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직선운동과 회전운동: 문학적 수행과 통제

kimnuiyeon.jeonyongwan.kr

 

마침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책 마침은 그 외형에 어떠한 그래픽 요소 없이 책의 순수한 물질성만을 정갈하고 단정하게 보여 준다. 이 책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면 어딘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든다. 책등은 실 제본이 훤히 보이게 드러나 있고, 언뜻 표지처럼 보였던 검은 종이는 앞뒤 각각 네 면씩 본문 종이에 풀로 접착되어 있다. 검은 종이가 실은 표지가 아니라 면지이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 면지는 일반적인 책의 통상적인 독자라면 누구든 잘 살펴보지 않고 쓱 넘겨 버릴 뿐인, 책이라는 전체 구조 안에서 표지와 본문을 이어주는 순수한 형식이다. 그렇다면 마침은 견장정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표지를 씌우기 직전의 공정 단계에서 만들기를 멈춘 것이다. 혹은 완성된 견장정 책에서 표지를 떼어 낸 상태일 수도 있겠다. 완결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 책 마침은 종착점을 반환 축으로 삼고 그곳을 돌아 들어가기 직전과 돌아 나온 직후의 두 상태를 모두 암시한다. 완결 자체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면서 동시에 파괴된) 텅 빈 장소로 두면서 말이다.

상승과 하강의 엔트로피가 순환의 평면으로 공간화된다는 점에서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건축적인 회화가 연상된다. 그렇게 ‘마침’이 영원히 지연되어 남겨지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가지를 뻗어 나가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그 흐름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구조는 반복을 종용하고 흐름은 반복되며 형태를 그리지만, 구조 자체가 흐름을 촉발하지는 않는다. 김뉘연·전용완에게 있어 그 촉발하는 힘은 언어다. 특히 문학적 언어다. 바꾸어 말하면 문학적 언어의 수행적 힘을 특정한 구조적 제한—책의 형식—안에서 전개시키면서 운동의 상태, 즉 리듬을 생산한다. 언어가 독자에게 이러저러한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면, 구조는 움직임의 연쇄, 변화라는 운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통제한다. 이 두 힘을 대립시켜 균형을 찾고, 두 힘의 동시적 작용을 세심히 관찰하며 문학의 운동성을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활동의 이면에는 사물(세계)의 질서를 조정하려는 의지가 스며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구체적인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 문학의 수행성에 대한 믿음과 한계를 검토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실험이 아마도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체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모든 사건’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은 ‘문학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은 언어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문학의 의미를 스스로 재규정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은 김뉘연·전용완이 기획, 연출한 동명의 공연에 입장하는 관객들에게 하나씩 전달된다. 일러두기에는 이 책이 “2019년 10월 26일과 27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공연 마침의 지침을 모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지침이라는 단어다. 바로 옆면의 차례에는 ‘방’, ‘일기’, ‘점’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사물을 위한”, “안무를 위한”, “음악을 위한” 세 지침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린다. 이를 통해 김뉘연·전용완은 이 책이 공연 전체와 맺는 관계를 선명히 규정한다. 마침은 공연의 시간을 구성해야 하는 사물, 안무, 음악 각각의 역할에 대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침이란 읽는 사람이 무언가를 행하게끔 만드는 언어다. 무보가 몸을 움직이게 만들고, 악보가 악기를 연주하게 만들고, 제품에 동봉된 매뉴얼에 그 제품을 작동시키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지침은 “~을 하라” 혹은 “~을 하지 마라”와 같이 동작에 대한 명령이라는 언어적 형식을 가진다. 그런데 마침의 지침은 (역시나) 어딘지 이상하다. 여기서의 지침은 소설이나 시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려 보이기 때문이다. 9면부터 14면까지 자리한 방: 사물을 위한 지침은 ‘나’라는 화자가 등장해 어떤 집과 방에 대해서, 그리고 사물의 질서에 관해서 상세히 설명한다. 이어지는 15면부터 17면까지의 일기: 안무를 위한 지침은 목요일부터 시작해 매일의 요일로 시작하는 문단이 반복되며 책상과 의자에 대해 서술하는 난해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많은 문장들에는 괄호가 삽입되어 있어 의미를 병렬적으로 만든다. 19면, 20면에 걸쳐 쓰인 점: 음악을 위한 지침은 무언가를 서술한다기보다는 나열된 단어의 집합에 가깝다. 마침표로 구분되는 하나의 문장이 한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침들을 살펴보고 난다면, 어떤 관객이라도 하나의 질문이 떠오르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이 지침들이 도대체 어떤 사물을 만들 것인가? 어떤 움직임을 만들 것인가? 어떤 음악을 만들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 지침이 허용하는 해석의 폭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같지는 않더라도) 엇비슷한 형상이나 상황을 상상할 거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미지는 모든 독자에게 개별적이다.

