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회색 연구

타이포잔치 2023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의 커미션으로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 회색 연구를 구성하는 텍스트.


1

괴테는 색채 현상이 밝음과 어둠의 만남을 통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색채는 검은색과 흰색의 경계선(Grenze)에서 검은색과 흰색의 상호간섭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색채라는 것은 인간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고정되어 있다는 본질주의와 거리가 멀었으며, 그보다는 관계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서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론었다. 색채라는 것은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움직임에 대한 다른 말이다. 1810년 완성된 괴테의 『색채론』은 근대의 자연과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수학적, 물리학적 지식으로 성립하지 못하며 당대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후에 괴테의 색채론을 재평가한 하이젠베르크는 뉴턴의 색채론이 물리적 질서를, 괴테의 색채론이 정신적인 질서를 보여준다고 말하며 이 두 지식의 상보성을 역설했다.

괴테가 『색채론』에서 처음으로 회색을 언급하는 내용은 서문에 있으며, 다음과 같다. “이제 일반적인 특성을 말하자면, 색들은 전적으로 반광(半光)으로, 반그림자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혼합되어 그 개별적인 특성들을 서로 상실하게 하면 일종의 그림자, 즉 회색이 생겨난다.” 괴테는 색채를 크게 생리색, 물리색, 화학색으로 구분하는데, 생리색에는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이 있다. 생리색이란 “눈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색채의 조화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자 눈의 생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눈은 어둠과 빛 사이에서의 항구적인 진동을 통해 물체를 포착한다. 괴테는 생리색을 다른 여러 색채를 발생시키고 변화시키는 일종의 매개변수로, 그리고 시각 작용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긴다. 특히 회색을 두고 “적당한 밝기의 빛”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적당함’을 눈의 활동의 시작점으로 삼기 좋은, 혹은 모든 이미지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중간값이라고 읽어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몸체를 가지기보다는 유령적인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부정적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비본질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기만과 결함으로” 말이다.

한편 『색채론』에서 괴테는 음향과 색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색채와 음향은 분리와 결합, 흔들림과 가라앉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작용들”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완전히 상이한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매개와 작용을 통한 것이기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색채와 음향을 일대 일로 대입시키는 모든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며, 오직 그것은 운동성이라는 프로토콜 안에서만 유비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 괴테 지음, 『색채론』,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3

2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림자를 두고 색의 여왕이라고 말했다. 색채는 회색 속에서 노래한다. 화가들의 작업실은 대개 회색 벽을 가지고 있다. 제리코는 회색 종이를 붙인 벽에 자신의 그림을 걸어 두었다. 회색은 완벽한 배경을 만든다. 마티스의 작업실 벽은 회색이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무시했고 <붉은 작업실>(1911)에서 벽을 빨간색으로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이 그림에서는 방과 방 안의 사물은 빨간색으로 녹아내리고 빨간색에 점령당한다.

회색은 완강하고 끈질기다. 밝은 색이 미래로 달려나가도록 하지만 또한 현재를 유지한다. 형상을 일점일획으로 감축한 자코메티의 그림, 성조기를 회색으로 칠한 재스퍼 존스의 그림, 세계를 회색 천으로 감싼 요셉 보이스, 연금술의 선두에서 회색으로 작업한 안젤름 키퍼. 그들은 회색의 대가 만테냐가 전체를 단색으로 그린 구상 회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리자이유의 계승자였다.

회색 작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베케트가 있을 것이다. 또 윌리엄 버로즈. 베케트는 작품이 회색이고, 버로즈는 존재 자체가 그렇다. 펄 그레이 모자를 쓴 신사. 요새와 우아한 복식을 갖춘 동굴의 회색. 회색 수도자. 배후의 인물.

  • Derek Jarman, “Grey Matter,” Chroma (London: Vintage, 1994)

3

필드 레코딩을 하러 떠돌아 다니다 보면, 지금 내가 떠돌고 있는 세계의 음향적 현실에 대해서 천천히 파악해 나가게 된다. 시각적인 풍경은 즉각적으로 다가오지만 청각적 풍경은 매우 느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굽이굽은 도로를 타고 산을 넘어가자 갑자기 수평선이 한번에 펼쳐진 바다가 보이고 “우와!”하는 감탄사를 연발한 경험이 한번씩은 있을 거다. 시각적인 풍경은 항상 먼저 주어지고 우리는 거기에 다가간다. 반면, 청각적 풍경은 항상 그곳에 다가간 후에야 주어진다. 해변에 가만히 앉아서 반복되는 파도 소리를 듣다 보면 그제야 비로소 바닷가의 온갖 소리들이 뒤섞여 들어온다. 시각은 정보를 단번에 구성하고 청각은 천천히 구성한다. 이것이 신체 기관 능력의 차이인지, 특수한 역사적 유산이나 문화적 학습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여하간 ‘지금의 나’는 이 인식의 차이를 느낀다. 필드 레코딩을 한다는 건 음향적 현실에서 청각적 풍경을 구성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듣기의 시간이 필요하고, 필드 레코딩의 목적은 그 듣기의 시간 이후에 정해진다.

