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우편적 미술관

c-lab 4.0: 언택트 Un+Contact(코리아나미술관, 2020)에 수록.

 

열린 집합과 미술관

올해 초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관람했던 뭎[Mu:p]의 공연 {Open set} ⊂ Phenotype(2020)을 여러 이유로 인상 깊게 기억한다. 공연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입장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회의용 테이블이 놓인 층으로 올라가기를 안내 받았다. 코리아나 미술관을 관객으로서 오랫동안 들락거렸지만 처음 가보는 장소였다.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다 공연이 진행되는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Open set} ⊂ Phenotype{Open set} ⊂ Phase-lag(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18)와 이어지는 작업이다. ‘Open set’, 즉 열린 집합의 사전적 정의는 “집합 U에 포함되는 임의의 점의 근방이 반드시 U에 포함될 때 그 점들의 집합”이다. 이러한 위상공간의 성격과 특성을 규명하는 것이 위상수학(topology)이라면, 뭎[Mu:p]의 {Open set} 연작은 이 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몸과 사물, 공간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범주를 탐구한다. {Open set} ⊂ Phenotype은 그 기획에 걸맞게 안무를 통해 미술관 공간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지각하게 해 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모듈을 겹겹이 쌓아 올려 임시로 만들어진 가벽 천장의 기둥을 만드는가 하면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두어 공간의 스케일을 가늠했고, 그것을 쓰러뜨려 한순간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로 공간감을 확인하게 했다. 이 공연이 만들어내는 긴장 상태도 무척 흥미로웠지만, 미술관에 대한 나의 경험 전체를 되짚어 보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이 미술관을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그 앎은 ‘전시’라는 경험 안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미술관은 결코 전시와 등가적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Open set} ⊂ Phenotype은 공간과 나에 대한 관계를 조정하는 안무를 통해 장소를 다르게 인지하도록 이끌었다. 뭎[Mu:p]의 공연 덕분이기는 했지만, 미술관이 어디를 열어두고, 비워두고 또 무엇을 포함하고 연결하려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은 여실히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미술관 문을 나섰다.

미술관의 이데올로기가 가려버린 그 물적 토대들을 다시 드러내어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의 관계 가능성들을 탐구하는 작업은 전후 서구의 예술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운동들의 핵심은 짐짓 중립인 척하는 화이트 큐브가 배제하는 것을 숱하게 찾아내어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세계 자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유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치열한 충돌들 사이에서 오브제를 다루고 이해하려는 것이자, 순수한 자기-존재의 현전으로서의 작품과 객관적이고 자명한 서사라는 단일성의 허위를 폭로하고 탈중심화 하려는 것이다. 비평은 그 충돌을 어떻게 가시화하는지에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이데올로기는 적확한 의지와 힘의 작용이 있기 전까지는 쉽게 벗겨내어지지 않는다. ‘동시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군의 미술관은 수동적-은폐에서 능동적-생산으로 그 역할을 전환하기 위해 여전히 진력한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 그 능동의 양태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 움직임의 총체를 진실을 구성하기 위한 지식 생산 실천의 역사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퍼포먼스, 텍스트와 몸짓 사이에서

