이미지는, 오늘날의 기술적 현실이 역사를 구성하는 일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역사적인 시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불면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바벨

메기 루스타모바 Meggy Rustamova
2019 Belgium 8min Color Documentary

화면에 등장한 중년 여성은 이제는 사용하는 이가 거의 사라진 아시리아어를 말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말을 불러 오기 위해 애를 쓰는 그 형상은, 반대로 이제 막 말을 배워 뱉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이 영화는 망각된 언어, 기억, 그리고 어떤 세계에 관하여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이 된다. 영화는 기억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불러오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잊힌 단어를 말함으로써, 가라 앉아 있던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을 찾아 꺼내 놓는 화면 속 형상처럼 말이다.

 

메모리

네레아 바로스 Nerea Barros
2021 Spain 15min 36sec Color Documentary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한 어부에 관한 전설을 말해준다. 이야기 속에서 어부가 살려 준 황금 물고기는 어부의 소원을 들어 주며 그에게 풍요를 선물했다. 하지만 어부가 바다를 가지고 싶다고 하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바다에 관련하여 인간이 어떻게 그것과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한 세계의 신화라면, 이 영화는 그 신화가 가능했던 세계가 끝난 이후 즉 신화가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바다에 관해 말하지만 손녀의 현실에는 황량한 땅 뿐 바다는 더는 없다. 신화를 더는 좇을 수 없는 뒤바뀐 조건 속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신화는 이어지고 기억되어야 한다면, 그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쓰어야 하나? 우리는 다음의 세대에게 너무 많은 어려움을 남겨놓고 있다.

 

융가이 7020

라켈 칼보 라랄데, 엘레나 몰리나 메리노 Raquel Calvo Larralde, Elena Molina Merino
2021 Spain 19min Color Documentary

1970년 우아스카란 산의 눈사태로 인해 융가이가 사라진지 5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당시의 이 사건을 회고하는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다. 융가이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생존자들의 도시는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이 울려 퍼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도시 곳곳에 그리고 사람들에 스며 있는 오래된 공동의 기억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기억하기는 그저 기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아스카란 산의 얼음은 환경 오염으로 인해 녹고 있고, 기억 속에만 있던 그 재난은 다시 현실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미래를 위한 일이 된다.

 

심연

알레한드로 알론소 Alejandro Alonso
2021 France, Cuba 30min Color Documentary

쿠바의 바히아 혼다에서 쓸모가 다한 폐선박을 해체하는 라우델은 어릴 적 우연히 보게 되었던 미지의 빛을 잊지 못한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그에게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라우델을 어둠 속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다. 라우델은 “잠자는 동안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죽음의 정적만이 가득한 폐허의 배 안에서 새하얀 새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고 빛을 가지지 못했지만, 등대에 올라 검은 바다를 향해 빛을 쏘아 보낸다. 어둠, 라우델, 그리고 빛은 어떤 특정 현실에 대한 재현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 영화가 요청하는 우리가 구성해야 할 믿음의 형태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스로 미지의 빛 그 자체가 되려는 것일 테다.

 

이성 혹은 힘으로

지아렐라 아라야 베가 Giarella Araya Vega
2021 Chile 18min Color fiction

칠레 내륙의 알토 엘 로아의 한 마을에서 친구들,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울 파니리는 아타카마 원주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무리의 군인이 사울을 어딘가로 강제로 끌고 간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학교다. 군부 독재 정권에 의해 설립된, 원주민의 존재를 지우고 국가 권력 아래 단일한 칠레 만들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훈육 기관 말이다. 친구들과 달리 현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울은 그곳에서 점점 피폐해져 간다. 그리고 어린 그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한, 혹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의 선택은 비극일까? 아니면 가장 저항적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