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엔지니어로서의 디자이너

강문식 개인전 sunkiss(파운드리 서울, 2024) 전시장에 놓임.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지, 아니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지는 바로 디자인의 질문이다.”1

‘나는 빌렘 플루서의 이 문장을 디자인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주장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이 근원적이고 도발적인 성찰은 디자인에 대한 정의, 그리고 디자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의 방향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특히 지금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 이 말을 황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플루서가 디자인의 질문이라고 규정한 문제를 다루는 일은 현업 디자이너들이 수행중인 수많은 현실의 과업과는 거의 닮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혹은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지, 아니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지’의 문제는 천문학자나 신학자, 혹은 정치인이나 시인의 일이지 디자이너의 일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모로 플루서의 단언과 디자인의 현재와 실제 사이에는 아득한 괴리가 있다.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서 이 말은 쓸모 있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의미심장하게 여길 것은 착오적인 면이다. 내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것은 괴리의 크기와 형태인데, 플루서의 주장에 비하자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디자인이라는 것은 협소해져도 너무 협소해지고 축소돼도 너무 축소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루서의 문장이 지시하는 문제의 역사적 순간을 한번 상상해보자. 우주의 운행 원리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하루아침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뀐다 하더라도, 지구 위에 선 ‘나’의 위치와 우주의 비밀스런 흐름은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나’는 분명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낄 것이다. 정말로 세계가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간명히 말하자면 플루서에게 디자인이란 획책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는 책략적이고 함정을 파는 공모자”일 따름이다. 그가 디자인이 속임수와 관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폄하나 부정이라기보다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문화적 맥락과 그 어원들을 고찰한 결과다. 그로부터 우리는 디자인이 기계, 기술, 예술 등의 단어와 함께 속임수라는 공통 분모 위에 긴밀히 얽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2 내가 생각하는 예술과 기술의 공통점은 플루서의 고찰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둘 모두 세계나 세계에 대한 경험과 참여를 변형시키는 일이라는 점이다.3 그러므로 어떤 책략이 필요할 때 우리는 바로 디자이너와 공모하기를 마음먹는 것이다. 나는 종종 예술과 기술이 서로 다르지 않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기술과 예술의 이념을 통합적으로 내포한 형상의 이름, 디자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단어가 엔지니어(engineer)라고 생각하곤 했다. 엔지니어 또한 물론, 사전적으로 획책하다(contrive)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내가 굳이 엔지니어라는 용어를 상기하는 이유는 그저 용어목록을 길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유용성이 있기 때문인데, 그건 디자인을 익숙한 지식의 맥락에서 떼어내 새로움의 발명을 갈망하는 낯선 영토에 위치시키고, 보다 더 공학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게 해주기 때문이다.4

몇 해 전 강문식 디자이너와 협업한 아이덴티티 개발 프로젝트 과정 중, 프로젝트에 관한 개념 엔지니어링을 위해 진행한 우리의 대화에서 나는 그의 작업의 엔지니어적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강문식이라는 디자이너의 작업은 그래픽을 통해 어떤 사건의 잠재성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여기서 잠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식 씨의 그래픽은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가 데려다 놓는 분명한 방향성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떤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 잠시 정지해 있는 순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그저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 방식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문식 씨의 작업을 보면서 디자인의 근원적인 의미로서의 설계(engineering)를 떠올리곤 해요.”5