나는 2010년대 초중반에 걸쳐 몇 년간 코리아나 미술관의 전시를 빠지지 않고 관람했다. 당시의 코리아나 미술관은 인상적일 정도로 퍼포먼스에만 집중하여 매 번의 전시를 기획했다. 퍼포먼스는 내가 특히 즐겁게 감상하는 영역이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에 끌렸고 내가 왜 그것에 끌리는지가 궁금해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퍼포먼스에 매혹된 이유를 최근 선명히 이해하게 되었는데, 퍼포먼스가 고정된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흐름을 생산하는 힘의 작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행위라는 것 때문이다. 즉 퍼포먼스는 장르나 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고 무너뜨리는’ 방법으로서, 끊임없는 흐름 자체로서 그것만의 독특한 허구를 생산한다. 퍼포먼스 작가란 힘을 어떤 위상에서 발생시키고 어떤 성질과 강도로 조정할지, 그리고 그 힘의 경로를 어떻게 가설할지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순차(sequence)를 다루는 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나미술관이 울트라 스킨(2009), 예술가의 신체(2010), 쇼 미 유어 헤어(2011), 더 보이스(2017) 등 퍼포먼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몸의 문제뿐만 아니라 피처링 시네마(2011), 필름 몽타주(2015) 등 재배치의 전략을 가장 유효하게 다루는 영상 예술의 실천을 살펴보는 것은 무관하지 않았다. 퍼포밍 필름(2013)이나 코드 액트(2014) 같은 전시는 여러 매체와의 중첩에서 발생하는 힘의 흐름과 의미작용에 대해 탐구한 전시로 기억한다. 또한 퍼포먼스의 맥락에서 텔 미 허 스토리(2013), 댄싱 마마(2015), 히든 워커스(2018) 등 여성을 주제로 삼은 전시가 꾸려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퍼포먼스’는 필연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욱 긴급한 것으로 요청되어 왔음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당시에는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코리아나 미술관의 전시 기획은 퍼포먼스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지도를 천천히 그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일련의 전시 기획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의식 또한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가 퍼포먼스의 요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 기획들에서는 가시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지도 그리기와도 이어지는 맥락인데, 앞서 언급한 전시들의 기획을 지도 제작법(cartography)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정해진 방위에 따라 구획을 나누고 지형지물을 특정하고 등고선을 그리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지도를 따라간다면 관객은 위험한 지형을 피해 몇몇 기념비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퍼포먼스에 관해서라면 그러한 지도 제작법은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퍼포먼스란 그러한 표면적 구획들과 영역을 가로지르는 힘의 작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퍼포먼스가 지층들 사이에서의 진동이라면 관객은 오직 땅의 흔들림을 통해서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의 지도란 지진계의 추의 움직임을 떠올리는 편이 더 걸맞지 않을까? 혹은 조류와 바람에 몸을 맡기며 항해하는 선장의 끊임없이 몸의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몸짓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같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형태의 지식을 구분하기 위한 비유이다. 하나가 텍스트화 된 지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몸짓에 더 가깝다. 이를 닫힌 사물과 열린 운동으로 비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비판의 논점은 퍼포먼스를 오직 텍스트화 된 지식으로 다루는 것에 있다. 퍼포먼스란 무엇보다 다른 두 지식을 섬세하게 대칭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식이란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체계 안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하나의 지식 체계는 특정한 무언가를 가시화시키지만 동시에 엄연히 실재하는 다른 현실을 은폐한다. 퍼포먼스의 유용성은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앎의 체계 즉 다양한 관계의 양태를 동시에 요구하며 실재의 복잡성을 현전시킨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과 서사

텍스트화 된 지식에 기반 한 전시란, 주제로 환원되는 작품의 선정과 배치나 매체와 장르의 구분에 입각한 접근이 대표적인 유형일 것이다. 전시는 예술 작품들이 수다하게 말을 걸어오는 매력적인 장소이지만, 이 유형의 전시 안에서 작품은 너무나도 손쉽게 언어에 함몰되기도 한다. 작품은 주제의 예시가 된다. 물론 언어가 영원한 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의 봉합하는 힘, 여러 이질성과 상이한 위상을 매끈하게 이어붙이는 특정한 의미 작용이 문제시된다. 말하자면 어떤 언어 사용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손쉽게 누그러뜨린다. 오늘날의 미술의 가치는 이와 같은 텍스트화된 지식 모델에 의해 상당히 경도되어 있는데, 이는 의미가 규격화된 상품으로서 거래되고 교환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전시란 것을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경험이 정해진 경로로 주어진 답에 도달하는 것에 그친다면, 알아채지 못한 사이 저 멀리 흘러가버리는 표류하기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구멍에 빠져 길을 잃기와 같은 지연과 충돌이 없다면 그것이 그저 잘 정리되고 잘 설명된 사전을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 문제는 관계를 조직하고 힘을 가동하는 방식이다. 미술관이 어떤 ‘서사’를 조직하는 곳인지를 질문하는 것 또한 좋다.

