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나선 운동과 시간-합성

Cotemporary Non-music vol.15(예술공간 돈키호테, 2021)

연구 발표자 류한길, 신예슬, 이승린, 이한범
일정 2021.7.2(금), 19:30 / 2021.7.3(토), 15:00
장소 예술공간 돈키호테 (순천시 금곡길33, 2층)

지난 4월 16일(금)과 17일(토) 양일간 예술공간돈키호테에서는 ‘음속허구:리듬과 믿음과 리듬’ 연구 발표회가 열렸다. ‘음속허구(Sonic Fiction) 연구모임’의 4명의 연구자는 작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음속허구의 관점에서 공동연구를 지속해오고 있고, 그 첫 번째로 ‘리듬’과 ‘믿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들었다. 16일 첫날은 신예슬(음악비평가), 이승린(소리문화연구자) 그리고 이한범(미술비평가) 3명의 이론가가 발표를 하고, 17일에는 음악가 류한길의 2시간이 넘는 긴 발표로 이어졌다.

신예슬 비평가는 서양음악사를 다시 되짚으며, 음정의 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배제된 소위 ‘악마의 음정’, ‘옳지 않은 음’ 혹은 ‘허구의 음(무지카 픽타)’이 ‘성스러운 음’ 혹은 ‘옳은 음’의 오랜 믿음에 가려져 왔던 경로를 탐색하고, 이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남겼다.

이승린 연구자는 본인이 숲에서 녹음한 소리를 스펙토그램(Spectrogram)으로 가시화해 보여주며(들려주며), “존재는 하나 잘 감지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들리지 않는) 영역 혹은 존재”를 다른 지형에서 파악 가능한 문화(믿음) 혹은 그 문화에서 만들어낸 의미구조로 보고, 그곳에 다가가기 위한 ‘허구적 방법론’을 계속 시도하는 과정에 있음을 피력했다.

이한범 비평가는 (스스로를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라 여기는) 가상의 존재 K가 믿음과 모종의 관계가 의심되는 미래의 흔적에서 리듬이라는 존재를 알아차리고, 아주 먼 과거로 그 흔적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어둠속에서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의 낭독은 어느 사이엔가 듣는 이의 난청을 의도하며 류한길 음악가의 방해 음향이 이리저리 유인책을 펼치는 가운데 섞여 들어가 ‘아직은’ 텍스트의 의미에서 비켜서있는 새로운 발굴지 - 전쟁터를 암시하고 끝났다.

둘째 날 발표를 진행한 류한길 음악가는 가청주파수 범위에 따른 청각테스트를 시작으로, 서로 상이한 주파수가 섞이면서 발생하는 맥놀이(비트)에서 선택적 리듬이 발생하는 과정을 시현하고, 이런 선택적 리듬이 음악사에서 어떻게 작동했고 정치와 철학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는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또한 이런 선택적 추출과정에서 배제된 영역과 존재에 대한 부정성이 우리의 믿음에 다분히 내재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예술공간 돈키호테 홈페이지에서 발췌

 

scrip

1.

지난 발표에서 저는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자 K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픽션 아닌 픽션을 써 보았습니다. K에게 있어서 미래라는 개념은 엔트로피가 극도로 증가한 무질서, 완전한 소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K는 인간 문명은 리듬을 생산하고 작동시키고 강화해 오며 미래를 향해 가속해 왔다는 사실을, 미래를 앞당겨 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활기차고 활발한 리듬은 역으로 문명의 빠른 몰락을 촉진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K는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 리듬이라고 믿었습니다. 미래를 발굴한다는 것은 리듬을 가지는 일이었습니다. K는 리듬이 형태화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소위 시대의 양식이라고 하는 물질화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K는 리듬이 모종의 권력적 이유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의심했고, 어떤 허위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런데 K는 리듬을 들여다 보는 와중 어떤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 존재를 좇아 K가 어딘가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2.

