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제도 아닌 역량

월간미술 2023년 6월호에 수록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연재된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의 시작을 알리는 글에서 유운성 비평가는 이 연재가 다루는 작품의 선정 기준에 대해 “오늘날의 실험영화, 보다 폭넓게는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과 공연 등 여러 예술영역들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오디오비주얼 실천들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할 수 있는 역사적 작업들에 주목”했음을 말한다.1이 연재에 뒤늦게 참여했던 나는 이와 같은 기획 의도에 비추어 ‘영토 없음’에 대해 이를 ‘어떠한 역사와 제도에도 속하지도 않음’, 즉 ‘구획되어 구분되는 자기 장소를 가지지 않음’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는 편협한 해석이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의 나는 ‘영토 없는 영화’에 대해 ‘여러 영토를 가로지르는 영화’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어떤 영화들은, 어떤 예술 작품들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여러 장소를 가로지른다. 여기서 장소란 이름 있는 땅들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름 없는 대지를 향해서 또한 걸어간다. 그런 작품들은 제도들의 시점에서 보자면 여기저기를 배회하거나 점멸하는 빛처럼 출몰했다 사라지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작품이 가진 ‘역량’의 문제라고 본다. 말하자면 어떤 작품들은 ‘영토 없음’의 역량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제도의 문제가 아닌 역량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작업들은 하염없이 이름 없는 대지를 걷는 시간이 우리에게 등장하여 보이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일 것이다. 제도의 관점으로만 접근한다면 이것들의 독특한 장소성은 제대로 다루어질 수 없다. 영화와 미술 사이에서의 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 광활한 회색 영역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여전히 제도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작업들이 있지만 당대는 그러한 작업들에 대한 사유가 궁핍해져만 간다.

‘역량’의 영화들은 대개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의심을 품고 있다. ‘영화’라는 운동성을 ‘영화’라는 이름에서 구분해 낸다. ‘무빙 이미지’는 그 구분의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다른 이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량의 영화들은 이름을 충실히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운동성을 탐구하고 재생산하고자 한다. 이름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사실 그 이름은 영화의 운동성 자체와 임의적으로만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량의 영화들은 제도 자체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변형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혹은, 그게 아니라면 밀려나고 무시된다. 제도는 반복되는 리듬을 안정화하고 인준하는 관성이 있는 반면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충격을 감지하고 수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현대미술의 제도는 제도 자체를 공격하고 의심하는 힘에 의해 추동되었기에 충격을 넉넉히 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충격과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노이즈마저 양식화하고 미학화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그 제도적 힘이 더욱 강하고 정교하다. 나는 2016년 창간된 영상예술 비평지 오큘로의 편집자로 줄곧 참여해 왔는데, 돌이켜보면 오큘로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영화적 역량을 다루기 위해 등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표면적으로는 ‘영화’와 ‘미술’을 오가는 영상 작업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지만, 사실은 두 제도 모두에서 포섭되지 못하거나 두 제도 모두에서 곤혹스럽게 여겨지는, 하지만 오디오비주얼을 통해 무언가-어딘가를 열어젖히기를 시도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이 영역의 것들을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막막한 일이었다.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연재에서 내가 처음으로 쓴 글은 백남준의 영화를 위한 선(1964)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 작업이 대표적인 ‘영토 없음’의 역량을 가진 영화라고 여긴다. 이 작업은 영화와 미술이라는 문화적 제도의 장소들을 모두 비껴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장소의 구성 원리를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촬영되지 않는 빈 필름을 영사함으로써 영화의 환영적 능력이 발가벗겨지고, 영화의 제도를 구성하는 다양한 장치들의 구성만이 가시화된다. 이에 영화는 이미지의 연쇄를 바라보는 일을 요구하지 않고 참여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임의접속 함으로써 시간성을 변형하고 생성적 관계의 모델을 유도하는 기술적 매체가 된다. 1965년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의 행사 뉴 시네마 페스티벌Ⅰ에서 이 작업을 상영할 때 백남준은 영사기와 화면 사이 공간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직접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연극적인 면모와 미술가라는 백남준의 정체성 때문에 영화를 위한 선은 여러 인접 예술 장르에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작업은 지금 여기 없는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그것을 불러들이고자 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어떠한 장소에도 속하지 않고자 하며, 그렇기에 동시에 여러 장소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 역설이 생긴다.

