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역사를 위한 아토피아: 우로보로스의 풍경

OKULO 007: 풍경(2018년 10월 10일 발행)에 수록.

 

우리들의 술집과 대도시의 거리, 사무실과 가구가 있는 방, 정거장과 공장들은 우리를 절망적으로 가두어 놓은 듯이 보였다. 그러던 것이 영화가 등장하여 이러한 감옥의 세계를 10분의 1초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함으로써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감옥 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

 

풍경, 역사, 장소

제니 올슨이 만든 두 장편 영화 조이 오브 라이프(The Joy of Life)(2005)와 로얄 로드(The Royal Road)(2015)는 상영시간 내내 샌프란시스코의 도시 풍경을 보여주며 연기자의 목소리를 빌린 보이스오버를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 이야기는 샌프란시스코라는 장소에 녹아 있는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젠더 정체성, 영화 등 광범위한 토픽에 걸쳐 유려하게 펼쳐지는 올슨의 사색으로 채워진다. 화면 안의 풍경 시퀀스들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과는 강한 결속력을 가지지 못한 채 동떨어져 무심히 흐르다가도, 문득 화자의 기억과 감정, 경험과 사유 등 사적인 영토를 매개하는 상관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들을 본다는 것은 관조의 대상인 풍경의 이미지들과 영화적 쓰기의 주체 사이에서 진동하는 끊임없이 상호적인 힘의 발현을 지각하는 일이 된다.

한편 제니 올슨은 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영화와 비슷한 형식의 풍경 영화들을 엄선하여 소개하기도 했는데,1 여기에는 패트릭 킬러의 로빈슨 3부작[런던(London)(1994), 로빈슨 인 스페이스(Robinson in Space)(1997), 로빈슨 인 루인스(Robinson in Ruins)(2010)] 또한 포함되어 있다. 영국 곳곳에서 촬영한 도시와 자연의 풍경에 더해 연기자의 보이스오버는 로빈슨이라는 허구적 인물의 이야기와 함께 런던, 나아가 영국이라는 지정학적 장소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방대한 분석과 비판을 수행한다. 올슨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킬러의 영화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풍경의 이미지들과는 그리 손쉽게 결합되지 못하고 서로 간의 알력 싸움, 즉 풍경의 이미지에 압도되다가도 내레이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긴장이 유지된다. 하지만 로빈슨 3부작의 화자는 올슨의 것과는 달리 극중 캐릭터가 설정되어 있어 좀 더 허구적인 속성이 강화되고, 때문에 여기서의 풍경은 사적인 경험의 상관물이라기보다는 제3의 세계에 놓인 사태의 흔적 혹은 잠재적 사건의 장소로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당연해 보여서 헛헛하기까지 한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이 영화들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또렷하게 발화하면서도, 기능적으로는 그 말이 다루는 장소에 대한 지표 역할만을 할 뿐인 풍경의 이미지를 이토록 정성 들여 보여주는 것일까? 로빈슨 인 루인스의 화자인 로빈슨은 이렇게 말한다. “로빈슨은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약 풍경을 충분히 살펴본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역사적 사건의 기본적인 분자(molecular)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로빈슨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래를 보기를 바랐다.” 킬러에게 있어서 풍경은 세계의 문제가 산재한, 혹은 세계의 문제를 읽어내기 위한 텍스트이다.2 마크 피셔가 평가했듯, 킬러의 카메라는 풍경을 통해 풍경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3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적지 않은 의구심이 뒤따른다.

