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그림자화법

김뉘연 시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문학과지성사, 2025)에 수록.


여름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생기면, 나는 아주 조금의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여, 겨울의 길고 두터운 어둠에 묻혀 있길 좋아하던 몸을 이른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몸으로 길들이기 시작한다. 새소리의 아름다움을 듣기 위해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건너 건너에는 꽤 크고 유명한 성당이 있고, 그 성당은 다양한 풀과 나무로 잘 꾸며놓은 공원을 가지고 있다. 수목이 다양해서인지 그곳에 머물거나 그곳을 오가는 새들의 종류도 무척 많은 것 같다. 호사스럽게도 새들의 여러 목소리가 나의 집까지 전해진다. 나물이나 과일에 제철이 있는 것처럼, 새들의 소리도 특별히 풍부해지는 때가 있다. 여름의 새벽, 조금 더 정확히는 해가 뜨기 직전부터 해가 뜨고 난 후 30분 정도까지다. 아직 어둑어둑할 때 시작하는 새소리는 완연히 밝아지면서 천천히 사그라든다. 누워서 듣다가 다시 잠들 때도 있고, 거실에 가만히 앉아서 듣다가 일상을 시작하기도 한다. 종종 옷을 갈아입고 산책을 나가 공원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때 밖으로 나가면 그때만의 독특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보인다. 나는 이제껏 그 부산스러움을 단지 생물들이 잠에서 깨 하루 생활을 시작하면서 보여주는 모습 정도로 생각해왔는데, 얼마 전 여명 속에서 미루나무잎이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내가 유심히 보게 된 건 그림자였다. 해가 뜨면서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고, 그림자가 움직임과 얽히면서 나뭇잎의 흔들림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세계가 수도 없이 잘게 쪼개지는 것 같은 느낌이 생겼다. 나무는 두 배가 된 것 같았다. 하나가 여럿이 되고 나뭇잎이 나뭇잎이 아니게 되고 나무가 나무가 아니게 되고 끊임없는 흔들림 속에서. 그때 나는 불현듯 그림자가 하나의 화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자화법. 그런데 화법으로서의 그림자는 뭘까?



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앉아 있다.
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서 있다.
그림자는 그림에 입체감을 안긴다.
그것이 그림자의 화법이다.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 부분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의 후반부에 수록된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에서 “그림자의 화법”이라는 표현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새벽녘 산책에서 본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림, 그림자…… 글자? 분명 어디선가 그림자를 봤었는데…… 김뉘연의 지난 시집들을 꺼내어 봤고, 여기저기서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림자에 관해 남긴 시인의 흔적들을 모아보았다.


그림
그림자
그림/자
글/자
글자
―「그림글자」 전문1


4월 19일.
장 루이 셰페르는 영화 속 그림자가 “모든 장면에서 내적인 기둥의 역할”(『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김이석 옮김, 이모션 북스, 2020년, 105면)을 한다고 본다. 인물 뒤로 물러난 그림자, 인물과 병행하는 그림자, 인물을 지워 버리는 그림자, 인물에게 먹힌 그림자…. 너는 소설의 어디에 어떻게 그림자를 배치할지 그려 본다. 소설은 장면이 아니기에 그림자만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림자를 연출하기 위한 인물과 사물, 배경이 필요하다. 다시. 너는 소설을 장면으로 구성하기로 정한다. 그렇다면 소설의 장면에 그림자만을 드리울 수 있게 된다. 장면은 추상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고, 너는 추상 소설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너의 소설의 표면밖에 볼 수 없을 것이고, 너의 소설을 표면적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너가 그림자에 바라는 바다.2


말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건 그림자놀이
말놀이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말놀이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작은 새가 작은 새로 있고
큰 개가 큰 개로 있고
말놀이는 말놀이로
그건 그림자놀이
새 짖는 소리
개 짖는 소리
그건 그림자놀이
끝난다면 말놀이가 아니고 그러면 그건 그림놀이
그림자놀이가 되고 싶은
―「그림자놀이」 전문3


