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친애하는 당신

서울아트시네마 2018 시네바캉스 시네토크

 

script

안녕하세요, 오늘 아핏차퐁의 친애하는 당신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 이한범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 아름다운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작품을 DVD로 먼저 봤었는데요, 이번에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니 특히 후반부 숲 부분의 느낌이 또 달라서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보면 볼수록 이전에는 못보았던 이야기의 디테일들, 예를 들면 온이 왜 물에 들어가기를 무서워 하는지, 민이 온을 성적으로 끌려 하는지, 타미가 민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든지 등등이 계속 보이게 된다는 것이죠. 아주 섬세한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영화의 이런 숨은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찾아내는게 아니라, 제가 이 영화에서 이상하게 느꼈던 점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아핏차퐁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태국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1994년에 미국 SAIC이라고 하는 시카고의 예술대학교에 들어갑니다. 그가 태국으로 귀국해서 처음 제작한 장편이 2000년도의 정오의 낯선 물체인데요, 이 작품을 통해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처음 데뷔하였고, 이후 전 세계의 영화제에서 상영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2001년 제 2회 전주영화제의 아시아인디포럼에서 상영되었고요. 그 이후 2002년 두 번째로 만든 장편 작품이 바로 이 친애하는 당신입니다.

아피찻퐁의 다른 여러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또한 아핏차퐁이 1999년에 설립한 “킥더머신”이라는 이름의 스튜디오에서 프로덕션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나 아핏차퐁의 다른 영화들은 이 대안적인 제작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뒤편에 흘러 나오고 있는 친애하는 당신의 스틸컷과 제작 장면 사진들은 모두 킥더머신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국어 제목은 “Sud Senaeha”로, ‘최고의 열정’, ‘완전한 친밀’ 정도로 직역할 수 있을 이 영화는 제 55회 깐느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섹션에서 프리미어 되어 대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죠. 이 다음 만들어진 2004년의 열대병이 또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고요.

이 작품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버마인 불법노동자 민과 그의 여자친구 룽, 그리고 룽이 고용한 민을 돌보는 온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이들이 태국과 버마의 국경지역에 있는 정글로 피크닉을 떠난다는 것이죠. 아핏차퐁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일화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는데요, 1998년에 정오의 낯선 물체 촬영을 위해 방콕의 한 동물원에 있을 때, 경찰이 두 명의 여성을 체포해서 경찰차에 집어넣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여성들은 모두 버마의 불법 이민자들이었고요. 이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는데, 말하자면 태국의 일상적인 측면이자 태국 사람들이 종종 마주하는 장면이었던 것이죠. 여기서 문득 아핏차퐁은 어떤 이중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즉 그 이민자들이 힘든 현실의 불확실성을 감내하고 있더라도, 그 삶이 완전히 어둠 안에는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아핏차퐁은 이를 “어둠을 가로질러 가는, 다른 사람은 감지하기 힘든 빛”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그 버마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억압적인 환경 안의 행복한 한 순간, 쾌락과 고통, 이 질문이 바로 친애하는 당신에 대한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라고 아피차퐁은 말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아핏차퐁의 다른 영화들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유명하고 또 많이 볼 수 있는 유령이나 어둠, 밤, 잠, 꿈, 신화나 민담 같은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없고, 또 가장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물의 느낌이 없습니다. 사실 아핏차퐁이 말하길 원래 이 영화를 사이언스 픽션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고 합니다. 캐릭터가 정글로 들어가고, 레이더같은 과학 기계를 통해서 그것을 추적하는 그런 모티브로 말이죠. 그런데 촬영 전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대본을 그들에게 맞게 수정을 하고, 그들의 먹는 방식, 걷는 모습 등 삶의 디테일들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되면서 과학적인 주제보다 그들의 일상적 매너리즘에 더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중요해진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되었다는 것이죠. 아핏차퐁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람이나 동물들을 보면 편집증적으로 세세하게 필기를 해 둘 만큼 디테일에 집착한다고 얘기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룽이 민의 성기를 만지는 그런 장면들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고 언급하면서 말이죠.

