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만약…

Ob/Scene Festival 2020 리뷰북(작업실유령, 2021)에 수록.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동. 몸이 어디론가 실려 간다. 정갈하게 마련된 도로 위에서 직진하는 버스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이동하고 있음을 가능한 한 까맣게 잊게 만드는 것은 모빌리티의 윤리다. 기술은 빠르면서도 안락한 이동을 상상하고, 사회는 그 이동을 교통시키는 체계를 합의한다. 기술이 부족하고 합의가 느슨하면 우리의 감정은 예민해진다. 지하철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비행기가 흔들리면 공포스럽다. 차가 막히면 불안과 지겨움이 함께 찾아오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이 정서는 무언가를 배제하는 것을 자연스레 정당화하는 무엇보다 강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풍경이 흘러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메테 에드바르센의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는 누군가가 책을 외우고 그것을 나에게 들려주는 공연이었다. 나는 30분 정도 누군가가 외운 책의 내용을 말로 전해 듣는다. 표면적으로는 그런 공연이었다. 공연이 준비한 몇 가지 책 중에서 나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표류도를 골랐고, 그 책의 첫 장을 들었다. 아니, 두 번째 장 까지였나? 사실 잘 모르겠다. 더 솔직해지자면 들었던 단어와 문장의 9할은 잊히고 나머지가 드문드문, 종이 위에 톡톡 떨어진 물에 번진 잉크와 엇비슷한 모양새로 기억에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표류도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이야기로 남지 못했다. 며칠 뒤 한 친구를 만났다. 공연에서 무엇을 들었는지 그가 물었을 때 나는 거의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었고 나의 형편없는 집중력과 기억력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기억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막상 부끄러움을 느끼니 조금 억울해졌다. 부끄러움을 만회하고 싶었던 건지 나는 소설의 내용 이외에 내가 그 시간동안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설명했다. 외우고 말했던 이가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 바짝 힘을 준 어깨와 등, 상기된 얼굴과 긴장에 경직된 입가의 근육. 잠시 숨을 고를 때 그 정적을 채우던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 딴 생각, 부산스런 자세 바꾸기. 따가운 햇살이 바닥에 그렸던 윤곽이 선명한 그림자. 이야기의 상황에 이입한 목소리와 이입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자맥질하듯 번갈아 오르내렸던 예측하기 어려운 리듬. 돌이켜 보니 나는 ‘그’에 대해서 생각보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그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는 더는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가 말을 할 때는 그가 있었고, 그가 말을 더듬거나 멈출 때는 내가 있었다. 그가 기억을 복기하기 위해 자신의 숨을 움켜쥘 때는 그가 잠시 나에게서 사라져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공연이 특별한 관계와 특별한 순간에 대한 것이라고 서둘러 미학화 하고 싶지 않다. 그와 나, 그리고 그와 내가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특권적인 것으로 강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다루어야 할 문제는 그보다는 우리 문화 근원의 공식을 건드리는 행위 혹은 ‘하기(doing)’의 복잡한 의미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공연의 표면적인 경험과 감상을 넘어서는 더 큰 프레임을 도입해야 한다. 공연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되짚어 경험을 조작하고 조율함으로써 실재의 진실을 찾아 나가야 한다. 공연이 끝난 직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이와 짧은 후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에게 이 상황이 너무 낭만적이어서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연의 시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다웠다. 볕이 잘 드는 창가는 따뜻했고, 사람 없는 예술 기관 안의 적막은 평화로웠다. 나만을 위해 읊조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일은 값지게 느껴졌으며 이 공연을 중단시킬 폭력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시간이 조금 더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불편했다. 아름다움은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가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고 느꼈다. 그 평화와 낭만은 ‘책을 외우고 기억하여 타인에게 전한다’라는 행위에 위급함, 긴급함, 절박함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흐리기 때문이다. 현대인을 위로하고 근심걱정을 잊게 만드는, 행복 에너지를 채워주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책읽어주기 서비스는 적은 비용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나는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가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낭만과 아름다움을 자아냈던 ‘단 한 번의 특별한 순간’이라는 공연의 경험을 벗어나 그것의 반복을 시뮬레이션 해야 한다. 반복! 반복은 이 공연이 보여주지 않지만 이 공연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퍼포먼스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 작업이 싹을 틔운 씨앗, 하나의 가정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오늘날 누가 굳이 책을 외우는가? 이 행위는 사실 아주 이상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삶 속에 깊숙이 품고 있고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내 삶의 많은 시간을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데 쓴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외우고 그것을 말로 전해보기를 시도해본 적이 없다. 책은 기억을 대신하기 위해, 그리고 말과는 다른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가?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이는 책을 외우고 말한다는 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책을 기어코 외워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메테 에드바르센은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는 책이 금지된 사회에서 책을 보존하기 위해 그 내용을 외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책이 곧 불태워질 운명이고 책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외우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다. 위기를 모면하려면 일단 책이라고 인식되는 물건의 외양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물건이 담은 내용을 다른 그릇에 옮겨야 한다. 언어가 기록되고 저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그 기록을 보여주거나 말하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과 인간은 엇비슷한 매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가 정말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책이 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그 불가능성은 우리가 학습한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책이 되고자 하는 인간 앞에서 우리는 책 앞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인지한다. 지식이 생산되고 전달되는 체계가 급격하게 변했다. 나는 어떤 프레임에서 다른 어떤 프레임으로 이동하는 중인 것이다.