이건 지난 수년간 이런저런 프로젝트에서 협업한 편집자로서 또 그의 시각 작업물을 이리저리 경험한 독자로서 천천히 형성해 온 강문식이라는 작업자에 대한 이해이며, 지금도 여전히 이 지점이 그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엔지니어로서의 디자이너라고, 짓궂게 말해보면 유능한 획책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조금 더 좁혀보자면 잠재성을 디자인하는 버추얼 엔지니어라고.6 예컨대 지난 2021년 스위스 루체른의 그래픽 디자인 페스티벌 벨트포르마트에서 커미션 받아 제작한 대형 포스터는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지난 작업들에 대한 아카이브이지만, 동시에 그의 한국 클라이언트들의 일이 루체른의 거리 곳곳에 노출되는 광고판이자 놀이터였다. 또한 9칸으로 나뉜 포스터의 화면 중 오른쪽 위의 두 칸을 빈칸으로 남겨 아직 닿지 않은 협업자들을 초대하고 기다리는 복합적인 장소였다. 위트이기도 했지만 무척 진지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업은 강렬할 정도로 상황적이다. 그의 그래픽 작업은 이처럼 늘,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을 잠재화하는 허구적 공간을 구축하고 활성화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그래픽이 도입되고 나면 현실은 모종의 상황이 일어날 여지가 생기는 잠재성이 큰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그래픽 작업의 엔지니어적 측면이며, 이는 디자이너로서는 무척 드문 역량이다. 그의 그래픽 작업을 보고 있으면 그건 최종의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의 계기로서 내놓아져 정말로 어떤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 상황에 기꺼이 참여하고 스스로 그 계기를 활성화시키는 이들이 결국 독자가 되고 그의 그래픽과 친구가 된다.

그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잠재성을 엔지니어링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작업적 특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서 그가 운용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하나의 점(dot)이다. 디지털의 기본 요소이자 모든 형태의 최소단위를 운용하여 연속 즉 형태로 인식되는 것을 만들거나 아니면 연속적인 것을 이산적으로 변형시켜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산적인 것은 어느 순간 어떤 형태를 이룰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잠재적으로 언제든 다른 형태로 바뀌어 나갈 운동성을 가지게 된다. 구름을 떠올려 보자. 구름의 구성과 현상은 그 자체로 강문식의 디자인 개념과 겹친다. 땅 아래에서 보자면 구름은 끊임없는 무빙 이미지이지만, 실상 그것은 작은 입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형되고 또 결국에는 다른 상태로 전환되어 사라진다. almost(2024) 시리즈는 이와 같은 구름의 물질적, 이미지적 존재론을 디자인의 메타포로 삼은 작업이다. 관객이 almost라 이름 붙은 무언가를 전시장에서 보았다면, 그것은 곧 다른 것으로 변하여 사라질 것임을 암시한다.

물질의 이산적 구성으로 인해 그의 그래픽 이미지는 고정되어 있음에도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보자면 그것은 점들 사이의 빈 공간을 운영하며 밀도를 다루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그 비어 있는 공간에 신경을 쓴다.7 빈 공간을 신경 쓰자면 불안정성은 높아지지만 그만큼 동시에 잠재성은 커진다. 예컨대 그가 작업한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의 아이덴티티는 멀리서 보면 수묵처럼 번진 글자의 인상이지만, 그 세부를 들여다 보면 글자를 구성하는 기하학적 요소들이 무척 다양한 방식의 관계 형성을 통해 빈 공간을 정밀히 설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획책 되는 것은 물에 대한 다른 경험이다. 느린 유동성, 통합되지 않은 이질성들의 들끓음, 그리고 문화적 기억에 각인된 동양적인 것에 대한 정서 같은 것들이 열린다.

강문식이 잠재성을 엔지니어링하는 또 다른 작업적 특성 중 하나는 시간이다. 그의 그래픽은 독특한 방식으로 시간을 모델화하는데, 그것은 한 지면에 여러 순간이 한꺼번에 현상되는 동시성(con-temporality)이다. 앞서 언급한 광주비엔날레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떠올려 보면, 먹에 물이 떨어져 번지는 순간과 먹에 떨어진 물이 말라가는 순간 모두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습적으로는 인과성이 뚜렷해 보이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여기에는 사실 분명한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 그저 현상과 관련한 여러 순간들이 동시에 도입되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해보자면, 그의 그래픽에서 일반적으로 결여되는 것은 완성되어 더는 움직일 여지 없이 고정된 상태다. 잠재성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고 독자는 그저 놓인 것을 전달받을 뿐인 그런 상태 말이다. 보통 그런 것은 저자와 독자 사이의 위계를 만들고 저자의 신화를 강화한다. 하지만 그가 독자와 공유하려고 하는 것은 완결된 제품이 아니라 그래픽이 열어주는 다채로운 순간들, 우리에게 스며 있는 물질적 기억이 꺼내어 오는 어떤 사건에 대한 공통 경험들이다.