언어, 사물의 질서

여기서 우리는 김뉘연·전용완이 만든 지침을 브루스 나우먼이 1960년대에 제작한 스튜디오 필름 연작에서의 스코어와 비교해 본다면 그 특성을 보다 선명히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 나우먼은 예컨대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라는 가능한 한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명령어를 지시문 삼아 스튜디오 안에서 이를 따르는 행위를 수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였다. 하지만 동명의 비디오 작품이 보여 주는 것은 언어적 명령으로서의 스코어와 그것을 따르는 신체의 움직임, 그리고 행위를 기록하는 비디오라는 매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격과 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재현의 불가능성이다.1 말하자면 브루스 나우먼의 스튜디오 필름 작업은 언어의 수행성을 언어–몸–영상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수렴-일치시키기 위해 진력하지만 이것이 실패하는 필연성을 보여 준다. 반면 김뉘연·전용완의 지침의 언어는 문학적 언술과 해석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기에 사실상 거의 모든 행동과 판단을 허용한다. 예컨대 문학적으로 걷기(2016년)는 걷기를 지시하는 지침이 중심이 된 일련의 프로젝트였다. ‘중심, 계몽적으로 걷기’, ‘흑백, 기계적으로 걷기’, ‘구름, 산책자의 걷기’, ‘얼굴 없는 별, 선을 따라 걷기’, ‘흰 머리카락이 난 선언, 집중적으로 걷기’, ‘돌들, 제자리 걷기’, ‘정방형, 개념적으로 걷기’ 등 일곱 가지의 걷기를 이르는 지침을 중철 책2으로 만들었고 안무가 강진안이 이에 따라 걷기를 수행하였다. 브루스 나우먼의 스코어와는 달리, 지침으로 사용된 문학적 텍스트에서 시작한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바깥으로 확산된다. 오직 ‘걷기’라는 조건만이 텍스트의 해석을 가시적인 몸짓으로 이동시켜 주는 통로가 된다. 다양한 걷기가 이루어지고, 그 걷기가 이루어지는 공간도 그것을 마주하는 관객들도 변주된다. 언어와 몸짓 사이의 연관성은 약하고 서로간의 거리는 아득히 멀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무빙/이미지전에서 선보인 수사학: 장식과 여담(2017년)은 김뉘연·전용완의 문학적 언어의 사용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수사학: 장식과 여담은 정확한 말에 대해서 부가적이거나 주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식’과 ‘여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그 영역을 탐구한 작업이다. ‘수사학’이라는 표명이 알려 주듯, 정확한 말보다는 말의 정확한 효력을 찾기 위해 경로를 우회하거나 불필요해 보이는 주변을 돌아본다. 수사학: 장식과 여담의 축이 되는 16면짜리 책에는 ‘이름들’이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작 지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본문을 부연한다고 여겨지는 주석들이다. 이 책의 본문과 주석을 번갈아 읽다 보면, 가지런하고 단정한 본문의 독백보다 예측하지 못할 방향으로 부산스레 수군대는 주석 읽기에 더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읽기의 방향이 바뀌고 텍스트의 의미를 조직하는 새로운 흐름을 찾아보게 된다. 주변적인 것이 오히려 더 주요한 내용이 된다. 최민선과 강진안은 이를 스코어 삼아 퍼포먼스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강진안은 전시장의 두 벽과 바닥이 모이는 모서리를 바라보고 바투 서서 그 모서리에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욱여넣고 떨어뜨렸다. 전시장 전체를 여백으로 남겨 두고 말이다. 이를 돌이켜 봤을 때 김뉘연·전용완에게 문학적인 것은 어떤 장르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구성하기 위한, ‘어떤 진실’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문학은 언어를 다루는 일이고 언어는 사물의 질서를 배열하는 흐름을 구축한다.