보리스 그로이스가 주장하듯 전시는 서사적 장소이고 오늘날 예술 작품이란 이 서사적 오용을 통해서만 가시적일 수 있다. 아니 그로이스는 오히려 ‘치료(cure)하는 자’로서의 큐레이터(curator)만이 병든 이미지를 전시라는 통제 된 환경에서의 배치를 통해 서사화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건강하게 만든다고까지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의 미술관이 말 없는 작품에 대한 순수한 감상을 위한 장소였다면, 그 감상의 원리는 이제 오로지 교환과 소비(그리고 경험)를 위한 미술시장과 미디어에서 일어난다. “단독으로, 맥락 없이, 큐레이션 되지 않은 채” 작품 단독의 가치를 주장한다. 때문에 큐레이터는 일종의 성상파괴주의자가 되고 전시는 그 우상이 파괴되는 장소가 된다. 시장 가치와 전시의 서사적 가치는 상이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시는 중요하다.1 나는 전시가 서사의 장소이며 그 서사의 가치를 역설하기 위한 그로이스의 미술관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서사성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전시가 서사라고 했을 때, 그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과 이데올로기 또한 첨예한 문제가 되어야만 한다. 보리스 그로이스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미술관이라는 글에서 미술관이 중요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은 ‘현재’가 끊임없이 상품-패션으로서 대체되며 새로움 이라는 허위가 무한히 재생산되는 와중, 미술관이야말로 다양한 시간을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비교하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정말로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판단하며 진정한 현재를 산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가지지 않은 과거를 식별함으로써 미래로서의 현재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동시대 미술관이라는 것이다.2 하지만 여기서 또한 ‘역사’ 그리고 ‘역사적’인 것이 무엇인지가 문제가 된다. 역사 또한 일종의 서사라고 했을 때, 그 역사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한 번 연결과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서사 생산자로서의 미술관이라는 지형에 대해 보다 적확하게 다루기 위해서 이를 간략하게나마 구조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클레어 비숍은 테리 스미스와의 대화 속에서 ‘동시대성’을 방법론으로 삼는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미술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위해 오늘날의 미술관을 세 가지 다른 모델로 구분한다. 하나는 근대적 미술관으로, 뉴욕현대미술관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한다. 근대적 미술관은 관객이 예술 작품을 단독으로 마주하게 되는 화이트 큐브에 의해 매개된 예술 작품의 신화와 연대기적 역사에 헌신하며 그것은 인종, 계급, 성별이 고려되지 않은 근대적 개념의 대중을 위한 것이다. 다른 여타의 맥락과 매개되지 않은 강렬한 몰입을 통해 작품과 관계되는 봉합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적 미술관으로, 전 지구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마지막이 동시대적 미술관으로, 미술관이 가진 컬렉션과 아카이브 등의 자원을 재배치하는 새로운 서사 쓰기를 통해 여러 근대를 관계짓고 경합하도록 하는 하는 장소다. 이는 근대적 미술관이 하나의 서사를 제외한 배타주의에 기반하고 포스트모던적 미술관이 다중의 서사를 인정하는 상대주의에 기반 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관 모델에 대해 즈덴카 바도비나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 예술의 미술관이 주류의 내러티브, 보편적 패러타임, 그리고 서구의 대형 기관의 헤게모니적 목표를 수행해왔다면, 동시대의 미술관은 지역의 공간을 다루어야 하고 그렇게 다른 공간과의 동등한 대화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대적 미술관은 예술이 다양한 맥락에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3 보리스 그로이스와 마찬가지로, 클레어 비숍 또한 동시대적 미술관이란 과거의 새로운 연결을 통해 현재를 새롭게 서술함으로써 미래를 다룬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큐레토리얼(curatorial)’의 몸짓이다.4

