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풍경의 (재)구성, - 오톨리스 그룹(Otilith Group)의 라디언트(The Radiant)

OKULO 001: 오디오 비주얼 리서치-지식과 감각 사이에서(2016년 3월 2일 발행)에 수록.

 

세르쥬 다네(Serge Daney)는 프리츠 랑(Fritz Lang)의 1947년 영화 비밀의 문(Secret Behind the Door)이라는 제목이 고전영화의 ‘깊이에의 욕망(desired depth)‘, 즉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관통하여 더 보려고 하는 욕망의 구조를 잘 드러낸다고 말한다.1 하지만 커튼을 열어 젖혔을 때, 창 너머의 피안(彼岸)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벽돌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깊은 곳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좌절되고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한다. 스펙터클화 된 현대의 시각문화는 프레임 지워진 평면의 이미지를 더 이상 환영적인 깊이를 가진 것으로 생산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이면, 혹은 화면의 밖을 바라보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미지와 세계는 이미 단절된 것일까? 좀 더 복잡한 문제로 들어가 보자. 테러리즘, 세계화, (비장소로서의)난민, 기후변화, 핵 발전 등 당대의 세계질서를 만들어 내는 문제들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어서 한 눈에 파악할 수 없으며, 불특정적이고, 비가시적인 대상이다. 재현할 수 없는 대상이 문제적인 시대에 이미지는 무엇이고 어떤 소용이 있는가? 오톨리스 그룹(Otolith Group)의 라디언트(The Radiant, 2012)는 이 문제를 우회하는 실천을 보여준다.

오톨리스 그룹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톨리스 그룹은 코드보 이션(Kodwo Eshun)과 안잘리카 사가(Anjalika Sagar)의 듀오로, 각각 1967, 1968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션은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서 인류학과 힌디어를, 사가는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Oxford)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톨리스 그룹은 영상뿐만 아니라 사진, 출판,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특히 2010년에는 하나의 전시이자 프로젝트였던 A Long Time Between Suns로 터너상(Turner Priza) 후보에 올랐다.

‘오톨리스’는 내이(內耳)에 있는 석회질의 평형석을 지칭하는 것으로, 공간 속에 위치한 생명체로 하여금 중력과 방향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내는 물질이다. 이션은 이 물질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지향하는 목표 또한 오톨리스처럼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내재적 조건들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2 그들의 첫 작업 Otilith Ⅰ은 극미중력(microgravity)의 우주정거장에서 태어난 2103년의 화자가 지구의 중력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며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허구적인 설정으로, 직접적으로 오톨리스라는 이름에서 기인한 리서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정말로 단순히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Otilith Ⅰ의 극미중력 상태는 서방국가들의 연합이 이라크를 침공한 절망과 분노의 상황과 연결된다. 오톨리스 그룹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한 집단, 한 사회의 정치성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조건들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션과 사가는 1980년대의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영상들을 채널 4(Channel 4)와 같은 국영 TV방송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했던 청소년기를 회고한다. 이들은 비토 아콘치나 브루스 나우만과 같은 미국 포스트-미니멀 작가들의 영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며, 베르토프(Dziga Vertov)에서 시작하여 크리스 마커(Chris Marker), 블랙 오디오 콜렉티브(Black Audio Collective),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와 같은 필름 에세이 작가들의 계보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3 오톨리스 그룹의 기본적인 태도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과연 정치적으로 어떤 힘을 지니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시공간적 차원 속 이미지들의 연관 속에서 문제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기존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는 선형적(linear) 역사 서술을 거부하고 현재적 시점에서 파악하는 움직이는 성좌(constellation)를 구성한다,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 필름이란 매체는 그들이 스스로의 윤리를 달성하는 방법론으로서 적절한 예술적 실천의 당위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2010년작인 히드라 데카피타(Hydra Decapita)는 디트로이트의 일렉트로닉 뮤직 듀오 Drexciya가 1993년부터 2002년 발매한 앨범을 모티브로 삼는다. 이 앨범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잇는 중간항로(Middle Passage)에 버려졌던 흑인 노예들이 죽지 않고 제국을 만들어 수면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하나의 픽션이다. 히드라 데카피타는 역사 속에서 이와 관련된 장면들을 추려낸다. 1783년 133명의 노예를 물에 던져 넣은 배의 선장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 이 사건을 시각화 한 터너의 회화, 그리고 이 회화를 언급한 존 러스킨의 텍스트를 연결한다.4 오톨리스 그룹이 현대의 우화와 역사적 장면을 교차시키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금융자본이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질서이고, 이 추상적 과정이 현실 속에서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밝히는 것이었다.

