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안무된 걷기의 정치적 가능성에 대하여

Step x Step(코리아나미술관, 2023) 전시 연계 프로그램 애프터워크살롱 #1 비평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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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굳이 설명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일상적 몸짓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걷기는 끊임없는 움직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화된 움직임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걷기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을 수없이 잘게 쪼개어 이리저리 바꾸어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불현듯 일상 전체를 총체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이 지치지 않고 걷기에 관심을 둔 이유다. 안무화된 걷기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정치적 순간을 열어내고, 우리는 깨지고 비틀린 걷기가 불러 일으키는 새로운 운동성 속에서 다시금 현실을 방문해야 한다. 이번 강의는 걷기를 안무화한 예술 실천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며, 오늘날 안무된 걷기가 어떻게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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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한범 입니다. 제게 퍼포먼스라는 건 지난 시간 동안 의미가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퍼포먼스라는 것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정의하는데요, 움직임, 움직임과 관련된 것,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건을 일으키고 변화와 변형을 가져오는 힘의 작용을 저는 퍼포먼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움직임을 다루는 매체로서의 몸이라는 게 퍼포먼스 장르로서 우리에게 익숙하게 형성 됐기 때문에 퍼포먼스는 주로 몸과 관련된 논의 속에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지지체의 특성에 국한하지 않고 조금 더 폭넓은 차원에서 움직임을 다루는 일로서의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움직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치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움직이는 것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움직임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지형이 변하고 형태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는 그 자체가 저는 우리가 추동해야 되고 살펴봐야 하는 어떤 정치적 상황들의 양태가 아닌가 그래서 항상 저는 퍼포먼스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항상 좀 그런 방식으로 작업에 대해 질문하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10여년 전쯤만 해도 미술에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에 관한 얘기가 많이 있었는데, 요새는 미술을 얘기하면서 정치라는 단어나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치는 저에게 여전히 되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걷기와 안무된 걷기의 차이가 뭘까 고민했어요. 걷기 자체가 이미 안무인데 안무된 걷기는 또 뭐라고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조금 복잡한 고민들을 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안무된’ 걷기는 이미 안무인 걷기와는 조금 다른 걷기에 관한 얘기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시작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고 그 차이는 뭘 말해주는 걸까요? 저는 이 둘 사이의 아주 미묘한 차이, 거의 알아채기 쉽지 않을 만큼의 차이가 안무된 걷기의 정치적 가능성 있는 어떤 장소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늘 강연의 부제가 ‘리듬 어긋내기라고 달려 있는데요, 저는 차이의 장소, 그 어긋남의 장소가 리듬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 우리가 습득하고 있는 걷기가 리듬화된 걷기라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리듬이 있다면, 안무로서의 걷기는 그 리듬을 어긋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는 겁니다. 아주 느리게 만들거나, 비틀거나, 뒤집거나, 아니면 파괴하거나 하면서 우리는 리듬을 다룰 수 있습니다. 저는 안무된 걷기의 정치적 가능성을 논의해보기 위해서 몸의 문제를 먼저 살펴볼 겁니다. 그리고 나선 리듬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개별의 예술 작업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은 여러 이론가들의 텍스트를 경유해서 이 리듬과 안무의 정치성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볼 생각이에요. 이론의 유용함인 생각의 틀을 참조합니다.