김뉘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림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림자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림과 글자 사이에서 진동하고,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가 어떻게 보이는지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림자는 그림과 더 밀접하게 관계 맺지만, 결국 그에게는 글자와 그림자 사이의 관계가 자신의 문학적 문제가 된다. 그림자는 대상이 있으면서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어긋나고 벗어난 자리에서 그 대상의 부분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대상만이 아닌 것은 말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글자가 어떻게 지면에 그림자를 도입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각예술에서 그림자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존재여서 그것을 화면 밖으로 몰아내려 할 때 오히려 곤란해지지만, 문학은 상황이 그와 반대인 것이다. 단순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림자’라고 쓰면 그 단어는 그림자가 아니라 내용이 된다. 독자는 ‘그림자’라는 단어를 읽으면 어떤 모습이든 그림자가 포함된 하나의 전체적인 공간을, 하나의 이미지를 상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 사과’라고 쓰면 우리는 사과와 그 사과가 드리운 그림자가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사과를 떠올릴 것이다. ‘사과 사’나 ‘사과 과’라고 쓰면 이건 ‘사과’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사과와 더는 관련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시인은 지면에서 그림자가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것을 넘어 지면이 순수한 그림자 자체로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무언가가 있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부차적인 부분으로서의 그림자를 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분만으로 이루어진 문학작품, “결핍된 소설”4을 구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문학작품을 구상했을까? 나는 결론적으로 그것이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5에 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림자에 대한 생각은 이 탐구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살피기로 하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글자가 어떻게 지면에 그림자를 도입할 수 있을까? 이 곤란함을 마주하며 문학이 요청된다. 나는 ‘허구 생산과 관련하여 글자를 다루는 기술들의 집합’을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보기를 통해서든, 읽기를 통해서든, 듣기를 통해서든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로서의 방식으로든 모든 글자는 허구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구두점 하나를 찍는 것, 단어 하나를 쓰는 것 모두 문학적 행위다. 여기서부터 ‘어떻게’라고 물으며 글자의 허구 생산 기술을 탐구하고 실행하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문학가라고 부른다. 나는 김뉘연의 “그림자놀이”에서 문학에 대한 이러한 의식을 발견한다. “그림자놀이”는 말 그대로 글자로 그림자를 출현시키기 위한 연습인데, 내용의 구성을 위해 글자를 사용하거나 글자가 내용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글자 자체나 글자가 추동하는 실재를 끊임없는 변형 상태에 두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실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놀이는 형식에 대한 실험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자놀이”는 그의 첫 시집 『모눈 지우개』에 실린 71편의 시 중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하고, 59편의 시가 편성된 2부의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2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2부에서는 단어를 배열하고 조합하며 구성한 내용과 형식이 서로를 반영해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 낸다.”6 이를 참고해 다시 말해보자면, “그림자놀이”는 글자가 일으키는 허구를 완결(멈춤) 없이 일렁이게 만들고 그것을 가만히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우선 “그림자놀이”에 필요한 준비물은 “버려진 말들” “빈 단어들”(「복도」, 『모눈 지우개』), “껍질”(「껍질」, 『모눈 지우개』)이고, 해야 할 일은 “말했던 말을 말하기, 다시, 했던 말을 다시 말하기, 말을 돌려 말하기, 다시, 돌려 말, 하기, 말 돌리기, 말에 말, 더하기, 그렇게 말이 되기.//다시. 말하기. 말했던 말을. 다시. 더하기. 말에 말을. 다시. 돌리기. 말을. 다시. 되기. 말이. 그렇게”(「여집합」, 『모눈 지우개』), 그리고 “그대로 보고 그대로 말하기 그대로 듣고 그대로 말하기 말한 대로 쓰기 쓴 대로 읽기 읽은 대로 생각하기 생각한 대로 하기 혹은 보고 들은 대로”(「구두점」, 『모눈 지우개』)다.

