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소리를 다시 몸에게, 몸에게 다시 장소를

아트엘이 기획한 전시 듣다 4: 소리와 언어(JCC 아트센터 2021) 도록에 수록.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전시장에 내리자, 위성희 작가가 나를 반겼다. 그는 나를 이끌고 전시장을 가로질러 야외로 나갔다. 시원하게 펼쳐진 시내가 보였고 맨들맨들하게 잘 닦인 돌바닥을 조금 걸어가니 건물을 돌아 3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나타났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사소한 안부의 인사를 나누며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아직은 날이 그렇게까지 춥지 않은 겨울의 낮이었다. 3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러, 그는 나에게 안대를 건네며 이제 여기서 퍼포먼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눈을 가린다는 데서 오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 기대가 뒤섞여 안대를 썼다. 그가 처음 내게 알려준 것은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의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종류의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은 난간에 기대어 건너편 집을 바라보며 마당에 나와 있는 한 할머니가 움직이는 모습을 알려 주었다. 옷을 단정히 차려 입은 할머니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우뚝 솟아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내게 그 나무의 잎을 만져보게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를 보며 우리와 놀고 싶어 하는 한 어린이가 있었다. 실재하는 것처럼은 눈을 가린 나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그가 나대신 무언가를 보고 그것에 대한 묘사를 옆에서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있는 것에 대한 묘사이기도 했고, 없는 것에 대한 묘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대를 쓰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 구분은 다소 무의미했다. 무언가가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곧장 나를 둘러싼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어린이는 작가가 지어낸 인물이었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흐린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나무는 정말로 그 자리에 있었고, 새들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위성희는 실재하는 것처럼을 시작하기 전 작업에 관해 짧게 소개하며, 이 작업이 요즘 유행하는 가상현실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 진술이 흥미로웠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작품에 관한 설명이기 이전에 이미지 혹은 다른 현실의 생산과 기술적 장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숙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VR이 우리의 뇌를 직접적으로 속여 현실을 다르게 경험하게 하고 재구성하게 하게 한다면, 위성희 작가의 이야기가 현실을 변형하는 핵심은 청자의 능동성이다. 이 기술이 공유하는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종합적인 인지의 제한이다. 그 이후 허구를 통한 현실 경험의 조정이 이루어진다. 다만 현대적인 기술의 이데올로기가 그 ‘제한’을 투명하게, 그러니까 우리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우리에게 덧씌우는 반면, 위성희의 실재하는 것처럼은 그 제한의 감각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재하는 것처럼이 자극하는 능동적 상상은 눈을 가림으로써 생기는 무수히 많은 불편과 두려움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 말이다. 이 기획을 이끌고 나아가 보면, 어떤 주체가 현실을 구성하고 거기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제한이 도입되어야만 한다는 가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저마다의 제한의 지형 위에서 각자의 통합적인 인지로 생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개별적 감각의 양태와 인지의 일반적인 ‘수준’과 ‘절차’라고 하는 암묵적 규범과 이에 뒤따라 기대하는 ‘성과’가 있다면, 이 규범과 성과로부터 큰 편차를 가지는 것을 우리는 사회적으로 장애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장애를 구분하게 된다. 규범이 엄격할수록 구분의 경계선은 더욱 분명해지고, 사실 그 구분선 안의 중심은 텅 비어 있음을, 어떠한 몸이든 몸이란 것이 이미 제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텅 빈 중심을 점유하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몸에 대한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은 또 다른 힘들의 작용일 것이다.

아트엘이 2018년부터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듣다 프로젝트는 이 경계 언저리의 모호함을 탐구하고 다양한 주체가 가능한 함께할 수 있는 장소를 상상하는 실험실이다. 이 프로젝트는 표면적으로는 소리, 청각에 관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한 해 한 해 차곡차곡 ‘듣기’가 무엇이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거치며 소리와 청각 자체를 넘어서서 이를 몸이라는 복잡한 문제와 교차시키며 소통과 앎이라는 주제로 내밀히 품는다. 위성희는 매 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실재하는 것처럼은 구전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한 2020년 작업 귀를 빌리기와의 연관 속에서 소리의 허구 생산 가능성을 탐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성희 외에도 참여 작가의 대다수가 지속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듣기의 의미와 그 외연을 확장시키는 탐구를 거듭해 왔다. 듣다 프로젝트는 지속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문 기획이다.