걷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걷기를 두 가지로 구분하게 됐어요. 하나는 일상에서 내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고 나를 안정화하는 낭만적 걷기. 이 걷기에 대한 규정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춘 것이기도 해요. 일이 잘 안풀리거나 몸이 엉망이 됐다고 느꼈을 때 저는 자주 걸으러 나가거든요. 한참 걷다 보면 많은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듭니다. 다른 하나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걷기. 오늘은 아마 이 걷기에 대한 얘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최초로 미학적인 걷기를 인식했던 계기는 베케트의 와트라는 소설 속 한 장면이었어요. 와트라는 주인공이 나트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걷기를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예를 들면 와트가 동쪽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그의 가슴을 가능한 북쪽을 향해 돌리고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남쪽으로 뻗고 그런 다음 그의 가슴을 남쪽으로 향하도록 돌리고 동시에 그의 왼쪽 다리를 가능한 북쪽으로 뻗은 다음 또다시 그의 가슴을 북쪽으로 향해 돌리고 그의 오른쪽 다리를 남쪽으로 뻗어 다시 가슴을 남쪽으로 그리고 왼쪽 다리를 북쪽을 향해서 뻗어내는 것이다. 계속 계속 수차례 반복해서 그가 그의 목적지까지 다다를 때까지, 그래서 앉을 수 있을 때까지.” 10년 전 쯤 어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작가분이 이 부분을 발췌여 보내준 적이 있었고 그렇게 알게 됐죠. 이 읽기 경험은 제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도대체 이게 어떤 걸음인지 그려지지가 않죠. 저는 그 부분에서 매혹이 됐던 것 같아요. 걷기에 대한 묘사를 하는데 이게 이미지가 되지 않는, 내가 그려내는 못하는 어떤 걷기. 저자는 등장인물을 이동시키는데 왜 불가능한 방식으로 걷기를 시킬까? 오랫동안 그런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직 그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이런 불가능한 걷기, 부서져 있는… 뭐랄까 이걸 보고 있으면 양철 로봇이 끼긱 대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게 되니까 생기는 어떤 고통스러움도 느껴지고… 저는 이게 무척 미학적인 상태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미학적인 걷기, 걷기의 미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던 것이 이 텍스트를 만나고부터가 아닌가 회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가 제가 오늘 얘기할 걷기를 안무화한 작가들, 예술들, 그리고 안무된 걷기의 어떤 공통된 성질을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서져 있고 어긋나 있는 걷기들이요.

제가 글을 쓰면서 굴려본 첫 질문이 이거였어요. 저 사람(예술가)들은 왜 아직 걷지? 지금처럼 모빌리티가 강하게 형성된 시대에 이건 어딘가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지금같이 걷는 것 자체가 거의 퇴화하고 있다고 할 만한 세상에서 왜 작가들은 계속 걷고 있나. 이게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이에 대한 대답은 개별의 안무들, 작품들을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걸 비평의 작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조금 건너 뛰어서, 만약에 이렇게 여전히 걷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업이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고민했어요. 사실 이것이 ‘정치적이다’라고 규정하는 건 크게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보다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과 갈등과 관계를 보여줘야만 하겠죠.

다들 전시를 보고 오셨겠지만, 저는 이번 전시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작업이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2019)였는데요, 유튜브에 클립이 올라와 있어서 가져와봤는데 전시를 못 본 분들도 있을테니 잠깐 볼게요. 제가 이 영상이 되게 이상하다고 알아채는 순간이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저렇게 이상하게 휘날릴 때였거든요. 제목으로 추측해보자면 그러니까 되감기를 한거죠. 전시장에서 부가적인 자료로 배포됐던 뉴스 레터를 보면, 거꾸로 움직이기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활동가, 이론가, 예술가, 기획자들이 쓴 글이 모아져 있어요. 이 글들을 보면 무척 흥미로운데 이 영상이 가진 과격함과는 다른 과격함들이 있거든요.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는 거꾸로 간다는 것의 의미를 앞으로 나아가는 개발주의와 견줍니다. 개발주의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거꾸로 가자는 제안은 이 세계를 거부하자는 제안이기도 하죠. 개발주의의 입장에서 본 뒤로 가기가 후퇴를 뜻한다면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영상을 보면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 주장이 설득이 되는데, 분명 되감기를 하는데 이게 거꾸로 간다라는 걸 그리 쉽게 알아차리기는 어려워요. 즉 둘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거꾸로 돌아가지만 우리에게는 또 진행의 한 방식으로 수용되죠. 그런 이상한 어긋남을 효과적으로 다룬 작업이라는 생각인데, 작가들은 아주 단순한 추상적인 수준의 그 운동성을 세계 전체 그러니까 이 진보주의와 개발주의와 발전주의와 그 발전주의로 인해서 생겨난 엄청난 배제들과 그런 문제들을 비판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가져옵니다.