2년 전 쯤 제주도에 필드 레코딩을 갔을 때, 나는 신화, 전설, 민담 등의 설화가 흐르는 장소들을 찾아 다니며 소리를 녹음했다. 는 경계 지역의 합성 작용을 음향적으로 탐구해보기 위한 프로젝트였고 이 프로젝트에서 필드 레코딩은 주요한 조사 방법론이었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이 마주하고 길항하는 경계선에는 반드시 모종의 합성 작용이 일어나고, 그렇게 엉기게 된 합성적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는 음향적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전설이란 것은 대개 그 땅이 형성된 이유를 말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해 보자. 설화는 말로 전해지고(口傳), 말은 공기를 통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풍문(風聞)이다. 어떤 이야기는 바람을 따라서만 흐른다. 그런데 ‘風聞’을 곧이 번역하면 “바람을 듣다” 혹은 “바람을 들어 이해하다”가 된다. 이야기가 생길 만큼 특별한 장소에는 그만큼 특별한 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설화의 장소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듣는 일을 반복했다. 소리에 어떤 비밀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제주도의 산간을 사나흘 정도 헤매며 알게 된 것은, 이곳 세계의 소리는 해가 뜨기 직전과 해가 지기 직전 가장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해가 하늘의 가운데에 떠 있을 때, 세상이 완전한 밝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오히려 음향적 세계는 잠잠하다. 그래서 필드 트립의 중반 이후부터는 자연스레 새벽에 일어나 깊은 숲을 향해 들어갔고 해가 질 때 쯤에는 깊은 숲에서 되돌아 나오곤 했다. 그 두 시간대는 말 그대로 회색의 시간인데, 어둠에 천천히 빛이 섞여 들거나 빛이 천천히 어둠으로 꺼져갈 때 그 풍경은 잠시동안 회색으로 비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둠 속이나 빛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물론 이 회색 시간은 굉장한 공포와 함께한다. 어둠에서 출발하고 또 어둠으로 나아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세상이 온통 불안정해서 온갖 움직임으로 들끓기 때문이다.

물영아리 오름의 정상에는 작은 습지가 있다. 나는 이곳의 소리 풍경에 매료되어 여러 번 오르내리며 소리를 녹음했다. 한번은 일몰 직전에 맞춰 올라갔는데, 곧 밤이 될 산에 오를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순수하게 시끄러운 그때 그곳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헤드폰 속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두명… 세명…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먼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다가오는 중이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습지에 도착했다. 대학생처럼 보였던 그들은 어둠이 짙어지며 다시 오름을 내려갔고, 나는 그들의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내가 만약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존재는 크게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프레임 바깥에 두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녹음기의 청각적 공간에는 어떤 소리를 의도적으로 제외시킬 수 있는 프레임이 없었고, 그저 그 소리가 멀어져서 바깥으로 나가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필드 레코딩의 매체적 특수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건 음향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이 존재하는 전체적인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리라는 것은 음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향이 공간적 특수성 안에서 작동하는 총체적인 움직임과 관계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필드 레코딩은 음향 채집의 도구가 아니라 소리라고 하는 특정 공간 안에서의 음향적 관계 전체를 등장시켜주는 도구라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음향이 소리의 정체라고 여기는 음향본질주의나 음향을 구성함으로써 소리를 구축한다고 여기는 구성주의와 구분되는 것이다. 이 둘은 소리에서 검은색이라고 할 수 있을 음향만 남겨둔 채 그것의 공간이라고 할 흰색은 없는 듯 취급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청각이 구성하는 소리 풍경은 언제나 그 둘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회색 영역의 역동이다.