올슨과 킬러의 작품에서 보이스오버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저 유명한 회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의 화면 한가운데 그려진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안개 자욱한 세계와 맞서 있는 것이자 그것을 내려다보는 무언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남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단지 그와 풍경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음만을 확인할 뿐이다. 풍경을 읽음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세계의 규칙과 이데올로기를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언어적인 체계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자장 아래 놓여있다. 풍경 이미지와 보이스오버라는 이미지-언어의 이분법적 구조는 객체로서의 세계를 읽어내고 재구성하는 초월적인 영화적 주체가 상정됨으로써 가능한 형식일 것이다. 트린 티 민하의 베트남 잊기(Forgetting Vietnam)(2012)나 데보라 스트래트먼의 일리노이 우화(The Illinois Parables)(2016) 역시 이러한 믿음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각각은 전후 현대 베트남과 미국의 일리노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역사적으로 다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며, 이를 위해 풍경을 적극적으로 껴안는다. 하지만 올슨과 킬러가 풍경을 별도의 편집 없이 보여주고 보이스오버로 내레이션을 삽입했다면, 베트남 잊기는 하나의 영상 위에 다른 푸티지 영상을 중첩시키거나 클로즈업과 같은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내레이션 대신 주로 구(phrase)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삽입함으로써 발화한다. 반면 일리노이 우화는 직접 촬영한 풍경 외에도 여러 기록 영상들의 푸티지를 사용한다. 또한 과거의 유명한 저작을 낭독하거나 기억을 회고하는 인터뷰, 녹음 자료 등 다양한 목소리를 이용하고, 표지판이나 신문기사 등 텍스트 자체를 삽입하는 등 보다 다채로운 시청각적 전략을 구사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작품들에 매혹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대의 치열한 역사가로서의 예술가이자 활동가들의 진지한 사색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매혹과 별개로 생겨나는 의구심이란 바로 이와 같은 영화적 구조, 세계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역사 서술의 주체가 가능한가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역사로서의 작품이 미학적으로 얼마나 유효하며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놓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작품의 제목이 명확하게 선언하듯 한 장소의 풍경을 언어적 진술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체계에 배치함으로써 그 장소에 대한 대안적 역사를 구성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역사는 아카이브에서 비롯되는 역사이고, 의미론적으로 타당한 구조로 조직된다. 여기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영화적 공간으로서의 풍경이 자율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역사가 사실 혹은 정보들에 의해 구성될 때, 즉 언어적으로 구성될 때 그 공간은 결국 특정한 정체성으로 환원되며, 영화의 주체가 추동하는 역사라는 시간성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풍경은 그것의 관계적 기능은 제거된 채 지표성만이 강화되어 역사가 상정하는 장소로 닫힌다. 이 서사는 언어로 진술되는 연속체의 역사, 시간의 축적을 전제한 역사이다. 이 역사의 모델은 재현의 체계에 속해 있는 것이며, 미학적 충격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의 방법론은 아니다. 한 장소의 시간성이 고유화되면 고유화될수록,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가 서술될수록, 그 장소는 외부와 더욱더 단절되고 고립된다.

풍경을 풍경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거리(distance)’일 것이다. 인간의 지각 범위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다가오는 세계를 위한 거리 말이다. 그리하여 풍경은 한 개인이 속해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개인을 초과하는 바깥과 맞닿아 있는 경계에 놓인 매개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거리에서 지각되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형상이라기보다는 형상들 간의 끊임없는 관계이고, 풍경은 바로 그 지각 범위 안의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유동적인 상호성의 현상, 즉 공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4 이것이 풍경의 아우라라면, 풍경의 이미지는 그것이 속해 있던 일회적인 시간과 장소의 상실, 아우라의 상실을 수반한다. 풍경의 이미지가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 침묵의 표면이라는 사실은 너무 자명해서 의심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사를 위해 풍경으로 향한 카메라의 임무는 그것을 꿰뚫어 보기보다는 어떻게 오디오비주얼의 체계 안에서 재편할 것인지의 문제로 이양된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오디오비주얼이라고 하는 체계가 풍경이 구성되는 논리와 유사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풍경을 담는 매체가 아니라 풍경의 방법론을 차용한 인공적인 모델이고, 언어의 의미론을 배반하는 감각의 체계라는 가정에 따른다. 풍경의 이미지는 ‘영화적 풍경’의 한 상관요소로서 관계적 행위자라는 속성이 극대화된 이미지이고, 오로지 순수한 구문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파악이 가능하다. 행위자들 간의 교섭을 통해 우리를 규정하는 조건들, 바깥의 허구가 환기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역사로서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5 풍경의 진정한 영화적 기능은 특정한 장소에 집적된 사실적 정보들의 배열을 통한 단일한 내러티브 혹은 정체성으로의 표상을 비껴가고, 이를 통한 관습적인 재현 수용의 절차를 지연시킨다는 데 있다.

풍경 그 자체가 세계의 구성물들 사이, 세계와 그에 대한 지각 사이의 끊임없는 유동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듯, 영화적 경험이 안내하는 역사 또한 총체적인 시청각적 경험을 통한 비선형적 서사로 구성되며, 그 역사가 관여하는 장소는 언제나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잠재적 가능성의 상태로 남는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역사를 환기하는 영화적 풍경의 경험은 장소(topos) 안의 장소 없음(atopos)을, 역사의 아토피아를 찾아 배회하는 것과 같다. 언어를 초과하는 역사를 위한 재현은 영화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야만 가능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영화라는 체계가 그것이 관여된 사회의 경험을 재조정하는 역량을 지니게 된다.6 말하자면 역사의 개념은 공간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며 그 재현의 방식은 역사의 모델로 제안될 수 있다. 관계적으로 형성되는 역사의 모델은 다급히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다. 장소의 지정학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들, 예컨대 물류, 전쟁, 난민, 기후 변화, 환경 오염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라.

