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신체 없는 목소리와 공간 없는 이야기

호버링 텍스트(미디어버스, 2019)에 수록.

 

포스트 인터넷의 조건이 보다 광범위한 디지털 문화의 생태계 안에서 아직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모종의 규칙이라고 했을 때, 그 규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와 씨름하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관해서 비평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프로그래밍’이다. 여기서 말하는 프로그래밍이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한다. 하나는 디지털 문화의 조건이 실존적인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즉 주체성의 프로그래밍이라는 축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문화의 조건이 오늘날의 예술 작품이 놓이는 좌표를 어떤 공간 체계 안으로 흘려보내는지, 그리고 개별 예술 작품이 그러한 역학에 반응 혹은 대응하며 스스로를 어떻게 배치하는지 이다. 여기서 두 문제는 하나의 층위에서 완전히 포개져 있지는 않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특권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간과했을 때 큐레이팅과 예술 비평은 종종 사회학적 징후와 작품을 혼동하거나, 디지털 문화와 예술의 관계를 단지 가시적인 형식의 발현에 국한시키며 서투르게 미학화한다.

한편 이 두 벡터가 매우 강하게 맞붙으며 교차될 때 드러나는 특수한 현상은 세대론이라는 담론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세대론이 담론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두 운동성의 교차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그것의 역할은 스스로 열병(fever)에 시달리고 있는 새로이 발명된 주체성이 서로 다른 매체와 영역을 가로질러 어떻게 첨예한 실천적 대응을 하고 있는지를 동시대라는 거리에서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성은 어떤 한 시대에 단 하나의 시각성 모델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특정 주체는 단 하나의 시각성으로만 프로그래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즉 당대의 주체는 무수히 많은 시각성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으며 예술적인 실천은 이것을 가로지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서로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술 양식이 동시에 출현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고 이는 분명 콘템포러리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두 벡터의 교차에 관해서 우리는 한 세대의 양식을 특권화하기 보다는 동시성을 추동하는 힘의 영역 자체를 비평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의 형식과 그것이 놓인 장소, 그것이 맺는 관계와 그것의 기능에 대해서 관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명하게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작품 그 자체일 뿐이지만, 우리가 다다를 곳은 그러한 가시성 너머다.