2022년, 영화 비평지 마테리알 6호에 리베카 솔닛의 그림자의 강 서평을 기고하면서 나는 이 책이 건드리는 영화에 대한 깊은 숙고를 전달하고 싶었다. 솔닛은 머이브릿지라는 현대의 기원적 형상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근원에 대해 사유하고, 우리가 지금 ‘영화’라고 부르는 것을 바로 그 현대성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여기서 현대성이란 모든 정주해 있는 것을 이동 가능한 대상으로, 교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일과 관련한다. 철도와 영화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림자의 강』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은 ‘기술’이라는 것에 대한 솔닛의 정의인데, 솔닛은 “기술이란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이다.”2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정의에 따르면, 철도와 영화만큼이나 당시 서부 개척자들과 전쟁했던 원주민 모도크족의 제의 또한 하나의 기술이고, 지금 여기 없는 대상을 가져오려 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지 않다. 그저 우리는 개척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솔닛의 이러한 숙고를 밀고 나가 보면, 결국 하나의 제도라는 것은 임의적인 것이며 우리가 어떠한 제도를 형성하는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더 밀고 나가 보면, 제도들을 가로지르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제도 형성 이전, 혹은 제도의 바깥에서, 무엇으로도 모양이 갖춰지지 않은 어떤 힘들의 운동성 자체를 고고학적으로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에 다가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 앞에 놓인 제도의 현재적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도 너머에서의 사건을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 2021년 음악가 류한길의 개인전 (인천아트플랫폼)을 경험했을 때, 나는 거기에 두 가지 의지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특정 공간 안에 명백히 소리만을 남겨놓으려는 의지. 전시장 한가운데 스피커 세 대를 대놓고 세워 둔 것은 조형적인 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리가 나오는 기계 장치의 존재를 자백함으로써 청취가 만드는 허구 이외에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사소한 신비와 환영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표명처럼 보였다. 다르게 말하면 은 음악, 영화, 미술, 연극 등 소리와 관련하여 고려할 수 있는 예술 제도에서의 습관과 형식을 경계하고 제도를 비켜 가기 위해 진력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러한 소리를 통해 지금 여기 없는 무언가를 강하게 소환하려는 의지. 에는 음악가 자신이 직접 쓴 전시와 동명의 소책자가 놓여있었고, 여기에는 이 작업이 마찰음과 파열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임을 밝힌다. 작가에 따르면 마찰과 파열은 생성적 힘을 가진 실재의 한 운동성이지만, 그것은 시각-논리 중심적 사고와 문화 안에서 “악마화”되고 억압된 것이다. 마찰음과 파열음은 시각뿐만 아니라 시각에 종속된 청각에 반목한다. 시각을 반영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각을 전복하는 소리. 바로 그러한 소리를 적극적으로 작동시키면 과연 무엇이 등장하는지를 실험한 것이 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등장했는지는 아직 나로선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어떠한 화면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 청취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의 흐름을 경험하게 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흐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없는 것을 데려와 흐르도록 하는 것. 어떠한 제도에도 속한다고 하기 어려울 이 작업이 근래의 가장 영화적인 경험에 가깝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것은 나를 둘러싼 넘쳐나는 자명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를 환기해 주었다. 그리고 또? 글쎄…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경험들 덕분에, 나 또한 여전히 말하기 곤란하고 막막한 회색 영역을 배회하는 것일테다.



  1. 유운성,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2. 리베카 솔닛, 그림자의 강, 김현우 옮김, 2020, 창비,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