4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쓴다는 건,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흰색의 가상의 공간에 검은색의 활자를 채워 넣는 일이다. 글을 쓰기 전이나 글을 쓰는 중에는 검은 글자들을 어떻게 이어 붙일지 숨을 참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여유를 부릴 겨를이 없다.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는 검은색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어딘지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글을 쓴다는 건 검은색을 다루는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건 전적으로 쓰기의 의지에서 비롯한다기 보다는, 동시에 호로 바쿠이(horror vacui)와 함께 성립한다. 끊임없이 흰색 면을 의식하고 흰색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텅 비어 있는 흰 면을 마주하면 대체로 공포스럽고 암담하다. 화면으로 흘러 넘칠 듯한 저 의기양양한 흰 면을 짓눌러버리도록 검은 글자들과 함께하는 전투가 필요하다. 검은 전투가 어찌저찌 위기들을 잘 넘겨서 검은 글자가 점점 울타리처럼 면을 촘촘히 막아내 주면 공포스럽고 불안했던 감정은 안도 혹은 희열로 바뀌게 된다. 검은 것들이 흰 면을 채우고 있을 때는 정말로 안정감을 느낀다. 그토록 바랐던 미래가 드디어 여기에 놓여 있는 것만 같달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용과는 별개로 흰색 위로 검은색이 섞여 있는 꼴이 영 만족스럽지 않다. 그건 내가 써 놓은 글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글을 고쳐 나가는 것은 생각을 바꾸어 먹거나 언어를 정교히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검은색의 영역을 무언가로 조형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떻게 조형되어야 할지는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데, 내 쓰기의 대상이 되는 것, 그리고 내가 쓰기로 말하고자 하는 것, 표현하고자 하는 것,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것, 생산하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재생산 할 리듬과 운동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기에 검은색의 글자를 내어 놓고 조합하여 의미를 형성하는 일과 그것을 조형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련의 행위 시간을 뜻한다. 이 전투는 그저 흰색 영역을 정복해 나가는 호전적이고 맹목적인 전투가 아니라, 검은색을 흰색과 어떻게 대립시키고 어떤 갈등을 불러 일으킬지를 설정하는 보다 복잡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건 전쟁보다는 정치에 가깝다. 글을 쓰는 이들이라면 분명 자신이 아끼는 문장이지만 조형성을 위해 삭제한 적이, 내용적으로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조형성을 위해 여담을 덧붙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용과 조형 모두가 총체적으로 만족스런 합의점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글쓰기는 끝을 내게 된다.

조해나 드러커의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는 흰색에 대한 검은색의 배치가 어떻게 은밀하게 의미를 생산하는지를 면밀히 탐구한 작업이다. 예컨대 “본문 일부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되 맞은편 페이지와 연결되도록 위치를 신중히 계산함으로써, 인접성의 위력을 역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 외부자는 따로 노는 글일까? 아니면 다른 부분과 연결될까? 어떻게 간주해야 할까?”라고 묻는 문단은 실제로 주변을 텅 비워 놓고 지면에 위치시켰다. 회색도를 조절하는 조형적인 일과 텍스트의 내용을 결합함으로써 우리의 두 가지 앎의 양태를 동시에 작동시킨다. 이와 같은 텍스트의 디자인적 퍼포먼스를 오랫동안 그리고 중요한 축으로 삼으며 작업 해 온 이들이 김뉘연・전용완일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편집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편집은 내게 주어진 어떤 상태의 문서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가끔 필자로부터 원고를 처음 받아 파일을 열어 보았을 때, 단번에 이 글이 잘 쓰였는지 아니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지가 느껴지곤 한다. 그건 아마 잘 세공된 조각과 엉성한 공산품을 비교해 보았을때 가지는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잘 쓰인 글의 검은색과 흰색의 리듬과 운동성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아름다움과 상쾌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건 그 자체가 이미 내적으로 잘 형성된 대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교정교열의 중요성은 이런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오탈자가 많거나 문장 부호가 울퉁불퉁하게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고나 비문이 많을 때 글을 꽤 못나 보인다.

나는 최근 희곡 책을 만드는 편집 일을 하고 있는데, 희곡을 다룬다는 건 이미지를 다루는 일만큼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왜냐하면 희곡은 산문이 가지고 있지 않는 호흡들이 있고, 그 호흡들은 지면에 공간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요구하는 적절한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생각보다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텍스트가 어렵거나 서사가 엉겨 있어서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위한 공간을 상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조해나 드러커 지음,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 최슬기 옮김, 작업실유령, 2019

5

Walking in the City

Yvonne Rainer

I can still love this time of day
east from Chelsea
south to St. Marks
a toothless moon
clearing the autumnal towers
each aglow in the sun’s spent light

As long as I can pass tatoo parlors
palm readersㅇ, Greek lunchenettes, bodegasㅇ
there may still be room to breathe
in this devouring town

Keep moving

  • Yvonne Rainer, Poems (NY: Badlands Unlimited, 2017)