K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하기 바로 한 달 전, 저는 한 편의 짧은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눠 드린 글입니다. 임시로 팀을 꾸린 세 작가가 협업의 결과물을 선보인 전시에 대한 리뷰였는데요, 저는 이 전시를 보고,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 혹은 작품에 대한 해석적 접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의미 있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다는 이 셋이 협업한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이 작동시킨 어떤 운동성의 양태가 비평적으로 더 다뤄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작가나 작품 자체와 별로 관련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양태란 바로 나선 운동입니다. 전시장에 등장한 작품이라 불리는 것들은 나선 운동 안에서 생성된 부산물일 것이라고 여겨졌죠. 세 명의 작가는 약간씩 어긋난 꼬리 물기의 방식을 통해 협업했습니다. 우로보로스가 자기 꼬리를 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옆에 있던 다른 꼬리를 문 형국 이었달까요? 그 꼬리 물기는 몇 차례에 걸쳐 반복 되었습니다. 즉 회전했습니다. 이 회전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심장한 것이 바로 합성이었습니다. 꼬리 물기가 어긋난 지점에서 세 명 각자의 영토는 자기 장소를 지키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할 방식으로 합성되었습니다. 그 합성이 시간에 작품이랄게 부산물처럼 떨어져 나왔습니다. 물론 그 전시는 그렇게까지 과격한 합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결국은 자기 영토를 구획한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만… 여하간 제가 보기에 그 어긋난 꼬리 물기의 회전 운동은 일종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거나 변형시키는 힘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 운동에 대해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습니다.

“그래, 그것은 어쩌면 시간을 내건 전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경계선을 흐리는 합성이 영역들 사이에 틈을 내고 새로운 시간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막연히 이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저는 이 문장을 조금 더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이 문장을 썼다는 것 자체를 발표를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습니다. 나는 왜 하고 많은 표현 중 ‘시간’을 내건, 그리고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나는 왜 이 운동이 시간과 관련한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오늘 발표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보기를 시도하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를 저는 리듬을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파르마콘 같은 나선 운동성의 맥락에서 접근해 볼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선 운동은 언제나 무엇과도 다른 시간 모델을 만들어내는 합성 장치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서없고 잡다한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이리 저리 배치해 봤습니다.

3.

얼마 전 저는 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강원도 양구로 갔습니다. 그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파로호에 만들어진 꽃섬이라고 불리는 인공섬에 설치되었죠. 그곳의 풍경은 저에게는 너무나 한국적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적. 실제로 여기에는 한반도 모양의 인공 땅도 있죠. 꽃섬을 벗어나 저 한반도 섬 방향으로 습지를 가로지르는 아주 긴 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여유가 많았던 저는 이 길을 걸어보기로 했죠.

4.

걸어가던 중 저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물가에 나무 찌꺼기들이 모여 빙글빙글 돌고 있었죠. 처음에는 왠지 섬뜩했습니다. 저게 왜 돌고 있지? 한참을 가만히 봤고 그 이상한 순간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것들이 왜 돌고 있는지 궁금해졌죠. 사실 답은 간단했습니다. 바로 옆에 물이 빨려 들어가는 수로가 있었고 그 물길이 흐르는 힘과 물가 지형 사이의 모종의 관계로 인해 가운데에서 회전 운동이 일어났던 거죠.

5.

반대편을 돌아봤습니다. 사실 큰 소리가 계속 들리기도 했구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고요함과 큰 소리의 대비, 그리고 그것들의 언저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회전 운동을 보며 한동안 상념에 빠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인공 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말이죠. 저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상황들에서 발견되는 형태와 패턴의 유사성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6.

회전 운동은 결코 스스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용돌이는 모종의 힘의 작용을 감추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소용돌이에 흠뻑 빠져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염없이 물을 관찰하며 온갖 종류의 소용돌이를 발견했죠. 필립 볼은 흐름에 다빈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옮겨 적습니다.

