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이브의 서사학

아트인컬처 2018년 12월호 수록.

 

‘이브’는 일반적으로 바로 그날(d-day)의 하루 전을 가리키기 위한 기대에 들뜬 수사이지만, 이브를 기획한 권혁규는 ‘오늘’을 대신해 이브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브가 지시하는 오늘은 특정한 하루나 오늘날이라고 하는 일반화된 관념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인 주체에 의해 구성되길 기다리는 유예된 시간으로서의 현재이다. 즉 이 전시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혼재한 동시대성을 긍정하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근거 없는 회의주의와 낙관주의를, 자기 자신은 그 체계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듯 시간 자체를 대상화시키는 화법을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에 개별성과 구체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그것을 통해 현재가 다시 구성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 전시는 오늘에 대한 모든 구체적 입장이 서술되는 공간이 되기를 자처하고 조익정, 최윤, 정희민, 김혜미, 함혜경, 황효덕, 최하늘 7명의 작가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현재를 서술하는 신작을 제작한다. 여기서 비롯되는 이브의 흥미로운 점은 각각의 작업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고유하게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시의 서사 요소로서 이중의 작동을 하는 것이 비교적 선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은 개별의 이야기를 널뛰며 전시가 목적하는 시간성이 무엇인지, 즉 전시의 서사성에 대해 가늠해보게 된다. 전시라는 매체가 근본적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의미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작품과 전시가 유기적이고 상호적으로 관계 맺으며 일종의 고유한 통합체로 인식되는 것, 그리하여 전시의 서사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브가 세대론의 프레임을 벗어나 유연하게 작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조익정의 아파트 뒷길이다. 낮은 책상 위에 비치된 헤드폰을 쓰면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어느 날 밤 자신이 살고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진 일화에 대해서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 일화란 표면적으로는 고작 자신이 드나들던 슈퍼에서 주인을 속이고 담배를 훔쳐 달아나는 고등학생들을 뒤쫓아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자는 평소에 슈퍼의 주인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학생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외려 그로 하여금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내달리게 만든 것은 자신을 점점 더 옥죄는 삶의 갑갑함과 불안 그 자체였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이동식 그림연극인 카미시바이(かみしばい)의 형식을 빌어 선보이는데, 자전거 뒷자리에 설치된 상자무대와 책상에는 26개의 그림판이 나누어 비치되어 있고 관객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자유롭게 열람해볼 수 있다. 이 그림은 검은 수묵으로 그려져 있어 이야기의 내용을 선명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이야기에 스며 있는 화자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 섬세한 작업의 이야기는 도시 사회에서 운신하는 한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탁월하게 다루고, 그러한 상황을 야기한 사회의 양식과 힘에 대해 상상하게 만든다. 2층에 설치된 함혜경의 에세이 영상 별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에 등장하는 화자 또한 자신의 사적인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한 건축가에 대한 것이다. 건축이라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도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풀어내고자 했던 건축가의 사유를 회상하는 내레이션과 어디인지 모를 익명의 도시 풍경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채 평행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상의 풍경과 일본어로 발화되는 이야기 사이에서 어느 순간 노스탤지어가 베어난다. 의미가 아닌 정동으로 그 공간을 다시금 기억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1층과 2층 벽면에 걸린 정희민의 회화에서 도드라진 표면의 부조, 예컨대 May Your Shadow Grow Less를 가득 뒤덮은 초록색 하트는 후경에 놓여 있는, 마치 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된 개인의 분열증적 기억 이미지에 대한 감정의 표식으로서 드러나는 듯하다. 그것은 혼란스럽게 중첩되고 뭉개져 서사로 결합되지 못하는 풍경과 사물 위를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비치며 마치 1인극을 선보이듯 부유한다.