“그림자놀이”는 크게 두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 방식은 ‘접기–펼치기’다. 한 장의 지면을 접었다 펼치면 사이가 생긴다. 사이가 생기면 하나는 둘이 된다. 그는 하나가 둘이 되는 일, 즉 접기–펼치기를 쓰기를 통해 수행한다. 하루를 “반으로” 접었다 펼치고, 다시 “반으로/반으로” 접어 하나였던 하루를 “네 배”(「세 시」, 『모눈 지우개』)로 만들어본다. 『모눈 지우개』의 58~59쪽 펼친 면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놓인 두 시 「잔 인사」와 「컵 인사」는 내용과 모양7이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거의 유사하다. “잔”과 “컵”이 서로 다른 단어지만 닮고 또 다르지 않은 것처럼, 두 시는 완전히 대칭적이지도 동일하지도 않지만 서로가 서로의 부분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타자로서 가진다. 둘이 있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해진다. 미술 기법 중 하나인 데칼코마니는 대표적으로 접기–펼치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다. 양쪽의 그림은 거의 같아 보이지만 전체든 부분이든 어느 요소도 형태가 완전히 같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무엇의 원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오직 접힘과 펼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동시에 발생하는 이미지다. 이것은 복제가 아니라 오히려 양자역학적 현상에 가깝다. 접힘–펼침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떤 이미지가 출현할지 모른다. 이미지는 잠재적이고 사건이 결정적이다. 이렇게 등장한 이미지는 두 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동일자이자 타자로서 필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하나이기도 하다. 그림자 관계는 단순히 나와 다른 타자의 안정적인 출현이 아니라 그 출현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가지게 되는, 끊임없는 되먹임을 형성하는 관계다.

다른 한 방식은 ‘흔들기’다. 『모눈 지우개』에 수록된 시 「낱말」은 이 놀이 방식에 대한, 어린이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아주 쉽고 간단한 지침으로 읽힌다. “말들이 낱말로 흩어져 있다./낱말들을 모아 말 상자에 담아 둔다 그러다 상자를/흔든다 말 상자를 흔드는/소리 말 상자에서 낱말들이 굴러다니는 소리 낱말이 뒤엉켜 문장이 되는 문장이 겹쳐져 단락이 되는”. 흔들리면서 글자 형태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기도 하고, 글자들 사이의 배치가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 새로 나타난 글자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일까? 바뀌었다기보다 흔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모눈 지우개』의 마지막 부분인, 93쪽부터 97쪽에 걸쳐 연달아 놓인 네 편의 시 (「무아레」–「무아래」–「무이레」–「무이래」)는 흔들기로 씌어진 글자가 어떻게 계속해서 서로 다른 무늬(moiré)를 만드는지를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그림자놀이”는 완성이란 없는, 끊임없는 흔들림을 보는 일이다.

‘접기–펼치기’ 그리고 ‘흔들기’는 서로 다른 놀이 방식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 뭉쳐져 있던 것, 멈춰 있던 것, 완결되어 있던 것, 연속적이었던 것을 나누고 떼어내 없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였던 연속적인 것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 그것은 더는 하나로 남지 못하고 부분들이 되며, 부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로 어린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놀이 같다.8 그러나 유희적인 면모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두고 놀이라고 이르는 데 그치는 것은 또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림자놀이”를 수행하는 시인의 진정한 목적은 유희가 아니라 “같은 말들의 다른 형상”(「구두점」, 『모눈 지우개』)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나는 차학경의 『딕테』를 다시 쓴 김뉘연의 네번째 저서 『제3작품집』이 그 자체로 그림자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에서 김뉘연은 이제 능숙하게 “그림자놀이”를 한다.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는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시로, 총 256행에 이른다. 내가 굳이 행의 수를 세고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시가 매우 구조적이며 이 구조 자체가 시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를 처음부터 알게 된 건 아니다. 이 책의 독서 경험이 구조를 발견하도록 이끌었는데, 나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를 읽으며 이른 아침부터 한낮을 거쳐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까지 도시의 여러 장소들을 천천히 배회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는 머리 위의 해가 옆으로 조금 내려와 세상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약간 어두워지고 부드러워진 그때, 정수리가 아니라 나의 옆 몸이 느껴지는 그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서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를 천천히 읽어나가자 불현듯 또 다른 기시감이 찾아왔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글자가 다시 반복된다. 정확하게 그 글자는 아닌데 그 글자인 것 같다. 그런 기분이 여러 번 거듭되면서 이 시에서 반복을 추동하는 어떤 구조가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됐고, 닮은 글자들을 찾아 이렇게 저렇게 배치해보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시에 대해 발견한 사실은 이렇다. 이 시의 75쪽 128행 “너는 여러 얼굴로 일어난다”와 129행 “여러 얼굴로 일어난 너” 사이가 접혀 있다. 그러니까 128행과 129행은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이자 타자로 가진 글자들의 집합이다. 그렇게 접힌 사이를 기준으로 126행과 131행, 125행과 132행……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거의 같지만 다르고 서로가 서로의 부분이지만 또한 독립적이다. 그런데 안정적인 것 같던 이 행들의 대칭은 어느 순간 깨진다. 한 행과 한 행이 호응하는 줄 알았지만 어떤 행은 두 행이 되기도 하고 세 행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73쪽 86~92행 “그림 사람.//그림 사람은 몸을 펼치고 싶다./펼친 몸.//몸은 그림을 펼치고 싶다./펼친 그림”과 호응하는 것은 77쪽 165~169행 “그림은 몸으로 펼쳐지고 싶다.//몸은 그림으로 펼쳐지고 싶다.//사람 그림”이다. 글자가 흔들린 것이다. 흔들린 글자. 서로의 대칭적 반영이 아닌 서로에 의한 회절. 그러고 보면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의 바로 앞에 놓인 단 두 행, 두 개의 단어로만 이루어진 시 「흔든다」는 본격적인 “그림자놀이”에 앞서 글자를 접었다 펼치고 흔들어보는, 아주 간단하지만 모든 원리를 환기하는 준비운동과 다름없던 것이다. 「흔든다」의 전문은 이렇다. “그림자 그림/그림 그림자”.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는 “그림자놀이”의 방식들이었던 ‘접기–펼치기’와 ‘흔들기’를 이제는 시인이 충분히 잘 익혀 보다 풍부하게 또 복잡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 시가 놓인 지면이 종이의 왼쪽 면을 철한,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코덱스 형태의 단행본이 아니라 위아래로 긴 두루마리 형식이었다면 우리는 이 시의 구조를 더 쉽게, 어쩌면 한눈에 파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림자의 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인이 긴 시를 쓴 건, 이 시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그렇게 해서 시각적으로나 건축적으로가 아니라 어떤 기시감으로, 느낌으로, 존재감으로 그림자가 드러나도록 하는 설계(계책)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림자는 그리 명백한 것이 아니다.