“머리카락을 닮은 물 표면의 움직임을 관측할 것. 거기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는데, 하나는 머리카락의 무게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컬의 방향 때문이다. 따라서 물은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그중 한 지점은 원래 흐름의 추동력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한 움직임과 되돌아가는 흐름 때문이다.”

여기서 저는 무게에 대해 언급한 통찰이 흥미로웠습니다. 이탈리아의 외딴 바닷가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바다를 이해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 또한 전지구적 조류를 형성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염분의 농도 차이 때문이라고 통찰합니다. 무게는 회전 운동을 일으킵니다.

7.

소용돌이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를 가능케 했습니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바다의 여신 카리브디스같은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있죠.

8.

이런 이야기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오래된 파편 속에서는 이야기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9.

노르웨이 지방의 마엘스트롬 또한 빼놓을 수 없겠네요. 마엘스트롬은 큰 소용돌이라는 뜻입니다. 마엘스트롬은 카리브디스처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형상화가 아닌 소용돌이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10.

그런데 이 표현이 노르웨이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은 소위 노르웨이 나선 이상현상(Norwegian Spiral Anomaly)이라고 일컬어지는 2009년 관측된 현상을 찍은 것입니다. 미사일 발사의 흔적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을 곧이 믿기에는 어딘지 미심쩍습니다.

11.

베르세르크에서 그리피스가 신의 대리인인 고드 핸드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신이라는 존재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 신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속에서 등장합니다. 이 만화를 그린 미우라 켄타로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 그의 허망하고 비참했던 창작자로서의 삶이 대신 전해졌죠.

12.

나선은 이처럼 인간이 감당 못하고 이해 못할,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감각하지 못할 어떤 거대한 미지의 존재, 힘에 대한 상징으로서 자주 등장합니다. 이상한 종교 단체와 연루된 여성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트루 디텍티브의 매튜 매커너히가 일순 나선형을 그렸다 흩어지는 새떼의 모습을 보는 이 장면은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나선형의 등장은 어떤 거대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극도의 무력함을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13.

하지만 나선 운동이 이러한 신화적, 주술적 맥락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인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이어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나선형을 이루며 자라나는 식물들.

14.

놀이기구.

15.

계단.

16.

또 계단.

17.

귓속의 달팽이관.

18.

현대 의학 기술 또한 나선 운동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겁니다.

19.

정상적인 공교육(!) 제도에서 과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나선 은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20.

최초의 블랙홀 사진이라는 이미지에서 또한 나선운동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1.

상품의 생애주기를 논하는 경제학에서도 나선 운동이 도입됩니다. 상품의 생명이 소진하는 것은 하강하는 나선운동으로 표현되네요.

22.

생산성을 홍보하는 한 에이전시는 선형적인 것과 회전운동을 힐난하며 창조적인 나선 운동을 적극적으로 프로모션 합니다. 저는 왠지 이 기업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23.

여기서 하나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상승과 하강, 나선 운동은 사실상 3차원에서 방향을 지니고 이루어지는 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인파같은 평면 위의 진동으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3차원 공간 안에서의 운동이라는 이해하게 됩니다. 방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빨려 들어가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지거나 하늘에 수놓인 신적인 것의 상징물이 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자연히 어떤 시간성을 구성하게 됩니다.

24.

방향을 가진 나선 운동은 태양계 자체가 움직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주가 팽창하는 방향으로 태양계는 나아가고 있고 그 혜성적 궤도 안에서 태양을 구심점 삼은 행성들의 주기운동이 레이어링 되어 있죠.

25.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순수한 방향성일지도 모릅니다.

26.

구소련의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였던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는 코민테른, 즉 공산주의 국제연합의 유토피아를 형상화한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모습은 누가 보아도 상승하는 나선운동이죠.

27.

그런데 인류에게는 이 상승하는 나선 운동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심겨 있습니다. 바벨탑 신화가 이를 잘 대변하죠. 끝없는 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천벌을 받아 공통의 언어를 잊는, 절망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그 장면에는 무너진 나선형의 탑이 있습니다.

