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중첩된 세계의 안팎에서: 임고은 작가와의 대화

OKULO 005: 시네마 이후,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 - 네 개의 대화(2017년 7월 31일 발행)에 수록

 

작년 이맘때 전시 관계적 시간(아르코미술관)과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에서 임고은 작가의 작업을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그의 작업은 과연 어떤 결 안에 있는지, 이미지 혹은 영상을 다루는 관점은 과연 무엇인지, 작업을 지탱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늘 궁금했었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득이 메일로 대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임고은 작가와 주고 받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많은 말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긴 호흡은 그 말을 더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한범 언제부터 사진, 필름, 디지털 영상과 같은 매체를 다루어 오셨나요? 작업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임고은 2002년에 7개월 동안 NGO 활동에 참여해 우즈베키스탄에 머문 적이 있어요. 졸업하기 전에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미 있다 여기는 일을 하며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세상을 향한 여정이 어학연수나 배낭여행같은 나의 미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시간이기를 바랐어요. 떠나 있는 동안 사진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동 필름카메라와 필름을 챙겼고, NGO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사진을 찍으며 카메라의 작동법을 익혔어요. 그러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가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들른 의료 봉사팀에 합류하게 되었죠.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가 맡은 일은 구호물자 및 의약품을 보급하는 일과 동영상과 사진으로 봉사팀의 활동을 기록하는 일이었어요. 당시 저는 카메라 사용에 서툴렀고 정신없이 바쁜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중에 그 결과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알게 되었죠.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향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떠났던 여정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결국 저의 미래를 바꾼 셈이 되었다는 걸요.

이한범 작가님의 작업에서 흥미롭게 느꼈던 것은 어떤 생경한 태도였어요. 연구자 혹은 실험자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죠. 이미지 자체보다는 이미지의 체계에 매혹된 듯 보았다고 할까요. 2004년에 만든 두 편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 사진 찍다차이나타운에 대한 주관적 기록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기술적 이미지가 유통되고 작동하는 방식, 즉 이미지가 놓인 체계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했어요. 사진 찍다에서 디지털 비디오의 화면은 필름 사진이 인화되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드러내고, 결국에는 그 이미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기 위한 암흑이 후반부에 이어지죠. 이는 주로 1960년대 서구에서 이루어졌던 간매체적인 실험들, 관객성과 인지 감각에 대한 탐구의 맥락에 있다고 생각해요. 흥미로운 것은 수용자의 조건을 다루는데 그 수용자가 타자로서의 관객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임고은 연구자 혹은 실험자에 가깝다 느끼신 것은 저뿐 아니라 다른 작가에게서도 앞으로 더 자주 나타나게 될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 미(美)에 대한 시대의 흐름이 시청각을 넘어 기술 매체, 과학, 정치, 사회 운동까지 그 영역이 확장된 덕분에 저처럼 다른 분야에 있던 사람도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 저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순간을 가장 멋있게 담아낼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찍은 사진을 보다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진 속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눈 속에 제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사진 속에 있던 타인의 시선을 통해 저와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지요. 사진 속 소녀 역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한동안 사진을 찍지 못했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형하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시작한 첫 비디오 작업이 사진 찍다죠. 당시 어떻게 하면 배우와 감독,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 외롭지 않은 작업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는데, 그 방법 중 하나로 사진 찍다의 후반부는 이미지 없이 관객이 전반부에서 들었던 소리만 재생하는 시도를 해보았어요. 이렇게 함으로써 관객이 소리를 지표 삼아 기억 속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차이나타운에 대한 주관적 기록은 저의 실패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주관적 기록이에요. 인천 차이나타운을 밀접한 거리에서 기록하고 싶었지만 차이나타운은 한국인인 제가 가까이 가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어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카메라의 눈을 빌어 피상적이나마 차이나타운의 이미지를 남기는 것과 미디어를 통해 듣는 단편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이 전부였죠. 그래서 결국 해체된 뉴스 보도물의 권위적인 내레이션과 반복되는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결합이 던져주는 정보들로 이 작업을 완성하게 된 거죠.

이한범 전시장에서 설치작업을 하실 때 거울을 자주 사용하시던데요. 이때 거울이란 단지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조건들을 하나씩 건드려 보고 드러내는 실험을 위해 필요한 장치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의 체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그것에 매혹되었는지, 혹은 왜 그것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실험하고 고민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실험을 영화적 이미지의 체계와 관련해서 수행하려 하는 이유도 궁금하고요.
임고은 거울을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한 건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모호한 작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진을 찍는 주체로서의 제가 거울을 사용하면 피사체가 되어 동시에 객체도 될 수 있으니까요. 거울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미지를 제공해왔던 흥미로운 도구이죠. 대상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듯 하면서도 불확실한 이미지가 표면에 떠오른 채 저장되지 않고 현재의 이미지만 흘러가죠. 이런 점에서 보면 이미지의 현재만 존재하는 거울은 영화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영화로 재현하는 과거의 시간은 모두 다시 현재가 되어버리니까요.