6

2019년 설립해 햇수로는 5년째 운영 중인 출판사 나선프레스에서 나는 많은 작업을 강문식 디자이너와 협업했다. 나선프레스가 강문식 디자이너와 지속하여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건, 되돌아보면 나선프레스가 지향하고 획득하고자 하는 어떤 모호함과 불확실성의 상태를 강문식 디자이너는 직관적으로 이해했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선프레스의 책들을 관통하는 것, 출판 활동을 지탱하는 하나의 원리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책으로 구현될 어떤 작업이 불확실성과 모호함에 기반함으로써 그 의미나 서사가 나선형의 형태로 무한히 확장하고 운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협업할 수 있었던 접점 중 하나는 우리가 둘 다 정지해 있는 상태 혹은 정지해 있는 것, 정지시키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끌리고, 움직임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건 책이라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만들어낼 책이라는 것 전체를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들에서 움직임을 만들면 책은 끊임없이 일렁이는 것이 된다. 몇 해 동안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우리는 이 일을 ‘회색 실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령의 집』(2019)은 ‘소닉 픽션’ 프로젝트와 얽혀 만들어진 책으로, 10여명의 주변 예술가들에게 서울에 관한 짧은 글을 의뢰해 편집한 책이다. 어떤 이는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부서진 글을, 어떤 이들은 노이즈같은 글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이 글을 배치함에 있어서 선명도와 해상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이 점차 희뿌연 노이즈와 시끄러운 노이즈로 나아가는 시퀀스는 지금 현재의 서울이라는 도시에 관한 경험의 스펙트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편집의 기획에 운율을 맞추듯 강문식 디자이너는 각 글마다 글자 크기, 글자체, 간격, 여백, 단 등 조판의 요소들을 미세하게 바꾸며 책 전체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물론 그 움직임은 뒤로 갈수록 소란스러워진다. 그렇게 『유령의 집』은 텍스트가 표명하는 내용 뿐 아니라 그것의 시각적 이미지, 물질적 경험을 통해서 또한 소음을 향해 나아갔다.

『비밀 호수와 더스트 데블』(2020)은 화성 탐사와 관련한 사진과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서로 뒤엉키면서 서사를 만들어 내는 박민하 작가의 책이다. 박민하 작가는 인류가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다양한 장치들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살피는 작업을 해 왔는데, 대표적으로 영화가 그러하고 또 우주 탐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화성탐사선이 지구로 전송한 이미지는 과학적 진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판타지가 투영된 의뭉스러운 것, 의심해볼만한 어떤 것이 된다. 그러므로 『비밀 호수와 더스트 데블』은 바로 이러한 의심을 수행하는 것이 되어야만 했는데, 이 지점에서 사진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지가 관건이 되었다. 피해야 할 것은 작가가 나사(NASA)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화성탐사선의 기록 사진이 멋있게 혹은 낭만적으로 표현되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그 사진은 어딘지 이상한, 어딘지 의심스러운,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되지 않아야 했다. 이에 대해 강문식 디자이너는 모든 사진에 은별색 인쇄를 덧씌우는 것을 제안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이미지에 광택과 불투명함을 더하며 이미지를 유령적으로 보이게 했다. 사진을 선명하게 보려는 어떤 노력도 무력하게 만들었고, 사로잡을 수 있을 듯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거부했다. 그건 이 책이 사진과 글을 읽는 이들에게 불러일으켜내야만 하는 특정한 상태였고 은별색의 도입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이미지에 대해 의심하는 이야기는 의심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해야만 했다.

회색을 도입한 인쇄가 이미지의 매우 다른 존재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경험한 뒤, 『퍼포먼스 퍼포먼스』(2021)에서는 이를 조금 더 개념적으로 활용했다. 『퍼포먼스 퍼포먼스』는 아메리카 지역의 퍼포먼스 사례들을 중심으로 저자의 퍼포먼스 이론을 구성하는 책인데, 이 책에 들어가는 모든 도판은 저자가 운영하는 퍼포먼스 아카이브 헤미 인스티튜트(Hemispheric Institute of Performance and Politics)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의 저자에게 퍼포먼스란 단 1회만 수행되는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고, 박제되고 기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구도를 넘어서서 끊임없이 창발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복의 수행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퍼포먼스 작업을 기록한 사진 또한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불가능성과 이미지의 선명함 그 양극단 사이에서 계속해서 불안하게 이것저것이 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했고, 이런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개념에 따라 모든 기록 사진에 노이즈 형태의 은별색 레이어가 덧씌워졌다. 그럼으로써 이미지의 가시성은 떨어졌지만 이 책은 퍼포먼스에 관한 저자의 생각에 뒤따라 끊임없이 모호한 상태로서 움직임을 예비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사라지는 하루』(2022)는 낯선 형태들이 등장하는 박보마의 그림책이다. 박보마는 원형들의 세계와 현재의 남성중심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세계 사이의 격차에서 원형들의 세계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며 그 세계를 회복시키고자 시도하는 작가다. 『사라지는 하루』에 등장하는 형태들은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보일 법하고 있을 법한 것들인데, 그러므로 그것은 명백한 실재도 완전한 허구도 아닌 그 사이의 모호한 영역에서 존재하는 물질적인 허구다. 『사라지는 하루』의 형태들에는 은별색 노이즈가 얹혀 있는데, 이로 인해 이 형태들은 디지털상에서는 불가능한 물질적인 존재감을 얻게 되었다. 노이즈화된 은별색 인쇄는 빛이 비추는 각도, 빛의 양, 주변의 환경에 따라 이 형태들이 그때그때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형태들이 스스로 무엇이 되고 어떤 장소에 있으려 하는 것인지를 표명한다. 끊임없이 변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게 만드는 일, 언제 펼쳐 보아도 다른 읽기가 가능해지는 일, 읽기 자체가 생성적인 것이 되게끔 하는 일. 실제로 그러한 존재감을 구현하는 일에 회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닝빵』(2023) 작업을 준비하며 우리는 은별색의 사용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강문식 디자이너와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지금껏 해 왔던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던 선택의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었다. 김지환, 민성식은 비장소, 비공간이라 할 수 있을 장소를 배경으로 삼으며 거기에 있을 법한 것들을 캐릭터로 그린다. 이상우 또한 선명하고 가시적인 것이 아닌 파편같은 현실, 불투명하고 모호지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현실의 순간을 듣고 묘사한다. 이와 같은 합성적 현실을 구현하고 또 읽기의 일을 회색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색이 필요했다. 회색은 여기서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이념 혹은 의지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해 봐야 알 것 같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회색 실험’은 ‘색’을 쓰는 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회색 실험’은 움직임을 생성하는 보다 큰 범주의 일과 관련한다.