나는 한동안 기록과 전달의 매체로서의 책과 인간을 나란히 놓고 생각했다. 책은 곰곰이 곱씹어 볼수록 더욱 의뭉스러운 사물임이 분명해졌다. (무언가를 말하고 보여주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크기와 무게, 질감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페이지라는 인터페이스를 지닌 구체적인 물질이다. 또 오늘날의 책은 대량으로 생산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상품으로 유통되고 심지어 헌책방이나 도서관 같은 이후의 삶을 위한 장소도 있다. 책을 단순히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줄거리와 등치시키지 않고 세계 안에서 긴장과 흐름을 만드는, 그리고 실제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의 전달을 수행하는 사물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몸 또한 그만큼 복잡한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 책이 지식을 담을 뿐만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이라면 몸 또한 그러하다. 퍼포먼스 학자 다이애나 테일러는 퍼포먼스를 사회적 지식, 기억, 문화, 정체성을 생산하고 전달하는 필수적인 행위로 여긴다.1 작은 몸짓부터 제의나 공연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는 한 사회와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하고 수행한 것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의 “레퍼토리(the repertoire)”가 생산하고 전달하는 지식은 쓰기와 출판이 생산하고 전달하는 지식과 다르다. 문자가 없다고 해서 그곳에 역사가 없고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기억하기 위해 반드시 타인을 만나고 그를 바라보고 몸짓을 섞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 문명 안에는 무수히 많은 앎의 방법이 혼재되어 있지만 지식을 표상하는 데 있어서는 책의 문화가 압도적이다. 여기서 책의 문화란 문자와 이미지의 사용, 그리고 인쇄와 기술 복제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광의의 영역이다. 보통 우리는 책을 쓰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분명 우리의 일상에서 몸을 통한 배움은 매우 자주 일어난다. 최근 내가 목공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공구의 가장 적절한 사용법은 그 공구를 사용하는 목수의 몸을 보고 따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과 전달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진실은 온갖 형태로 드러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대체로 비대칭적이다. 문자와 인쇄 문화는 현재의 인간을 구축하는 하나의 큰 역사적 힘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책을 새롭게 발명하려 한다. 책은 인식의 방법 자체이자 문명의 네트워크에 개입하는 강력한 사물이다. 때문에 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책이 품은 내용이 소멸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인식 체계의 변화, 지식과 기억의 생산, 이동, 전달을 수행하는 패러다임 전체의 전복을 뜻한다. 책이 사라지기 위해선 우리에게 익숙하던 무언가가 필연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아니 책이 사라지면 우리에게 익숙하던 무언가가 필연적으로 파괴된다. 그런 점에서 ‘만약… 책이 없었다면’과 ‘만약… 책이 없어진다면’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다. 전자가 SF적이라면 후자는 혁명적이다. 물론 ‘무한한 반복’이 도입된다면 두 가정은 하나의 실재에서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만약… 책이 없어진다면’을 가정하는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가 위급함, 긴급함, 절박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파괴와 그 이후에 뒤따를 반복을 상상해야 하는 서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다. 이 서사의 시퀀스를 따져보자면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는 가정이 하나의 상황이 된 도입부에 해당된다. 문자화 된 지식을 몸에 다시 기입해야만 하는, 책을 통한 앎에 맞춰진 지식을 그와는 다른 앎의 방법인 몸으로 수행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시간이다. 나의 앞에서 책을 외워 말하는 이는 끊임없이 말을 중지하며 문장을 복기하려고 애썼고, 나는 그의 이야기보다 그의 몸짓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우리가 자석처럼 끌려갔던 방향을 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것은 그의 퍼포먼스이기도 하고 나의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어설픈 합 맞추기였고, 아직 합의되지 않은 대화였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몸짓을 응대하지 않는다면 아마 많은 것들이 오후의 햇살 속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이 참여가 만약… 여기저기서 쉼 없이 반복된다면 어떤 심대한 변화가 일어날까? 결론 아닌 이 질문은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가 이념을 다루는 작업으로서 다른 현재를 추동하는 흐름을 모의실험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모빌리티와 정동의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에서 외워 말하는 이가 읊조림을 중단하고 지체했을 때, 그가 다시 언제 입을 열지 가늠이 안됐을 때, 그러니까 전달이 돌연 중단되었을 때 사실 나는 내가 어떤 기분을 가져야 하는지 조금 헛갈렸다. 답답하고 짜증이 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지체와 중단 사이사이에도 너무 많은 움직임과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지체와 중단은 오히려 더 실재를 강하게 지각하게 해주었다. 지연, 지체, 부정확함, 간섭, 방해가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또한 맥락에 좌우된다. 그 맥락이란, 길을 잃거나 잘못 배송되는 일을 허용하는 윤리일까? 적어도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에서 그것은 허용되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모의실험은 언제나 윤리와 얽혀 있다. 아니 언제나 윤리를 모색하기를 요구한다.


 


  1. Diana Taylor, The archive and the repertoire: performing cultural memory in the America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3). 

메테 에드바르센,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 (2020,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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