눈에서 몸으로, 그리고 목소리와 이야기로

만약 내일 당장이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거나 이를 닦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생활 속 행동마저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울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우리의 일상 영역에서 가장 주된 감각은 시각일 것이다. 시각과 시각성의 문제는 이와 같은 일상 영역을 넘어 문화의 구성 논리와 사유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의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그 핵심에 있다. 그리고 시각성의 구성은 시각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과도 같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당대적 논점이 있다. 하나는 시각성 자체를 다양한 프로그램의 발현으로 세분하며 그 변화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파노프스키가 “정신적 의미내용이 구체적인 감성적 기호와 결부되고, 이 기호에 내면적으로 동화되는 상징형식들 가운데 하나”를 원근법이라고 명명한 것이나 조너던 크래리가 19세기에 등장한 집중과 분산이라는 지각의 양식을 통해 근대적 주체성의 형성을 이해하는 것, 또 히토 슈타이얼이 선형 원근법의 해체로부터 수직 원근법의 도래를 일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데거나 푸코, 데리다와 같은 현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근대라는 특정한 시대의 시각성을 문제시했는데, 이와 같은 비판적 접근은 두 번째 논점으로 향한다. 즉 반-시각에 대한 사유, 나아가 시각 이외의 감각 체계에 대한 사유와 그에 관한 실천이다. 이를 시각의 가산과 감소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틴 제이가 밝히는 것처럼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 망막중심주의에 대한 거대한 의혹을 가졌다는 사상사적 문제 이외에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약한 신호들”1부터 현존적 신체의 수행과 체험을 추동하는 예술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시각적 인식체계에 간섭하는 현상학적 내러티브로 조건 지워지는 관객성, 날로 증가하고 있는 비시각적 예술 실천들, 예컨대 사물과 신체가 놓인 조건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이를 변증법적으로 전개시킨 대지미술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비-인간 혹은 인지 감각 너머의 가능세계를 향한 픽션적 실천들, 그리고 디지털 문화 안에서 점진적으로 시각적 진실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이미지의 조건과 관련된 예술 실천을 위한 비평적 토대를 상상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시각의 가산과 감소라는 축으로 재편되는 역사가 눈의 주체에서 몸의 주체로의 이행을 기획했고 오늘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혼재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이제 우리가 시각에 대한 불신과 동시에 마주하는 곤혹은 바로 그 현존적 몸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비디오가 등장하면서 일군의 예술가들이 자기반영적 나르시시즘의 발현으로 분열증적 주체의 신체성을 탐구했다면, 디지털 문화의 인터페이스는 다층적이지만 비위계적인 아바타, 즉 허구적 신체를 손쉽게 생산한다. 소설가 정지돈은 시각예술가 김범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에 대한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까 늘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이지만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중략) 나는 나보다 더 낫거나 훌륭한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를 여기에서 저기로 변화시키고 싶다. 나는 여덟 개의 트위터 아이디와 네 개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가지고 있고 외국인과 강물, 양서류와 스웨터와 여자와 죽은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이것들을 만들었지만 아무런 연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신 행위 없이는 나라는 존재를 지속하기 힘든데, 내가 단지 나 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재미없고 황당한 일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것은 곧 우리는 단 한번 세계에서 살 수 있을 뿐이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빨리 감을 수도 없고 공간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다는 한계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모든 과학과 기술과 예술은 이것을 뛰어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변신술은 우리의 존재를 상승시키기 위한 사다리이며 평행우주고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자이다. (중략) 이것은 고전적인 삼단 논법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세계로 이제 이것이 현실 세계이며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이다.”2

김범이 이미지와 사물의 진실성과 관계된 지각 체계, 즉 시각성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하며 도식적인 규칙을 능청스레 재배치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정지돈은 그 비판이 닿는 장소에 발 디디고서는 스스로 적극적인 변신술을 체화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주체가 가능한 곳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라고 확신에 차 말한다. 이처럼 물질적 한계를 가진 신체와 평행한 허구적 신체를 무한히 증식시킬 수 있는 곳(그리고 그것들이 더 이상 불화하지 않는 곳)으로 현실 세계를 인식한다는 점은 무수히 많은 정보가 사실도 허구도 아닌 것으로 진술되는 그의 글쓰기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실도 허구도 아니라는 것은 그 정보의 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 안에서조차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인 발화 주체가 모호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떠 낸 정보들의 총합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떠받치는 장치는 전적으로 바로 그와 같은 분열적 주체의 발화이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소설 안에서 사건의 장소라거나 실질적으로 이야기와 경합하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목소리 그 자체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목소리는 정보들을 기워 내어 이야기를 구현하는 최소한의 매개적 기능만을 수행한다. 소설 안팎 어디에도 목소리의 신체는 없다. 신체 없는 목소리는 서사의 담론을 약화시키고, 이야기의 사건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발화된 정보로만 누벼진 가시성의 표면, 이것을 ‘상징 형식’으로서의 데이터베이스의 인터페이스를 따르는 서사라고 한다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다”는 ‘당신이 듣는 것이 전부다’라고 강변되는 듯하다. 무한보다 큰 정보의 집합은 그것을 특정한 단위로 조직하는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라는 가시성으로 드러난다. 오늘날의 ‘서사적 충동’은 다른 무엇보다 강하게 발화를 요청하는 듯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시각 예술 영역에서의 전시와 작업을 보면서 가장 큰 의문으로 남겨져 있던 것은 시각예술가들이 왜 이리도 말을 많이 하게 된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내레이션이나 자막이 없는 영상이 드물었고, 퍼포먼스에는 렉처의 형식이 만연했다. 많은 경우 나는 그것이 일종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느꼈는데, 예컨대 보여주는 것, 체험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어딘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박이 있다고 보였다. 오늘날의 스크린은 왜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종용하는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정신의 삶(The Life of Mind)에서 ‘생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고찰하며 베르그송을 “직관을 확고하게 믿은 마지막 철학자”로 칭하고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베르그송 이래로, 철학에서 시각에 기반한 은유는 지속적으로 줄어들며, 대신 그리 놀랍지 않게도 관심과 강조는 보는 것을 통한 사색(contemplation)에서 발화(speech)로, 누스(nous)에서 로고스(logos)로 완전히 이동해왔다. 이러한 이동과 함께, 진리의 기준은 대상에 대한 앎의 인준(사물과 지성의 어울림, adequatio rei et intellectus)으로부터 생각의 형식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발화와 로고스라고 일컬어지는 ‘말’이다. 보는 것이 믿음을 배반하고 체험의 신체가 사라졌을 때, 이제 그러한 사태에서 거대한 세계의 정보를 조직하는 것은 말이 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확산되는 예술 실천의 한 양상은 우리가 흔히 오디오-비주얼의 체계라고 부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미지와 말이 경합하는 곳 말이다. 이곳이 오늘날 주체의 문제를 통해 이미지가 처한 조건과 시각 예술의 지형학을 확인할 수 있는 유효한 리트머스 중 하나일 것이며, 그리하여 문제는 결국 오디오-비주얼 체계의 배치가 가진 구조적 역학으로 나아간다. 이 배치가 어떻게 나름의 서사를 발생시키는지 묻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예술을 가로지르는 힘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난 마돌