이한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거울에 영사되는 MOV(I)E(2009)에서처럼, 현재의 이미지 혹은 현재적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영상의 ‘설치’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이런 설치 광경을 접하고 나면 이미지는 그 스스로는 현재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건가 하는 질문이 생겨요. 스스로는 현재적이 될 수 없기에 도와주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모종의 조건을 발생시키기 위한 작업처럼 보입니다. 이미지가 현재적인 것이 되기 위한 조건이란 게 있을까요?

임고은 저는 극장에서 영화를 경험하는 시간과 전시장에 설치된 영상을 경험하는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요. 어차피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혼재되어있으니까요. 우리가 현재라고 인지하는 것조차도 사실 미세한 지각의 시차가 생기므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아닐까요?

이한범 외부 세계가 변해서…(2013~2016)나 보(이)다(2008~2012)의 경우 영화라는 시스템이나 영화적 이미지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시각화하고 물질화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관객은 현재적 이미지를 마주함과 동시에 영화적 이미지와 영화 매체에 대한 비평적 장소에도 놓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비평적 장소를 만들기 위해 기술적 장치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죠. 작가님의 설치에는 그 자체로 ‘작동의 내러티브’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보(이)다의 경우 센서가 있고, 센서에 반응하는 회전하는 흰색 막대, 그리고 그에 따라 영사되는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

임고은 영화는 이미지 자체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역사, 정치, 경제 등이 서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흥미로운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물이에요. 영화는 여러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무르익었기 때문에 영화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더 풍성해졌지요. 또한 아날로그 필름과 디지털 영상 모두를 경험한 작가로서 그 변화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영화의 매체적 변화와 함께 벌어지는 사회, 문화, 정치, 건축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고자 했던 작업이 연작 외부 세계가 변해서…죠. 보(이)다는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보면서 경험했던 것들로 부터 시작되었어요. 미치광이 같은 사랑은 영화를 보는 동안 배우가 관객인 나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라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든 영화에요. 놀랍게도 바로 이어서 봤던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서의 배우들은 때때로 관객을 응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관음증자라며 욕도 하더라고요! 두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는 무대라는 장소를 보(이)다에서 ‘무대와 같은 영화관’ 내지는 ‘영화관 같은 무대’로 구현했고, 그 곳에서 관객과 배우 사이의 보고 보이는 관계를 교란시켜 보고 싶었어요. 이 작업의 인터랙티브한 요소는 시선의 주체와 객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서 흰 막대의 회전 속도와 조명의 밝기가 변하면서 관객은 ‘보는 대상’이자 ‘보이는 대상’으로서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되거든요.

이한범 보(이)다같은 전시장 설치에서 장치가 정교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숙련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임고은 보(이)다를 작업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가 가능한 영화을 만들고 싶었어요. 첫째는 관객이 더 잘 보기 위해 작업에 다가갈수록 보고자 하는 욕망이 좌절되는 영화, 두 번째는 시선의 주체와 객체가 모호한 영화, 세 번째는 잔상으로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죠. 이렇게 확장영화의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구상만 해놓고 실현하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라익스아카데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라익스아카데미의 기술 제작지원을 받아 제작할 수 있었어요. 아마 라익스아카데미 기술 조언가인 케이스 레이다익과 스테판 쿠데르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제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거에요.

**이한범**에피소드 1: 외부 세계가 변해서…(2014)와 에피소드 2: 외부 세계가 변해서…(2014)는 직접 촬영하신 영상으로 만든 것인데도 처음에는 파운드푸티지 작업이라고 착각했어요. 영화의 전성기로 나를 데려다놓는 듯한 노스탤지어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달까요? 외부 세계가 변해서…는 영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만든 작업이라고 하셨는데, 그 과정을 드러내기 위해 무척이나 강렬한 영화적인 기억을 이용한 것은 영화에 대한 작가님의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혹은 오래된 영화적 방식을 이용해 무언가를 재생산해보려는 과정이었던 것인가요?

임고은 에피소드1: 외부 세계가 변해서…는 16mm 필름 워크샵에 참여했을 때 촬영하고 현상한 필름을 편집해 제작한 것이에요. 스마트폰으로도 간편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요즘, 아날로그 필름 작업을 하려고 참여한 사람들과 워크샵의 풍경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거든요. 언젠가는 더 이상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 년 전에 쓰여진 소설 속 주인공이 고민하는 문제가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삶을 사는 방식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반면 사물은 계속 새로운 속성과 더불어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이라 특정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잘 담고 있죠. 아날로그 필름도 그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에피소드 1: 외부 세계가 변해서…는 오래전에 기록된 필름처럼 보이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 감독과 제가 서로를 기록한 장면이 있어서 시대 감각을 교란시키죠. 지금은 잘 통용되지 않는 16mm 흑백필름을 사용해서 어긋난 시간이 주는 시대착오적이고 생경한 느낌이 모호하게 작업에서 드러나기를 바랐어요.