라디언트

라디언트(The Radiant)는 2012년 도큐멘타 13(dOCUMENTA 13)의 커미션으로 만들어진 작업으로, 64분의 러닝타임은 오톨리스 그룹이 만든 영상 중 가장 길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의 태평양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9의 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의 1~4호 원자로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 사건은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적 손실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문명을 유지시키고 있는 핵발전이 지닌 구조적 문제와 대재난의 가능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전 세계적인 불안감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한 재난의 이미지는 절망과 공포, 불안과 비참함 이외에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감각들이 진실로 핵 발전을 불신하게 만들고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논리와 발전의 테제를 관통하는가? 아니면 리얼타임으로 보도되는 뉴스의 이미지들과 나 사이에 실재하는 물리적 거리감을 확인하며 하나의 사건으로 소비할 뿐이었나?

한 가지 비교를 해 보자. 쌍둥이빌딩으로 돌진하는 비행기는 그 자체가 지닌 폭력성과 붕괴로의 개연성으로 인해 즉물적으로 전환되어 9/11 테러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표상된다. 이 이미지는 너무도 명확하게 자본주의의 우상숭배와 그것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우상 파괴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파괴된 우상은 매우 손쉽게 비디오게임, TV 드라마, 영화 등의 ‘이차적 이미지’로 증식하며 테러리즘에 대한 국가적 보복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가 된다.5 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그 사건이 하나의 대표적 장면으로 치환될 수 없는 애매한 지점이 있다. 원자로가 폭발하는 장면 속에서 방사능이 대기로 방출되는 모습은 인지되지 않으며, 방사능으로 인한 물리적 피해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그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재난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9/11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이미지는 모두 ‘깊이 없는’ 상태로 재현되며 스펙터클에 가깝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후자의 경우 가시적인 차원에서 명확하게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훨씬 어려운 문제다.

라디언트의 중반부에 나오는 사진작가 치히로 미나토(Chihiro Minato)의 인터뷰 내용은 오톨리스 그룹이 직시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풍경(風景)은 일본어로 후케(ふうけい), 중국어로는 펭슈이(风水)라고 하며 모두 바람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 관점은 정적이고 고정된 대상으로서의 풍경(landscape) 개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차원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후쿠시마의 토속적인 신화와 종교에서 기원한 문화적 요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원전사고 이후로 기존의 삶의 풍경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혹은 미나토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한 개의 풍경이 더 추가되었다. 바로 방사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은 후쿠시마의 전통적 문화와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삶의 양태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했다. 오톨리스 그룹의 라디언트는 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인간의 삶과 세계를 규정하는 대상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미나토의 인터뷰는 루믹스 카메라가 천천히 차례대로 분해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 교차는 라디언트가 다루는 대상이 상을 포착하여 다시 드러내는 기존의 시각적 재현 방식이 완전히 무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사능, 즉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풍경은 포착할 수 없는 실체라는 선언이다.

그렇지만 오톨리스 그룹은 전체 작업 속에서 끊임없이 방사능을 가시화하려고 노력한다. 비가시적인 대상을 어떻게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는가? 또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려고 하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하나는 방사능을 직접적으로 이미지/사운드 차원에서 재현하려는 노력이고, 두 번째는 기존의 아카이브 이미지들을 재사용함으로써 방사능을 둘러싼 상황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다시 시각적인 차원과 청각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시각적인 차원에서 방사능을 지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상들을 제시한다. 상황실 혹은 연구실의 모니터 위에 표시되는 지도에는 지진의 진도와 진원지가 여러 가지 크기와 색의 도형들로 시시각각 변한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과 그래프로 수치화되는 방사능 분포와 강도의 표시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접하는 기호들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의 문명이 자연을 관리하고 판단하는 수단이 이처럼 조야하고 어설픈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준다. 영상은 직접적으로 가시화된 방사능을 마지막에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검은 화면에 실이 흩뿌려지는 것 같은 화면은 일명 안개상자(cloud chamber)라 불리는 것으로, 과포화 된 기체 알코올이 들어있는 상자 속에 방사선이 지나가게 되면 그 궤적을 따라 기체가 이온화되어 응축하게 되고, 가느다란 실 형태로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사운드는 시각이미지보다 방사능의 실체를 더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방사능 농도를 측정하는 가이거 계수기(Geiger counter)의 전자음은 영상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소리인데, 방사능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는 빨라지고 옅은 곳에서는 느려지며 그 규모를 드러낸다. 카메라가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하는 평범한 웅덩이나 집의 모퉁이에서 가이거 계수기는 방사능의 존재를 전달한다. 한산한 거리, 풀이 무성히 자란 정원의 풍경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계수기의 소리는 그 풍경에 방사능의 풍경을 얹어버리며 한순간에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또 하나 특징적인 소리는 영상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일본의 아티스트 아츠히로 이토(Atsuhiro Ito)가 만들어내는 노이즈 사운드이다. 이는 에너지를 절약함으로써 국제적 노력에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라는 정부의 모순적 요구에 대한 시위의 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였다. 이토는 기타 페달에 네온 튜브를 달아 귀가 멀 정도로 소리가 큰 소음과 함께 빛을 만들어 내며 국가가 금기시하는 ‘과도함’을 통해 저항한다.6 이토의 노이즈나 계수기의 전자음은 일본말을 읊조리는 군중들의 소리, 자연 속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접합되어 영상 곳곳에 심어져 있는데, 이를 통해 방사능의 풍경이란 우리의 신체를 둘러싼 ‘기관’이며, 문화에 틈입해 있는 일종의 구성원리로 느껴지게 한다.