sunkiss의 전시장을 가득 채운 하늘색은 인쇄물의 안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빛에 바래고 남은 색을 시간이 만든 하나의 이미지로서 다시 새로운 상황으로 끌고 온 것이다. 빛바랜 색이란 일상적 삶 속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어떤 시간의 두께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sunkiss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하늘색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으로부터 멀리 있던 어떤 시간들이기도 한 것이다. 여러 순간이 동시적으로 현상된다면, 그건 잘 다듬어져 간편하게 이해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보다 여럿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그래픽에서 비롯할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다.

여기서 여럿의 참여라는 것은 최종의 이미지에서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과정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작업의 의미가 획책 되는 차원에서 무척 중요하다. 내가 그의 작업을 엔지니어적 측면과 관련하여 말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가 피슐리&바이스의 동물(1986)이에요. 이 작업은 적어도 제게는 동물의 형태 자체로는 완성되지 않고 허리를 숙여서 구멍을 통해 오브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까지 포함되어야 작업으로 성립해요. 내가 만든 것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소비자가 많다는 것은 작업이 사람들과 많이 맞닥뜨린다는 거고 변수가 늘어나는 만큼 재밌는 순간들이 많아진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건 제가 어느 정도 의도는 하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요. 그런 불안정한 상황 자체가 디자이너로서 흥미로워요.”7

그의 작업은 언제나 독자의 존재가 필연적인데, 그의 작업에서 독자는 인터랙션의 대상이 아니라 잠재성을 활성화하고 결국 의미를 결정하는 주체로서 위치 지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의 작업에서 참여의 의미는 독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생산의 과정에서 여러 협업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그래픽 디자인의 ‘다른 결과’를 열망하며 디자인의 과정 자체를 다각도로 변형하고 새로운 생산 모델을 고안하기를 시도해왔다. 끊임없이 디자인 이외 분과의 작업자들과 협업하고 대화하며 그 가능성을 모색해왔는데, 그 핵심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분업이 아닌 서로 다른 작업자들이 만났을 때 가능한 합성적 모델이다. 그렇게 돌이켜 보면, 그의 ‘작업의 시간’은 생산과 읽기에까지 이르는 너른 범주에 대한 공학적 숙고가 바탕 되어 있다. 이를 일러 운동장 만들기라고 하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얘기해 볼만한 특성은 주변성(marginality)이다. 그가 자신의 그래픽의 주된 요소로 도입하는 자원은 대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도상이나 형태가 아니라, 그보다는 큰 의미 없고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그는 모두가 불꽃이 터지는 밤하늘을 보고 찬사를 쏟아낼 때 건너편 구경꾼이 신은 짝짝이 양말이나 새의 발자국 모양으로 깨진 타일을 보고 있을 사람이다. 온갖 기이하고 멋진 기념품들로 가득한 경이의 방(Wunderkammer) 한 구석에 놓인 ‘잡동사니’라고 이름표가 붙은 상자 속 물건들이 아마도 그가 신경 쓰는 사물들일 테다.8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꽂아 넣거나 즉각적으로 앎으로 환원되는 형상이나 현상이 아닌, 모호하고 사소하며 풍경의 큰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세부적인 사항,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형태를 가진 흔적, 주인공이 아니어서 주변부에 자리하지만 눈길을 끄는 자투리를 의미심장하게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미지를 추동하는 과정이 강문식의 그래픽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일까? 그래픽 디자이너가 잘 다루지 않을법한 재료인 알루미늄 판에 유성 잉크를 사용하여 실크스크린한 뒤 벽면에 설치한 대형 패널 연작 sunkiss(2025)의 이미지는 그가 몇 해 전 여행한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받아온 안내 팸플릿에 그려진 동식물 일러스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손톱보다 작은 세부는 공간의 벽면을 채워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서로 연결된 패널들이 사실은 서로 관련 없이 동떨어져 놓여 있던 세부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미지를 겪는 관객은 그 이미지의 출처와 어쩔 수 없이 연루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그 출처로 되돌아가는 유사 체험이 아닌 전혀 다른 상황에의 연루가 된다. 세부들이 열어 젖히는 잠재적 공간과 무수한 이야기들의 가능성. 내가 여기서 언급한 강문식의 작업적 특성들은 잠재성의 엔지니어링이라는 맥락에서 주요하게 상기해볼만하다고 생각한 면들인데, 나의 쓰기 역량이 모자라 범주화하여 살펴보았지만 이 면면들은 사실 명료히 구분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서로 매우 상호적으로 얽혀 작동하는 양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특성들에 대해서 내가 부연할 수 있는 다른 하나는 이 선택들이 지금으로선 예술적 기획이라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작업자 개인의 성향과 관련한다는 점이다.