이한범 “암스테르담의 실험영화 감독들이 참여한 필름 예찬이라는 제목의 전시와 공연에 참여하여 기록”한 작업 에피소드 2: 외부세계가 변해서…에서는 디지털 카메라와 수퍼8mm 필름 카메라를 이용해 만든 영상을 하나의 화면에 중첩시키고 있어요. 5월 어느 날, 5일(2010)은 꽃이 지는 모습을 필름 프로젝터와 디지털 프로젝터로 같은 스크린에 중첩시켜 동시에 영사하는 작업이고요. 이는 필름이나 디지털 사이에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공존하는 역사적 시간을 하나의 위상으로 통합시키려는 것처럼 느껴져요. 디지털과 필름, 좀 더 확장시켜보자면 영화를 둘러싼 매체적 환경, 더 확장시켜보자면 작가님이 말씀하신 사회, 문화, 정치, 건축의 변화의 문제와 긴밀히 연동된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의 변화와 그것을 둘러싼 것들의 변화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임고은 경계가 분명한 것보다는 모호한 것이 실제와 더 가깝고 우리의 지각과 기억은 늘 불완전하므로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해요.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중첩된 경계에서 실험하다 보면 다르다 구분되던 것들이 또 다른 다름으로 변모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향수에 젖어 아날로그 필름만 고집한다거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영상을 쫓아가지 않고, 두 매체 각각의 성향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동등하게 다루고 싶어요. 이 두 매체가 만나는 지점이 제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니까요. 거창하게 사회, 문화, 정치, 건축의 변화라고 말했지만, 연작 외부세계가 변해서…는 당시 제가 머물던 한정적인 장소에서 벌어진 다양한 변화를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작업이죠. 암스테르담 본델파크 파빌리온에 위치했던 영화박물관은 2013년에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새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EYE 영화박물관(EYE Filmmuseum)이 되었고, 암스테르담의 모든 영화관의 영사기는 디지털 영사기로 바뀌었으며, 코닥은 필름 생산에 대해 불투명한 미래를 선언하였지요.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네덜란드 왕실의 세대교체와도 함께 했어요. 1963년 본델 파크 파빌리온 발코니에 앉아 있던 베아트리스 공주는 여왕이 되었고, 2013년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빌럼-알렉산더르에게 왕좌를 물려주었어요. 공교롭게도 그 즉위식을 축하하는 첫 공식 행사가 새로운 EYE 영화박물관에서 열렸고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러 의미를 새로 엮어 보기도 하고 시간의 좌표를 옮겨보기도 하며 기록하고 수집한 자료를 협업자 이고르 세브축(Igor Sevcuk)과 공유하면서 독립적으로 각각 네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죠

이한범 영화에 대한 비평적 실험이 가능한 곳이 전시장이 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과연 전시장은 영화의 역사가 해방되는 장소일까요?

임고은 처음부터 전시장이라는 특정 장소를 생각하며 작업한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전시장에서는 상영 공간 자체를 바꿀 수 있어 자연스럽게 전시장에서 영화 밖 공간에 대한 실험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요즘은 전시장을 영화관처럼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전시장에서 관습적인 영화관을 다시 만날 때는 사실 반갑기도 해요. 불필요한 감각을 차단한 채 불특정 다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전통적인 영화관에서의 시간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영화에 대한 비평적 실험 공간이 전시장으로 국한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생각해요.

이한범 작품들의 제목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알파벳 하나가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형식이 많은데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작업과 연동시켜 보았을 때 제게는 그 괄호가 다층적인 의미를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예를 들어 NO(W)HERE의 경우 NO HERE, NOW HERE, NOWHERE 등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 작업은 벽에 붙어 있는 오브제, 오브제를 비디오로 촬영해 프로젝터로 영사함으로써 나타나는 실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관객의 신체와 그 신체 또한 영사된 화면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여러 다층적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임고은 작업의 다층적인 성향을 반영해 제목도 그렇게 지어보고 싶었어요. NO(W)HERE는 관객의 모습을 카메라와 영사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재현합니다. 카메라와 영사기를 연결해 서로 마주한 거울 마냥 피드백 현상이 일어나게 했는데, 공간을 한 번 더 왜곡시켜 상이 뒤집힌 공간을 추가하였고, 이 두 공간이 만나는 접점을 만들었어요. 이 작업에서 카메라는 뒤집힌 기표를 다시 뒤집어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반영하지만, 관객은 항상 자신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으며, 실재와 허구가 끊임없이 재생되며 공간이 확장되는 거죠. 그 공간은 여기 지금(NOW HERE)이면서 그 어느 곳에도 없는(NO WHERE) 공간이지요.