큐레토리얼과 배움의 방법

큐레토리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용어이자 개념으로, 여전히 그 의미는 갱신되고 새로이 논의되고 있다. 논자에 따라 그 세부적인 정의와 사용의 맥락은 달라지지만, 마리아 린드가 명확히 하듯 그것이 근본적으로 미술의 영역의 너머까지 확장되는 일종의 앎의 방법론이라는 주장은 일치한다.5 큐레토리얼에 대한 이릿 로고프의 구분적 정의는 그 ‘실천’을 둘러싼 정황과 그것이 생산하는 지식의 성격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의미 있다. 이릿 로고프는 무엇보다도 큐레이팅(curating)을 재현의 체제 안에서의 행위로 이해한다. 큐레이팅은 어떤 작업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수평적 이동’이다. 큐레이팅은 주제를 세우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작품을 조직함으로써 그 주제를 예시화 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최종의 상태, 그러니까 조직이 완결된 ‘제품’이다. 이에 반해 큐레토리얼은 재현과 멀어지는 일이다. 고립되고 마침표를 찍은 최종 제품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활성화된 작업의 궤적을 강조한다. 이릿 로고프는 큐레토리얼을 일종의 인식론적 구조로 이해한다. 큐레토리얼은 흩어져 있는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지식들의 연결을 통해 그 개별 지식의 총합을 초월하는 새로운 지식의 발생을 요구한다. 즉 끊임없는 관계의 작용 속에서 사건을 발생시키고 충돌을 유도함으로써 세계를 재생산하는 인지 방법인 것이다. 때문에 선형적인 나열 보다는 우발적인 조우의 연쇄가 더 중요하며 큐레토리얼은 이 절차에 어떻게 사람들을 참여시킬지를 고민한다. 이릿 로고프는 큐레토리얼이 이상적인 야망과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 사이의 간격(gap) 속에서 발생한다고 여긴다. 즉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다루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문화적 프로토콜 안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해결할 수 없을 때, 그 불가능성이라는 간격의 상태가 중요하며 큐레토리얼은 그 간격을 활성화시키고 사람(관객)들을 거기에 관여시키는 일이다.6 동시대적 미술관이 “제품 기반” 예술이 아닌 “프로젝트 기반” 예술을 중심에 두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7

눈치 빠른 이라면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큐레토리얼이 왜 지식 생산(knowledge production), 연구(reserach)라는 말과 빈번히 함께 등장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이릿 로고프의 말처럼, 큐레토리얼은 일종의 인지 방법으로서 ‘앎’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관계된다. 미술의 최근 담론장은 이를 두고 “교육적 전회(educational turn)”라고 일컫는다. 이는 미술 관객이라면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토크, 심포지엄, 워크숍 등 끊임없이 말이 전달되는 프로그램이 필수적인 행사가 된 풍경이나 교육이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과 프로젝트들이 많아지는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반제도 정신에 입각하여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배움을 구축하는 비판적 문화 실천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육적 전회의 핵심적인 실천들은 작은 규모로, 특정한 지역에 스며들어 긴밀한 대화의 지속 상태를 만듦으로써 구성원들 자신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다른 서사 ‘쓰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는 상호 관계 속에서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주체성을 해체하고 현실과 첨예하게 관계된 자기 자신을 다시 불러들인다. 나는 이 글에서 교육적 전회라는 담론에서 벌어지는 교육과 동시대 예술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사례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나는 이 현상 혹은 움직임 안에 잠재된 근본적인 충동과 문제의식을 선명히 추출해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진실 말하기’에 대한 긴급한 요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것이 옳은 것, 사실, 보편적 진리 등 잔해의 더미 속에 묻혀 있는 ‘보석 같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지만 억압되고 배제되어 비가시적인 상태의 것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주체가 흩어져 있는 파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현실과 조건에 대해 의미 있는 연결을 찾아나가는 일이며 이를 통해 인식하게 되는 실재다. 큐레토리얼이 좇는 세계는 그렇게 저마다의 주체가 주체성을 회복하고 진실을 쓰기 위해 배회하는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교통하는 긴장의 장이다. 이릿 로고프는 이러한 사이에서의 움직임, 바깥에의 상상을 통해 “수많은 현실을 다르게 사유하는 방법”이 교육이라고 보았고, 특히 신자유주의와 인지자본주의가 맹렬히 침투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비판적 능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광범위한 통찰, 실천, 규약과의 동맹 관계를 계속 재발명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평가와 예측이 지배하는 문화에 쉽사리 사로잡히지 않는 배움의 형태를 갖게 될지 모른다.”8 틀이 정해진 서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어진 장소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그 내부에서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참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관계란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충돌과 지연에 의해 구성되는 시차적 매개이며 이것은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잊히고 잃어버린 가치를 기억하는 노력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적 미술관이란 점점 더 이러한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의미론이 아닌 구문론에 의해 서사가 구축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C-Lab 4.0