2009년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창간 발행된 디자인 저널 양귀비는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지, 아니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지”의 문제를 “바로 디자인의 질문”으로 삼은 드문 기획이었지만 아쉽게도 창간호만 만들어지고 뒤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강문식은 여기에 고덕동 153-1번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네비게이션이 상용화되던 시기 이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기반해 실제 배달 기사들이 어떻게 지리 감각과 공간 지식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조사한 일종의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다. 그는 문제를 설정하고, 이해하고, 또 해결하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여 구체적인 공간을 관찰하고 또 그 세계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닌다. 이는 그가 디자인이라고 하는 일을 수행하는 방식의 원형일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언제나 현재적 현실과 관련시켜 조건 짓지만, 동시에 디자인이 세계에 대한 어떤 획책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놓지 않고 탐색한다. 그는 디자인을 언제나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그것이 반-예술이나 반-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획책들의 경합 자체가 디자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9 그러면 비로소 잠재성에 대한 엔지니어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플루서는 속임수라는 뜻을 가진 디자인을 악마화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디자인이 추구해야 할 더 나은 문화는 그 자체로 사기라는 것을 의식하는 문화일 것이다. 우리가 문화에(기술과 예술에서, 즉 디자인에서) 전념한다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속이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10 속임을 감추지 않고 이 문제를 고민하는 것, 우리를 어떤 잠재성과 함께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건 강문식의 작업에 전반적으로 전제되는 일이다.


  1. 빌렘 플루서, 디자인의 작은 철학, 서동근 옮김, 선학사, 2003, 24쪽. 

  2. “디자인, 기계, 기술, 아르스, 예술 등의 단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개념으로 볼 때 다른 것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두는 동일한 실존적 세계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연관성은 오랫동안 (최소한 르네상스 이후) 부정되어 왔다. 근대의 시민문화는 예술세계를 기술과 기계문명에 엄격하게 대치시켰으며, 그러므로 문화는 상이한 두 개의 가지로 나뉘었다. (중략) 이런 부정적인 분리는 19세기 말경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그 사이를 분리,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단어 속에서 예술과 기술 사이의 내적 연관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디자인은 새로운 문화에 길을 열기 위해 예술과 기술이 상호 일치하는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책,
    16쪽. 