3층에 놓인 최하늘의 The CHASER: The God of Eco Hybrid & LOVE는 오늘날의 문화적 양식을 지칭하는 알레고리의 집합이다. 그림자와 같은 카펫, 이글거리는 화염이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부착된 높은 좌대,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마스크를 쓰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있는 초록색 소년상으로 구성된 이 세속화된 우상을 주위로 관객은 천천히 걷게 된다. 최윤의 진보 2(풍경 위로 붙은 것)은 세속화된 풍경의 이미지와 거기에 덧붙여진 또 다른 시대의 주문(呪文)을 영상에 수집하고 기괴하게 변조된 새소리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기형적인 풍경을 재현한다. 이미지의 환영이 달아나고 표면의 질감이 드러날 정도로 화면을 확대해 보지만 그것은 표면 너머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 영상이 기울어진 조야한 스티로폼 단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벽면에는 벼가 마치 난초화인듯 붙은 초록색 게시판이 걸려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초록색 배경은 어떠한 이미지라도 합성될 수 있는 바탕임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의 풍경과 그것에 “붙은”사물의 위치를 풍자한다. 제단이 어딘가에 가 닿기를 비는 신앙이라면, 초록색 게시판은 불가항력적인 권고다. 2층에 놓인 김혜미의 Slaapkamer가 이미지의 몽타주라면, 3층에 놓인 황효덕의 달 표면 고래는 분해된 사물의 비물질성을 위한 감각 요소들의 몽타주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문제는 결국 이미지와 사물의 생산과 해체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체계를 성립시켜보는 일처럼 보인다. 결국 이브를 관람한다는 것은 이미지, 이야기, 감정, 사물로 여과된 시간의 잔여물, 그 특수한 증거들의 흔적을 찾아 배회하는 일이 되고, 오늘에 대한 나의 감각을 쪼개고 나누어 여러 동시적 시간의 장면을 중첩시켜보는 시도다. 그리고 그것은 강한 물질성들의 배치를 통해 드러나는, 시간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공동의 마음과 공명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약 한 달간 이어진 이브에는 요즈음 의례적으로 이루어지는 강연이나 아티스트 토크와 같은 부대행사가 없었다. 이브는 거의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동시에 수다하게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작품의 배치 그 자체만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려 진력했기 때문이다. 즉 전시는 스스로 서사가 되기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이 전시가 표면적으로 다루는 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성이지만, 그것은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비평적으로 이미 매개된 개념적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들의 성좌를 거닐며 현상학적으로 지각되는 어떠한 틈, 그곳에 놓여있는 허구의 소여로서 시간에 대한 모종의 이해가 주어질 뿐이다. 이를 전시의 서사성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시의 서사학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가 언어와는 다른 ‘랑가주’임을 주장하며, 시네마-랑가주가 어떠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의미 작용을 하는지를(구체적으로는 ‘현실 효과’라고 하는 특수한 현상을 발생시키는지를) 탐구했다. 이를 위해 메츠는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배치되는 방식, 즉 영화에서의 이미지의 통합체적 성격을 유형화한다. 이처럼 영화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론은 전시 그 자체를 통해 비가시적인 어떤 것을 가시화시키고자 하는 예술적 실천을 읽어내는 데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전시가 하나의 랑가주가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분명 오늘날의 전시는 작품이 저 스스로 미적 대상이 되는 장소를 넘어서 현상학적 서사를 위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작가로서의 큐레이터, 저자로서의 큐레이터라는 말의 등장은 작품과 전시라는 이항이 점점 더 하나의 위상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뜻하고, 담화로서의 전시가 이야기로서의 작품을 초과하게 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동시대 미술의 전시에서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의 총합은 전시의 의미와 등가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짐으로써 전시의 서사성은 발현된다. 때문에 오늘날 전시의 의미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그것이 생산한 감각과 지식이 어떠한 예술적 실천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또 그것의 저자인 큐레이터의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을 가늠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시가 발생시킨 서사가 어떠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 판단은 전시의 의미 작용 대한 합리적인 규칙을 마련하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다만 아직 우리는 그러한 기호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아직은 전시가 건넨 대화에 사적으로 응답함으로써 그 의미를 대신한다.


 

이브(2018, 서울시 동대문구 왕산로 9길 24)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