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영상 비평을 위한 몇 가지 단상

아르코미디어 비평 총서 시리즈 미디어챕터 1(아르코미술관, 2018)에 수록.

 

비평은 근본적으로 판단의 행위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간단한 질문은,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이다. 미술 비평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작품, 전시, 이벤트, 혹은 집단적 운동과 같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시적인 것이게끔 만든 힘의 영역이기도 하다. 즉,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작품은 판단 대상이기도 하지만 힘의 영역을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수수께끼에 뒤덮인 하나의 증거물이다. 비평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 증거물을 꼼꼼히 조사하여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다. 작품의 형식, 그것을 만든 작가의 말, 그것이 속해 있는 시대의 상황, 누군가가 이미 수행한 조사 자료, 비슷한 사건을 다루었던 선행 연구 등은 그 증거물과 관계된 정황들이다. 물론 그것이 현장에 버젓이 놓여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저 그럴듯해 보이는 구성물일 수 있다는 의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짓된 증거 효력은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비평가는 탐정, 혹은 수사관과 닮아 있다. 사건의 현장을 꼼꼼히 살펴보고, 분석하고, 주변을 탐문하고, 직관과 경험, 지식을 동원해 비가시적인 도망자의 뒷덜미를 잡기 위한 몽타주를, 하나의 허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가장 곤혹스러울 시간은 어떻게 접근해도 사건이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기존의 방법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일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마인드 헌터의 FBI 수사관 홀든이 1970년대에 새로이 등장한 ‘이유 없는 살인’, 전례 없는 방식의 연쇄 살인 사건들을 마주하며 “범죄가 변했다”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홀든은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났음을 직감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범죄자와 직접 대면하여 그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인터뷰와 사건의 수사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마인드 헌터>의 드라마는 내게 비평의 과정 그 자체를 환기시킨다. 대상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 그것이 바로 ‘어떻게’의 문제다. ‘무엇’과 ‘어떻게’는 그리하여 비평을 위한 근본적인 전제이자 상호 긴밀하게 얽혀 비평 행위를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담론과 서사