이런 생각은 이 전시에 포함된 다른 작업인 클라라 리덴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죠. 제목도 보면 ‘진보의 신화’죠. 거꾸로 걷기의 대명사인 문워크로 이 도시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리고 리덴의 다른 작업 그라운딩에서는 계속 넘어져요. 오늘 저도 다시 영상을 보면서 재밌는 순간을 발견했는데, 리덴이 횡단보도에서 넘어지자 뒤에 있던 일하던 흑인 남자가 도와주려고 약간 몸을 숙이더라고요. 저는 그 작은 몸짓이 말해주는 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넘어지는 것은 이 도시 사회의 맥락 안에서 도와줘야 하는 어떤 움직임인 거죠. 넘어진 사람은 약자가 되고 어떤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고 도움을 줘야 되는 대상이 되는 맥락 안에서 우리가 있는 건데, 그런데 작가는 그런 기척은 신경도 안 쓰고 일어나서 걷고 또 넘어지고 그냥 자기 걷기를 계속 반복할 뿐입니다. 그리고 클라라 리덴의 작업이서 이런 것들이 미세하게 표현되는 다른 방식은 그의 형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이에요. 이 퀴어성은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가 거꾸로 움직이기를 통해 획득하자고 주창하는 퀴어성과 같지만 또 다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걷기만 한다고 어디 퀴어적인 세계가 되겠어요.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가 언어적인 힘에 훨씬 많이 기댄다면, 리덴은 형상적인 힘에 더 지분을 내어주죠.

제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출간 준비중인 책이 있는데, 다원 우주: 포스트 개발 사전이라는 제목이에요. 제3세계의 활동가들과 학자들이 개발주의, 발전주의를 비판하는 용어집 형태의 책이죠. 여기서 개발에 반대하는 정치는 다양한 대안 세계를 향한 목소리들 사이의 협력이라고 얘기해요. 이런 생각은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가 제안하는 거꾸로 움직이기의 의미와 거의 같은 결에 있겠죠. 하지만 이게 정말로 정치적 가능성을 가진 언어인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보고싶긴 합니다. 예술의 정치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에 대해서 저는 오늘 리듬의 문제와 관련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의 작업을 처음에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다루는 리듬이 오늘 다룰 작업들 중에서는 가장 크고 너른 리듬에 관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세계가 형성된 리듬 말이죠. 그리고 그들은 그 리듬의 반대 리듬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고요. 이 리듬은 사실 인간적인 규모는 아니죠. 인간 문명이 발전한 전체적인 역사 안에서의 리듬, 우리가 지금 습득하고 체화한 관습들을 형성한 긴 시간과 복잡한 움직임의 결합입니다.

본격적으로 안무된 걷기를 리듬의 문제로서 다루기 위해 저는 몇몇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 볼 생각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마르셀 모스라는 인류학자입니다. 저서 몸 테크닉에서 그는 ‘몸 테크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회마다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자기 몸을 사용하는 방법”. 제가 ‘사회’와 ‘전통’에 강조 표시를 해놨는데요, 아마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게 서로 겹친 두 범주의 축이라는 것을 알아채실 거에요. 사회가 어떤 장소의 공시적인 상태라면 전통은 어떤 장소의 통시적인 상태입니다. 즉 몸 테크닉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 사회 안에서 형성되어서 전승되는 몸의 특정한 쓰임 방식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학적 대상이 되는 것이죠. 인간이 형성하는 어떤 몸이 문화적이고 관습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돼 있다는 걸 밝히는 작업인 거거든요. 모스는 수영 테크닉을 예시로 들어요. 자신의 세대에서 수영 테크닉은 잠수 테크닉에 선행했던 것인데, 다음 세대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말이죠. 그리고 자유형이 평영을 대체했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건 다음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 세대는 수영 선수를 일종의 증기선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즉 몸 테크닉은 자연스러운 배움이 아니라 무언가가 투사되고 투영된 매우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물론 모스가 이 몸테크닉의 형성을 말하는 방식은 사회적인 것이 반영되었다는 식으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문제, 생물학적인 문제, 그런 것들과의 작용과 반작용… 이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다만 우리가 인류학적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기에, 몸과 행위가 굉장히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도 일단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까 전통 얘기도 했지만, 모스에게 있어 몸 테크닉이 성립하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전승입니다. 할머니가 딸을 가르치고, 딸이 또 나를 가르치고 또 내가 딸을 가르치고… 이 반복이 몸 테크닉을 성립시킵니다. 그리고 전승은 변화를 허용합니다. 다만 전승 그 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죠. 다르게 보면 이것은 훈련이고 교육입니다. .

