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삶으로부터

아트인컬처 2018년 10월호에 수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두 개의 전시실에서 진행되는 올해의 작가상 2018의 시작과 끝에는 흥미롭게도 모두 ‘아카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들이 놓여 있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정은영의 보류된 아카이브이고, 돌아 나가는 우리를 배웅하는 것은 옥인콜렉티브의 랜덤 아카이브이다. 그리고 이 두 아카이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실제성을 담보하는(혹은 증명하는) 아카이브라는 장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어떻게 해서든 아카이브가 되기를 피하려 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다. 정은영은 여성 국극인들이 친필로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적은 액자들을 나열한 사이에 태연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액자 하나를 놓아두었고, 옥인콜렉티브는 자신들의 서사를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읽기를 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작동하기를 요청한다. 이들은 구체적 삶의 실제성을 가시화시킬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의 실제성을 위해서는 역사를 위한 다른 모델이 필요하며, 특정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에 있어서 다른 구조적 형식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론은 그 자체로 예술적 성취라고 이해되서는 안되며, 유의미하게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누구나 뒤집어쓸 수 있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탈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며 의미 있는 작업의 시간을 축적해온 네 작가들의 신작을 모아 놓고 보니 거기에는 연장된 삶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어떠한 삶들을 매개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구민자는 그의 신작 전날의 섬 내일의 섬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시간동안의 흔적들을 그대로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다. 예컨대 “피지의 돌, 조개 껍질, 산호 조각 등”을 흙판의 표면에 눌러 찍은 기록,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최수정과 자신이 찍은 풍경 사진들을 벽면해 부착했고, 그들이 사용했던 한 쌍의 캠핑 장비들을 대칭되게 배치해 프로젝트의 시간을 전시장 안에서 표상했으며, 스코어처럼 남은 행동의 기록들을 관객이 열람할 수 있도록 보존해 두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틀간의 퍼포먼스 기록 영상 전날의 섬 내일의 섬은 미술관의 개장 시간인 8시간과 11시간으로 편집되어 상영된다. 말하자면 이 영상의 장면 장면은 언제나 일회적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위에서 재연되는 작가의 지나간 시간을 의사-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이 모든 인공적인 체험의 매개적 성질을 강화시키는 것은 구민자 작가의 섹션이 시작되는 벽면 위에 높이 설치된 가로등의 흰 빛이다. 그 빛은, 우리를 단지 사물이나 이미지로만 매개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떠한 분위기(mood)까지 함께 동시적으로 체험하기를 요구한다.

정재호의 전시공간으로 가기 위해 지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정면의 벽을 향해 서울의 건축물을 수집하듯 찍은 사진들이 프로젝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사진 속 건물들의 한 외벽면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 회화가 펼쳐진다. 어떤 것들은 벽에 걸려 있고, 어떤 것들은 조각처럼 구조물이 되어 전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작업들의 놀라운 점은 무엇보다도 극도로 사실적으로 지각되는 환영성일 것이다. 관객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려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고, 근접한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질감, 특히 건축의 노후화된 표면을 통해 표현되는 시간의 영역이다. 모뉴먼트가 된 이 시간은 현재를 뜻하는데, 여기서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축적으로 드러나지만 그 축적은 이제 더 이상 노후화되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무한한 지연, 끝의 시간으로서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소공로 99-1, 노들회관, 청파로 빌딩, 남대문로 빌딩 등 실제 건축물의 이름이나 주소를 가감 없이 투명하게 제목으로 사용하며 바로 그 건축물에 대한 지시적 성격을 강화하는데, 그리하여 이들은 실제적 삶의 얼굴(파사드)을 소환하면서도 그것을 현재에 속박된 기억으로 환원시킨다. ‘건축물’ 작업이 극도의 사실적 환영을 보여주었다면, 신작 중 가장 큰 회화 작업인 난장이의 공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도시의 풍경 위로 날아가고 있는 로켓의 모습이다. 유년기의 감성으로 표현된 이 공상 과학의 클리셰는 한지 위에 아크릴로 제작한 작가의 지난 작업들, 그가 “아카이브 회화작업”이라고 명명하는 이미지들의 문화적 양식과 겹쳐진다. 한지라는 지지체의 특성 때문에, 작가의 기억 속에서 소환된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적인 사건들(작가는 이 회화작업의 내용은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다), 즉 한국 근대화 시대를 표상하는 재현된 도상들은 다소 낭만적으로, 또 노스탤지어가 뒤섞인 채 드러난다. 건축의 표면이 우리가 속한 시간의 구조물이라면, 그 시간의 질감들 속에 틈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적 양식들이고, 동시에 노스탤지어로 물든 기억이라는 아카이브다.

