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버의 집을 찾아서: 수수께끼 같은 사물과 허구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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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놓인 물건들ㅡ붉은 벽돌 담장을 흉내내고 어린 아이 정도 크기에 정사각형 모양을 한 사무실용 파티션 세 개, 머리 반대쪽 나무가 뾰족하게 잘려 공중에 매달린 성냥개비 하나, ‘salt’와 ‘pepper’라는 글자가 서로 다른 타이포로 인쇄되어 위아래로 나란히 붙은 두 장의 엽서, 나무 받침 위에 올려진 적당한 크기의 베이지색 크록팟ㅡ을 슬쩍 둘러보고 시작점으로 돌아와 중철 책자 비버의 집으로를 집어 들었다. 이야기 한 편을 읽을만한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파티션 너머에 있던 두 개의 나무 벤치 중 하나에 앉았다. 벤치에 앉으니 둘러보았던 전시장이 한눈에 들어왔고 왠지 어딘가로 숨어들어와 웅크린 기분이 들었다.
비버의 집으로는 자의식이 생기며 엄습하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 한 비버의 이야기였다. 비버가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모호함, 이편이기도 하고 저편이기도 하지만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경계에 얽혀 있는 숙명 때문이었다.
“어느 날 비버는 자신의 손가락에는 물갈퀴가 없으나 자신의 발가락에는 물갈퀴가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구별해 내기 시작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집이 물과 육지, 두 세계의 경계선에 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그런 비버의 최근 취미는 새벽녘 슬그머니 캠핑장으로 숨어 들어가 쓰레기 더미에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소금과 후추를, 보다 정확히 말하면 소금과 후추를 반반씩 넣어 하나로 포장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소금과 후추, 물과 육지, 검은색과 흰색, 두개로 이뤄진 하나.”
비버가 소금이나 후추가 필요해서 그것을 수고스레 모으고 보관하는 건 아니었다. 경계의 불안에 시달리는 비버에게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물질이 하나로 합쳐져 존재하는 소금과 후추는 자기 자신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잠재워주거나 혹은 열망을 투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을 테다. 비버는 캠핑장에 모여 앉아 사람들이 소금과 후추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근데 이거 말이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는데 말이야, 좀 웃기지 않아? 항상 소금 옆에 후추가 있는 거 말이야. 아니면 후추 옆에 소금이 있거나. 소금은 바다에서 나오고 후추는 육지에서 나오지, 심지어 소금은 하얗고 후추는 검지. 어쩌다 이런 게 하나의 관계로 굳어져 버린 걸까? 그리고 이런 건 왜 항상 두개가 한 몸인 거야? 그니까 내 말은, 당연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다구.”
당연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당연해서 이상한 두 개가 한 몸인 소금과 후추를 열심히 모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비버의 불안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커져만 간다. 비버는 갑자기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려던 찰나 두 앞니 사이에 낀 시금치의 강렬한 존재감을 느낀다. 성냥개비의 반대편을 뾰족하게 깎아 이 사이에 낀 시금치를 빼낸다. 비버는 전에 없이 만족감을 느꼈고 성냥개비이자 이쑤시개인 그것을 빤히 바라보며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뾰족해진 성냥 끝에 매달려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던 시금치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곧 그 시금치 조각을 다시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한쪽 끝은 성냥개비이고 다른 한쪽 끝은 이쑤시개인 그래서 터전을 불태우거나 이빨을 쑤실 수 있는 그 작은 수수께끼의 몸뚱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책을 덮고 벤치에 앉아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래서 울지도 웃지도 못 할 이이야기, 비극 그 자체이자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한 비버의 이야기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다. 결코 화해되지 못할 상황들이 경합하는 사건을 비극이라고 한다면, 비극의 주인공이란 그 경합 사이에서 경합의 힘들에 휘말려 어떤 선택을 하든 회복할 수 없는 상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행위자일 것이다. 비버가 비극적인 이유는 A와 B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에서 A와 B를 모두 가지고 있거나 A와 B 사이에 있으며 둘을 모두 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극이 해소되거나 사건이 전환되기 위해서는 세계가 A와 B를 구분하지 않거나, 아니면 비버가 불안을 감당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소진시켜야 한다. 존재의 형식과 양태를 불태우는 파괴나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포기)하는 타협은 일시적으로는 비극의 해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비극을 완성시키고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느 요소 하나의 상실만이 있을 뿐 경합하는 상황들의 관계는 조금도 재조정되지도, 재구성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비버의 집으로에 이런 이야기는 없다. 물론 거의 일어날 뻔 하긴 했지만…