7

사무실에 놀러온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라이브 공연을 녹음하여 앨범으로 발매하는 것에 대해 대화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한 분은 서점을 운영하는 분이었고 녹음된 것을 듣고 실제 공연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되면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분은 음악가였는데 녹음은 음악적으로나 음악 소비에 있어서 크게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기록을 해 둔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음악가의 말에 동의하며, 실황을 녹음하고 그것을 다시 앨범으로 만들 때 어떤 재생산의 기획이 없다면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이건 예술 작업을 기술 복제의 신화 속에서 다루는 편집자의 태도에서 기인한 규범적인 태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음악가가 말한 기록해 둔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내 의견을 덧붙였는데, 그 때 그 한 번의 연주 자체 보다는, 녹음에서 불가피하게 포함되는 특정한 공간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훗날 더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말이었다.

어떤 인간은 같은 기록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들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의도적으로 녹음의 대상으로 삼은 특정 음향에 집중하여 녹음물에 가치를 부여하겠지만, 훗날 아주 다른 청각적 능력, ‘음악’의 다른 제도를 가진 이들이 이 녹음물을 들었을 때에는 지금 우리가 없는 듯 취급했지만 그들에게는 명백하고 중요할 어떤 음향적 현실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건 특별한 얘기가 아니다. 디지털 소리에 익숙한 우리가 아날로그 소리에 대해 가지는 어떤 거리감, 낯섦, 매혹, 혹은 향수를 생각해 보라. 또 레이턴시처럼 우리는 거의 인지하지 못하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라. 각자의 소비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거기엔 뭔가 다른 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안다.

크리스토퍼 스몰의 견해에 따르자면 음악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고, 이 음악이라는 사건에는 작품, 연주, 연주자 등 관습적으로 음악을 구성한다고 여기는 것 이상으로 많은 외부적 존재가 조건이 된다. 나는 녹음이 이 외부적 조건의 존재를 등장시켜주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점이라고 하면 너무 도구적인 표현일 터이니, 그보다는 구체적인 실재에 접근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우리는 특정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에 ‘어떤 음향’만을 선별해서 듣고 그 듣기를 강화하는 과정 속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다. 특히나 요즘의 노이즈 캔슬링 같은 기술을 생각해 보면, 현재의 음향 생산과 듣기 문화는 가능한 선명히,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는 기술적 이데올로기의 방향과 함께 나아가는 중이다. 노이즈 캔슬링의 간단한 기술적 원리는 ‘소음’이라고 규정된 음향적 현실 자체를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주파수를 생성해 상쇄시킴으로써 없는 듯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기술은 소리를 관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과 잡음으로 명확하게 정의하고 구분해 내며 의미 없는 것을 강제로 지워버린다. 여기서 소리를 관계적인 것으로 또 끊임없는 변화와 일렁임으로 여기게 하는 이념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녹음기를 든다는 것은 종종 정치적인 순간을 생성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명히 듣는 일이 아니라 청취자의 치우친 듣기를 오히려 약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비롯한 듣기는 막대하게 쏟아지는 음향적 현실의 복잡성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렇기에 녹음기를 든 사람은 가끔은 현재의 완고한 소리 문화에서 저 멀리 선 외부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주하는 소리의 현실은 불가항력적으로 불투명하고 어수선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인 회색의 풍경이다.