“그림자놀이”처럼,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는 그간 김뉘연이 문학으로서 다루어왔던 주제들이 거듭한다. 완결 없는 움직임의 추동, 반복, 예측할 수 없는 변형, 불확정성, 부분에 대한 의지, 빈 공간의 필요…… 그런데 새롭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 가시적인 것들 속에 원형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진작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타자다. 너, 그리고 우리. 이번 시집에서 김뉘연은 계속해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너’와 ‘우리’는 무엇일까? 추측건대 ‘너’는 ‘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한다.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고, 함께 있음을 알고 있지만, 결코 쉽게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이지만 결코 하나이지는 않다. 닮기도 하지만 반대이기도 하다. “너는 정의를 벗어난다.//너의 움직임을 보았다는 말이다, 내가.//내가 네게 있고 있다”(「팔을 펼치고 손가락을 튕기고」), “다시 시작된 우리는 한 단어를 이룬다. 너와 나는 우리를 시작했을 뿐,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더라도……

그렇다면 시작이 반이다, 우리는 반쯤의 상태로 서로를 지속한다. 그러면서 우리를 돌아다닌다”(「커다란 여분」),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게 되었거나. 여럿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거나”(「반쯤 실현된 단어」), “나는 우는 사람./네가 웃고. [……] 네가 울고 내가 웃어도 된다./그렇게도 만난다. [……] 필요를 벗어난다”(「바깥에서 동시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해 보이는 것은, ‘나’와 ‘너’는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이가 아득히 멀기도 하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와 ‘너’가 ‘우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거리, 빈 공간이다. “모르는 거리”에서 마주친 나와 너.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불렀지만 우리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거리의 우리는/우리의 거리를//유지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되어 있다”(「발음이 풀리지 않은 상태」).