다이애나 테일러는 퍼포먼스 이론가인데요, 몸과 행위가 어떤 사회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연구합니다. 그에게 퍼포먼스는 한 사회와 문화의 기억을 체화하고 전승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는 아카이브와 레파토리 개념을 다루는데요, 흔히 우리는 아카이브라고 하면 단단하게 남는 기록 매체를 떠올리지만, 테일러는 반복되는 움직임,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 자체가 일종의 저장소라고 여깁니다. 일시적이고 사라지지만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남기는 매체. 『퍼포먼스 퍼포먼스』라는 책에 쓰인 다음 내용을 한번 읽어볼게요. “일찍이 나는 퍼포먼스, 몸짓, 구술, 움직임, 춤, 노래 등의 행위가 몸 안에 담기는 현상을 레퍼토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대개 일시적이고 또 재생산할 수 없는 지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레퍼토리에서 존재함은 필수 조건이다.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사람들은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에 참여하고 또 전파의 과정에 기여한다. 하지만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행위들이 늘 일정하게 유지되지는 않는다. 레퍼토리는 ‘의미’에 담긴 안무를 보존하고 또 변형시킨다. 나는 이 개념을 책, 문서, 뼈, DVD 등과 같이 더 전통적인 아카이브 오브제들과 연결해 논의를 발전해 나갔다. 이론적으로 아카이브는 시간의 흐름이 초래한 변화에 저항한다. 오랫동안 지식을 보존할 수 있으며 접근 또한 쉽다. 한편 비교적 안정적이라 여겨지는 아카이브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를 구성하는 사물들과 함께 변화를 거친다. 새로운 오브제가 아카이브에 유입되는 동시에 일부는 마법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테일러의 퍼포먼스 이론의 핵심 중 하나는, 고정불변한다고 여겨지는 것조차 반복을 통해 변한다는 것이에요. 레퍼토리는 두 번 행해진 것, 반복되기 때문에 존재하는 어떤 것. 여기서 반복을 모스의 개념 속에서 비추어 보자면 바로 전통이겠죠.

리듬이라는 것의 핵심 또한 반복입니다.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어떤 질서를 구축하는 행위와 같아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뭔가가 반복됨으로써 그 뭔가가 있다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뭔가가 ‘어떻게’ 있다고 인식을 하게 되죠. 예를 들면 해가 매일 뜨죠. 해는 매일 뜨기 때문에 하루라는 단위가 생겨납니다. 겨울은 어떤 주기에 따라 찾아오니까 계절이 됩니다. 반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리듬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상을 한번 툭 쳐봅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두고 리듬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치게 되면 그 소리들의 리듬을 말할 수 있게 돼요. 리듬은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규칙을 가지고 반복된다. 그것은 그러므로 어떤 질서를 형성한다.

음악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가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현대적인 음악이란건 바로 그러한 건축적 개념을 거부하거나 비껴나려는 시도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현대적인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저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총체적으로는 반리듬의 현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던 역사적 시기의 끝단에서 등장한 것들. 반건축. 어긋남.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안무된 걷기의 어긋남의 문제들인 것 같습니다.

모스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관계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는 나는 리듬 연구가 바로 그 전염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단지 한 개인에게 발생하는 일에만 주목하는 어떤 연구보다 더 진전된 분석을 낳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런데 가령 무용을 피상적으로나마 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해 보면, 무용이 한편으로는 모든 공연자의 동일한 호흡 운동, 심장 운동, 근육 운동에 대응하며, 때로는 관객까지도 그 운동을 공유한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와 동시에 춤이 일련의 이미지를 전제하고 그것을 뒤따른다는 사실도 분명하지요. 이 일련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무용의 상징이 공연자와 관객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 리듬의 의미와 그 작용에 대해서 모스도 알고 있던 것이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전염성’이라는 표현입니다. 전승과 전염은 다르죠. 전염은 나의 의지 없이도 내게 침투하는 것입니다. 리듬의 무서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춤을 따라 추지 않더라도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이미지에 속하게 된다는 것. 그런데 또 이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가서 식당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음식을 주문하고 돈을 내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그걸 따라해요. 그 사회의 리듬을 습득해서 그곳의 리듬에 동화되려는 노력인겁니다.