이한범 암스테르담에 있는 프로젝트 골렙(Project Goleb)에 작업 공간을 두고 있고, 작가 공동체 클룹코(KLUPKO)의 구성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골렙은 어떤 곳인지, 작가 공동체 클룹코는 어떤 모임인지 궁금합니다.

임고은 골렙은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모여, 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의 한 층을 작업실과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느슨한 공동체에요. 일상생활과 작업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곳이죠. 각자의 공간 이외에도 프로젝트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워크숍, 상영회, 독서모임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하기도 해요. 그냥 모여서 밥을 먹을 때도 있고요. 또, 게스트 스튜디오에 임시로 머무는 작가가 항상 있고, 작가뿐 아니라 작가의 가족과 교류하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면, 지금은 게스트 스튜디오에 브라질에서 온 작가 세실리아 카발리에리가 마더스 인 아트(Mothers in Art)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두 살 된 딸 도라와 함께 머물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 도라의 아빠 카밀루도 함께 지내다 돌아갔어요. 제가 얼마 전 엘렌 식수의 정원에 대한 작업의 스케치를 끝내고 클라리스 리스펙터의 글을 읽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카밀로는 식수의 제자였고, 리스펙터를 전공한 후 리오데자네이루연방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프로젝트 공간에서 소규모 그룹과 함께 제 스케치 영상을 보며, 식수와 리스펙터의 정원에 대해 카밀루와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어요. 클룹코는 일종의 골렙의 위성 프로그램으로 주거 공간에 작가를 초대하여 전시, 상영회, 퍼포먼스 등을 진행하는, 역시 일상생활과 작업이 조우하는 방식입니다. 골렙이 작업공간에 주거 공간을 초대하는 식이라면, 클룹코는 주거 공간에 작업 공간을 초대하는 식이죠. 저와 이고르가 실제로 살고 있는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전시 혹은 행사가 있을 때는 작가와 관객이 드나드는 공적인 공간이 되기도 해요. 이곳에서 저희는 작가이면서 기획자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저희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공간을 운영하다 보니, 클룹코에서의 행사가 저희 작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각자의 작업을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되요.

이한범 현재 네덜란드 코카인 플랜트 프로젝트라는 작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영상 작업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떤 프로젝트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결과물이 될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면 좋겠군요.

임고은 네덜란드 코카인 플랜트 프로젝트는 2011년에 커미션을 받아 진행한 작업이라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작업과 결과물이 많이 다르지만, 언젠가는 영상으로 다시 만들고 싶은 작업이에요. 1900년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싱켈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합법적인 코카인 공장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이러한 역사를 지닌 공간을 찾기 어렵죠. 제가 코카인 공장이 있던 자리를 찾으려 했을 때 기록에 나와 있는 주소 정보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네덜란드 코카인 공장의 역사를 허구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싱켈 지역에 여러 종류의 모조 설치물을 설치해서 과거와 현재의 혼란스러운 지형학적 상황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 했어요. 이 전시 기록과 조사 자료를 가지고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역사, 현재와 과거, 진실과 허구, 기표와 기의 사이를 오가는 영상을 제작하고 싶었는데 아직 시작을 못 하고 있네요. 일단 올해는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이 경계를 끊임없이 새로 그어 가는, 어느 누구에게도 길들여 지지 않는 타자의 공간인 정원에 대한 작업을 끝내려 하고 있어요.


 

에피소드 1,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16mm 필름, 흑백, 2분 5초, 유성, 2014.
MOV(I)E, 혼합 매체 비디오 설치, 흑백&컬러, 무성, 2009
보(이)다, 혼합매체, 2008-2012, 라익스 아카데미(Rijksakademie van Beeldende Kunsten) 기술 제작 지원. (사진 제공 아르코 미술관)
에피소드 1,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16mm 필름, 흑백, 2분 5초, 유성, 2014.
에피소드 2,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super 8mm&HDV, 흑백&컬러, 7분 20초, 유성, 2014.
에피소드 4,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HDV, 흑백&컬러, 8분 20초, 유성, 2016.
에피소드 4,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HDV, 흑백&컬러, 8분 20초, 유성, 2016.
에피소드 4, 외부세계가 변해서…, 단채널 비디오, HDV, 흑백&컬러, 8분 20초, 유성, 2016.
NO(W)HERE, 비디오 피드백 설치, 컬러, 무성,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