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그림을 보았던 오늘

양아영 개인전 Off Guard(인디프레스갤러리, 2022) 전시장에 놓인 글.

 

둥근 바닥 푸른 꽃 하얀 꽃잎 오른 편 정원 커다란 유리컵 안에 담긴 일렁이는 겹치는 일들 깃털의 노랑 화분의 뒤편 너무 커서 생기는 그림자 시작은 위에서 본 작은 동그라미 컵 안의 빛 접시는 관계를 다루기 좋은 시간을 보내는 일들 강아지 어두운 웅덩이 튤립과 강아지 프레임들 사이에는 분홍색이 있다 분홍색은 부분들 사이를 잇는 흔적이다 오랜 도상과 말라버린 식물들 흘러 내리는 거대한 폭포 아래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쌓인다 부서진 채로 흐린 정원과 무너진 정원 흐린 얼굴과 무너진 얼굴 떨어진 붉은 꽃잎 흩어진 빛은 물건의 범위를 알려준다 바위가 있는 풍경 붉은 노을에서 시작한 그림

하룬 파로키의 자라 슈만의 그림은 자라 슈만이 9주 동안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림이 시간을 이용한 합성장치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림의 현실을 낯설게 여기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분명한 현실이다. 극단적으로 부분들만을 이해하는 것을 보통의 현실이라고 부른다면 그림은 연결을 기억하려는 수고스런 일이다. 그건 어떤 종족이 전승해온 비밀스런 임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흰색의 꽃은 가운데에서 시작했다. 가운데가 가장 빛나고, 선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장의 잎이 단단히 뭉친 가운데로부터 그림은 천천히 밖으로 향해 나간다. 아래로는 줄기가 생겨나고, 잎의 바깥으로는 잎 대신 색의 면이 생겨난다. 그림은 밖을 만들어 나간다. 그 밖은 꽃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꽃의 흔적만이 남은 매우 먼 장소가 되어간다. 나는 그림의 왼쪽 아래에 어둠으로까지 보이는 짙은 초록색의 공간을 가장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더이상 꽃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을 느낀다. 그곳은 사물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장소이거나 사물의 장소여서 편안함을 느꼈지만 나는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고 그것이 그림에 관련하는 몸의 조건인 것만 같아 작게 슬픔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슬픔은 빠져나오기 묘연해 보이던 그 어둠에의 몰입에서 되돌아 나올 수 있는 두드림이기도 했다. 한 발 뒤로 물러나보니 그림들은 모두 가운데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바깥을 향해 나아가며 가운데를 점점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형태를 갖추어 가는 건축보단 무너지는 형태의 실재에 더 매혹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림의 변두리에 더 오래 머물렀다.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다시 시작하리라 여기기 보다는 그 상태 자체를 하나의 미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낮 공기 하늘 구름 지금 오래된 조각들 뒤엉킨 머리카락 흘러 내린 손수건 주말에 본 것은 최씨를 크게 부르던 울퉁불퉁한 목소리였다 오래전 얇은 와인잔에 입을 맞대 물을 마시는데 그걸 깨물면 깨질 것 같아 깨물었더니 정말로 그것이 입안에서 바스락 깨져버렸었다 이것은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는 반드시 무언가를 만나고 만남은 반드시 흐르는 일이다 거의 모든 일은 둘의 신비 둘의 신비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어남에 대한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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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에서 만난 스반보르그의 집에는 20년 동안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큰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 그건 그저 뿌연 색면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아주 얇은 선으로 한 마리의 유니콘이 그려져 있었다. 어릴 적 어느 날 정원에 앉아 있다가 이상한 존재감이 느껴져 뒤를 돌아 보았더니 거기에는 유니콘 한 마리가 있었고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그것은 휙 하고 사라졌었다는 이야기를 스반보르그는 내게 들려 주었다. 유니콘은 그 존재감 만큼이나 희미했고 스반보르그의 기억만큼이나 희미했다. 그 그림은 계속해서 희미해져가기 위해 그려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아영 개인전 Off Guard(2022, 인디프레스 갤러리). 사진: 양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