  • 크리스토퍼 스몰 지음, 『뮤지킹: 음악하기』, 조선우, 최유준 옮김, 효형출판, 2004
  • 데이먼 크루코프스키 지음, 『다른 방식으로 듣기』, 정은주 옮김, 마티, 2023
  • 신예슬 지음, 『음악의 사물들』, 작업실유령, 2019
  • 조너선 스턴 지음,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0

8

「세심한 듣기는 소리를 만드는 일보다 중요하다: 공간에서의 소리 전달」(c.1989)

앨빈 루시어

수백 년 동안 서양 음악은 작곡과 연주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심은 소리의 개념과 생성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소리의 전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죠. 쓰인 악보는 3차원 현상의 2차원적 상징입니다. 표기법이 아무리 복잡해도, 환영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쓰인 음악은 평면에 갇혀 있습니다. 구전 전통의 음악조차도 암기나 악기의 토폴로지에 뿌리내리고 있고 또 글, 이야기, 사회적 위계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관심을 가져서 소리가 어떻게 공간을 통해 흐르고 공간을 차지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소리에는 특정한 공간적 특성이 있습니다. 길이가 짧은 진동(고주파)은 지향성입니다. 길이가 긴 진동(저주파)은 퍼져 나갑니다. 음파는 3차원의 구체 형태에서 흘러 나오며, 특정 상황에서 마디(node)와 배(antinode)는 바이올린의 진동하는 현처럼 공간에서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각 공간은 흡수, 반사, 감쇠 등 구조적인 것과 관련된 현상을 통해 소리를 수정하고, 어딘가에 두거나 이동시키는 그 공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존 음향 엔지니어링 관행에서는 동일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이러한 현상을 무시해 왔습니다. 즐기고 활용해야 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는 음악 작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소리의 자연적 특성과 건축 공간의 음향 특성을 음악적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일련의 작품을 구상해 왔습니다.

(중략)

<사람과 사물의 윤곽선(Outlines of Persons and Things)>(1975)에서는 음파는 불투명한 물체 주위에 회절 패턴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귀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실루엣을 생성하거나 이미지를 이동시키고, 증폭시키는 확성기를 생성합니다. 객체나 청자가 움직이는 경우, 약간의 위상 변화의 결과로 필드에 감지할 수 있는 변화가 발생합니다. 만약 소리가 두 개 이상의 밀접하게 조율된 주파수로 구성된 경우 리듬 패턴이 일시적으로 빨라지거나 느려집니다.

(중략)

저는 요즘 공공 장소를 위한 일련의 태양광 음향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유형, 크기, 구성, 수집 기능을 갖춘 태양광 패널이 매일의 일출과 일몰 사이에 해를 따라 다양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날씨 조건에서, 햇빛이 하루 중 다른 시간에 다른 강도로 패널에 떨어지면 다양한 양의 전압이 수집됩니다. 이것이 전자 음악 모듈, 앰프, 스피커 등을 가동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근처의 나무와 수풀, 인접한 건물의 모퉁이, 지나가는 사람과 자동차가 드리우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또한 음악에 추가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각 설치는 고유할 것입니다. 패널의 수와 크기는 사운드 시스템의 복잡성과 설치 규모에 따라 결정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본 음원은 낮은 전력 소비를 위해 선택된 펄스파 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주기에서 단지 10%만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필터는 음색 제어에 사용됩니다. 모든 시스템은 완전히 태양열로 구동됩니다. 음악의 생성, 전파 및 품질은 특정 순간의 태양 광선의 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 Caleb Kelly ed., Sound (Massachusetts, Cambridge: The MIT Press, 2011)

9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의 시작에는 자살을 위해 건물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총에 맞아 죽은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건물 아래에는 안전망이 있어서 자살은 필히 실패할 것이었지만, 이상한 우연으로 아래층에서 싸움을 하던 노부부가 창밖으로 쏜 총에 맞아 타살된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한순간에 ‘하는 것’에서 ‘당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뒤늦게 밝혀진 것은 그 총에 총알을 직접 장전해 둔 것이 그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남자는 노부부의 아들이었고, 부부싸움 도중 총으로 부인을 위협하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정말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요량으로 총알을 넣어 둔 것이었다. 어머니를 죽이려던 총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되었다. 이 남자가 왜, 어떻게 하여 죽었는지는 명백하지만 과연 이 죽음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난감하다. 자살이지만 자살만은 아닌, 타살이지만 타살만은 아닌, 이 죽음은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 말고도 모종의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조금 다른 픽션이긴 하지만 하워드 조지의 논문 「중동태는 없다(No Middle Voice)」에도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한 죽음이 나온다. 여기서 하워드는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즉, 하느냐 당하느냐 하는 대립적인 구도 사이의 중간 영역, 즉 능동과 수동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표현할 중동태라는 것이 영어에는 없다는 것이다.

