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무엇이 클레오를 불안하게 하는가?

시네마테크 아카이브 특별전 아녜스 바르다(2019) 프로그램북에 수록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의 클레오에는 몇몇의 장면에서 특정한 형상이 상징처럼 등장한다. 예를 들어 클레오가 안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맞은편 상점 안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 가면이라든가, 길거리에서 마주친 개구리를 먹는 남자, 자신의 팔뚝을 꼬챙이로 뚫은 남자 같은 것들 말이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이와 같은 맥락 없고 기괴한 도상은 분명 모종의 코드일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겠지만, 도상해석은 클레오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힘을 재배치하는 것에 진력하는 이 영화의 운동성을 생각해보는 데 그리 주요한 방법은 아니다. 그 형상들의 영화 내적인 기능은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데, 바로 클레오의 마음에 갑작스럽고 큰 불안을 환기키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끊임없이 클레오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이미지들이 산재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타로 카드, 깨진 유리, 그리고 친구인 도로시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 이 시선은 클레오를 쳐다보듯 카메라를 향하고, 뒤이어 초상처럼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클레오 주변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이 교차 편집되어 이어진다. 시선이 담긴 얼굴을 마주하며 불안의 봉오리는 피어난다.

클레오는 자신이 큰 병에 걸렸을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심리적인 정황들은 큰 병에 걸렸음이 확실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리고 자동차 번호판으로 운을 가늠하거나 화요일에는 새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미신을 확신하는 한, 그것은 일상을 구성하는 실재가 된다. 무엇이 클레오를 불안하게 하는가? 클레오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정체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듯하다. 그보다는 그 병이 자기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어떤 가치들을 무너뜨리고 망쳐놓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가깝다. 그는 타로 점집을 나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추함이야말로 곧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생명의 부재가 아니라 ’미모‘의 부재라는 강변은 영화 초반, 그러니까 클레오가 가발을 벗고 스튜디오를 벗어나 저 홀로 길거리에 나서기 전까지 그를 지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클레오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미지와 말, 그리고 상황을 가시화시키며 그 힘의 작용 방식과 그것이 작용하는 층위를 탐색한다. 클레오로 표상된 한 여성을 계속해서 근거 없는 불안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것은 이와 같은 이중 구속으로서의 ’이미지‘이고 영화는 실존적인 신체가 이미지를 넘어 서는 과정을 전개시킨다. 이 영화의 픽션은 다름 아닌 조정된 힘의 관계인 것이다.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의 클레오는 클레오라는 하나의 인물만을 좇지 않는다. 다섯시부터 여섯시 반까지의 시간을 총 13개의 지속으로 나누어 클레오와 클레오를 둘러싼 인물들 사이에서 섬세하게 무게중심을 이동한다. 그것은 영화적 공간 안에서 클레오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힘의 풍경이며, 클레오는 그 풍경을 거니는 산책자로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좌표를 찾아 나간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허탈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 사실을 긍정한 것, 그것은 영화가 추동한 조정된 세계의 좌표를 알리는 불빛일 것이다. 여기서 이 영화는 두 가지 의문을 남긴다. 하나는 제목과 달리 왜 ‘일곱시’가 아닌 여섯시 반까지의 드라만을 보여 주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13개로 나누어진 지속 시간은 왜 영화적 공간의 시간이 아닌 실제 지속과 등가적인가 이다. 이 두 질문은 모두 시간과 관련된다. 전자가 아직 구성되지 않은 시간의 상상적 여분이라면, 후자는 구조화된 영화의 시간임과 동시에 관객의 시간이다.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의 클레오의 영화적 시공간은 언제나 프레임의 밖으로 초과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힘의 재배치를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능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