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경계 탐색: 히토 슈타이얼 다시 읽기

월간미술 2022년 6월호에 수록.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이름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초중반부터인데, 그 즈음의 서울의 미술계는 바깥에서 흘러 들어온 ‘포스트 인터넷’이라는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 히토 슈타이얼의 말은 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변화해가는 기술적, 문화적 조건들, 그리고 주체성을 구성하는 힘의 변화를 인지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여기 작가들의 작업은 유럽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정치 사회적 경험에 기반한 히토 슈타이얼의 말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 보편성을 설명하는 서사는 개별 작업의 미적 특성보다 항상 빠르게, 또 강력하게 작동했다. 스크린의 추방자들이 그의 저서들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번역 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빈곤한’ 이미지론은 그것을 떠받치는 정치적-미학적 기획인 ‘이미지에의 참여’가 진지하게 숙고되기보다는1, 그것이 예시하는 이미지들처럼 열화 된 채 껍데기의 질감만을 더듬으며 빠르게 소비되었다. 당대성을 표상하고 규정하려는 여러 기획에서는 그의 흔적을 직간접적으로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는데, 대개는 양식(style)에 치중하며 조급해 했다.2 그리고 ‘인터넷 이후’, 그의 작업은 데이터, 기술, 미술관을 주제로 한 비판적 기획들에서, 담론에서 또한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나는 히토 슈타이얼의 말에 매혹되기도 하고 또 그 매혹의 힘에 경계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미지의 대상으로서의 ‘동시대’를 설명하려는 능동적 수행자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어떻게 구성되어있으며 무엇을 (얼마나 적절히) 행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동시대’라는 대상을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루는 대상과 작품의 형식은 언제나 일종의 파르마콘(pharmakon)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로 우리는 무언가를 쉽게 배울 수는 있었지만, 그의 작업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궁핍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히토 슈타이얼의 개인전 데이터의 바다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려는 듯 다섯 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하지만 ‘데이터의 바다’, ‘안 보여주기-디지털 시각성’, ‘기술, 전쟁, 그리고 미술관’, ‘유동성 주식회사-글로벌 유동성’ 등 1~4부는 지난 10여 년 간의 미술계의 흐름과 그 속에서의 히토 슈타이얼의 위치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새로울 것 없는 주제이고 작품들의 모음일 것이다. 즉 이번 전시는 히토 슈타이얼을 향한 기존의 해석과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작업들 비어 있는 중심(1998), 독일과 정체성(1994), 바벤하우젠(1997), 정상성 1-X(1999), 11월(2004) 다섯 개가 설치 상영되고 있었던 마지막 5부 ‘기록과 픽션’ 또한 그의 초기 다큐멘터리 실천을 별도로 프레이밍 해 살피는 기존 기획에서 벗어나지 않지만3, 아직 한국에서 제대로 선보인 적이 없었던 작품들이었기에 내게는 전시 관람 전부터 가장 관심이 가는 섹션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면,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을 구축하는 한 원리를 짐작해볼 수 있게 된다.

5부 ‘기록과 픽션’에 포함된 작품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기록 영상과 다양한 파운드 푸티지를 조합하여 편집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주로 당대 독일의 사회적인 현상을 더듬으며 작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여러 이질적 공간을 나란히 배치하며 다룬다. 이 작업들은 외견상 디지털 이미지와 정동적 효과가 강화된 스펙터클한 사운드를 활용한 최근의 작업들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지만,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을 떠받치고 있는, 혹은 그의 작업을 여전히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방법을 비교적 선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계와 관련한 것이다. 산드로 메자드라와 브렛 닐슨이 현대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과정이라는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 진력하는 “연구 ‘대상’으로뿐 아니라 ‘인식의’ 관점”4으로서의 경계 말이다. 슈타이얼의 초기 작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예술적 작업 전체는 결국 가시적인 경계가 약화 혹은 해체되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경계가 새로이 생성되며 구축되는 풍경을 그리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고, 추측하고, 나아가 그 경계에 어떤 구멍이 뚫려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와 무질서의 형태에 대한 현재 진행 중인 논의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5로서 읽힌다. 말하자면, 히토 슈타이얼은 경계라는 힘의 작용에 대한 인식을 언제나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비어 있는 중심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터가 된 포츠담 광장 앞 공간에서 시작한다. 냉전 시기 동독과 서독을 나누던 가시적인 벽은 무너졌만, 그렇게 텅 빈 장소에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경계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새로운 국경과 계급이,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경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이 작업은 보여주고자 한다.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유동하며 힘을 발휘하는 하나의 기능이자 구체적인 현실이다.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정치적, 군사적 경계의 장소가 되었던 그 공간은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른 가치를 믿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얼굴 없이 등장하는 점유자(the squatter)의 인터뷰 목소리는, 비어있는 그 공간이 결코 비어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배제가 작동할 경계적 장소로서 도래할 것임을 말한다. 이 영화적 작업은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약 8년에 걸쳐 촬영된 기록 푸티지와 기존의 아카이브 푸티지들을 몽타주하며 ‘빈 중심’을 차지했던 약 200여 년 동안의 경계의 역사를 구성하는데, 이는 특히 소수민족과 이민자들, 즉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만 하는 주체들을 향한 배척과 폭력, 혐오를 수행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학생인 동 양은 장벽 붕괴 이후 겪었던 끊임없는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나열하고, 마찬가지로 아시아계 학생인 후안 추는 외부자의 관점에서 건축물에 스민 권력을 읽어낸다. 누군가에게 장벽의 붕괴는 통일을 축하하는 축제였던 반면 그것은 또한 공포를 야기하는 폭력의 경계를 생성하는 사건이었다. 비어 있는 중심의 전체에 걸쳐 흐르는 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것으로, 슈타이얼은 영상 속에서 한 시퀀스를 할애해 1743년 포츠담 게이트를 넘어 베를린에 들어오려 했던 그의 조부 모제스 멘델스존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한 일화를 들려준다. 그 외에도 작가는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2차 대전 시기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모하메드 후센의 이야기, 2년 후 추방당할지 독일에 머무르게 될지 알 수 없음을 말하는 포츠담 광장 주변 거리 행상의 인터뷰를 영상 속에서 함께 기워 낸다. 그리하여 이 다큐멘터리는 경계란 이동과 순환을 형식화하는 권력 작용임을 인식하고 또 주장한다.