아핏차퐁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 봐도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이러한 디테일이 아닐까 합니다. 인물의 표정이나 손, 걸음걸이 등을 찍는 클로즈업 샷이 이렇게 많이 들어간 작품이 있나 떠올려 봐도 쉽게 생각이 나지 않죠.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인물들의 디테일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드라마가 됩니다. 제가 오늘 토크 준비를 하면서 찾아봤던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리뷰들이 대부분은 이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들을 의미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이 영화의 미감이 환기시키는 감정에 기반한 감상이더라구요. 다 맞는 말이기는 하면서도 뭔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는데 왜냐면 제가 이 영화에서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약간은 다른 측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냐면, 이 영화는 카메라가 아무리 세밀한 것으로 다가가고 복잡한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미시적인 요소들이 어떠한 영역 안에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하려 고군분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군분투라고 표현한 것은 영화 내내 그것이 힘주어 애쓴다는 게 아니라 서사와 형식, 그리고 관람의 중요한 포인트들에서 이 시간의 연속체가 영화라는 것 안에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긴장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 풍경 이미지의 영화적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두 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로 고개를 돌려 눈을 한번 깜빡이는 룽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그 전에 지속되었던, 방금 말씀드렸던 풍경 푸티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왜 강렬하게 다가왔느냐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풍경은 내가 생생하게 실재라고 여기고 있던 내러티브에 대한 급작스러운 거리두기를 하게 만드는 기능을 했기 때입니다. 말하자면 뭔지 모를 아련함과 먹먹함으로, 감정이 고양된 상태로 이 미시적인 이야기에 몰입하여 영화가 끝나려는 찰나에 갑자기 뭔지 모를 풍경을 하나의 압도적인 이미지로 보여주죠. 이 풍경이 환기시키는 게 뭐냐면, “네가 봤던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관장하는 영역 안에 있고, 그럴듯하고 있을법한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뭐 진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같다는 거죠. 말하자면 이 풍경의 기능은 이 드라마가 하나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있었던 허구적인 무언가라는 것을 강하게 선언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영화적 공간으로서의 풍경 자기 자신을 내어 보이는 것이죠.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푸티지가 바로 이 풍경 씬이라는 것은 분명 다른 감각을 전달해줍니다. 한편으로는 이게 캐릭터의 감정적 상관물인가 하는 의심도 해 보았는데요, 왜냐면 이 풍경은 영화 중반에 룽과 민이 숲을 헤쳐 나와서 마침내 다다른 둘만의 내밀한 공간이고, 룽은 무척이나 들떠서 “이 풍경 너무 아름답다, 떠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 이곳에 데려온 민에게 “로맨틱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감정의 상관물로서 자리하기에는 40초가 넘게 이어지는 이 푸티지는 다소 길게 느껴집니다. 맞아.. 저기였지 하는 아련함에 젖다가 어느 순간 음..? 하면서 튕겨져 나와 버리는 것이죠.

이 숲은 카오야이 국립공원이란 곳으로, 방콕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002년에 있었던 씨네21과의 짧은 인터뷰를 보면 아핏차퐁은 풍경에 대한 어떤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영화는 작은 순간에 관한 영화이며, 풍경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사람은 산, 물, 태양처럼 풍경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풍경도 하나의 캐릭터다. 풍경도 연기를 한다.” 재밌는 것은 아핏차퐁이 이 영화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햇빛’을 꼽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햇빛이 생명을 위한 힘의 근원이자 동시에 파괴라고 말하죠. 영화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햇빛에 영향을 받습니다. 불법 체류자로서 타이에 살고 있는 버마인 민이 앓고 있는 살갗이 벗겨지는 원인 모를 피부병은 햇빛에 노출되면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으로 나오죠. 민에게 태양은 어디를 가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숨막히는 억압의 조건이 됩니다. 물론 그런 햇빛은 숲 속에 들어가면 평안과 치유의 힘으로 바뀌고요. 즉 영화 안에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 행동에 수행적인 보이지 비가시적인 행위자인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아핏차퐁이 두 번째로 꼽는 주인공은 숲, 정글입니다. 이 정글은 주인공들이 해방되고자 찾는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속박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영화에서 정치적인 메시지가 없음에도 정치적인 텍스트가 읽히는 데에는 이러한 설정이 배경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핏차퐁이 전하는 여담 중 하나는 이 영화와 풍경이라는 것이 어떻게 겹쳐져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잘 환기시켜줍니다. 촬영할 당시 정글이 깊어서 발전기를 가져갈 수 없었고, 완전히 자연빛에 의존해서만 촬영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빛이 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촬영팀은 한국에서의 고사처럼 돼지머리와 술을 숲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자 비로소 빛이 나 촬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촬영을 마치고 철수를 한 며칠 뒤에 그 숲에 큰 홍수가 나서 완전히 다 뒤집어졌고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냇물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을 전합니다. 다소 감상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글이라는 공간의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특성과 영화라는 공간에서 이야기가 하나의 풍경 안으로 수렴하며 일시성과 허구성이 강화되는 것은 어쩐지 맞닿아 있어 보입니다.