책, 구조와 통제

그들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문학적인 언어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드는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브루스 나우먼의 작업이 재현의 불가능성과 연관된다면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은 모든 해석이 가능한 상대주의를 어떻게 통제할지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부서지고 흩날리는 모래를 어떻게 해변의 모래성으로 보이게끔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매번의 지침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물질화한다는 것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개념적 정의는 연속적이고 순차적인 공간이 구조화된 구축물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연히 책은 공간의 배열을 통해 구체적인 운동의 방향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지면과는 다른 물질, 즉 잉크로 구현된 텍스트나 이미지의 시각적 작용과 함께 복잡성을 더해 가게 된다.3 시는 직선이다(2017년)는 책의 물질성이 가진 운동성과 텍스트의 운동성, 그 상호적 관계에 대한 좋은 예시다. 시는 직선이다는 2막으로 구성된 일종의 희곡으로, 대사 없이 움직임에 관한 지문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1막은 누워 있는 사람(수평)이, 2막은 서 있는 사람(수직)이 등장한다. 누워 있는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웅크리고, 펴기를 반복하고 서 있는 사람은 “파란색을 생각”하거나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을 생각하며 걷는다. 이 희곡은 한 면에 열 쪽이 만들어지도록 접지된 세로로 긴 종이에 앞뒤로 나뉘어 쓰여 있다. 가로로 쓰여 있는 텍스트(수평)와 세로로 긴 책(수직)이 시각적인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1막과 2막의 모든 지시문은 각 행이 서로 대구를 이루고 모든 지시문에는 대구가 되는 다른 막의 지시문이 작게 병치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1막의 첫 지시문 “한 사람이 누워 있다. 그는 서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누워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옆에는 작게 2막의 첫 지시문인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누워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서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가 쓰여 있다. 이렇게 시는 직선이다는 희곡의 허구 안에서도 책과 텍스트의 시각적 배치 안에서도 수직과 수평이 끊임없이 대칭적으로 직조되어 나가는 운동을 추동한다. 이를 지침 삼아 2017년 닻올림픽의 한 행사로 시청각에서 진행된 진상태와 마틴 케이의 동명의 소리 공연은 지침에 따라 1막과 2막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수직과 수평의 교차라는 운동은 소리의 파동을 빌려 열린 세계에서 다시 조직되어 순수한 청취의 경험으로 전환되었다.4

이처럼 책의 특수한 물질적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문학적 언어가 힘을 발휘하는 장의 한계를 구축하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 구조의 운동 원리를 환유(換喩)하는 일은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문학 출판물 편집자로 활동하는 전용완, 김뉘연에게 있어 그들 자신에게 당위적인 발언 형식일 것이다. 책이라는 사물이 말하는 방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그 사물의 형식을 빌려 침묵으로 말한다. 침묵의 말하기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한 언어는 그것만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마침

마침의 무대에는 두 개의 사물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다. 하나는 작고 하나는 크며 스테인리스 재질이다. 둘 모두 네 면은 편편하고 직각으로 맞붙어 있지만 두 면은 굴곡져 있다. 육면체를 형성해 가고 있는 중인지, 육면체에서 깎여 나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뜻 하나는 책상처럼 다른 하나는 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책상과 의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그만두게 되는데 그러기에는 전혀 기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방: 사물을 위한 지침의 화자가 사람이 아니라 만약 저 사물들이라면, 아마 사물들은 그것이 원래 놓여 있던 “작은 방”을 떠나와 여기에 당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스스로 어떤 질서를 벗어난 사물들. 공연이 시작하고 무대의 왼쪽에서 최민선이, 오른쪽에서 강진안이 등장한다. 최민선이 큰 사물을 기울여 작은 사물의 모서리에 기대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춰 둔다. 이후 30여 분 동안의 공연에서 두 안무가는 때로는 합심하여, 때로는 외따로, 때로는 서로 견주며 사물의 위치를 무대라는 영역 안에서 이동시키고, 사물들이 놓이는 방식을 찾고, 그것과 몸이 관계되는 방식을 천천한 호흡으로 살펴 나간다. 일기: 안무를 위한 지침에 나오는 “가구는 우리를 (어떻게) 옮긴다.”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물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수행적 힘과 절차(어떻게)가 괄호 쳐져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최민선과 강진안의 안무는 이 괄호 안을 채울 수 있는 단어의 목록을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원칙상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무언가에 따라 사물들의 거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계속해서 다른 얼굴로 서로를 마주한다. 사물들 간의 질서는 그저 유동적인 어떤 상태로만 여겨질 뿐이다. 공연은 최민선과 강진안이 사물들을 공연이 시작할 때 있었던 처음 그 자리에 두고 퇴장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최민선과 강진안의 자리가 서로 바뀌어 있다. 왼쪽에서 들어왔던 최민선은 오른쪽으로 퇴장하고, 오른쪽으로 들어왔던 강진안은 왼쪽으로 퇴장한다. 이 뒤바뀜은 사물들에 관하여, 공연 전체에 관하여 중요한 암시를 전한다. 사물들만이 남은 텅 빈 무대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원래 상태로 회귀된 것이 아니라 반전된 다른 위상을 가진 무언가가 되고 언제라도 다시금 사물들의 움직임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알린다. 사물은 여전히 움직임 중에 있음을, 공연 또한 여전히 전개되고 있음을 알리는 긴장을 ‘마침’으로 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라는 개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마침의 분량 대부분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면이다. 방: 사물을 위한 지침, 일기: 안무를 위한 지침, 점: 음악을 위한 지침이 연이어 서술된 이후 91면에 이르는 공백이 이어지고 세 글 모두 내용은 같지만 다른 조판으로 지면을 차지한다. 이 반복에서는 일기–점–방으로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리고 다시 91면의 공백이 이어지고 또 다른 방식으로 디자인된 세 글이 점–방–일기 순으로 쓰여 있다. 이렇게 마침은 끝나지만, 다시 어디선가 방–일기–점의 순서로 글이 반복될 것이다. 직선으로 나열된 이 순차가 실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회전운동이라면 이 연쇄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방식은 하나도 같지 않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마침은 그리하여 단 한 번도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개별성을 생산하는 무한한 반복의 시퀀스를 상상한다. 회전운동이 진폭을 가진 파동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라면, 이 반복의 시퀀스 구조는 그것을 그저 두서없이 발산하도록 두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렇게 어떤 불가해한 ‘리듬’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독성의 문제는 류한길과 진상태의 음악에서 보다 여실히 다루어질 수 있다.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 마침 공연에서 최민선과 강진안은 같은 안무를 선보였지만 류한길과 진상태의 음악은 두 날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두 번 모두 음악은 관객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무대 위의 사건과 관계되지 않고 그저 소리 자체의 청취로만 존재했다. 불화라면 불화일 것이지만, 사실 애초에 거기에는 관계의 기대감 없이 어떤 거리만이 있을 뿐이다.5 소리는 반복의 구조 안에서 언제 어디서든 그저 출몰했다가 몸을 감추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김뉘연·전용완의 이러한 언어적 실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여 다른 물질적 형태로 재생산하고 힘을 매개하는 협업자들의 존재 또한 필수적이다. 과감히 정의해 보자면 이 협업자들은 적어도 각자의 영역에서 김뉘연·전용완이 문학의 수행적 힘이라고 여기는, 사물의 질서를 주시하고 무너뜨리고 다시 구축하고 또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은 늘 협업자들과의 긴밀하고 치열한 대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화는 그것에 공명하는 다른 매개자-관객에게 계속해서 참여하기를 요청한다. 회전운동과 직선운동은 그들의 언어가 힘을 발생시키는 원리이자 형태일 뿐만 아니라 모종의 공동체를 위한 대화법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마침이 서점의 매대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내게는 공연장에서 마침을 펼쳐 보았을 때보다 더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공백과 기다림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1.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논의한 바 있다. 이한범, 매개하는 몸과 매개되는 몸: 퍼포먼스의 굴절에 관하여, 직사각형 둘레에서 글쓰기 행사 출판물, 2018년. 이 글은 다음 링크에서도 읽을 수 있다. 