영상이 오디오-비주얼이라고 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체계라고 할 때, 그것은 가시적인 것들의 배치를 통한 의미작용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작용이란 특정한 두 개 이상의 항을 연결시키는 관계의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상은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사운드의 유기적인 배치로 산출되는 서사물이다. 그것은 영상이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시간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는 이야기와는 변별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사는 이야기와 담론으로 구성된다. 시모어 채트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사물은 이야기라 불리는 내용의 국면과 담론이라 불리는 표현의 국면을 가진 하나의 구조다. 이야기는 담론에 의해 발화된다. 일반적으로, 현실효과를 의미작용으로 가지는 극영화는 이야기를 어색하지 않게끔, 즉 사실적인 것으로 지각되게끔 발화한다. 예컨대 우리는 인셉션이나 반지의 제왕보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더 어색하게 느끼곤 한다. 이야기를 비트는 담론은 영화라는 매체의 예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을 이룬 계보에 속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이야기의 허구성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영상 작품비평을 위해 구조주의적인 서사학의 방법에 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최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미술 작품은 전례 없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들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아카이브를 만들고, 강의를 한다. 영상 또한 마찬가지인데, 예컨대 내레이션의 빈번한 등장과 허구적인 상황을 구성하는 드라마, 혹은 화면 안에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는 것 등이다. 이는 기호적인 것일지언정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현대 예술의 궤적을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특징적인 시대적 징후처럼, 컨템퍼러리의 특정한 양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런데 이야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말하는 방식에 대한 숙고와는 다소 불균형을 이룬다. 이는 오늘날의 미술에 나타나는 소재주의적인 성격의 강화, 의미를 향한 과도한 관성과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연관된다. 이때 이야기를 이루는 사물 요소와 사건 요소가 곧장 미학적, 비평적 가치를 얻으며 종종 현상학적 의미 작용의 중요도는 망각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영상 예술을 마주할 때 생기는 곤혹 중 하나는 담론의 기능이 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재현에 대한 냉소, 즉 어떤 대상을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것이 더 이상 신뢰에 기반한 소통이 아니게 된 오늘날의 이미지의 위상이라거나, 나아가 당대의 첨예한 문제들은 더 이상 사진적 이미지 재현의 체계로는 가시화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그 양상이 가속주의(Accelerationism)의 한 면모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매체에서 가용한 합리적인 의사 체계를 발명하고 전략적 몽타주를 구성하기보다는 의미 작용의 불가능성을 과시하는 강도가 세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디오 비주얼의 배치 안에서 가시적인 것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상호간의 연관 관계가 더욱 임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즉각적인 감각과 체험으로서의 서사로 환원되며, 의미작용과는 동떨어진 자율성을 산출한다. 그리고 오로지 배치된 개별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경험만이 의미를 구성하는 인터페이스로 작동한다. 업체의 CHERRY BOMB(2018)와 같은 작업처럼 말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담론의 양식인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파괴적 운동성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서사 분석의 방법은 적어도 그것을 도식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가시적인 것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그것의 좌표가 유동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것은 이제 주어진 이미지나 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여분의 영역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 나의 눈앞에 놓인 이미지와 이야기가 어떠한 특정 담론을 경유하는지를 파악해야만 그 작품의 서사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고 서사성이 환기된다. 예컨대 김희천의 바벨2015)에서 스페인어 내레이션으로 낭독되는 자전적인 이야기와 그것과 병치되는 이미지의 시퀀스에 대해서는 명확한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요원하게 느껴진다. 임흥순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풍경 장면들은,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그 풍경이란 오로지 작품의 담론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반대로 작품의 담론이 규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풍경이 무엇으로 나아가는지 알 수 없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장편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 (2002)와 친애하는 당신(2002)에서 등장하여 서로 이어지는 병원 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아버지의 귀가 안 좋아 병원을 찾은 부녀는 보청기를 처방받고, 친애하는 당신에 등장하는 병원 씬에서는 아버지가 보청기가 망가졌다고 투덜댄다. 이는 아핏차퐁이 구축한 자신의 영화적 공간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연속되는 이미지와 이야기이며, 그러한 영화적 공간의 스펙트럼에 대한 숙고 없이는 불가해한 시퀀스다. 한편 김효재의 난 마돌(2017-2018) 시리즈처럼 이미지를 배치하고 영상의 시간을 유통시키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유투브와 같은 특정 플랫폼이 중요한 담론적 장치로 기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경우는 당대의 문화적 양식, 지각 체계의 구성 방식과 겹쳐진다는 측면에서, 사회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증후적 텍스트와 예술적인 실천수행을 구분하기 위한 비평적 규준이 더욱 요청된다. 이는 예술과 텍스트의 우열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증후가 곧장 미학적 가치로 환원되는 컨템퍼러리의 관성에 대한 경각심이기도 하다. 새로움이 급진적인 가치를 부여받는 컨템퍼러리의 장은 차이의 발생이 예술적 성취로 인지되는 습속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적 가치의 소멸을 암시한다.

우리의 지향점이 영상 예술의 서사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적 분석이라 하더라도, 과연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담론화 되어 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일은 더욱 필요해지고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 그 자체로 몽타주의 공간인 전시와 장소특정적인 설치 영상의 형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서사 분석이 요청되는 이유는 한 작품의 담론이 시간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간을 허구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사는 컨템퍼러리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조류와도 같다. 나는 여전히 예술의 정치성은 증후에 대한 폭로라기보다는 담론에 내재한 원칙을 폭로 혹은 발견하는 것에서 올 수 있으며 비평의 기능 중 하나는 그것의 윤리성과 정치성을 따져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 서사 분석이 오늘날의 영상 작품을 비평하는 최종의 심급은 아닐 것이다. 배치의 문제가 시간에 가 닿는 통로라면, 우리는 동시에 이미지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숙고해야만 한다. 여기서는 담론과 서사의 문제처럼, 의미를 분열시키는 특정한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것은 재현된 신체의 형상이다.