통일 이후 독일 내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민족주의와 독일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논쟁의 과정을 담은 독일과 정체성, 바벤하우젠에서의 유대인 가족 추방에 관한 기록 바벤하우젠, 유대인 묘지가 훼손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의 역사에 관한 사색 정상성 1-X는 모두 한 경계의 소멸과 그것으로 인한 다른 경계의 생성 속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과정에 대한 탐구로 읽힐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의 초기 작업에는, 그가 직접 경험한 시대적 전환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있으며 무엇보다 그것은 가시적인 현상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역사적 힘으로서의 경계에 관해 서서히 인식해 가는 과정이다. 이후 그의 작업들이 구체적인 경계, 혹은 경계의 작용 자체를 주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제 그의 작업 전체가 경계의 생성과 소멸이 수반하는 역동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자 경계를 뚫고 나아가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11월에서 언급되고 이후 그의 주요한 미학으로 자리 잡은 순환주의는 여러 장소들과 장소들의 충돌, 그 충돌의 조건으로서의 경계에 대한 인식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경계 장소들 중에서 히토 슈타이얼이 집중하는 것은 아마도, 현실에 흘러 넘쳐 현실 자체에 관여하게 된 이미지라는 사물이 이동하며 마주치게 되는 오늘날의 요동치는 경계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광범위한 네트워크 속 이주자로서의 사물-이미지의 편에서 쓰는 인류학적 보고서일지도 모르겠다.

비어 있는 중심의 마지막에는 하나의 의미심장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반대편 너머가 보이는 부서진 벽의 틈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워크 화면 위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문장을 인용한 내레이션이 흐른다. “벽에는 언제나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을 통해 우리는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잠입해 들어올 수 있다.” 이 말은 경계를 탐색하고 사유하는 이로서 히토 슈타이얼이 내기를 거는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은유이자, 미래를 구성하는 윤리로 읽힌다. 미래를 마치 도래할 현재처럼 예견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대해 직접적으로 냉소하는 이것이 미래다(2019) 외에도, 슈타이얼은 그의 작업에서 자주 미래의 형태에 대해 고심한다. 하지만 그 형태란, 슈타이얼이 비어 있는 중심에서 포츠담 광장 앞 빈 공간을 점유한 이들에게 그 장소의 미래가 어떠할 것이라 예상하느냐고 던진 질문에 점유자들이 한 대답처럼, ‘알 수 없는 것’이며 슈타이얼 또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교통되는 장소로서의 미래를 지지한다. 그에게 경계는 현실의 강력한 권력이 작동하는 장소이자 그 권력이 조형하는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다른 현실을 생산할 수 있는 전쟁터이기도 한 것이다.

 



  1. “그러나 만약 재현된 대상에게도, 재현물에도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실이 그 물질적인 구성에 있다면? 만약 매체야말로 진짜 메시지라면? 혹은 매체란 사실상 그 기업적 비전을 통해 상품화된 강도의 세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단순히 이미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기보다 이미지에 참여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관계를 폐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미지가 축적하는 욕망 및 힘들은 물론 그 이미지의 물질에 참여하기를 뜻한다. 이 이미지가 어떤 이데올로기적 오인이 아니라 정동과 유효성으로 동시에 표현되는 사물임을 인정하기란 어떠한가?” 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물,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8(개정판), 68-69쪽.  

  2. 나는 처음엔 이 현상이 소비주의의 관성적 속도에 의한 페스티시라고 생각했는데, 차츰 그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인식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닌가 가정해보게 되었다. 부재한 것은 다른 장소, 그 장소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의 방법이다. 히토 슈타이얼이 다루는 대상은 여러 이질적인 장소들을 가로질러 여기에 당도한 사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여러 이질적인 장소들의 몽타주를 통해서만 식별 가능한 사물을 다룬다. 여기서 장소는 물론 과거라는 시간적 개념 또한 포함한다. 사물과 사물의 장소를 사변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그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3. Mark Terkessidis, The Archive of Forgotten Concerns: Hito Steyerl’s Early Films as Alternative Documents, in Hito Steyerl: I Will Survive(Leipzig: Spector Books, 2021) 

  4. 산드로 메자드라, 브렛 닐슨 지음, 남청수 옮김, 방법으로서의 경계, 갈무리, 2021, 16쪽.  

  5. 위의 책,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