2021년의 듣다 4: 소리와 언어의 여러 작업들을 보며 흥미로웠던 것은, 참여 작가 각자가 주목하는 면면은 다르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소리를 몸으로 되돌려 다룸으로써 ‘듣기’를 정치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음향을 순수한 파동으로서 다루지도 않고, 청취를 귀의 독립된 행위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몸과 행위의 총체성 안에 듣기의 문제를 녹이면서 가려져 있거나 망각된, 혹은 모른 척 당해왔던 몸의 특정한 순간 혹은 작용을 회복시킨다. 예컨대 전시장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나선형 계단 아래 두루마리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 설치된 안마노와 고아라의 협업 작업 손빛 글씨(2020)는 수어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손의 형태가 아닌 손의 움직임 자체에 주목한 작업이다. 장노출로 손을 촬영함으로써 통약되는 기호의 기능은 사라지지만 그 의미로 나아가기 위한 손의 운동성과 존재감은 오히려 강화된다. 그 옆에 놓인 안마노의 다른 작업 글 기둥(2021) 또한, 보이는 것, 읽히는 것으로서의 글자가 아닌 쓰고 만지는 경험에서의 글자, 즉 신체적 수행이 중심이 된 글자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들이 문자 언어의 의미작용 속에서 대개 의식되지 않는 몸의 순간을 강조했다면, 농인과 청각장애인의 대화를 3채널 영상으로 재구성한 김은설의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언어(2021)는 음성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과정에 반드시 수반되는 미세한 신체적 특징과 행위를 클로즈업과 크롭 등의 편집 기법을 사용하여 강조함으로써, 보고 듣는다는 것이 단지 하나의 감각기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둘러싼 네트워크의 작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알려준다. 이 작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파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세 농인의 대화를 추측하고 구성해야만 하는 상황에 관객을 놓아둔다. 이 작업들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듣기’는 행방이 묘연하다.

여기서 ‘소리를 몸으로 되돌려 다룬다.’고 말한 것의 의미를 한번 곱씹어 보자. “소리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 중심적으로 정의된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조너선 스턴은 듣기의 근대적 형성에 관한 그의 연구서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 1장에서 19세기 발명된 장치 포노토그래프가 인간의 귀를 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매체의 역사적 전개는 “신체가 분리, 이전, 복제, 사용 가능한 개별 기능의 집합-이를테면 ‘고막 기능’ 같은-으로 재배치된 역사와 일치한다.”1 나아가 스턴은 이렇게 말한다. “음향 재생의 역사는 인간의 신체가 지식과 실행의 대상으로 변형되는 역사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음향 재생 기술은 소리가 지적 연구의 대상으로 정립되고 청각적 지각이 추상화되어 고막형 메커니즘으로 결정화된 결과다.”2 말하자면 우리가 소리라고 규정하는 것과 이를 귀의 문제로 국한된 듣기로 연결시키는 방식은 근대에 수행된 해부학적 생리학에 기반하고 있다. 벨이 청각 장애인들의 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노토그래프를 발명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의 개념에는 이미 사회적 신체에 대한 관습과 편견이 자리하며, 기계 귀는 다시 정상성 혹은 인간성의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일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듣기의 현상에 관해 듣다프로젝트의 참여 작가들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3층 전시실 한켠에는 작가들의 말을 발췌하여 옮겨 놓은 아카이브 섹션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실재에의 듣기’와 ‘형성된 청취’ 사이의 간극에 대한 묘사들이 있었다.3 그 차이에 대한 인지와 진술은, 우리가 이해하던 듣기라는 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몸에서 비껴나 있는 개념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이를 구성해 온 역사적 힘에 마주선다. 그러한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정치적이었고, 이들은 듣기를 다시 통합적인 몸으로 되돌려놓고자 한다.