이미지와 재현된 형상

재현의 맥락에서 이미지로 드러난 신체는 흥미로운 연구의 대상이다.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서사에서 이야기된 것은 거의 항상 사건들의 시간적인 연속에 해당한다. (중략) 반면 이미지의 경우 재현된 것은 원칙상 고정된 순간적인 점이다.”1 이 말에 수긍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예외적인 변칙은 있다고 생각한다. 신체와 신체의 행위 이미지를 지각하는 것으로, 그것은 고정된 순간에서 무한히 진동하는 점이다. 즉 영상 속 신체의 행위를 마주할 때 생기는 곤경은, 나의 눈앞에 있는 이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모호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실제 사람인가? 캐릭터인가? 텍스트인가? 아니면 그 모두인가? 그것은 서사와 달리 즉각적으로 인지되지만 의미 작용은 무한히 지연되며, 그 자체로 서사성에 개입한다. 우디 앨런의 해리 파괴하기(1997)에 등장하는 흐릿한 얼굴처럼 말이다. 화면 속의 행위자와 그 행위를 의미화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명한 근거를 가지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텅 빈 도심의 도로 위를 하염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남루한 차림의 한 남자를 보여주는 씬(scene)을 생각해보자. 만약 이를 두고 누군가 그 남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심리를 대변한다는 방식으로 결론내릴 때, 그 의미화는 타당한가?

앤디 워홀의 첼시 걸즈(1966)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연기를 하지만, 그 연기는 자기 자신의 실제 삶에 대한 연기다. 여기서 담론의 기능은 약화되지만 화면에 드러난 인물은 실제의 삶과 연기된 삶을 동시에 함축한다는 측면에서 삶과 동시적인 허구를 유발한다. 한편, 브루스 나우먼의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1967)를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우먼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사각형의 둘레를 걷는다. 제목인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를 안무의 스코어로 생각한다면 나우먼은 그 스코어를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어깨와 골반을 기이하게 움직이는 나우먼의 형상을 통해 스코어의 텍스트로 완전히 수렴되지 못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스코어를 매개하는 몸, 그 몸을 매개하는 카메라라는 이중의 매개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명백한 사실은, 재현이라는 것이 자명함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불안한 굴절의 체계임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되새겨 보면, 화면 안의 주체를 하나의 표상으로 읽고 의미화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반대로 화면 안의 주체를 하나의 표상으로 투사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투명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이자 이데올로기적 작용이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민은 스코어라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이를 기반으로 안무를 짜고 영상 혹은 공연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오민의 영상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은 규칙과 우연이 관장하는 구조적 시스템이 아니라 그 규칙의 보편성에 포섭되지 못하는 고유한 형상적 특이성을 부각시키는 기술적 편집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규칙을 한 인물이 수행할 때, 그 수행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체의 미묘한 질감, 예를 들어 표정이나 움직임의 반경과 같은 질감은 그 규칙을 초과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카메라는 그 초과의 장면을 매우 비인간적인 형상으로 담아내고 편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인간적이란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 그리고 시선의 거리에 의해 프레이밍된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뜻한다. 즉 오민의 영상 작업에서 시간을 구조화하는 것은 규칙이지만 그것을 가로지르는 표면의 형상, 규칙의 재현으로 남겨진 형상,은 안무가의 지문과도 같은 질감과 윤곽선은 그 시간의 구조를 다시 흩어 놓는 기능을 한다. 그 형상은 안무의 규칙도 안무가 자기 자신도 아닌 기묘한 영역에 속한 하나의 이미지다. 오민은 관객과 공연자(2017, 2018)와 연계되어 출판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안무가의 스코어(2012)를 보면서, 강연을 하고 있는 아너 테레사 더 케이르스마커르(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얼굴로부터 ‘생각의 표정’을 최초로 인식하게 됐다. 춤추고 있는 그의 표정은 강연 중의 표정과 거의 유사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공연에서 기대하는 표현적인 표정도, 현대 무용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무표정도 아니었다. 케이르스마커르의 표정은 자신의 작업에서 함께 공연하는 다른 무용수의 표정과도 구별된다.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매우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이 ‘생각의 표정’이 공연자를 무대 위에 조성된 가상의 공간뿐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관객과 같은 시공간에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켜주는 흥미로운 요소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이 ‘생각의 표정’을 발현시키는 상황을 수집해 왔는데, 주로 (동시다발적이거나, 일 초의 쉴 틈도 없이 촘촘하게 연결되거나, 한 동작이 성공해야 다음 동작이 의미를 가지는 연쇄적인 작업과 같이) 고도의 집중과 통제가 필요한 순간과 긴밀하게 연결된다.”2