사건을 전환시키기 위한 관계의 재조정과 재구성에의 문학적 시도를 사변 문학이라고 일러보자.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 세계가 A와 B를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설정, 상황들이 경합하는 양상이 다르게 구성된 세계가 도입되는 장르는 일반적으로 과학소설이라고 불린다. 비버의 집으로는 사변 문학이기는 하지만 과학소설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세계는 바뀌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세계를 새로이 제안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야기는 비버에게 놀라운 마술적 순간을 부여한다. 연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극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전면적인 관계의 재구성을 가능케하는 허구적 공간을 말이다. 집을 불태우려던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앞니 사이에 낀 시금치가 등장하는 건 “바로 그때”이고, 몹시도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결국 불안을 감당하고 소진 시켜준 성냥-이쑤시개를 비버는 “생각할 여유없이” “본능적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을 겪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비버는 사건이 전환된 이유가 “왠지 모른다”. 세상에 없던 사물의 등장을 둘러싼 상황의 행간에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허구적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건 글자들 사이에 의뭉스레 봉합되어 있다. 이 공간은 이야기의 저자도, 비버도, 그리고 독자도 결코 그 존재가 무엇인지 확정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이야기가 품은 회절을 통해 그 존재감을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모두에게 실재적이지만 실체적이지 않으므로 허구적이다. 그러니 비버는 바로 그 수수께끼 같은 사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야기는 비버가 수수께끼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은 것은 그저 성냥개비이기도 하고 이쑤시개이기도 한, 성냥개비도 아니고 이쑤시개도 아닌 수수께끼 같은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물이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도 아닌 잠재성 그 자체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집을 태울 가능성과 이 사이를 쑤실 가능성을 가졌고 또한 이야기가 보여주듯 그것만은 아닌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냥이었으나 이쑤시개가 되었다는 변형이나 변용이 아니다. 그 둘 모두이기도 하면서도 둘 모두도 아닌, ‘성냥’이나 ‘이쑤시개’의 자리로부터 매우 협소했으나 실재했던 이름 없는 자리로 밀려난 사물이 과잉된 행위성을 가짐으로써 확보하게 되는 무한한 입체적 공간이다. 나는 불현듯 가상의 좌표평면 위에서 -1과 1 사이에 놓인 0이라는 공간을 떠올린다. ‘0’은 아무것도 없음일까 아니면 모든 것일까? 이건 크게 중요한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비버의 집으로가 표현하는 것은 1도 -1도 아닌 사이 공간의 광활함이고, 그 공간을 잠재성으로서 확보하는 사물의 역량에 관한 숙고이자 그 역량의 작동에 관한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조각적으로 사변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수수께끼 같은 사물… 허구적 공간… 잠재성… 다른 경합… 새로운 관계들…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죽박죽되기 시작하면서 곤란해진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전시장을 한번 더 둘러봤다. 전시장에 놓인 이상한 물건들ㅡ’벽 모양의 벽’, ‘터전을 불태우거나 이빨을 쑤실 수 있는 그 작은 수수께끼의 몸뚱어리’, ‘소금과 후추’, ‘늦게까지 불을 피워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인간들’이 둘러 싸고 앉았을 크록팟ㅡ은 모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이야기를 두 손으로 잡고 짜내면 나오는 것들. 그렇다고 이것들이 그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소들 몇몇을 이야기 밖으로 끄집어내 이야기와 함께 즐기라고 놓아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지 이상하고 우스운 이 수수께끼같은 사물들은 모두 하나의 문제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다. 서로 다른 하나와 하나가 함께 있거나 나뉘는 일 혹은 상황. 그리고 그 경합이 숨겨두거나 없는 듯 취급하는 공간 혹은 잠재성. 이 사물들 또한 이야기 속 성냥-이쑤시개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곳으로 조금씩 밀려나 나타나게 된 것일테다. 이야기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면 이 사물들은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문제에 관객을 연루시킨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 나는 뒤를 돌아 서서 너머를 가리지도 막지도 않은 이상한 파티션 벽모양의 벽 뒤의 미술관 밖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이야기에서 비버는 벽 너머로 악어떼를 보며 치를 떨었는데, 내가 본 것은 가을의 아름다운 색채와 주말 오후 공원에 나와 뛰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이었다. “천칭 만칭 구만칭”… 비버가 되뇌었다는 외할머니의 말을 나도 모르게 곱씹었다. 비록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것은 무수히 다를지라도, 여기와 저기,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이것과 저것, 나와 너의 거리에 대해서, 그 사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집을 돌아가는 길에 문득 크록팟 생각이 났다. 그 안에는 막걸리가 발효되고 있다고 하고, 전시의 마지막 날 완성된 막걸리를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역시나 낭만적이다. 그런데 막걸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맛있게 발효되지 않고 썩어서 뚜껑을 여는 순간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작가가 당황해하며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함을 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를 일이지.