  3. 리베카 솔닛은 기술에 대해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그림자의 강, 김현우 옮김, 창비, 2020, 176쪽)라고 정의한 적 있는데, 이는 솔닛이 기술 뿐만 아니라 예술까지 염두에 두며 이를 통합적으로 숙고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4. 이 생각의 방식, 그리고 엔지니어라는 용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모두 전적으로 코도 에슌에게 빚져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작가나 저자가 아닌 개념 엔지니어(concept engineer)라고 규정하며 기존의 지식 체계와 문화적 관습이 하지 못한 것, 보다 미래적인 지향 아래 현실이 요구하는 실천, 새로운 지식과 감각이 활성화되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실험하고 발명하여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번 책에서는 스스로를 ‘개념 엔지니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면 전체 과정이 훨씬 더 신선하고, 훨씬 더 흥미롭고, 훨씬 덜 알려진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제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영역에서 허구, 개념, 환상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다른 영역으로 번역하며, 섞고, 그 결과가 어디로 향하는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다양한 개념을 사용하여 새로운 경험의 영역을 탐색하고, 새로운 지각의 영역으로의 탐험을 예측하고 가속화합니다. 이러한 지각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전통적인 주류 용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데 그 강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류 용어들은 여전히 문학과 두 개의 문화에 완전히 얽매여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렇기 때문에 주류가 지금 벌어지는 일에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Kodwo Eshun, Motion Capture(Interview), More Brilliant Than The Sun: Adventures In Sonic Fiction (Quartet Books, 1998) p.186. 

  5. 강문식&이한범, 로고는 무엇을 하는가?: 부산현대미술관 M.I. 개발에 관한 대화,유동적 미술관: 개념과 체계 연구, 2023, 21쪽. 이 인쇄물은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부산현대미술관, 2023) 전시의 참여 작업으로 제작되었다. 

  6. 일반적으로 버추얼 엔지니어링은 컴퓨터 기반 가상환경을 이용한 설계 및 시뮬레이션, 최적화 등의 공학적 방법을 뜻하지만, 내가 말하는 버추얼 엔지니어링은 물질적 사물 혹은 경험을 통해 잠재성(virtuality)을 형성하고 발생시키는 공학적 과정을 뜻한다. 참고로 여기서 잠재성의 반대되는 개념은 현행성(actuality)이다. 

  7. 강문식&이한범, 앞의 글, 22쪽. 그는 피슐리&바이스의 작업의 매력을 자주 얘기하곤 했는데, 다른 한편으로 또한 그가 자주 얘기했던 작가가 바로 솔 르윗이다. 피슐리&바이스의 작업에 대한 매혹이 그들의 엔지니어적 차원이라면, 솔 르윗에 대한 매혹은 그래픽적 차원이며 나는 강문식의 작업에 이 두 차원이 합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의 작업이 예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적 작업과 행위들에서 흥미롭고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이를 것의 요소를 추출하고 자기화함으로써 자신의 디자인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8. 분더카머: 시, 꿈, 돌, 숲, 빵, 이미지의 방(문학과지성, 2021)의 저자인 윤경희 작가는 2021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주관으로 진행된 책에 관한 한 대담에서, 올레 보름이 1655년 그린 그림 분더카머의 방 한구석을 확대해 ‘VARIA’(잡동사니라는 뜻이다)라는 글귀가 쓰인 상자를 가리키며 분류 불가능하고 묘사하기 어렵고 잘 인지되지 않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얘기했다. 그림에서 다른 거의 모든 사물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고 명사화 할 수 있는 명확한 모습을 지녔지만, 이 상자 속의 물건은 그저 어떤 덩어리처럼 대충 묘사되어 있다. 윤경희 작가는 자신의 책이 이 상자에 든 물건에 대한 상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는데, 나는 강문식이 세계에 흩어진 사소한 흔적들로 하나의 이미지를 추동하는 일이 이와 닮았다고 종종 생각했다. 

  9. 강문식은 고덕동 153-1번지의 짧은 결론에 다음과 같이 쓴다. “어떤 지도를 쓰느냐는 본인의 몫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단지 영화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계적 편리함을 수용하되 항상 이것을 경계하는 마음도 동시에 지녀야 한다. 미련한 수고로움은 때때로 효율적인 편안함보다 낫기 때문이다.” 강문식, 고덕동 153-1번지, 양귀비 1,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출판부, 2009, 66쪽. 

  10. 빌렘 플루서, 앞의 책, 17쪽. 

Moonsick Gang, almost 02
2025
Silkscreen on tie-dye fabric
134 × 140 cm (approx.)
Edition of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