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암묵지와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2021 시민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
운영기간 2021년 4월 20일(화) ~ 5월 20일(목), 5주간
교육시간 매주 화, 목(온라인 강의로 진행하며 강의 게시 후 일주일간만 수강가능)
교육내용 전시기획 관련 이론 및 실무에 대한 이해 20강

program

2021 시민큐레이터 양성교육(안)

 

syllabus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 암묵적 앎(tacit knowing)은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의 1966년 저서 암묵적 영역(Tacit Dimension)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언어’와 같이 어떠한 종류의 형식으로든 명시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습득하고 축적한 지식의 형태를 일컫는다. 폴라니의 말을 빌어 간단히 해보자면,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암묵지는 명시적 지식과 상호적으로 작용하며 우리가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현실을 다시 설명하고 또 진실을 추측하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암묵지를 긍정하고 그것에 호의적이라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해질 수 없음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알 수 있다.” 아감벤이 말할 수 없는 소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코레(페르세포네)라는 형상 없는 형상은 바로 그러한 말해지지 않음을 통해서만 존재의 인식이 가능한 무엇일 것이다. 코레는 모든 구분의 경계에 놓여 무엇이든 됨으로써 구분을 지우는 존재다.

우리는 대개 이름을 부르고 설명할 수 있어야만 무언가를 안다고 여긴다. 이 단순한 앎의 관행을 의심해 본다면, 아마 우리는 세계에 남겨진 작고 사소한 흔적들, 그러나 실재에 다가서는 의미심장한 증거를 유심히 관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식화 되지 않고 형식화 되지 않은 수많은 존재와 그것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물과 이미지라는 것에 다가서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우연히 당도한 사물과 이미지에 섣불리 이름을 붙이지 않고, 보아왔고 이해해왔던 대로 말하지 않고 그것에 다가서기 위한 과정을 설계해야 해야만 비로소 ‘나’는 사물과 이미지와 합당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삶의 진실성과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바라보는 정치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미술관이 이러한 과정의 설계자를 자처할 수 있다면, 미술관은 아마도 지금의 문화적 배경 안에서 새로운 배움의 장소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배움의 장소, 앎의 장치로서의 미술관이란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흘려 보내며 새로움이 갱신되는 플랫폼이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앎의 관행을 재고하고 인식의 틀을 실험하며 미래를 위한 윤리를 제안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여가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 산업의 소비재로서의 미술관이 아니라 어떻게 암묵지를 강화하고 그 가능성을 살피는 곳으로서의 미술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미술관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혹은 어떤 허구를 도입할 것인지 묻는 일일 것이다. 미술관의 허구의 도입은 미술관이 가진 자원, 그리고 미술관이 놓인 네트워크의 모든 관계항을 조건으로 발명되어야 하는 서사이다.

compass

지식(앎)이라는 단어는 어느 특정 분야가 일정한 시기에 수용할 수 있었던 모든 절차와 인식 효과를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지식의 요소가 일정한 시대에 어떤 과학 담론 유형에 고유한 규칙이나 제약의 총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과학적이거나 단지 합리적이거나 일반적으로 수용됨으로써 효력을 발휘하는 것의 전형적인 강제 효과들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실상 지식의요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샤샤는 글을 못 읽는다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아주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읽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려고 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내 감정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5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사전편찬자 헤시키우스는 에우리피데스의 짧은 시 구절에 등장하는 한 “말할 수 없는 소녀”에 대해 언급한다. 헤시키우스는 그녀가 다름아닌 바로 페르세포네라고 설명한다. 페르세포네의 더 흔한 별칭은, 다시 말해 환칭하면, "어린 소녀”이며 그 어린 소녀는, 그 자체로 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입회자들은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없이, 겪는 상태[변화된 상태]에 놓여있게 된다”고 단언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본디 가르침이 무엇이며 본디 입회가 무엇인지”를 구분하며, “전자는 듣는 것을 통해 생겨나고, 후자는 지성 자체가 조명을 받게 될 때에만 발생한다”고 한다.

미카엘 프셀로스는 이 두번째 요소에 대하여 “입회자는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상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비의적 요소를 엘레우시스 비의 입회와 유사하다고 일컫는다”고 우리에게 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관하여에서 일종의 암시로 여겨질 수 있는 한 구절에서 주저 없이 이렇게 단언한다. “지성과 오성의 존재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인도하는 것을 가르침이 아니라 다른 이름(eteran eponymian)으로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