김효재의 난 마돌3이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스스로를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소개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전략은 완전히 연출된 드라마를 다큐멘터리,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서 시작하지만 난 마돌에서 그 역할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내레이션에 일임될 뿐 편집된 이미지들은 언뜻 보아도 그런 전략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대의 인터넷 사용자라면 즉각적으로 이 이미지들이 유튜브나 웹 플랫폼에서 스쳐 지나가듯 마주칠 수 있는 주소 없는 파편들임을 알아챌 것이다. 김효재는 전작 움짤 만드는 법 가르쳐 드립니다(2016)를 통해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 즉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이미지를 수집해 GIF 파일을 만드는 과정을 인터넷 강의 형식을 빌어 말한다. 이 작업은 김효재가 영상을 사용하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난 마돌과 긴밀히 연동된다. 김효재는 움짤 만드는 법 가르쳐 드립니다에서 무한히 반복적으로 언제든 스크린 위에 호출할 수 있는 이미지의 생태계를 시간적인 관점으로 풀어내는데, 그것은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과거와 그 과거의 데이터베이스인 미래, 그리고 그것을 스크린 위로 가시화시키는 현재로 상정된다. 그리고 움짤을 만들기 위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미지간의 순서 정하기와 개별 이미지가 얼마나 지속(duration)되도록 설정하는가, 즉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를 얼마만큼 현재화시킬 것인가 이며, 만들어진 파일은 다시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내보내져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난 마돌은 이러한 이미지론을 우화적으로 비튼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제로 자기 자신의 튜토리얼을 따라갔을 때 요청되는 이야기의 구조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미지가 재료로 쓰이는 서사는 이미지 스스로 그 시간을 지탱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이는 멀리서 볼 때는 하나의 초상화 같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저 그러모은 파편들을 얼기설기 배치해놓은 쓰레기 예술(trash art)의 착시와 다르지 않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저작권이 만료되거나 곧 만료될 이미지라는 특정한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조건으로 인터넷 인터페이스에서 필터링 된 결과로서의 이미지의 집합이 서사에 소요되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요구한다. 여기서 이 이미지의 연쇄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게끔 지탱하는 것은 바로 ‘말’이다. 난 마돌은 대본이 먼저 쓰이고 각 대목과 시각적인 연계성을 지닌 클립들을 검색하여 배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따라서 이 작업에서 이미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기능하는 것은 말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작업 안에서 이 말이 여러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어떤 장면에서는 내레이션 없이 자막만이 나오고, 또 어떤 때에는 기계음으로 변조된 목소리가 나오는데 여러 층위로 변조된 목소리는 각기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며 이미지의 배치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4 맥락이 거세된 이미지들, 이야기를 위한 어떠한 개연성도 가지지 못하는 이미지들, 너무나도 가시적이어서 아무런 미학적, 정보적 가치도 없는 이미지들은 또 다른 이야기의 잠재태로 남겨져 있고, 이것은 특정한 목소리가 어떠한 말로 얽어내느냐에 따라 다르게 성립되는 가변적인 상태임을 생각해본다면 특정한 대상을 논하기 위한 특정한 상황을 상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부유하듯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축만을 오가며 재사용되고 이어 붙여질 뿐인 이미지의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요청되는 자아로 작가는 손쉽게 분한다. 거기에는 신체적 지표는 사라지고 말의 발화만이 남아 있다.5 이 이야기는 말로 지탱될 수밖에 없는 특정한 문화적 조건을 과장되게 폭로하는 듯한데, 그런 측면에서 이 작업을 ‘가짜 다큐멘터리’라고 명명한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난 마돌 상, 하편 모두 채 2분이 안 되는 짧은 클립 영상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와 관계된 양식 발현의 징후처럼 보인다. 즉 이미지의 배치가 서사적으로 지지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처이자 다른 목소리로의 보다 유연한 이동을 위한 형식적 발판이다.