특히 여기서 풍경이 다른 무엇도 아닌 정글이라는 것은 중요해 보입니다. 아핏차퐁 영화에 군인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야간 보초를 서는 군인들에게 내려지는 지침 중 하나는 숲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선을 너무 한곳에 오래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렇게 되면 사물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숲이라는 공간은 이처럼 그 표면의 응시를 통해서 그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허구들을 출현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즉 로컬리티의 상징이라던가 어떤 정체성의 재현과는 거리가 먼, 사건의 공간으로의 개연성이 충만한 곳이고, 이는 한 공간의 허구적 상황을 가시화시키는 것으로서 영화적인 것의 개념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숲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공포가 그 숲이 전면화하는 허구 중 하나라면, 아핏차퐁이 한편의 영화라는 구조를 통해 전면화하는 이야기는 영화라는 숲이 환기시키는 허구 중 하나라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하나의 풍경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할 때, 여기서의 풍경은 물론 실제 태국의 지정학적 맥락들, 예컨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풍경으로서의 영화, 즉 영화적 공간 안에서 좌표 없는 이야기들을 교통시키고 그것을 허구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풍경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친애하는 당신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속되는 풍경의 이미지는 바로 정확하게 그러한 풍경의 개념으로 영화적인 공간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죠. 여기서 더욱 중요해 보이는 것은, 아핏차퐁은 어떤 하나의 허구를 ‘재현’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아핏차퐁이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세계에 포함되어 있지만 세계의 한 요소에 대한 동일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등가물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핏차퐁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지시하는게 아니라 영화적인 이야기 그 자체로만 작동합니다. 그것이 아핏차퐁 영화가 성립하는 중요한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혹자는, 특히 열대병의 경우 1부에서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사랑 얘기와 2부의 정글 이야기가 서로 말도 안되는 거리로 떨어져 있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핏차퐁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야기들이 구조화되는 아주 합당한 영화적 공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축을 전공했던 경험이 영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핏차퐁은 그 두 개가 자신에게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며 상당히 벤야민적인 생각을 내보입니다. 즉 건축이든 영화든 개념적으로는 A에서 B까지 이동하는 시간에 관한 것이고, 그 매체는 분산적인 여정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영화적 공간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지속 안에서 서로 관계없는 이야기들이 널뛰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아핏차퐁의 영화가 도시와 숲의 이분법적 구도를 만든다는 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숲이라는 공간은 도시나 삶의 영역과 대립하는 어떤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수렴되고, 중첩되고, 교통되는 서사적 공간인 것이겠죠. 바로 열대병에서 변신 가능하고 영혼계와 인간계를 오가는 호랑이가 그 공간의 서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표현은, 정확하게는 바로 이러한 서사의 공간이 상정되기 때문에 판단 가능한 명제일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당신이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리뷰를 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오히려 마네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회화와 더 비슷한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토크를 준비하면서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한 박사 후 연구생이 2011년에 쓴 “경계지역으로서의 정글”이라는 논문이 있길래 읽어봤는데, 논문의 논지나 질은 형편없다고 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1970년대 서구의 영화제에서 선보여지던 비치트 코나부이, 처드 송스리 같은 태국 감독 영화에서의 자연 풍경과, 아핏차퐁이 보여주는 정글은 상당히 비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태국 영화에서 자연은 도시공간과 대비되는 곳으로서 ‘Thainess’, 즉 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위한 재현이라는 것이죠. 이런 재현의 풍경을 저자는 유토피아 혹은 파라다이스로 이상화된 시골, 그리고 스스로 이국적인 것이 되는 풍경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영화의 풍경에 대해 “내가 처음 살아보는 정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았다”라는 아핏차퐁의 말도 인용하면서 말이죠. 말하자면 아핏차퐁의 정글은 로컬리티를 위한 서사적 공간의 구성이지 로컬리티의 재현, 특히 아름다움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때문에 아핏차퐁의 풍경은 항상 영화 안에서 모종의 인물, 이야기와 관련이 되어 있죠,