중동태는 능동과 수동 어느 쪽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영역을 가시화해준다. 하지만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여기서 논의를 더 밀고 나가는데, 그는 중동태가 그저 능동과 수동 사이의 중간 영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능동-수동을 대립시키는 의식의 틀, 기반 자체를 전환하기를 요구한다. 즉, 능동-수동의 대립 관념이 전제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이지만, 능동-중동의 대립에서는 의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보다는 주어가 과정의 안에 있느냐 혹은 바깥에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능동에서 동사가,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대립하는 태인 중동태에서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가 되는 그러한 과정을 나타낸다 요컨대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글자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우리는 대개 암묵적으로 읽기를 의지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책을 펼쳐… 또렷한 정신으로…한 글자 한 글자씩…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읽기의 모델은 텍스트를 의미론적으로 다루는 일이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명시적인 지식을 재생산해내는 것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의미만을 향해 텍스트로 향하고 또 텍스트는 의미만을 보여주려 할까? 물론 텍스트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며 그 의미를 가장 잘 가시화해주기 위한 체계를 설계하는 과정이 있고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읽기에 있어서 나와 텍스트 모두의 비의지적 영역이 있다고 추정하며, 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그곳에서의 사건에 관심이 있다. 헤라르트 윙어르가 『당신이 읽는 동안』에서 줄곧 말하는 ‘자동적인 읽기’가 이에 관한 비슷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읽기’라는 과정은 주어인 ‘나’의 안팎에서 혹은 안팎을 오가며 끊임없이 진동하는 운동성이 구성하는 시간을 뜻할 것이다. 글꼴을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은 “사실상 무한하다”는 윙어르의 생각의 행간에는, 읽기에는 매우 방대한 복잡성이 자리한다는 이해가 놓여 있다. 글자의 명료함과 특성을 구축하는 일이 의지적인 읽기를 위한 객관적 대상을 조형하는 데 헌신하는 일이라면, 중동태로서의 읽기를 가동시키는 게임은 불투명성을 조작하는 데 그 규칙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중동태의 세계』, 박성관 옮김, 동아시아, 2019
  • 헤라르트 윙어르 지음, 『당신이 읽는 동안』, 최문경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3

10

빅토르 I.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념(즉, 헤겔적인 관념)과 재현에 대한 우리의 관념(사실상 플라톤적인 관념)은 우리를 다양한 관점으로 빛의 역사에 접근하게 해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지만, 그림자의 역사의 가능성은 회피하도록 만든다. 헤겔은 이러한 모호함의 본성에 대해 간접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사람은 존재를 마음속에 그릴 때, 또렷한 시각의 명확함으로서의 순수한 빛의 이미지 속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무를 그릴 때는 순수한 어둠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구분은 바로 이렇게 친숙한 감각적인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것을 더 정확하게 상상한다면, 절대적 밝음 속에서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보이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밝음과 어둠은 등가의 것이며, 완전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하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빛과 순수 어둠은 동일한 두 개의 공간이다. 사물은 명확한 빛과 어둠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고(빛은 어둠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어두워진 빛이고, 어둠은 빛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밝혀진 어듬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로지 어두워진 빛과 밝혀진 어둠만이 그 자신들 속에 차이의 계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바로 명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림자만을 연구한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절대적 특성을 지닌 존재인 빛의 적극적 재현을 빛-그림자의 변증법으로 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중적인 도전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의 역사는 무의 역사가 아니다. 그림자의 역사는 그림자의 기원에 관한 신화들이 드러내주는 문을 통해 서양 재현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한편, 스베틀라나 보임은 「오프모던 선언문」에서 그림자의 자리의 중요성에 관해 역설한다.

특유의 흉내 내기 힘든 비스듬한 명석함으로 발터 벤야민은 짧은 그림자의 중요성에 관해 쓴 적이 있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부지불식간에, 그 자신의 거처, 자신의 비밀 속으로 물러갈 태세를 하고 있는, 사물들의 발끝에 걸린 날카로운 검은 모서리일 뿐”이다. 짧은 그림자들은 문턱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너무 근시안적이 되거나 너무 큰 날개를 달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우리가 사물들의 짧은 그림자를 경시하고 너무 가까이 사물들에 다가갔다가는 그것들을 없애버릴 위험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들이 너무 커지게 내버려둔다면 우리가 그것들에 휩쓸려 들어가 즐기고 있게 될 수도 있다. 짧은 그림자들은 우리가 가까움과 멀어짐 사이의 균형을 점검하도록, 사물의 본질을 말하는 자들과 음모론적인 가장(simulation)을 설교하는 자들 모두를 믿지 않도록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알랭 바디우의 「존재의 장소로서 회색 암흑」 중 일부를 보자.

「없이(Sans)」라는 텍스트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은 도정의 장소 또는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의 궁극적인 정화이다.