말이 하나의 서사적 장치라면 그에 비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다른 서사적 장치는 커서다. 난 마돌: 상에서 바탕화면에 무수히 산포한 이미지 파일을 계속해서 휴지통에 집어넣거나 난 마돌: 하에서 구글 검색 엔진과 지도 검색 결과 화면을 오가는 커서 말이다. 이 커서의 움직임은 역시나 말하는 주체들 누구와도 겹쳐지지 않으며 그보다 더 전지적인 자리에 놓여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움직임이 상연되는 무대인데, 그것은 화면 안에서 중첩된 프레임의 바깥에 해당한다. 난 마돌: 상에서 두드러지는, 여러 개의 프레임이 중첩된 화면에서 이야기와 맞물리는 이미지가 흘러가는 프레임은 언제나 그것의 배경보다 크기가 더 작다. 배경은 대부분 데스크톱의 바탕화면 자체이거나 자연 풍경과 우주를 보여주는데, 난 마돌: 하에 속한 난 마돌 시리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메타적 리뷰에 따르면 이는 이야기와 시각적 연계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유투브에서 저작권 문제를 피해가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때문에 이 프레임의 병치는 이야기 자체와 관계되는 형식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바깥, 이야기가 놓인 조건, 즉 유투브와 같은 플랫폼 환경이나 가상의 데이터 환경을 환기시킨다. 난 마돌: 상의 예고편이라 이름 붙여진 짧은 영상은 허공에 떠 있는 구식 삼성 모바일 폰의 스크린 안으로 거대한 몸집의 공룡이 두발로 일어서 얼굴을 집어넣는 클립이다. 이것이 스크린 안의 이미지의 발생과 유통, 그리고 이미지와 데이터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이라면, 김효재가 프레임의 중첩과 이야기 바깥의 보다 더 무용한 이미지를 통해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미지를 순환시키는 플랫폼, 혹은 가상의 세계의 구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게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 구조가 화면 위에서 그대로 가시화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이미지에 대한 비가시적 힘의 구조조차도 이용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전제처럼 보이며, 한편으로는 그 구조자체가 서사를 추동하는 장치로 인지하는 듯하다. 그리고 유령처럼 움직이는 커서는 바로 목소리의 주체와는 동떨어진 실제적인 신체의 지표다. 앞서 언급한 난 마돌 시리즈에 대한 리뷰는 상편과 하편을 이어 붙여 그대로 재연하면서 그 위로 그동안 숨어 있던 작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태연하게 등장시키며 보다 촘촘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이미지의 재사용으로 끝없이 다른 이야기가 증식되는 구조를 완성하려는 듯이 말이다. 여러 개의 목소리만 있다면 여러 개의 이야기는 언제든 가능하다.