‘나’와 ‘너’와 관련해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씨’라고 일컬어지는 형상이다. 마치 이곳 도시 곳곳에서 출몰하는 어떤 인물인 것만 같은 ‘이 씨’. 그러나 ‘이 씨’는 “확신할 수 없는”(「소개받은 인물」) 존재다. ‘이 씨’가 ‘너’를 만나게 되는 것은 ‘나’를 본다는 의미와 같다. 무엇보다도 “이 씨를 만난다는 기대 그것이 너와 나의 기운을 만든다”(「어떤 성질의 표시」). ‘이 씨’는 바로 ‘너’와 ‘나’가 ‘우리’가 되게끔 하는 존재다. 그리고 나는 ‘이 씨’가 “그림자놀이”와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이 씨는 말이 없는 사람에 가깝지만 말을 하고자 하면 한다. 어제 이 씨가 한 말을 하나 되살려냄. 내일은 공휴일입니다. 오늘이 공휴일이라는 말을 어제의 이 씨가 남겨두었다. 이 씨는 공휴일에 세 가지 시간을 심어둠. 공휴일의 사람. 공휴일에 사람. 공휴일과 사람. 세 시간은 어디로 가고 사람 셋이 서로를 맴돈다. 공휴일의 사람은 공휴일에 사람을 구하고 공휴일과 사람을 반죽하고, 부풀어 오른 사람을 이 씨가 안는다. 물러남. 잇자국. 선명함.
―「개별적인 방문자」 전문


‘이 씨’는 다른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말이 없는 사람에 가깝지만 말을 하고자 하면 한다.” 그가 말을 하면 하나의 시간이 “세 가지 시간”으로 다시 펼쳐지고, 사람 하나가 “사람 셋이” 된다. 그렇게 세 가지 시간과 사람 셋은 한 장소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씨’는 이 모든 시간과 사람을 품는다. 그림자가 바로 ‘이 씨’의 화법이다. 그런데 「개별적인 방문자」의 마지막에 “물러남. 잇자국. 선명함”이라는 단어들이 여전히 거슬거슬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다른 시 「벌어들인 것」을 보자. 여기서 김뉘연은 “쓰고” “지운” 뒤 남은 “흔적”에 대해 말한다. “남은 것이 있다.” 그리고 시인은 “있는 것/을 본다 읽을 수 있기/까지 읽는다”. 그러면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분명한 것’은 남아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흩어지고 사라져 멀어진 것일 테다. 희미해졌을 때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씨’를 “그림자놀이”를 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씨’는 화법 자체다. 그는 놀이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를 ‘우리’로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화법은 글자 사용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글자를 통해 타자들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나아가 발명하는 문학이다. 그림자화법이란 동일한 것의 타자를 출현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동일한 것의 타자를 동일화하여 전체로 만들거나 경계를 그어 외부적인 타자로 축소시키지 않고, 동일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부분으로 두며 끊임없는 상호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자가 근원적으로 타자성과 관련 있다는 것은 서양의 재현의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빅토르 I.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의 첫 장을 할애해 재현의 두 가지 다른 패러다임, 즉 그림자 투사와 거울 반영을 구분한다. 다음은 스토이치타가 인용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동굴 우화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동굴에 갇혀 있던 자들이 동굴을 떠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동굴 밖 세계에 있는 사물들을 바라보기 전에 빛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먼저 그는 그림자(skias)를 바라보는 것을 가장 쉬운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물에 비친 사람과 사물들의 반영 이미지(eidola)를 볼 것이고, 마지막으로 사물 그 자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 그는 낮보다 밤에 천상의 실체와 하늘을 관찰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 태양과 그 빛을 바라보는 것보다 달과 별의 빛을 바라보는 일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태양을 똑바로 보는 것, 즉 물에 반영된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다른 어떤 매개체(phantasmata)를 사용하지 않고도 태양의 본질을 그 존재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9

내용을 보면 플라톤의 철학에서 그림자는 반영 이미지와 구분되고, 그림자는 재현의 위계에 있어서 가장 열등한 것으로, 진리(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 지어진다. 스토이치타가 말하길 “그림자는 서양의 재현의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부정의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러한 의미는 결코 완전히 포기된 적이 없었다…… 플라톤 이후에 미술 작품은 거울 패러다임의 제약을 수용해야만 했고, 그림자의 투영은 주변 역할로 밀려났다.”10 여기서 다시 곱씹어 비교해볼 것은 회화의 기원에 관한 플리니우스의 설명이다.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타인의 (몸이 아닌)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린 것이 회화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이 두 기원, 서로 겹치지만 근원적으로 구분되는 재현 이미지들 사이에는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이 있다. 그림자와 반영 이미지가 서로 분명히 구분된다는 스토이치타의 주장은 꽤나 분명하다. “플리니우스의 전통 속에서 이미지(그림자, 그림, 조각상)가 동일한 것의 타자동일한 타자라고 한다면, 플라톤에게서 이미지(그림자, 반영상, 그림, 조각상)는 복제 상태에 있는 동일자복제 동일자인 것이다.”11 그리고 “그림자는 ‘다른’ 단계를 재현하는 반면, 거울은 ‘동일한’ 단계를 재현하는 것이다.”12