28.

나선 운동은 직선운동을 포함하기에 기둥의 조형에도 많이 사용됩니다. 상승의 역동성광 웅장함, 권력과 권위를 표현하기에 이만한 게 없겠죠.

29.

스파게티 면 종류 중 하나인 푸실리가 그런 거창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푸실리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어딘지 또 의미심장합니다. 푸실리는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총신’을 뜻하는 오래된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직 전투를 위해 사용되는 그 총.

30.

총알을 빠르고 정확하게 쏘아보내기 위해 총신의 안쪽 길, 강신, 건배럴 이라고 불리는 부분에는 나선형의 홈이 파여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총알이 나가면서 회전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물체에 도달해 파괴하고 관통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007 시리즈의 오프닝 시퀀스가 바로 이 강신을 표현하는 것이죠.

31.

총은 무언가를 죽이거나 파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당연히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살상력도 커지겠죠. 어떤 총은 총알을 음속보다 빠르게 쏘아내기도 합니다. 음속보다 빠른 물체는 공기를 뚫고 나가며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층을 뚫고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아주 큰 타격 소리가 발생합니다.

32.

이를 수퍼소닉이라고 하는데, 음속보다 빠르게 나는 제트기의 비행에서 종종 관측되는 현상입니다. 전투를 위한 군사무기는 속도가 생명인가 봅니다.

33.

소리의 속도를 넘어서는 일은 그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주 파괴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제트기는 도심 위에서는 음속을 넘어 비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음속을 넘어서면 굉장히 큰 소리가 나기 때문에, 은밀한 살상을 수행해야 하는 작전에서는 적에게 위치를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총알에 화약을 적게 넣어 일부러 음속보다 느린 속도로 날아가게 만든 서브소닉 총알도 있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생성과 파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34.

그런데 저는 이 음속을 돌파하는 총알의 사진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총알이 지나온 길에 남은 흔적이죠.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물체라면 당연히 곧고 정갈한 직선의 궤적만이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어딘지 혼란스럽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35.

이 사진은 매우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입니다. 모래 위를 달리고 있고, 그래서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모래폭풍이 일어나죠. 그런데 이 모래폭풍이 일어나는 모습이 어딘지 총알이 지나간 자리의 형태와 유사합니다.

36.

우리는 이 현상을 이미 밝혀진 과학적 지식을 통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레이놀즈 계수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체역학에서 레이놀즈 수는 “관성에 의한 힘”과 “점성에 의한 힘”의 비로서, 주어진 유동 조건에서 이 두 종류의 힘의 상대적인 역학관계를 정량적으로 나타낸다.

즉 어떤 매질을 통과하는 이동하는 힘에 대한 공식인데요, 레이놀즈 계수가 10 이하일 때에는 유체가 큰 변형 없이 지나칩니다.

37.

천천히 이동하는 보트의 뒤로 남은 파동은 정갈하고 아름답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네요.

38.

물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의 파형 또한 마찬가지구요.

39.

자, 그런데 레이놀즈 계수가 증가하면, 즉 점성은 그대로인데 속도가 증가하면 기이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속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미시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소용돌이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속도가 올라간 회전 운동은 어느 순간 안정된 대칭을 깨는 작용을 합니다.

40.

이 현상을 카르만 와류라고 부릅니다. 와류는 영어로 ‘vortex’ 인데요, 언뜻 소용돌이 나선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와류의 특징은 반대되는 방향의 소용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속도가 올라가면 기존의 회전 방향과는 반대되는 방향의 회전 운동이 연쇄적으로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41.

이 현상은 흐름이 있는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42.

저 유명한 고흐의 그림 또한 이 와류를 그린 것이라고 기상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사실 놀라운 것은 이게 와류라는 사실보다 고흐가 이 와류의 복잡성을 맨눈으로 인지했다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와류는 일종의 혼란과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의미심장하게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43.