그런데 리듬에 관한 사유가 아주 새로운 담론은 아니예요. 리듬은 20세기의 유물론자들이 현대 사회와 도시 문화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맹렬하게 연구했던 대상이기도 하거든요. 앙리 르페브르는 리듬분석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몸은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는 리듬들의 꾸러미(paquet)로 이루어진다… 몸은 리듬들의 다발(gerbe), 다른 말로 리듬들의 묶음(bouquet)을 만들어 낸다.” 한 사람은 하나의 리듬으로만 형성된 게 아니라 도저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리듬으로 형성이 되어 있고 그 인간은 그 리듬을 통해서 움직이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게 돼요. 이 책의 결론에 보면 이렇게 써놨어요. “리듬들에 대한 분석과 리듬분석 프로젝트는 단 한 순간도 몸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해부학적 혹은 기능적 몸이 아니라 다리듬적이고 조화리듬적인 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몸은 항상 현재하는, 항상적인 준거였다. 리듬의 이론은 몸에 대한 지식과 경험 위에 구축된다.” 리듬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몸이라는 게 너무 중요한 존재인 거예요. 여기서 몸은 해부학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에요. 르페브르는 리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요. “동일리듬성: 리듬들의 동듬함, 혹은 동치; 조화리듬성: 서로 다른 리듬들의 결합을 전제; 부정리듬성: 리듬들이 서로 분리되고, 변형되고, 탈 동기화 한다.” 여기서 르페브르는 부정리듬과 관련해서 서술할 때 병리학에 대해 얘기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아프게 된다는 거죠. 내 존재가 외부와 불일치할 때 생기는 병리적 현상들. 리듬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병들은 외부와의 어긋남으로서 이해해볼수 있는 거에요. 아픈게 아니라. 부정리듬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어떤 자연스러움의 리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두 리듬이 한 필드에 있을 때 비로소 부정리듬성이 설명될 수 있겠죠. 그리고 둘의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입니다.

우리가 안무된 걷기의 정치성을 말할 때, 결국 부정리듬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제가 걷기를 낭만적 걷기와 미학적 걷기로 나누어 보았는데, 말하자면 낭만적 걷기는 동일리듬성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그러지고 흐트러진 주파수는 걷기를 통해 ‘정상화’ 되죠. 그러한 걷기 주체에게 세상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반면 부정리듬성의 미학적 걷기는 괴로울 수 있습니다. 이건 대단히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걷기 안무 작업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걷기를 수행하는 이들이 무척 힘들어보인다는 점이에요. 유심히 보면 쉽게 걷는 이들, 편안히 걷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어요.

부정리듬성의 어떤 가능성을 탐색했던 사람이 미셸 드 세르토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일상의 발명: 실행의 기예라는 프로젝트의 목적은 소비자의 위상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현대적인 생산주의와 소비주의 안에서 소비자는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지죠. 자본가가 상품을 만들어내면 소비자는 그 상품을 소비하는. 하지만 세르토는 소비자가 생산자라고 얘기합니다. “중앙집중화되고 시끌벅적하며 화려하고 합리적이고 팽창적인 생산에, ‘소비’라고 불리는 또다른 생산이 대응한다. 이 또다른 생산은 교활하고 산발적이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조용히 도처에 침투해 들어간다. 왜냐하면 이 생산은 자신이 생산해낸 고유한 생산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경제 질서가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생산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생산물 자체가 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생산물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본주의가 등장을 한다라고 얘기를 해요. 생산품을 어떻게 쓰게끔 하는 것까지가 자본주의의 설계라면, 상품 자체가 문제라기보단 상품을 쓰는 방식이 문제가 되는겁니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생각해보면, 그것의 중독성은 이미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미디어의 문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건 설계의 문제죠. 세르토가 말하고자하는 건, 일상에서 자본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입니다.