두 번째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시간 속에 산포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한 시점으로 통합하여 재-구성하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2011년의 대재난이 발생한 필연성을 통시적인 역사, 다중의 장소 속에 찾으며 핵문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자본주의의 숨겨진 실체들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라디언트는 단순히 이미지의 재현 차원에서 비가시적 대상을 가시화하는 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비가시적 대상이 놓여있는 풍경 자체를 그려내며 좀 더 본질적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멀리서 점멸하는 발전소의 불빛, 52층의 모리타워에서 내려 다 본 도쿄의 휘황한 야경, 그리고 일본의 현대사가 전쟁의 폐허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임을 드러내는 대화로 이어진다. 이 짧은 이미지의 연속은 결국 현재를 직시하기 위한 문제설정과도 같다. 이미지의 상(像)과 사운드로 비가시적인 방사선을 실재적인 것으로 감각하도록 만들었다면, 그 사이사이 틈입한 아카이브 이미지들은 대상이 지닌 역사성을 재구성한다. 할 포스터에 의하면 이미지의 재사용은 기존의 역사적 정보를 상실시키거나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7 즉 오톨리스 그룹은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편집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을 비껴서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경험을 다르게 감각하도록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사용은 랑시에르가 말하는 다큐멘터리의 ‘허구적 발명’과도 같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는 사실적인, 그러나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재단하고 덧붙이고 분리시키면서 현실을 하나의 인상으로 생산하지 않고 ‘이해되어야 하는 소여(所與)’로 받아들이는 예술적 작업이다. 현실의 묘사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는 추출된 이미지와 형성된 이미지들 간의 일치와 불일치를 더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8 라디언트가 이미지를 재형성하는 방식은 이미지들이 거의 공시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하나의 시점으로 이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빗물을 받아 오염도를 측정하고 농작물을 검사하는 과거의 한 장면은 후쿠시마 피폭지역에서 보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활동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라디언트는 문제의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선형적 서술이 아닌 이미지의 병렬적인 나열을 통해 열려있는 관계 가능성을 펼쳐놓으며 아틀라스를 형성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간의 통합이 특정한 시대나 시점으로 수렴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의 경계를 지워내며 일종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통해 시간을 다루는 문제는 기억하기의 정치성과 맞닿아 있다. 태초에 이미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제의가치를 지녔던 것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9 그것은 어쨌든 인류가 만들어 낸 시간의 박제이자 기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시 아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현대 시각문화의 이미지 생산과 소비가 그 어떤 기억을 담보하는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사실들 간의 연결이 사라진 채 ‘역사의 정합성’을 부여받은 이미지는 더 이상 기억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재난은 단순히 감각적 차원에서 소비되며, 무수히 많은 사실적 정보가 ‘사건들의 결합’, 즉 뮈토스로 구축되지 못한 채 쏟아져 나올 뿐이다. 랑시에르는 기억과 정보의 양은 무관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보는 기억을 위해 축적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보가 많아지게 되면 거기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억은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관계에서 탄생한다는 지적은 당대의 이미지 사용, 기억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있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10 오톨리스 그룹이 만들어 낸 이미지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득하려 하지 않으며, 어느 지점으로 나아가길 종용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재배열 된 성좌를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 강력하게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이며, 기억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이 기억은 사건의 지식이나 정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된 차원에서 수용하는 지금 현재의 관람주체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비)세계상으로서의 이미지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에 의해 체계화되고 표상가능하게 된 현대사회를 ‘세계상(世界像)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 세계상이라는 것은 세계의 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상(像)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며, 세계가 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본질적인 특징이다.11 W.J.T. 미첼(W.J.T. Mitchell)은 ‘그림으로의 전환(pictorial turn)’이라는 표현으로 이 상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1967년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용어를 통해 예술, 미디어, 이론과 문화의 형성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얘기했다면, 미첼은 그 담론의 중심을 그림(picture)으로 옮겨온다. 여기서 그림은 벽에 붙어있는 회화, 앨범속의 사진, 책 속의 삽화와 같은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이미지가 등장하게 되는 전체적인 복잡한 상황을 가리킨다.12 따라서 ‘그림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이미지의 범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마찰‘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살아있는 행위주체(living agent)로 이미지를 간주하고,13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며 어떻게 관람자와 세계를 변화시키는지 밝혀내야 하는 담론의 대상이 된다.14 여기서 중요한 사고방식은 이미지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이고(is) 무엇을 의미하는가(means)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요구하고 행하는가(does)를 탐구하는 것인데, 미첼이 보기에 이미지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우리는 그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이 요구와 응답의 과정이 역사를 구성하고 문화를 형성한다고 했을 때, 이미지는 마치 화폐처럼 교환의 매체로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이 질문의 맹점은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의 상황은 예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톨리스 그룹이 만들어 낸 구성적 이미지는 화폐적 교환관계를 교란시킨다.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다시 발견하고 직조하는 일은 기존의 관습적 지식을 해체시키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음을 보았다. 적극적으로 발화하지 않고 의미의 관계망을 만들어낼 뿐인 집합적 상태의 이미지는 그것을 우상화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미끄러지게 만든다. 결국 오톨리스 그룹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비언어적 차원으로, 바꿔 말하자면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대상의 재현을 벗어나 상황의 구성으로 다시 짜여질 때, 이 허구는 역사를 재구성하며 비가시적인 풍경을 수면 위로 떠 올려 보낸다. 세계는 하나의 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세계는 오로지 사실, 정보, 이미지들 간의 구성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드러날 뿐이다.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응답