데이터베이스 픽션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야기의 문제는 이미지라는 것이 구성하는 체계 전체가 심대한 변화를 맞이했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것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일까? 시각성과 진실성이 극도로 감소된 이미지의 체계를 방증하는 것일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몽타주의 문법으로 나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일까? 여하간 하나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 가능하게 했던 감각의 균형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하여 시각 예술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룰 때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이는 것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매체적 조건이 과연 어떠한 픽션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것일테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영화가 언어와는 다른 랑가주라고 여기는 메츠에게 말은 영화의 안팎에 걸쳐 있는 이질적인 것이다. “말은 늘 넘어선다. 말은 항상 약간은 대변인 역할을 한다. 말은 결코 완전하게 영화 속에 있지 않고 항상 약간은 그 앞에 있다.” 아마도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 주제중 하나인 오디오-비주얼 체계에서 이미지와 말의 역학에 대한 방대한 논의는 잠시 차치해두고, 보다 더 일반론적인 범주에서 이미지와 예술 실천이 맞닿는 영역에 대해 흥미롭게 여겨지는 부분을 숙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레이몽 벨루가 비디오의 픽션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며 영화와의 연관 속에서 그것을 파악할 때 픽션의 두 개의 중심이라고 일컬은 것, 즉 ‘추상적인 중심(표면과 그 위의 점처럼 미니멀한 두 개의 요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과 ‘구체적 중심(완전히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라고 여겨지는, 캐릭터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연루되는 상황으로서의 이야기)’의 뒤섞임, ‘시스템으로서의 픽션’과 ‘신체로서의 픽션’의 뒤섞임, 즉 서로 다른 픽션의 구성 방법의 뒤섞임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비디오 이미지의 조달자로서의 텔레비전이 아니라 거대한 이미지 플랫폼으로서의 데이터베이스를 상상해야한다. 그리고 여기서 데이터베이스의 픽션을 구성하는 것이 왜 목소리에 기반한 리얼리티와 긴밀히 연관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볼만 하다. 그것은 이미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며 발생하는 문화적 양식이자 예술적 코드다.


 


  1. Boris Groys, “The Weak Universalism, e-flux Journal 15, April 2010. link 

  2. 정지돈,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다: 김범, 경기문화재단 웹진 TalkTalk, 2016. link 

  3. 이 작업은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2017년 2017년 10월 6일부터 10월 21일까지 소쇼룸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선보였고, 2부는 2018년 1월 6일부터 3월 18일까지 2/W에서 진행되었던 전시 호버링에서 상편과 함께 전시되었다.  

  4. 반면 목소리 자체가 서사의 담론으로서 적극적으로 기능하는 최근의 경우로 노재운 개인전: 코스믹 조크(2018. 8.30 ~ 10.14, 아트스페이스풀)에서 선보인 영상 요한에게-사이버스페이스 독립 선언문(2018)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사이버 공간을 사유화하고 통제하려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문으로서의 선언을 작가는 숙련되지 않은 발성으로 직접 발화함으로써 본인의 신체성을 강조했다. 

  5. 난 마돌: 상의 도입부에는 금발의 여성이 등장하고 난 마돌: 하에서는 스크린 밖의 우리를 TV를 보듯 스낵을 먹으며 관람하는 남성이 나오지만, 이들 또한 서사적 요소가 아니라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짜기워진 이미지의 파편에 불과하다. 이 작업에서 인간의 신체는 그저 다른 모든 이미지와 마찬가지의 위계에 놓여 있다. 

김효재, 난 마돌 설치 전경. 호버링(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