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 그러고 보면 역시나 크록팟은 텅 비어 있거나 막걸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서로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테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그건 아직 어떠한 관계도 매개하지 않았으며 그저 모든 관계에 대한 잠재성일 뿐이다. 누군가는 확실한 매개에의 약속에 안도하고 안정감을 느끼겠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고양시키는 건 역시나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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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죽음 의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인류학 연구자들과 세미나를 하던 중 주술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하는 한 논문을 읽게 되었다.2 저자는 왜 종종 주술이 일상의 평범한 것들, 거의 아무것도 아닌 물질 혹은 물건을 다룸으로써 수행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데, 이에 대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영역(realm that is nothing at all)’에 접근하기 위한 의도성(intentionality)과 관련한다고 주장한다. 주술은 “생명 너머의 공간, 물질성을 초월한 공간, ‘여기’와 ‘지금’을 초월한 공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기본적인 물질적 대상들을 조작”하는 일이며, 주술가는 “기본적인 형태들이 스스로 재배열되는 모습으로부터 다른 영역의 요소들과 인물들의 구성을 본다”. 이 주술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사회 구조 너머에 있는 중재적 공간(intermediary space)이다. 저자는 주술의 핵심은 바로 이 빈 공간, “비존재의 모호한 공간(ambiguous space of ‘not-being’)”이며, 이를 통해 기존 관계에 불확실성을 부여하고 사회적 관계를 다시 구성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작업이 흥미롭고 또 의미심장한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허구적 공간을 누락될 수 없는 요소로 위치시킨다는 점이다. 저자는 논문의 말미에 무 혹은 공허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이론적 성찰을 소개하는데, 이는 모종의 허구적 공간이 엄연한 사회적 요소로서, 실재적인 것으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한계 짓고 가두어 온 인식론 자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우리는 출현하여 가시화된 실체들뿐 아니라 여전히 틈사이에 남아 있고 출현하지 않은 잠재성까지를 사회적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 그건 아마도 한 사회의 가능성들을 돌보는 일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존재론적 구조와 어떻게 경합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감동환의 작업이 바로 그러한 일들에 해당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비버의 집이란 바로 그 텅 빈 공간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그러면 작가는 그 집을 측정하는 측량기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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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각이란 재료를 다루어 형태나 형상을 만든다는 좁은 의미의 기술적 용어가 아니다. 그보다 조각이란 물질적 대상의 다룸을 통해 산출되는 무수한 실재적 사건에 관여하거나 참여하는 일이다. 이러한 정의 속에서 조각은 문학과 만난다. 문학은 글자를 다룸으로써 발생하는 허구와 협상하는 영역이자 기술이고, 글자는 물질적 대상이므로 조각이 글자를 다룰 때 조각적 과정과 문학적 과정은 닮게 된다. 닮긴 하지만, 또한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티스트 북’이라고 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타협적인 용어가 광의의 조각 개념 위에서 다시 설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은 연속적이고 상호적이며 유기적인 예술 실천들의 관계가 매체에 따른 범주 구분으로 인해 끊기고 나뉘어 몰이해되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에서 책은 세계에 대한 조각적인 탐색 과정 속에서 발견되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다루어지는 사물에 가깝다. 미술가 김범은 예술 작업의 한 매체로서의 책에 관한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바 있다. “각각의 매체는 서로 다른 인지 영역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합니다. 책은 그림이나 조각과는 달리 주로 언어를 재료로 하는 작업이기에, 물론 다른 작업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의사 표현 및 정보 전달은 물론 문학적 표현까지 다양한 내용을 상세히 전달하는 매체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그림의 형상이나 조각의 외관을 통해 시각적 인지에 관련된 표현을 해 왔지만, 책을 통해서는 그와 관련하여 인지 대상의 가상성과 기만성, 그리고 이에 관련된 인간의 특성과 심리 등 또 다른 방향의 연장선으로 확장된 표현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이설희 기획, 워크룸프레스, 2024, 242-2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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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t Rio, “Death, Witchcraft and the Temporal Aspects of Divination,” Rane Willerslev, Dorthe Refslund Christensen eds., Taming Time, Timing Death: Social Technologies and Ritual(London: Routledge,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