이러한 예시들은 영상을 통해 재현된 한 대상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즉각적이고 명료하게 이질적인 형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상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독특한 측면은 재현의 과정에서 그 대상 자체를 호출한다는 데 있다. 특정한 대상을 보여주고자 할 때, 음성 언어는 그 대상을 대상의 형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기호 체계로 변환키지만 영상은 대상 그 자체를 제시한다. 여기서 음성 언어의 기호체계와 영상의 재현간의 차이는 바로 그 대상의 특정성을 담보하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그리하여 영상에서 보이는 대상은 세계 안에서 실제 존재하는 그 대상과 동등하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상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결국, 영상 이미지는 아무리 투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철저하게 구성된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세계와 닮았지만 세계 그 자체가 아닌 세계. 우리는 그 형상을 통해서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구성된 방식을 통해 이것이 과연 어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어떠한 예술적 언어를 구축하고 있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못한 것은 사운드의 문제다. 사운드는 오디오 비주얼의 배치 안에서 이미지의 서사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사운드는 프레이밍 된 이야기에서 화면 밖의 존재, 즉 외화면을 환기시킨다. 또한 호러 영화에서 사운드가 극적 긴장감의 완급조절을 위한 클리셰로 기능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영상의 서사성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여길 수 있다. 보르네오의 동쪽(1931)에서 여배우 로즈 호바트의 장면만을 발췌해 재제작한 조셉 코넬의 로즈 호바트(1936)의 배경음악의 효과를 생각해보라. 한 캐릭터의 말이 더빙되었을 때, 같은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된 다른 영화의 캐릭터가 불현듯 겹쳐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 화면 안의 캐릭터에는 계속해서 어떤 잔상이 남는다. 목소리의 문제는 특히 오늘날 내레이션이 강화되고 있는 영상 작업들의 경향 안에서 좀 더 면밀히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목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발화하고 이미지의 배치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필요한 이유는, 가시적인 것들의 배치로서의 오디오 비주얼 체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체계가 하나의 랑가주로서 어떠한 언어적, 감각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지, 또 어떠한 시간성,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우회로이기도 하다.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 SF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1998)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컨택트(2016)의 주인공 루이스는 언어학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곳곳에 외계 문명의 우주선이 내려앉고, 그녀는 그것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들 중 하나에 들어가 외계인들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루이스가 외계의 언어를 습득해 나갈수록, 교차편집으로 삽입되어 영화의 주된 이야기와는 동떨어져 있던, 마치 루이스의 꿈속의 장면처럼 보이던 의문의 시퀀스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인지하게 된 루이스 자신의 미래다. 그러나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살짝 비틀어 ‘언어가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성을 구성한다’라는 가정은 굳이 외계의 언어라는 공상적인 상황을 빌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눈앞에서 가시적이다. 영화는 연속된 지속 안에서 시간을 구조화하는 역능을 지닌 매체이기 때문이다. 컨택트는 이와 같은 영화의 특수한 서사형식을 이야기의 핵심적인 소재라 할 수 있는 비선형적인 시간, 즉 과거-현재-미래의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이라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이야기와 겹쳐 놓는다. 그리하여 우리 관객은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녀가 경험하는 다른 시간의 모델을 효과적으로 의사-체험한다. 이미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녀의 딸을 보았지 않았는가. 오디오 비주얼의 체계가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언어의 심급이라면, 우리는 허구의 인식론을 허구의 존재론과 동일한 위상에 놓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크리스티앙 메츠(2011), 이수진 옮김,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 1, 서울: 문학과지성사, p.31. 

  2. 오민(2017), Audience and Performers,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