다른 한편으로 좀 더 나가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적인 공간을 선언하는 아핏차퐁의 방식이 참으로 신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선하다는 게 클리셰인 것은 알지만 정말로 산뜻하기 때문인데요. 그 외적 구조를 끊임없이 B급 영화나 호러 영화, 통속 드라마, 아니면 정말로 삶의 외형 같은, 뭐랄까 좀 더 일상의 영역에 가까운 외형을 본떠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장르물에서 가능한 영화적 공간이라는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측면은 한편으로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부터 시작해 동시대의 포스트 개념미술가들의 사유중 하나인 전유와 샘플링, 카모플라주와 유통*(meme)과 상당히 밀접해보입니다. 이들은 예술이 아닌 척 하는 것을 통해 혹은 특정한 형식만이 접근 가능한 길을 탈취함을 통해 급진적인 예술적 효과를 생성하는 전략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죠. 물론 아핏차퐁에게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부가적인 것 같습니다. 아핏차퐁은 시카고예술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구조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곳에서도 구조주의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태국에 돌아와서는 “구조주의 영화는 태국에는 맞지 않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특정한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영화적 형식과 구조, 그리고 그것의 수용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와 그것의 풍경으로서의 영화적 공간에 대한 사유는 분명 여기서 예리하게 벼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아핏차퐁의 작품은 구조영화의 유산을 또한 한껏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뭐냐면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물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자각시켜주는 것이죠. 앞서 저는 친애하는 당신의 마지막 풍경 씬이 환기시키는 것은, 공들여 만든 이야기가 결국 영화적 공간 안에 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드라마에서 우리를 서사적 공간으로 구출시켜주는 이미지라면, 이와 비슷한 경험은 영화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오프닝 시퀀스이죠. 세 남녀의 복잡한 감정과 숨은 이야기들에 집중하다가 40여분 쯤 갑자기 크레딧이 올라가고 음악이 흘러 나옵니다. 이게 관습적인 영화의 규칙을 깨는 것이라고만 말하는 너무 나이브한 얘기 같고, 이 오프닝 시퀀스가 환기시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네가 봣던 이야기는 다 영화야 라고 능청스레 손짓하는 것 같죠. 또 음악이 상당히 중요해보이는데, 아핏차퐁은 매 번의 영화에서 무드에 상관없이 능청스레 chill하다고 해야할까요 그런 태국 대중 음악을 집어 넣습니다. 유머같달까 확 깨는 거죠. 열대병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군인들이 시체를 수습하고 사라지고 난 후에, 벌거벗은 남자가 지나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위로 너무 감미로운 목소리가 발라드를 부르는 식인거죠. 아핏차퐁은 음악이 자신에게 있어서 “또 다른 시간”이라고 얘길 합니다. 영화적 공간 안에 수많은 시간이 중첩되는 와중 그런 시간을 끌어 올려 들려 주는거죠. 그리고 그 효과는 관객에게 바로 그 영화적 공간을 환기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요. 또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 쪽에 등장하는 민의 외화면 내레이션과 드로잉이에요. 말을 잘 못하는 민의 이야기를 보충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갑자기 툭 튀어 오르는 흰색 드로잉은 영화의 평면성을 극도로 강화해서 화면 안의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합니다. 오프닝 시퀀스의 크레딧처럼 말이죠.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아핏차퐁이 드로잉에 대해 “그것은 순수함 또는 동시에 어리석음으로 보일 것이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드로잉의 개념이다”라고 말한 것도 흥미로운 언급입니다. 여하튼 이런 구조주의적 측면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런난 것을 꼽으라면 정오의 낯선 물체입니다. 거기서는 촬영을 멈추고 다음 촬영을 위해 세팅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심지어 아핏차퐁 자신이 직접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아핏차퐁은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의 환영성, 허구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의 설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단편 영상에서 스크린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아핏차퐁의 영화적 공간이라는 것이 영화 한편의 서사를 넘어선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영화 안에서의 이야기는 다른 영화 안에서 뒤틀려 다시 보여지고, 한 영화의 이미지는 그의 전시 설치 작품에서 다시 보여집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적 공간은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적 결과물들의 성좌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어, 친애하는 당신의 첫 장면, 아핏차퐁의 부모님이 실제 운영하던 병원에서 찍은 장면을 떠올려 보죠. 