지난 9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기후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 나에게 증명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오직 날씨가 있고 그것이 변한다는 것만 믿는다.” 대상은 물질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재현될 수 있어야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태도는 아주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는 한편으로 이미지에 의한 인식의 속박처럼 보인다. 나아가 사태가 더 적나라하게 재현될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실은 해방으로 나아가는 고발이 아닌 더욱더 그 안으로 죄어 들어가 버리는 상태를 만든다. 이미지가 새로운 해방적 주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는 안이 아닌 그것의 밖에 있다. 이미지는 단지 표면(surface)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태도는 우상파괴의 불신과는 다른 맥락 속에서 이를 전복시키고자 한다. 우상파괴가 거부에 기인한 것이라면 표면으로서의 이미지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필름 몽타주는 이미지의 재배치가 시간을 재구성하고 끊임없이 역사를 구축해 나간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지니며, 이는 당대에 유효한 매체적 발명으로 보인다.


 


  1. link  

  2. link  

  3. link  

  4. link  

  5. W.J.T. Mitchell, What Do Pictures Wan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2005), pp. 5-27. 

  6. The Otolith Group in Conversation with Nomi Beckwith, Journal of Contemporary African Art 34, Duke University Press, 2014, p. 16. 

  7. Hal Foster, “An Archival Impulse”, October (2004) 110, Fall, p. 4. 

  8. 자크 랑시에르, 다큐멘터리와 허구: 마르케르와 기억의 허구, 영화 우화, 인간사랑, 2011, pp. 259-264. 

  9. 뢰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글항아리, 2011, pp. 21-63. 

  10. 랑시에르, 앞의 책, p. 258. 

  11. Martin Heidegger, The Age of the World Picture, 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New York; Harper & Row, 1977), p. 130. 

  12. W.J.T. Mitchell, op. cit, pp. ⅹⅲ-ⅹⅶ. 

  13. link  

  14. W.J.T Mitchell, “Pictorial Turn”, Picture Theory, (United States: Uni. Of Chicago, 1994), pp.11-13. 

오톨리스 그룹, 라디언트(2012)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