장소 없음의 풍경

지난해 8월, 온라인 영상 상영 플랫폼인 브이드롬(www.vdrome.org)은 한 달 간의 여름휴가를 공지하며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의 하이 눈(High Noon)(2014)을 스트리밍 했다. 아론 M. 올슨(Aaron M. Olson)의 음악 프로젝트 L.A.테이크다운(L.A.Takedown)이 제작한 복고적인 신스팝 사운드트랙은 단조롭게 반복되었고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채도 높은 풍경 이미지와 꽤 합이 잘 맞았다.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았던 이 영상은,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기에 제법 쓸모가 있었다. 휴가를 떠나면서까지 작품을 소개하는 재치 있는 큐레이팅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작품은 오디오비주얼이라는 체계를 이용해 공간을 재생산하는 것에 대한, 혹은 ‘장소’ 그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알샤리프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이 눈은 서로 다른 장소(캘리포니아 남부와 일본 오노미치)에서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풍경 푸티지들을 30여 분 동안 한 화면에 계속해서 중첩시킨다. 몇 개의 똑같은 푸티지만이 반복해서 사용되지만, 아래위가 뒤집어진다거나 거꾸로 재생되면서 다시 등장하고 시선을 움직이는 카메라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뒤이어지는 푸티지를 맞붙이기 때문에 명료한 상(象)보다는 유동성이 강하게 지각된다. 그리하여 이 풍경의 중첩은 서로 다른 형상의 배치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아래위와 전후가 뒤바뀌는 서로 다른 운동성의 교차로 느껴지는데, 오로지 영상의 기술적 조작을 통해 구조화되는 움직임은 풍경을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무한히 이동하는 것과 같은 자기충족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그리하여 특정한 장소의 풍경은 여타의 맥락에 정주하거나 무언가를 표상하지도, 어떠한 의미로 쉽사리 환원되지 않고 미끄러지며 ‘장소 없음’의 시공간 속에서 맴돌 뿐이다.

장소 없음이라는 것은 알샤리프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알샤리프는 종종 디아스포라 작가로 소개되는데, 부모님은 팔레스타인인이지만 쿠웨이트에서 태어났고 이후 프랑스, 가자 지구 등지에서 성장했으며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학자 하미드 나피시는 이미 ‘액센티드 시네마(accented cinema)’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권에 사는 제3세계 예술가의 영화에서 추방 혹은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어떻게 공통된 양식으로 발현되는지를 밝히고자 시도한 바 있다.7 알샤리프의 작업에 대해 이와 같은 분류학적인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더라도, 타자화된 정체성을 전제해야만 하는 양식적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영화적 기능에 관심을 두는 것이 더 유익해 보인다. 왜냐하면 알샤리프의 작업에서 양식적 특성(푸티지의 중첩과 거꾸로 재생하기, 여러 언어와 텍스트를 사용하기 등)은 세계가 운용되는 구조와 그 안에서 자리 잡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기 위한 적절한 재현의 방식 자체를 탐구하는 과정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알샤리프는 한 인터뷰에서 하이 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음에 대한 감각과 시간”이라는 토픽이 팔레스타인 작가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아가 앨런 왓츠(Allan Watts)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성이란 ‘당신이 보는 위치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는 달라진다’는 사실과 우리가 아래위가 뒤집혀 서로 맞닿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8

작가가 스스로도 반복적으로 언급하듯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재현이다. 그는 재현이 실제 세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에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조건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과 이미지로 고립된”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라는 장소 혹은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다.9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을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오디오비주얼의 체계를 이용해 만드는 불확실함과 혼란스러움은 선형적인 시간,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각, 그리고 사실과 역사가 주조되는 관습적인 시각성과 서사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감각을 재고하고, 그리하여 역사라는 허구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재조정하고자 한다. 이 역사는 사실의 집적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형성되지 않으며 명료하게 관찰되거나 만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는 풍경의 중첩과 시간의 뒤엉킴이 구조화되면서 발생하는, 장소 없음에 놓임으로써 발생하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풍경을 가로지르는 것들

알샤리프는 이미지라는 것이 단지 표면일 뿐이며, 그 너머나 이면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가 속한 세계의 조건을 재생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오디오비주얼의 언어를 배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의 첫 장편 작업인 우로보로스(Ouroboros)(2017)는 바로 그러한 생각이 잘 반영된 것으로, 이미지의 표면을 겹치고 뒤집고 꿰어 냄으로써 서로 동떨어진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그 사이를 널뛰고자 한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일컫는 우로보로스는 알샤리프에게 있어 망각과 함께 무한히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이자 그 폭력은 편재해 있는 것임을 상징한다.