그림자. 언제나 부분으로만 드러나는 동일한 것의 타자. 동일한 것의 타자로서의 그림자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가 설명하는, 니체 철학의 진리 이론과 관련된 ‘정오’라는 형상이다. “한낮은 해가 모든 것을 싸안으며, 모든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고, 세계의 온전한 단일체를 구성하는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다. 그리고 한 사물의 가장 짧은 그림자란, 이 사물 자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니체에게 이는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가 둘이 됨을 뜻한다. 어째서? (하나로서의) 사물은 더 이상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사물 위에 던지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자기 자신 위에 던지며, 그리하여 동시에 사물이자 그것의 그림자가 된다. 해가 천정에 있을 때, 사물들은 단순히 노출되는(이를테면 “벌거벗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그림자를 차려입고 있다.”13 그런데 이 가장 짧은 그림자, 사물의 동일한 타자가 출현하고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 순간을 어떻게 길게 펼쳐놓을 것인가? 그것이 아마도 김뉘연이 문학가로서 품은 물음일 것이다. “대상을 깨뜨리고 부수어 생기는 파편들을 복원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조합해 만드는 조각들의 새 언어”
(「진실?」, 『문서 없는 제목』).



엄밀히 말해서 그림자를 잃는다는 것은 자아의 상실이자 타자의 상실로 여겨야 한다. 그림자를 지키고 회복하려는 의지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를 지키려는 의지와 관련한다고 말해야 한다. 나와 너, 둘 중 하나만 잃고 하나가 남게 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산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합성적인 개념이다. 타자에 대해 말하고 타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문학이 스스로 타자를 품고 또 타자로 인해 끊임없이 문학 자체가 흔들리도록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 없이 문학이 사회적인 것이 되기는 어렵다. “그림자화법”은 그러므로 타자를 지키는 것이자 문학을 지키는 일처럼 보인다. 아주 오래된 기원에서.


  1. 김뉘연, 『제3작품집』, 외밀, 2023. 

  2. 김뉘연, 『부분』, 외밀, 2021, p. 68. 

  3. 김뉘연, 『모눈 지우개』, 외밀, 2020. 619 

  4. 『부분』, p. 6. 

  5. 『부분』, p. 10. 

  6. 김뉘연·전용완의 웹사이트에 실린 『모눈 지우개』 소개 글.  

  7. 여기서 모양은 흰 지면 위에 검은 글자가 만들어내는 윤곽의 전체적인 형태를 말한다. 글자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모양이기도 하다. 

  8. “아주 일찍부터 어린이들은 물체와 그 그림자 간에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구성하는데, 그림자들은 규칙적으로 사라졌다가 같은 장소에 다시 나타나고 방향을 바꾸고 형태가 달라지며 재빨리 혹은 서서히 의미심장한 변환과정을 거친다.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고 심지어 물건의 크기도 바뀔 수 있다(“한 가지 물건 같은데 또 다른 물건이 되기도 하네”). 그림자는 “여전히 무엇인가 빠져 있기는 해도” 알고 있는 물체나 몸체의 형태를 상기시킬 수 있어서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간의 갈등을 야기시킨다. “아, 내 손인데… 아니 내 손이 아니잖아!”와 같은 존재와 부재 간의 긴장 상태로부터 질문들, 가설들, 그리고 확인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생겨난다”(Reggio Children s.r.l, 『모든 것에 그림자가 있어요, 개미만 빼고』, 오문자 옮김, 도담서가, 2020, p. 18). 

  9. 플라톤, 『국가』, 516a; 빅토르 I. 스토이치타, 『그림자의 짧은 역사―회화의 탄생에서 사진의 시대까지』, 이윤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6, p. 31에서 재인용. 

  10. 같은 책, pp. 34~35. 

  11. 같은 책, p. 37. 

  12. 같은 책, p. 49.  

  13. 알렌카 주판치치, 『정오의 그림자』, 조창호 옮김, 도서출판b, 2005, p.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