오늘날의 미술관 모델과 큐레토리얼의 관계에 대해 살펴 본 것은, 최근의 코리아나 미술관의 행보를 보다 구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해보기 위해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코리아나 미술관은 큐레이팅의 장소에서 큐레토리얼의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퍼포먼스에 대한 미술관이었다면 퍼포먼스의 미술관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 중심에는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하는 C-Lab 프로젝트가 있다. 2017년 시작해 매년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담화(전시, 워크숍, 강연, 세미나, 토크 등)들을 교차시키는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미술관 모델이 구분하고 있는 전시-교육-연구-소장의 구분을 허물고 그 기능들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다 가시적으로 인지시켜 줄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 우직한 행보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관용 전시 공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서울 미술계의 현상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인상 깊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9

이와 같은 코리아나 미술관의 큐레토리얼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 열어보게 된 한 통의 전자메일 때문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미술관이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오늘날의 미술관에 대해서, 특히 코로나 상황으로 전 세계 대부분의 미술관이 관객의 접근을 제한하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추세 속에서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수신한 그 메일은 코리아나 미술관이 C-Lab 4.0의 세부 기획으로 진행하고 있었던 리서치 딜리버리 프로젝트에서 발신한 것이었다. 리서치 딜리버리는 5월부터 8월까지 총 16회에 걸쳐서 C-Lab 4.0의 기획과 그 기획에 포함된 작품, 프로젝트, 행사를 폭넓고 입체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의 자료를 링크해 주는 서비스다. 리서치 딜리버리는 뉴스레터를 신청하듯 구독하면 매 주 월요일 구독자에게 메일로 전달된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리서치 딜리버리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는지 조차도 처음에는 몰랐다. 리서치 딜리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미술관의 소식을 받아볼 수 있는 뉴스레터 겠거니 하며 습관적으로 구독 신청을 했고 또 습관적으로 읽지도 않고 지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아채지도 못했던 몇 번의 오배송 이후 편지는 나에게 닿았다.