알샤리프가 이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명확하다. 바로 가자 지구라고 하는 상황이다. 그는 가자에 대한 다른 보여주기를 시도하고, 그것을 표면적인 이미지의 소비로부터 해방시켜 다른 장소들의 시공간과 연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시간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장소는 반복해서 상실된다”라는 냇 뮐러의 묘사는 정확하다.10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마도 가자라고 하는 상황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가 될 것이다. 우로보로스는 가자와 로스앤젤레스의 한 마을,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 이탈리아의 마테라,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성을 오간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안에서 그 풍경이 어떤 시간에 속해 있는지, 어떤 장소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단지 영화라고 하는 공간 안에 배치되어 서로 간의 상호성을 가질 뿐이다.11 한 풍경 안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고, 이런저런 장치를 통해 풍경은 이어지고, 겹쳐지고, 반복된다. 마테라의 풍경 속에 있던 주인공이 로스앤젤레스의 한 마을에 등장했을 때, 담벼락에 걸려 있는 마테라의 풍경 현수막을 가만히 보다가 지나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로보로스의 첫 장면은 드론으로 촬영한 해안가의 풍경이다. 수직으로 내려다본 해안에는 파도가 밀려온다. 아니, 밀려나간다고 표현해야 정확할 텐데, 영상은 이 풍경을 거꾸로 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드론은 천천히 해안 도시 안쪽으로 이동하며 도로 위에서 움직이는 차들,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의 운동장에 모여 움직이는 사람들과 같은 도시의 미시적인 움직임들을 마치 감시자와 같은 시선으로 포획하고, 드문드문 부서지고 타버린 건물들을 무심히 스쳐 보여준다. 이 시퀀스 내내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허디거디(hurdy-gurdy)의 사운드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강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갑자기 전환되는 장면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경을 천천히 조망한다. 갑자기 왜 다른 도시를 보여줄까 싶지만, 문득 한 건물에 적혀 있는 ‘Bank of Palestine’이라는 문구가 보이고 이곳이 시점만 바꿔 촬영된 가자 지구임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기억하는 가자의 이미지는 재난과 폭력,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한 도시이지만, 중년의 아랍 여인이 햇살 가득한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간 드넓은 가정집은 삶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유한 생활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모든 방을 하나하나 들어가 침구류며 책꽂이, 장식품 등을 손으로 건드리는 여인의 뒷모습을 따라가는데, 이 롱테이크 시퀀스는 해안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거꾸로 재생된다. 거꾸로 재생되는 시퀀스는 사막에서 텐트를 짓는(해체하는) 네 남녀의 모습이나 마테라의 집 안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먹는 주인공의 모습 등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는 서사가 선형적 시간의 연속체로서 구조화되는 것을 거부하며 한 단위의 공간이 다른 단위와 임의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서로 다른 시공간처럼 보이는 이미지의 장소들 사이를 가로질러 반복해서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과 그와 같은 기능을 하는 사운드이다. 이들은 공간의 이미지들을 관통하며 그것들의 배치를 조정하는 일종의 매개변수이며, 풍경은 움직임을 매개하는 구조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존재를 통해 유동적인 서사를 위한 영화적 공간이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장소의 풍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 남자는 그러나 특정한 캐릭터를 부여받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고, 사연도 없다. 다만 풍경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풍경을 교통시키는 하나의 형상으로서, 움직임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알샤리프는 “이 다양한 현장(site)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상징적인 이야기, 그 현장을 여행할 사람, 그리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내러티브의 외양이 필요했다”고 말한다.12 앞서 언급했던 허디거디의 사운드는 주인공 남자가 한 여자와 고풍스런 성 안에서 소리 없이 책을 읽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드론의 눈이 감시자의 시선으로 가자지구를 훑어 내려갈 때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던 사운드는 사랑하는 듯한 두 남녀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도 틈입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천천히 시선을 거실의 다른 쪽으로 옮겨 가자, 그곳에는 허디거디를 연주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외화면을 환기시키던 소리는 이제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실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드론으로 촬영한 가자의 풍경이 중첩되고, 이 두 화면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공존한다. 그러나 두 남녀는 마치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태연히 행동하는데, 잠자리에 들기 위해 거실을 나서며 불을 끄자 허디거디의 소리도 함께 중단된다.