거기에서 한 노인이 딸과 함께 보청기를 들고 상담을 하러 옵니다. 민과 온은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죠. 이들과 대화하는 의사를 보고 있으면 내가 왜 여기서 민과 온이 아니라 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어야하지?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이 장면은 아핏차퐁의 첫 영화인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똑같이 등장합니다. 배우는 다르지만 똑같이 보청기를 처방받는 노인과 딸이 등장하고 의사가 나옵니다. 친애하는 당신의 이 장면은 보청기가 고장났다고 다시 찾아오는 장면이니 어떻게 보면 정오의 낯선 물체의 이후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죠. 다른 한편 열대병에서 오두막에 앉아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통과 켕에게 한 여인이 들려주는 호수에서 돌을 주워오는 두 농부의 이야기는 징후와 세기에서 또 들려집니다. 열대병에서는 금으로 변했던 돌이 모두 두꺼비로 변하는 결말이었다면, 징후와 세기에서는 도둑들에 맞아 죽는 설정으로 바뀌죠. 전시 설치 작업인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엉클 분미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죠. 이러한 방식으로, 아핏차퐁의 영화는 개념적으로 영화적 공간을 만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영화적 ‘공간’을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서사 생성의 구조 때문에 그의 수많은 작품이 미술관에서도 적절하게 전시가 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처럼 영화적 공간이 하나의 풍경이 될 때, 즉 서로 관련 없는 요소들이 유동적이고 열려 있고 불확정적이고 그럼에도 상관적으로 교통될 때, 거기에는 분명 관객이라고 하는 주체가 틈입할 공간이 생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공간은 원래 있었던 것이므로 강화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핏차퐁 작업의 미학적 특징이 이러한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이를 시작점으로 삼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풍경이라는 개념과 아핏차퐁의 영화적인 공간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좀 일반론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제가 참여하고 있는 오큘로라고 하는 영상예술비평지에서 다음달에 출간할 신간의 주제가 ‘풍경’입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은 온통 풍경 생각만 살아서 좀 식은땀이 나는데, 이것을 준비하면서 제 나름대로 영화에서 풍경이 어떻게 이해되고 다루어지는지를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름다운 배경”으로서의 풍경은 제외되었고요. 하나는 제임스 베닝이나 앤디 워홀, 키아로스타미처럼 영화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풍경이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대부분 풍경을 엄청나게 오랜 지속으로 보여주죠. 아다치 마사오나 그를 뒤따르는 에릭 보들레르는 풍경을 사회적 현실의 텍스트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고, 이와 비슷한 관점이지만 패트릭 킬러 같은 감독은 풍경에 목소리를 덧입힘으로써 풍경과 관계 맺는 실제 지정학정 장소를 재규정하죠. 물론 또 다른 분류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지금의 역량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분류는 아핏차퐁과 같은 이야기를 위한 서사적 공간으로서의 풍경입니다. 생각해봤던 작품은 매드맥스 정도 인 것 같은데, 사실 이러한 사유를 읽을 수 있었던 건 영화보다는 미술 영상 작품에서 좀 더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근에 생긴 고민이기도 합니다.

최근 아핏차퐁을 둘러싼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태국 정부의 검열문제이겠죠.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검열의 대상이었지만, 2014년 군사쿠데타 이후의 상황은 더 경직된 것 같습니다. 아핏차퐁은 찬란함의 무덤 이후 더 이상 자국에서 장편 영화를 찍지도 개봉하지도 않겠다고 말하고, 현재는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영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싱가폴 대학의 미술사가 데이비드 테의 흥미로운 견해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자국 내에서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주의의 역사에 대항하는 동시대 동남아미술가들의 예술적 실천이 국제 예술의 장면에 진입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던 아트가 흩어지고 동시대 국제적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익한 모델은 탈-국가적(pre-national)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이와 같은 역사적 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죠. 데이비드 테는 서구 모더니티와 자본이 글로벌라이즈를 요구할 때 태국은 불편한 저항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데이비드 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바로 장소, 거리, 그리고 유동성에 대한 태국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상징이나 재현이 아닌 내러티브라는 도구를 통해, 아핏차퐁의 작업은 포스트 1989 체제에서 적절하게 비평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