리서치 딜리버리는 언뜻 리더스 다이제스트 류의 요약정리 서비스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 프로젝트의 일관된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영역과 범주를 가로질러 하나의 작품, 개념, 현상을 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을 뻗어나가고자 하는 것이며 그 길은 그 작품, 개념, 현상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에 기반 한다. 예를 들어 일곱 번 째 리서치 딜리버리에서는 C-Lab 4.0의 기획 중 하나였던 스크리닝 프로그램에 포함된 송민정 작가의 작품 토커(2019)를 다루었는데,리서치 딜리버리는 이 작품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비롯해 ‘온라인 페르소나’라는 주제를 다루는 학술 자료의 목록과 비디오가 변화시킨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인터페이스를 다루는 볼 거리들을 함께 제시했다. 이는 각각 송민정 작가의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해석을 부연하는 것으로 독해되는데, 리서치 딜리버리는 특정 자료들의 좌표를 구성함으로써 비평을 수행하고 수신자가 직접 작품에 대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도록 경로를 안내한다. 리서치 딜리버리는 크게는 C-Lab 4.0의 주제인 “언택트”를 축으로 삼고 작게는 C-Lab 4.0 기획 안에 포함된 작업과 프로그램을 축으로 삼으며 주제와 작품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이 관계의 지형은 명확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리서치 딜리버리가 펼쳐 놓는 다양한 맥락들을 통해 수신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보게 된다. 편지에 쓰인 모든 링크를 다 살펴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주어진 링크에서 시작해 정신 차려 보면 전혀 엉뚱한 다른 자료에까지 닿는 순간들도 빈번했다. 리서치 딜리버리는 그러게 나 스스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그 배회 속에서 마주치고 얻게 된 정보를 통해 “언택트”라는 C-Lab 4.0의 주제와 개별 작품 자체를 초과하는 보다 복잡한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다.

C-Lab은 지난 4년간 지속되어 왔지만, 나는 왜 이제야 이 프로젝트를 큐레토리얼로서 이해하게 되었을까? 다른 무엇보다 경험을 조직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가 장소(site)라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물질성에 기반하여 현재를 단숨에(강렬하게)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절차를 구축하여 움직임을 발생시킴으로써 배움을 불러들이는 것에는 장소의 존재감이 약화되어 있다. 이러한 큐레토리얼에서 장소는 오히려 사후적인 경험의 누적과 이해 속에서 발생한다.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는 장소(place)가 드러나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술관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불능에 빠져있는 풍경 속에서, 지난 4년간 C-Lab의 경험을 축적해 온 코리아나 미술관은 이 상황에 대해 비교적 유연하게 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분명 작품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장소를 해체하고 절차와 관계의 재구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수행적 미술관의 작동 방식에 대한 고민이 주요하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C-Lab 4.0에는 작품은 있지만 전시는 없었다. 물론 전시라는 장소에서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경험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온라인은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뭎[Mu:p]의 공연이 일깨워준 것처럼 작품을 둘러싼 공간은 작품과 긴밀하고 은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총체성을 통해 작품의 경험을 구성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 관계와 인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소가 불가능해졌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장소를 재구성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온라인에 온전히 작품과 전시를 재현하려는 것은 이 불가능성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큐레토리얼이라는 방법이 재현을 거부하고 과정과 절차를, 관계의 상호성과 우발성을 강조함으로써 특정한 현실을 인지하게 한다면 어쩌면 코로나 사태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모델을 더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손짓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던 미술관은 모든 것을 너무 강력하게 연결하고 관계 맺게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결속을 더 강하게 하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틈을 내고 간격을 만들어 부서진 연결로 가능한 서사를 써 보는 일이다. 안나-소피 스프링거는 큐레토리얼을 항해술에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끝없이 움직이는 섬들을 통과하는 항해에 효과적인 큐레토리얼 실천은 필연적으로 신체적 접촉, 개연성 없는 교환, 공동의 실험에 취약해질 수 있다. 그러한 취약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큐레이터를 재현의 환영적 수평선이라는 안전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큐레토리얼은 허구를 구축하기가 더 좋아진다. 현실과 상상 모두에 있어서 말이다.”10