장면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봉합되지 못하게끔 기묘한 방식으로 맞붙여 그 사이의 허구적인 틈을 벌려 놓는 편집은 이 영화의 다른 흥미로운 요소이다. 주인공 남자와 사운드가 화면 안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의 표면을 교통시킨다면,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불연속적인 시퀀스는 영화적 풍경(공간의 상호성에 대한 감각)을 강화시키며 영화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허구적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영화의 초반, 한 집을 두고 두 개의 이야기가 배치된다. 빨간색의 상의를 입고 등장한 주인공이 모퉁이를 돌아 집 앞에 다다른다. 뒤이어 그 집의 거실인 듯 두 남녀가 식탁에 앉아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시 집 밖의 주인공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식사 도중 노크 소리를 듣고 식사를 하던 남자가 문을 열어주러 가고, 문을 통해 들어온 주인공의 앞에는 음식을 먹는 두 남녀가 아닌 종이를 손에 쥐고 모여 앉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러 갔던 남자가 그 속에 태연히 앉아 있음을 우리는 알아챌 수 있다. 잠시 후 주인공은 대본을 읽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한 방의 문 앞으로 다가가 살며시 열어 본다. 곧이어 젊은 여성이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은 지도를 보다가 문이 열려있는 듯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고개를 빼고 문을 닫는다. 우리는 주인공과 그 여성이 같은 공간에 놓여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시퀀스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장면들을 자연스러운 듯 연결시키며 오히려 그 사이에 놓여있을 상상적 공간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완전히 중첩될 수 있는 그런 모호함의 공간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스팔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은 처음에는 만화경(kaleidoscope)의 이미지처럼 만들어져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이내 지상에서 멀어지는 드론으로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스팔트 위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과 함께 ‘HEL’이라고 하는 글자가 그려져 있다. 이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지옥(Hell)일까? 안녕(Hello)일까? 아니면 도와달라는 신호(Help)일까? 우로보로스는 이 미완의 단어처럼 언어적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단지 표면들의 구조로만 건설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장소는 없고 공간적 경험만이 있을 뿐이며, 역사적 서사는 없고 역사를 위한 방법만 있을 뿐이다. 알샤리프는 “재현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곧장 알게 되는 것보다는 당신이 있는 장소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의 조건을, 내가 관여하는 역사를 어떻게 지각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체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가능한 방식들을 점쳐보며 모델을 세워보는 모의실험에 가까울 것이다.

지리학에서 지층학으로

사진작가이자 지리학자인 트레버 페글런은 우주 밖을 보는데 쓰이는 강력한 장비를 이용해 수십 마일 밖에서 소위 ‘블랙 사이트(black site)’라고 불리는 군사 시설을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험적 지리학: 문화적 생산에서 공간의 생산으로(Experimental Geography: From Cultural Production to the Production of Space)라는 글에서, 현대 지리학의 질문은 그것이 무엇(what)이냐가 아니라 어떻게(how)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그것이 되는가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지리학자들은 공간의 생산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그 연구를 통해 공간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실험적 지리학이란 바로 이와 같은 “자기반영적인 방식으로 공간의 생산에 참여하는 실천, 문화적 생산과 공간의 생산이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문화 생산과 지적 생산이 공간적 실천임을 인식하는 실천”을 일컫는다.13

그러나 최근 인류세(anthropocene)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시각 예술에서 또한 인류세라는 주제를 상기시키는 이미지를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향 중 하나는 아마도 단연코 지층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막대한 시간이 켜켜이 쌓인 대상이고, 알 수 없는 자연의 힘이 드러난 형상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범주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사진적 재현으로는 이에 대해 사유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여겨진다.14 우리에게 필요한 시각성은 이제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이양되는 것일까?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기우는, 이것이 과연 공간적인 사유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표면이 아니라 끝도 없이 펼쳐진 깊이의 퇴적층으로 침잠하여 유물을 찾아 헤매는 탐사선이나, 세계 자체를 조망하는 전지적인 눈을 통해서 말이다. 바로 그러한 이미지 앞에 선 우리는 과연 어떠한 주체가 될 것인가? 역사란 축적된 시간을 해체하거나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표면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과연 풍경의 소멸은 무엇을 뜻할 것인가?


