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호수 일지: 몸의 부대낌이 여는 (사랑의) 공간, 글이 여는 (문학적) 공간

호수일지(문서진 지음, 돛과닻 발행, 2022) 북토크

일시 2023년 1월 19일
장소 스프링플레어

 

questionnaire

Part 1. 행위에 관하여

  1. 이 책이 시작한 작업 <살아있는 섬>에 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호수 일지>를 보면서 좋았고 또 한편 낯설었던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기획’의 말이 없어서 였어요. 그러니까 이걸 왜 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어떤 성과를 기대하는지, 혹은 이게 어떤 일인지를 설명하는 말 말이죠. 그래서 그런 말을 요청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1. 스물한 번째 날 에서 본인도 ‘무용한 삽질을 한다’라고 표현을 했는데, 저는 이 ‘무용함’이라는 것을 조금 섬세하고 다채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경제적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무용하다고 해도 별로 할 말 없겠지만, 사실 이 책은 무용한 행위가 무엇을 다채롭게 생산해 내는지를 보여준다고도 생각하거든요.

일곱째 날에는 이렇게 씁니다. “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왜 하기로 한 것인지 나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며칠 사이 일이 익숙해지고 나니 의심이 마음에 슬금슬금 자라는 것 같다.” 그리고 뒤이어 “호수가 대답해줄 것이다. 이미 대답을 들은 걸지도, 앞으로 들을지도, 아니면 아예 듣지도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야만 그렇게 얻어진 것이 무엇이든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약속된 모든 기다림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의 결론이 무엇이든.”

그리고 열째 날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씁니다. “호수에 나가면 나는 충만해져 돌아온다. 매일의 언어가 새롭다. 그 언어들을 모두 끌어안고 하나하나 기억해 적어 옮기고 싶지만 그것들을 변환하기에 내 언어는 역부족인 데다가, 내가 타자를 두드리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날아가 버리곤 한다. 미처 다 옮기지 못한 그 언어들이 내 몸 어느 한구석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라 믿어둔다.”

무용함에의 회의감과 충만함의 환희 사이를 오가는 이 운동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했던 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철저한 불가지론인 것 같고…이 경험은 상당히 복잡하고 풍부했을 것 같은데 그 경험을 회고해주실 수 있을까요?

  1. 무용함과 충만함을 오가는 이 행위가 열어 준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책을 가만히 뜯어 봤을 때 제가 발견한 것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공포’, ‘청취’, ‘구체적이 세계’, 그리고 ‘관계’. 혹은 작가님의 행위가 열어 놓은 공간 중 이것들이 언어로 잡혔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이 각각에 대해서 책의 구절들을 같이 읽어보면서 얘기 나눠보고 싶어요.

[공포/죽음의 공간]
첫째 날
“호수에 나가있을 때는 조금 무섭다. 얼음이 두꺼워서 꺠지지 않을 거라고 이곳 레지던시 디렉터인 댄이 말했었고, 스노우 모바일이 잘 다니는걸 보면 안전한 것 같지만 눈을 쌓다 보면 얼음에 하중이 많이 실릴텐데, 괜찮을까?”

넷째 날
“모르기 때문에 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수만은 없다. 모르기 때문에 나는 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열네 번째 날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얼음이 정말 깨지든 안 깨지든 그 전에 이 공포감 때문에 죽을 것 같다”

[소리의 공간]
넷째 날
“오전에 일을 하는 도중 호수 바닥에서 둥둥 하며 울리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한번은 크랙이 가는 소리도 들렸다… 호수는 조용한 가운데 바닥에서 둥둥 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지금 이 얼어붙은 호수 표면 밑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열다섯 번째 날
“오늘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간에 그 소리가 나는 날에는 기온이 꽤 많이 떨어진 날들이었다. 최저기온이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에 대체로 그 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단 한 번, 내가 쌓은 섬 앞에서 얼음이 퍽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전과는 달리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았고 잠시나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뛰어 섬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열일곱 번째 날
“내가 호수 위에서 소리에 예민해지는 이유는 시각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평평한 호수 위 내 키의 두 배 높이로 서있는 섬을 바로 코앞에서야 가까스로 볼 수 있는 정도의 가시거리, 그런 환경에서 주변 상황들을 인지하려면 다른 감각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바람 소리에 묻혀 있는 소리들 중에서 식별할 수 있는 소리들을 듣는다.”