베르세르크 세계관에서 와류계는 심연의 중층인 유계로 온갖 물질-비물질적 존재들이 드글드글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퀴어 상태의 세계입니다. 거기서는 무엇이 있든 어떤 일이 생기든 이상할게 없는 곳이지만 인간은 범접할 수도 없고 생존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44.

저희는 지금까지 나선 운동을 속도와 방향의 측면에서 살펴보았고 속도에 따라 어떤 무질서와 모순, 형태의 무너짐과 생성이 생겨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은 그것의 위험성과 공포, 무력감 같은 것을요.

45.

여기서 저는 현대적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로 눈을 돌려 보려 합니다. 기이할 정도로 나선 운동에 빠져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수많은 실천을 말입니다.

46.

직접적으로 나선형을 그리기도 하고요.

47.

이렇게

48.

그리고 이렇게

49.

혹은 이렇게

50.

하지만 나선형이 드러난 모든 이미지를 취합할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작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미지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 표면적 현상들 속에서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중하게 된 것은 두 다른 역사적 계열체입니다. 하나는 앞서 얘기했던 속도와 관련된 것으로, 대체로 영화적 장치의 발명으로 혹은 속도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무엇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움직임을 각인하고 재생산하는 실천들 속에서의 나선 운동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시 원형적 세계 속으로, 그러니까 지금의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나선 운동이 불러 일으키는 잊힌 시간 모델을 소환하는 그런 실천들입니다. 먼저 첫 번째 계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51.

최초의 영화 작가라고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는 로이 풀러라는 무용수의 무대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를 든 뤼미에르 형제에게 의미심장했던 것은 로이 풀러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회전한다는 것이었을테고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담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52.

빈혈증의 영화(Anemic Cinema)라는 뒤샹의 1926년 작품은 사진가 만 레이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뒤샹이 로토릴리프라고 부른 6개의 원판이 회전하면서 불러 일으키는 시각적 환영이 이 영화의 주를 이룹니다. 단순한 형태의 반복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마치 무한대로 긴 시간을 생성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입니다.

53.

이 무한에 대한 감각과 동경은 어쩌면 동영상 장치를 탄생시킨 근본적인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최소한의 자원을 사용한 끊임없는 움직임의 생성. 아주 짧은 순간을 무한에 가까운 시간으로 전화시키는 것.

54.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이러한 욕망은 이미 여러 장치를 통해 구현되어 왔습니다. 애니메이션 장치 조에트로프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죠.

55.

이것은 어쩌면 폭발적인 대변혁을 가져온 산업화 사회, 근대라고 불리는 어떤 체계의 도입과 관련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의 연속을 위한 무한한 에너지의 공급을 원칙으로 합니다.

56.

물론 동시에 엄격한 통제와 권력 모델이기도 했지만요. 운동성의 생산과 통제의 생산 모두 엇비슷한 원형 운동을 전제한다는 것은 어딘지 의미심장합니다.

57.

영국의 포크로어테입스(folklore tapes) 라는 한 작은 프로젝트 레이블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민속적인 문화와 신화의 흔적을 찾아가 필드레코딩을 하고 다시금 재생산하는 소리 연구 작업을 선보입니다. 여기서 발행하는 시리즈물 중 인더스트리얼 포크로어 시리즈가 있는데요, 산업의 민속적 소리를 채집한 음반입니다. 세 번째 앨범은 스프링이라는 제목을 달고 빙빙 꼬인 산업 공산품의 조각을 표지로 보여줍니다.

58.

다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1961년 브라이언 지신이 만든 드림머신은 눈을 감고 감상하는 영화적 장치입니다. 눈을 감아도/감아야만 보이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종의 환영 생산 기계인데요, 스트로보스코프와 같은 효과는 뇌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9.