 


  1. Jenni Olson, “Landscape Cinema Starter Kit.” link 

  2. 킬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대처 시대의 초반인 1981년부터 풍경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국과 그 밖의 나라들에서 초현실주의의 전통을 경험한 후였기에, 일상의 리얼리티를 급진적으로 변형시키는 촬영을 추구했다. (…) 최근에 나는 키티 하우저(Kitty Hauser)가 O.G.S. 크로포드의 사진에 대해 쓴 것을 읽게 되었다. ‘신즉물주의 사진작가들처럼 그는 명료함을 추구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흐릿함이나 모호함이 없는 극명한 대조를 좋아했다. 그의 초점은 자신 앞에 있는 사물이나 장면에 놓여있었고 이것들을 가능한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 이러한 사진들에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는데 그 세계는 그 강렬함 안에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풍경 사진이 종종 유토피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청, 즉 세계에 대한 비판과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동기 부여되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이 언급은 AHRC(Art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의 풍경과 환경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2007년부터 3년간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인 ‘풍경의 미래와 무빙 이미지(The Future of Landscape and the Moving Image)’ 웹사이트에 게시된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link 

  3. Mark Fisher, “English Pastoral: Robinson in Ruins.” link 

  4. 여기서 공간(space)와 장소(place)에 대한 개념적인 구분은 지리학자 도린 매시에 기댄다. 도린 매시는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장소 개념이 위계를 생성하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이며,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와 교차로 규정되는 특수한 결과물로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공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함을 역설해왔다. 매시는 공간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첫째, 우리는 공간을 상호관계의 산물로 인식한다. 전지구적인 곳에서 아주 작은 장소에 이르기까지 공간은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된다. 둘째, 우리는 공간을 다수의 감정에 기초한 다중성(multiplicity)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이해한다. 즉 공간은 독특한 궤적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으로 이해되며, 이질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이다. (…) 다중성과 공간은 상호구성적 관계로 인식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공간을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공간은 상호관계의 결과이며, 관계란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물질적 실천에 착근되는 것이며, 항상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공간이란 완성된 것도 아니며, 닫힌 것도 아니다.” 도린 매시 지음, 박경환, 이영민, 이용균 옮김, 공간을 위하여, 심산, 2016, 35~36쪽. 

  5.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풍경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정동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풍경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지속될 때 관객의 감각적 경험이 극대화되고 현존성이 부각되는 것은 더 이상 시각적 장 안에서 관여시킬 대상이 없어졌을 때 오는 티핑 포인트다. 

  6.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이 풍경 이미지와 오디오비주얼 체계가 맺는 항시적으로 유효한 도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단지 방법론일 뿐 그것의 미학적 충격을 언제나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7. Hamid Naficy, An Accented Cinema: Exilic and Diasporic Filmmaking (Prinstone: Prinstone University Press, 2001). 

  8. “Q&A with Basma Alsharif.” link 

  9. “기억 속 사실은 희미해지고 다른 방식들, 우리가 보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그 기억은 강하게 귀환한다. 전쟁통에 살았던 기억이 옅어져 갈 때 내가 전쟁의 이미지, 시리아 전쟁의 이미지를 본다면 나는 (그것을 통해) 기억할 것이다. 내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이미지가 대체하는 것이다. 다른 매체를 통해 나에게 기입된 경험에 대한 주관적 이해인 것이다.”
    Justin Smith, “Uroboros and the Cycle of Violence: An Interview with Basma Alsharif.” link 

  10. Nat Muller, “Dislocating Time and Place: Basma Alsharif’s Ouroboros”, Nang 4 : In & Out, 2018, p.65. 

  11. 정체성을 지우고 이미지의 표면을 통해 장소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에는 알샤리츠의 윤리적 입장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화할 현장을 선택할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풍경과 사람을 착취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사용을 위해, 생각을 제안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대신하기 위해 장소의 이미지를 만든다. (…) 영화 제작이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분야인 것처럼,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정말로 식민주의 탐험가의 모험을 그대로 비춘다. 이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Gustavo Beck, “An Endless Cycle: Basma Alsharif Discusses Ouroboros.” link  

  12. Gustavo Beck, 앞의 글.  

  13. Travor Paglen, “Experimental Geography: From Cultural Production to the Production of Space.“ link 

  14. T.J. Demos, Against the Anthropocene: Visual Culture and Environment Today, Sternberg Press, 2017, pp.12~13.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
바스마 알샤리프, 우로보로스(2017)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