몸의 유동성 안에 듣기의 총체를 재배치하는 것이 이 전시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들어야 하는 대상의 범주 자체를 확장하여 소리의 바깥을 품는 일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능동적 청취와도 맞닿아 있는데, 그저 주어진 소리를 ‘잘’ 듣는 일이 아니라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어진 안에서 최대한’이 아닌, 불가능성에서 시작하는 현실의 재구성 능력과 참여에의 허용과 관련한다. 원하라의 에세이 영화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김은설, 서이제, 신종원의 소리와 듣기에 관한 내레이션과 함께 이와 크게 관련 없어 보이는 풍경이나 파운드 푸티지 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듣기에 관한 사색이자, 그렇다면 이 흘러가는 이미지들이 들려주지 않는 것 중 당신이 듣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는 박찬별의 세 그림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간 어느 하나/빛과도 언뜻 이어지는데, 잘 보지 못하는 그는 지금껏 그에게 보이는 풍경을 정직하게 그려왔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보이는 것들 사이의 시간, 빛이 모호한 잔상으로 남은 짧은 순간을 기록했다. 그것은 어떤 형상이나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흔적에 가깝다. 이들은 명확하게 어떤 영역에 속하지 않는, 가시(청)적이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존재감을 형성하는 대상들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민경이 전경호와 협업한 저무는 시간은 바로 그러한 봉합되지 않는 차이의 경험을 대화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한편 해미 클레멘세비츠의 몸짓(2021)과 위성희, 전경호의 협업 작업 소리가 사라진 곳(2018)은 통상적인 의사소통 체계가 어떻게 쉽게 불능에 빠지는지를 의사소통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방해하는 부정성의 구현을 통해 드러내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장소가 등장하는지를 살피는 작업이었다. 몸짓이 한국어와 프랑스어라는 두 개의 다른 언어 체계를 병치하고 그 안에 다시 수어와 음성 언어를 대비시키며 즉각적이고 명확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한다면, 점자와 묵자의 병기에서 시작하여 누구도 다가가고 들을 수 없는 텍스트로 이행하는 소리가 사라진 곳 번역 가능성으로부터 번역 불가능의 상태를 순차적으로 연출한다. 그저 하나의 물건으로서만 덩그러니 남은 인쇄물을 앞에 두고 우리는, 누가 되었든, 공통적으로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하는 실패의 상황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무기력한 좌절일까? 아니면 그것은 혹시나 여럿의 대화가 비로소 가능한 다른 어떤 공통의 지대일까? 만약 그곳이 여럿 혹은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 곳이라면, 그 장소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까? 그러니까 이 궁금증은 사실, ‘듣기’의 문제가 감각과 인식의 문제 즉 한 독특한 개인의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의 장소를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한 사회(혹은 역사)가 종종 장애를 개인의 한계로 규정해왔다면, 그 한계를 지우지는 못하더라도 그것과 함께하는 장소는, 몸들의 듣기가 수행되는 장소는 어떻게 가능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공동체의 두 모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는 심해 고래들의 생태계와 같이 모두에게 열려있고 모두가 소통하는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 가능성’을 예비할 뿐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모델이다. 여기서 김현경은 완전한 열림, 모두를 공통의 지평에 두는 것은 일견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장소 상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자기 장소를 가지는 것, 즉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4이다.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5 한편 김원영은 한 SF 잡지에 기고한 그의 글에서, SF가(한 사회가) 소수자의 불평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의 딜레마를 설명한다. “소수자가 현실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편견을 뚫고 나와 새로운 면모를 그려 낼 때 보이는 어떤 위엄이나 소설적 아름다움은, 그 소설이 덜 과학적일 때, 혹은 현재 우리를 조건 지운 자연적(과학적) 배경에서 멀리 떨어질 때 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그러나 (장애가)우연한 차이일 뿐이라는 설정은 우리의 존재를 얼마간은 분명히 조건 지웠을 (자연적) 토대를 무시한 기만에 불과했고,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진보의 서사 속에서 정작 장애는 더더욱 배제되었다. 우리는 그 사이의 어떤 길에서 싸우고 있다.”6 나는 이들이 경계하는 완전한 열림과 완전한 닫힘 사이의 어떤 장소에 대해서 생각한다. 듣다 프로젝트 역시 이러한 틈의 장소를 상상하고 탐색하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음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장소는 발명되어야만 하는 어떤 곳이라는 사실이다.


 


  1. 조너선 스턴 지음, 윤원화 옮김,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 현실문화, 2010, 73쪽 

  2. 앞의 책, 74쪽.  

  3. “소리를 듣고 워크숍을 할 때 녹음을 해서 듣는 방식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방식은 녹음기에 녹음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돼서, 뭔가를 자꾸 확인하거나 일치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던 것 같아요. 실제로 못 들었는데 ‘이런 소리가 있었구나.’ 발견하게 되는 방식으로요. 오늘은 녹음기를 안 쓰고 사람이 일종의 매체가 돼서 듣고 기억한 바를 표현해서 전달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느끼기에 뭔가 ‘차이’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거 같았어요. ‘무엇을 들었나’ 또는 ‘이게 사실인가’ 확인하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어떤 차이나 틈새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어요.”(김지연); “원래는 소리를 내려면 원인이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나려면 그 소리를 발생시키는 움직이나 그런 원인적 행동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가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면, 그때는 원인적 행동과 소리가 분리 돼요.”(해미 클레멘세비츠); “저는 듣는 작용이 귀의 고막에서만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뇌의 작용도 있고, 기억도 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어떤 감각도 단일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아요.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해서 소리를 통해 마음에 상이 맺힌다고 생각해요.(…)”(위성희)  

  4. 김현경 지음,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03쪽 

  5. 앞의 책, 204쪽.  

  6. 김원영, SF는 장애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늘의 SF #1, 아르테, 2019, 288~290쪽. 

위성희, 실재하는 것처럼,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안마노, 글 기둥,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김은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언어,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오로민경+전경호, 저무는 시간,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원하라, off screen,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헤미 클레멘세비즈, 몸짓,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
박찬별,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간 어느 하나/빛, 2021
사진 © 아트엘, 박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