[구체적인 세계]
둘째 날
“오전 오후 내내 내린 눈은 싸락눈이었다. 소복이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과는 달리 얼음 결정이 된 싸락눈은 매섭다. 바람도 많이 불어 눈 결정이 얼굴을 때리면 아프고 따가웠다. 싸락눈은 저녁이 되어서야 거센 바람을 동반한 함박눈으로 변했다. 오늘의 눈은 한참을 예쁘게 조용히 내리던 어제의 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하루 중에도 양상이 급변했다. 이누이트의 말에는 눈을 구분하는 단어가 몇백 가지가 된다는데 나도 그들의 언어가 필요하다.”

여섯째 날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 결정이 매일 조금씩 다르다. 오늘 온 눈은 육각형의 별 같은 결정이 아니라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매일 보는 눈이 모양새도, 맛도, 냄새도, 촉감도 다르다.”

열한 번째 날
“매일 똑같은 노동을 반복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의 일은 결코 매일 같을 수 없다. 그가 육체를 움직여 근육의 힘으로 바위를 옮기는 한 그의 일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관계의 공간]
열일곱 번째 날
“빌리와 메리루, 이 작업 일부에 그들이 있다. 그들이 나와 함께 이 무용한 삽질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쌓은 섬보다, 그렇게 해서 찍은 기록물보다, 내가 만든 그 어떤 것들보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더 뭉클하게 했다.”

  1. 여섯째 날 글을 보면, “생각해보면 내가 했던 작업 중에 이 일은 가장 무거운 작업이다.” 라고 쓰셨는데 이건 어떤 의미일까요?

Part 2. 글쓰기에 관하여

  1. (to 영글 서진) 이 글이 원본 퍼포먼스에 딸린 기록물로서의 글이 아니라 단독의 책이 되리라는 판단이 있었기에 이 책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쉽진 않겠지만, <호수 일지>는 어떤 글쓰기인지 얘기 나눠보고 싶어요.

  2. 저는 이 책이 ‘문학적’이라고 생각했고 독특한 방식으로 ‘문학적 공간’을 여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여기서 제가 ‘문학적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글을 통해 열린 공간’이지 시적이라거나 소설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문학적 공간이라면 길거리에 붙어 있는 광고 문구 또한 문학적 공간을 열어요. ‘창고 대방출’ 이런 문구도 분명 상상적 공간을 순간적으로 열어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문학적 공간’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비평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열렸고, 어떤 공간인지가 더 중요한 것이겠죠.

저는 <호수 일지>의 문학적 공간은 앞서 저희가 찬찬히 얘기 나누었던, 무용함과 충만함을 오가는 운동성의 행위가 열어 놓은 공간들이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문학적 공간이 또한 동시에 행위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행위와 글쓰기는 원본과 기록물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끊임없이 피드백하는 관계처럼 보입니다. 행위만으로는 열리지 않고, 글만으로는 열리지 않고, 이 둘이 관계맺어야만 열리는 공간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호수 일지>라는 책의 출판 자체가 <살아있는 산>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도 생각해요. 그게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저의 해석에 관해서 얘기 한번 나눠 보면 어떨까요?

  1. 글쓰기, 혹은 몸/행위와 글쓰기의 관계가 작가님의 전반적인 작업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실천을 만들어내는지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지난 12월 열렸던 개인전에서 또한 작가님은 ‘글’ 혹은 ‘쓰기’를 통해 무언가를 하셨었죠. 작가 본인을 ‘몸의 부대낌’ 을 통해 작업한다고 소개하기도 하시구요. 최근 전시를 함께 살펴보면서 몸/행위와 글/쓰기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