세르토의 이 작업과 공명하는 것이 저는 이본 레이너의 작업인 것 같아요. 지금 보시는 거리 행위(M-Walk)(1970)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로 40여명 정도가 거리를 걸었던 작업이었어요. 이본 레이너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요, 「도시에서 걷기」라는 작품이 있어요.


난 여전히 하루 중의 이 시간을 사랑해
첼시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쪽으로 세인트 마크까지
이 빠진 달
가을의 탑을 청소하기
태양의 빛 속에서 각각은 빛난다

가능한 오랫동안 문신 시술소를 지나쳐
손금 읽는 사람들, 작은 그리스 음식점, 잡화점을 지나쳐
아직 숨 쉴 공간이 남아 있다
이 게걸스런 마을에서

계속 움직여라


어긋내기의 관점에서라면, 시와 안무는 레이너의 작업 안에서 이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가 언어의 임의적 지시관계를 깨뜨리고 전혀 새로운 언어 사용을 제안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그의 안무 작업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어요. 이 시를 보면, 와트처럼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내가 “가능한 오랫동안” 어딘가를 지나쳐 걸어갈 것이라거나, “아직 숨 쉴 공간”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들. 그리고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명령 “계속 움직여라”라는 말.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움직여야하고 도시 속에서 우리는 움직여야한다는 안무적 제안입니다.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인 차이밍량의 <행자>를 봅시다. 아주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나오고, 느리게 걷는 사람 주변으로 이 도시의 일반적인 군상이 있어요. 그런데 제게 의미심장했던 이 작업의 핵심은, 행자도 군상도 아닌 그들 사이에 생긴 빈 공간이에요. 만약 행자가 도시의 다른 요소들과 비슷한 속도나 방식, 방향으로 걸었다면 이런 공간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 흐름이 하나로 동화되어 사라졌을 공간이죠. 만약 이 장면은 사람들이 그냥 교차하는 길거리의 풍경밖에 되지 않겠죠. 그런데 여기서는 또렷한 경계 공간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건 의도한다고 해서 의도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에요. 이건 그저 어떤 힘들의 경합으로 인해 비로소 가시적이게된 그런 공간입니다.

부정리듬의 걷기들이 안무 된 것이라고 했을 때, 이걸 조금 더 과감하게 다른 범주로 얘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즉 이것을 걷기가 아니라 춤이라 일러보면 어떨까요? 걷기가 아니라 이걸 춤으로 생각한다면 뭐라고 우리가 이해를 하고 좀 더 다른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넘어지고 천천히 걷는 게 아니라 그걸 춤으로 얘기를 한다면 뭘 할 뭐가 될까 이런 좀 저는 질문이 생겼던 것 같아요. 라샤 살티가 쓴 반란적 실천으로서의 춤(Dancing as Insurrectional Practice)이라는 글의 일부를 읽어드릴게요.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첫 2년 동안 매일의 거리 시위에서 신체가 중심이 됐다는 것은 명백했다. 내전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 하나였던 것, 즉 춤에서 특히 그렇다. 혹독한 추위와 극심한 더위 속에서도, 밤과 낮, 심지어 일부 장례 행렬에서도 반란군은 다양한 종류의 레반트지역 시골 민속의 전통인 다브케(dabkeh)를 춘다. 정권의 폭력과 테러 언어에 탐닉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기적적으로 확고하고 지치지 않는 헌신 속에서 이러한 창의적인 전략은 새로운 시민 참여와 정치적 주체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자기 자신이 형성하고 만들고 싶어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이념을 탐색하고 발생시키고 전달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걷기라는 것도 하나의 춤으로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춤을 추는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전시를 보고 걷기를 안무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봤을 때 그 안무된 걷기라는 걸 어떤 방식으로 규명할 수 있을까 하는게 저의 질문이었고 리듬의 문제와 결부시켜 그것을 정치화하여 독해하기를 시도해봤습니다. 안무된 걷기에 관해서 다른 견해나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같이 나눠봐도 좋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