언택트를 주제로 한 C-Lab 4.0은 끊임없이 관계와 거리에 대해 질문한다. 이 질문은 어떤 정답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질문을 촉발하며 예상치 못한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언택트가 무엇이며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입 안에서는 웅얼거림이 일어난다. 코로나 이전의 시대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접촉에 대한 공포는 그 연결이 자연스레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작품에 대한 감상과 경험이 그리워지고 이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지만, 한편으로는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그러한 경험 바깥, 인지되지 못했던 간격 안에서 세계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미술은 세계에 대해 열린 집합이지만 우리의 사유는 대체로 비대칭적이었다. 데리다에게 우편-공간이란 인식할 수 없는 공간이며 배송되지 않은 우편물들이 축적되는 공간이다. 그 사이공간에 대한 사유는 지연되고 잘못 배달된 편지들의 회귀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차와 간격 속에서 매끈한 의미로 구성된 세계를 해체하고 인지 불가능했던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우편적 탈구축”이라 부르며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주창한다. 큐레토리얼은 근본적으로 이 우편적 상태, 우편적 과정, 우편적 배치, 우편적 대화를 요구한다. 우편적 미술관은 동시대적 미술관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동시대적 미술관이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긴급하다. 동시대적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비평적 가능성은 자신의 현재를 해석함으로써 정말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한다는 데 있다. 예술적 실천은 그렇게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1. Boris Grois, “On the Curatorship,” in Art Power(Cambridge, Massachusettes: MIT Press, 2018), 44-52. 

  2. Boris Grois, “The Museum in the Age of Mass Media,” in Manifesta Journal, n.1 spring/summer(2003), 38-47.  

  3. Zdenka Badovinac, “Contemporaneity as Points of Connection,” in e-flux Journal, no.11(2009). 

  4. Claire Bishop, “Museum Models, Radical Spectatorship,” in Talking Contemporary Curating by Terry Smith et al.(New York: Independent Curators International, 2015), 140-141.  

  5. Maria Lind, “Performing the Curatorial: An Introduction,” in Performing the Curatorial: Within and Beyond Art, ed. by Maria Lind(Berlin: Sternberg Press, 2012). 9-23. 

  6. “Curating/Curatorial: A Conversation between Irit Rogoff and Beatrice von Bismarck,” in Cultures of the Curatorial, ed. by Beatrice von Bismarck et al.(Berlin: Sternberg Press, 2012), 22-24.  

  7. Alenka Gregoric, “Interdependence,” in Glossary of Common Knowledge, ed. by Zdenka Badovinac and Ida Hirsenfelder(Ljubljana: Moderna galerija, 2018), 293-297. 

  8. 이릿 로고프, 연구가 되기,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018), 41-58.  

  9. 이 ‘대관용 전시 공간’은 여러 국가 예술 기관과 지역 문화재단의 막대한 예산 지원으로 인해 늘어난 전시 공급을 소화하기 위해, 즉 전시장 대관 수요가 커짐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규모가 작은 이 전시공간에서는 젊은 작가들과 독립 기획자의 전시가 릴레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정작 그것들을 맥락화하는 이념은 없다. 물론 창작의 여건을 마련하고 지원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이 현상이 문제적인 이유는 전시 혹은 작품을 가시적이게 하는 판단 주체가 기금 사업의 심사위원들이라는 점인데, 이는 다양한 문화 생산자들의 자발적인 가치 탐색 과정을 교묘히 약화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시와 작품을 시즌마다 생산되고 대체되는 쳇바퀴같은 소비 문화 속 상품으로 만드는 구조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예술 실천을 규격화한다. 미술의 공간은 생산자이기 이전에 감상자이자 해석자로서 특정한 프레임을 구축하며 작품의 의미를 변주하고 관객에게 전달하며 저마다의 가치를 구성하고 발언하는데, 이에 반해 현재의 대관 중심 전시장은 그저 플랫폼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곳은 보리스 그로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작품의 오용 없는 직접적이고 투명한 매개가 이루어지는 곳, 마치 순수한 증권거래처럼 보인다. 

  10. Anna-Sophi Springer, “The Museum as Archipelago,” in Scapegoat Journal, no.5, Summer/Fall(2013), 243-253. 

권병준, 소리ll거리 사운드 워크숍 ⓒ 코리아나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