전시를 곱씹으며, 나는 일종의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이 전시장에서 형상들, 장면들, 사물들을 통해 이토록 직접적으로 어떠한 삶들에 여과 없이 매개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의 이유가 삶의 재현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나는 성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지로 매개되는 오늘날의 생산조건에서 무조건적인 스펙터클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냉소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는가가 더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는 재현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그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관객을 어떻게 주체화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전시가 제안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주장하듯 ‘불편함’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 이해해볼 수도 있다. 이 전시의 이미지들은 모두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작가들 모두가 명시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아카이브라는 용어를 참조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을 가시적으로 확정하고 그것을 재구성함으로써 비판의 행위를 수행하고자 한다는 것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신중을 기해야 하는 평가다. 왜냐하면 비판이란 한 작가가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만큼 명시적으로 발화 하는가와는 별개의 기준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혼동될 때, 이 미학적 용어는 작가들로 하여금 더욱 세련되고 발굴되지 않은 문제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가 되기를 암묵적으로 강제한다. 비판의 성패는 오직 작품이 주어지는 관객의 자리에서만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늘날의 이미지 체제를 향유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의 이미지, 예술 작품이 비판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대상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이 오늘날의 이미지 체계의 공고함을 가로지르며 작동할 때이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미학적 기능이지 계몽의 수단이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뭉뚱그려질 때, 예술은 경도되고 교조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정은영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작업은 35분 길이의 영상 작업 유예극장이다. 전시장을 들어와 왼편에 보이는, 의뭉스레 늘어뜨려져 있는 뒤가 비치게 얇은 푸른색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바로 무대의 뒤편처럼 여겨졌던 곳에서 작업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젠더와 전통의 상관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전통이라는 허상을 유지시키는 습속에 뿌리박혀 있는 남성중심적 사고를 드러내는 사료들의 발췌와 젠더 혹은 전통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 국극인, 가곡인, 드랙킹을 인터뷰하고 이를 서로 교차시킨다. 그러나 영상의 중후반부에 이르러 세 인물의 인터뷰가 매우 빠른 속도로 교차 편집되고 그들의 발화가 모든 맥락이 거세된 채 논쟁적인 단어들만이 텍스트와 함께 점멸하듯 등장하는 부분은 상당히 선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상의 문제를 복잡화시키기 보다는 표면적으로 봉합시켜버리고 만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한 시퀀스에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성 국극에 대해 논평한 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목소리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고 민비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라는 지독하게 여성혐오적인 발언 부분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으로 그 텍스트가 쓰인 지면을 강하게 두드린다. 나는 거기서 내가 어떠한 이해와 판단의 주체도 아님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옥인콜렉티브의 전시장은 다른 제안을 한다. 그들의 전시장은 주변 관객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만큼 어둡고, 관객의 술렁거림과 영상의 사운드가 뒤섞여 있는 공기는 어수선하다. 작가가 설정해 놓은 동선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회의 중심 밖에서 삶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기록된 모습을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옥인콜렉티브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담은 바깥에서라면, 회전을 찾아서 또는 그 반대는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 공동체 ‘회전예술’의 구성원들의 인터뷰 영상이다. 그리고 황금의 집은 제주도에 자리 잡은 음악다방 까사돌을 드나드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 영상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형상과 육성에 집중한다. 영상 안에 집합된 인물들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듯하지만, 그들 각자의 발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여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개별성이다. 그리고 옥인콜렉티브의 편집은 그들을 실제 세계의 형상으로 내세우고 문제적인 것으로 봉합하기 보다는 서로간의 틈사이를 메우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의미심장하게도 능청스러운 농담의 수사들과 유머다. 그것은 중심에서 소외된,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바깥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유지하거나 ‘갈 곳이 없는’ 노년의 자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특정한 인물들이 하나의 집합으로 유지되는 힘의 양분처럼 보인다.

관객이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은 벽면에 비스듬히 내리쬐는 핀 조명이다. 강렬한 그 조명은 관객이라는 불특정한 실존적 삶을 불러 세우지만 거기에는 주변의 어둠과 소란밖에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공동체는 그것이 존재했든지 아니든지 결국 항상 공동체의 부재로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자문하면서 그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회를 공동체라 부를 것이다.”라는 모리스 블랑쇼의 인용구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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