  2. 이 책의 표지에는 책의 크기, 여백, 글자 크기, 글줄 수, 면수, 활자체, 조판 배열, 종이의 종류, 글자 색 등 텍스트와 지면의 형식과 그 관계에서 드러나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건조하게 쓰여 있다. 이는 책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무대라는 사각의 공간과 그 위에 올라 선 연기자에 대한 묘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3. 하지만 김뉘연·전용완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사용되지 않는데, 이들에게 이미지는 텍스트와 책의 물질성이 연상시키는, 혹은 이에 뒤따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때문에 이들의 작업에서 이미지란 언제나 텅 빈 자리로서만 존재한다. 

  4. 소리 연구자 이승린은 이 작업의 청취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막과 2막은 각각 ‘수평’과 ‘수직’인 것으로 추측되는 상징적인 인물들의 움직임이 묘사되어 있는데, 두 인물의 동작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이 관계가 마치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동일 인물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시청각에 울리는 두 연주자의 소리와도 공명한다. […] 시청각 마당에 앉아 있던 청취자들은 안팎에서 들리는 소리의 경계를 체험하며 연주자들의 ‘음악적인 소리’와 도시의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 사이에서 집중과 분산을 경험해야 했다. 여기서 연주자의 소리와 외부 소리의 청각적 지형을 ‘수평’과 ‘수직’의 관계로 본다면 시차를 둔 소리의 다른 이름들이라는 희곡과의 상동성을 추측해 볼 가능성이 생긴다.” 이승린, 변화하는 청취의 장: ‘닻올림픽 2017’ 리뷰,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2, 예솔, 2018년. 

  5. 하지만 분명 어떤 순간은 소리가 사물-몸짓과 강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러니까 사물을 둘러싸고 어떤 긴장이나 감정을, 사건을 연상시키는 순간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순수한 진동으로서의 소리가 사물과 관객인 ‘나’의 해석적 인지 범위에 포섭되는 주파수로 진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뉘연 전용완, 마침(2019)
김뉘연 전용완, 마침(2019)
김뉘연·전용완, 마침, 2019년 10월 25일,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태경 ⓒ김뉘연·전용완 kimnuiyeon.jeonyongw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