구름 한 점 없고 아무런 소음도 없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회색 하늘 모래 땅 회색 재. 땅과 같이 회색인 작은 몸들. 하늘은 그 몸들을 무너뜨리며 홀로 서 있다. 회색의 재는 여기저기 깔려 땅과 하늘은 멀리서 끝없이 얽혀 있다.

공간의 허구적 정화 끝에, 우리는 존재의 장소(또는 장소의 형식 속에서 존재의 문제를 증언하는 장치)를 ‘회색 암흑’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회색 암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빛도 대립물로 가정될 수 없는 암흑, 대조를 이루지 않는 암흑이다. 이 암흑은 어떤 빛도 자신의 타자로서 대립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회색이다. 추상적으로, 존재의 장소는 반변증법적이라고 할 만큼 회색인 암흑으로 픽션화되고, 빛과의 어떤 대립과도 분리되어 있다. 회색 암흑은 자신의 고유한 배치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암흑, 다른 무엇과도 짝지어지지 않는 암흑이다.

  • 빅토르 I. 스토이치타 지음, 『그림자의 짧은 역사』, 현실문화연구, 2006
  • 스베틀라나 보임 지음, 『오프모던의 건축』, 문확과지성사, 2023
  • 알랭 바디우 지음, 『베케트에 대하여』, 서용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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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에서 “grey noise”를 검색해 보면, “인터넷에서 유일하게 진짜 회색 소음을 생산하는 장소”라고 소개하는 노이즈 제네레이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의 가청범위의 모든 주파수에 걸쳐 단조롭게 지각되는 소음”이라고 회색 소음을 소개한다. 다시 웹에서 소음의 색에 관해 검색하면 다양한 색상 소음에 대한 소개를 찾아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소음의 스펙트럼을 색으로 명명하고 구분하는 것은 시각적인 색상 스펙트럼의 개념과 유사한데, 예컨대 백색 소음은 흰 빛과 같은 주파수의 형태로서 동일 대역폭(bandwidth)에서 일정한 데시벨을 가지며 때문에 이 소리는 전경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다가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주파의 강도가 높아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검정 소음은 모든 동일 대역폭에서 아무런 데시벨을 가지지 않는다. 그 사이에 분홍색 소음, 청색 소음, 회색 소음, 갈색 소음 등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른 모든 색상 소음의 경우 주파수가 높아지거나 낮아짐에 비례하여 데시벨이 증가하거나 낮아지면서 특정한 영역을 점유하지만, 회색 소음만은 곡선의 형태이며 이러한 스펙트럼은 귀로 듣기에 모든 주파수 대역이 고른 음량으로 들리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는 백색 소음이 가장 균질한 음향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청취적 현실에서는 회색 소음이 가장 균질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색상 소음을 비교해 청취해 보면, 회색 소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사진에서의 중간톤처럼) 가장 안정적이다. 어느 한 주파수 대역이 돌출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고르게 전개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청취의 균질함 때문에 회색 소음을 듣고 있으면 저주파와 고주파 사이를 바삐 오가는 활발한 운동에 참여한다는 입체적인 감각이 생긴다. 회색 소음 웹 제너레이터에는 이용자들이 달아 놓은 코멘트를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 회색 소음 장치가 자신의 주의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https://mynoise.net/NoiseMachines/greyNoiseGenerator.php

12.

“소리가 주변을 끊임없이 휘젓고, 일련의 진동과 반향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경계를 넘어 메아리치며, 내부와 외부, 표면과 깊이, 그 너머 사이의 관계를 물결처럼 번지게 하고, 개별적인 것들을 집합적인 몸으로 모으거나 반대로 떨어뜨려 놓는 힘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생동하는 조건을 강화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물의 고유한 흐름을 가능하게 한다.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소리라는 기획은 근본적으로 불안하며, 그것은 지배적인 것의 안정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갑작스런 호흡의 힘, 가시적인 경계에 저항하는 놀란 목소리로 되살아날 수 있다. 보이지 않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 그 실천은 우연히 듣는 사람과 그 안의 낯선 사람들을 통해 사회적 활력의 집합체를 확장함으로써 공유지의 기술주의적 울타리를 방해한다. 또한 박탈당한 사람, 떠도는 사람, 반향 하는 사물,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주를 지지함으로써 모든 유형의 경계에 도전한다. 또한 우리의 약점을 더 큰 힘, 성애적 지식과 공유된 취약성에서 발견되는 힘으로 끌어 올리는 도구를 만든다. 이것은 듣는 자유에 의해 견인되는 자리와 실천, 능력과 상상이다. 양심과 의식을 깊게 하기 위해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고 특정한 분노나 희망과 함께 내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러한 사례에서 우리는 자신이 항상 일부인 상호의존성을 진정으로 느끼기 시작할 수 있으며, 이는 이 삶이 사는 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

  • Brandon Labelle, Sonic Agency: Sound and Emergent Forms of Resistance (London: Goldsmith Pres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