이 모든 애니메이션, 움직임에 대한 열망은 특정 시간성의 재생산임과 동시에 시간성을 변형시키는 것을 지향하는 탐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빙 이미지라는 것을 일종의 시간 생산 장치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자 여기서 저는 다시 무빙 이미지, 나선 운동은 속도의 문제와 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속도에서 우리는 영화적 환영을 지각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픽션을 소환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속도가 변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다른 현실이 펼쳐지나요?

60.

베케트의 저 유명한 TV 방송용 시리즈 쿼드는 이와 유사하게 무한에 다가서기 위한 일종의 스코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한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무한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이상한 현실의 등장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끊임없이 회전시킵니다.

61.

무한을 향한 평면 위에서의 운동은 에셔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공간화되기도 했죠. 무한이라는 것을 향한 열망에는 왜 이토록 회전하는 운동성이 도입되어 있을까요?

62.

소위 아프로퓨처리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선 라의 수많은 비주얼 아트워크에 나선형, 그것도 정갈하지 않고 기울어진 형태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미래를 ‘다른 시간’이라고 정의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예기치 못한 다른 사건의 형태로서의 미래. 그것을 추동하는 운동으로서의 나선 운동.

63.

자 이제 나선 운동을 참조하는 다른 두 번째 계열의 현대적 예술 실천을 살펴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들은 앞의 영화적 실천, 무빙 이미지의 생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간 모델을 상상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원시성을, 인간이 자연에서 분기되기 이전의 어떤 결합 상태를 소환하는 것이죠.

63.

수많은 고대 유물 유적들은 나선형의 형태로 구축되어 있거나

64.

나선형의 도상을 품고 있습니다.

65.

이렇게

66.

혹은 이렇게

67.

또는 이렇게

68.

이런 모습이거나

69.

터키에서 발견된 괴베클리 타페 유적지는 기원전 1만년~8천년 사이에 구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유적으로, 약 200여개에 달하는 돌기둥이 20여개의 원을 구성하고 있다고 현재까지 조사되었습니다.

70.

가장 위대한 현대적 예술가 중 한 명인 로버트 스미스슨은 끊임없이 고대의 형상들, 그 중에서도 나선형을 소환합니다.

71.

아마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나선형 방파제는 미국의 그레이트솔트 호숫가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자연의 시간과 등가적으로 서서히 침식되고 소멸해 가는 중이죠. 이것이 바로 스미스슨이 말하는 예술작품의 근원적인 조건으로서의 엔트로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탄생과 함께 소멸해 가는 것, 명료한 형태는 흐려지고 부서진다는 것. 엔트로피의 증가는 예술 작품을 약화하며 수많은 다른 형태들을 발생시킵니다. 예술 작품은 저 스스로 시간이라는 합성 장치의 재료로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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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라는 저서에서 전통 사회들은 시간의 갱신을 이루어내는 다른 방법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방법들을 실행에 옯겼다, 역사적인 시간에 저항했다고 말합니다. 나선형이라는 표상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가 여전히 자연에 통합되어 그것의 실재적 시간을 모델화한 인지의 흔적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모든 제도에 대한 반발이 폭발하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어떤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클린 드 용은 기 드보르, 아스거 욘 같은 이들과 함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구성원이었고 1960년 SI의 분리와 현실정치화 속에서도 상황주의의 이념을 예술 작업으로 이어 나간 인물입니다. 그가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작업하여 총 6개의 이슈를 발행한 시츄에이셔니스트 타임스에는 유물과 도상, 현대 예술과 이미지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을 통해 자연과 문화의 근원적인 분리 상태를 다시 교통시키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가장 급진적 예술 실천이 원시로 회귀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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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재클린과 동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루시 리파드의 관심과도 맞닿는 것입니다. 리파드는 당대의 예술가들의 작업을 고대의 도상들과 연결시켜 파악하며 잊힌 시간과 그 시간과 결부된 사회와 윤리의 회복을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한번 곱씹어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여성의 사회적, 생물학적, 정치적 경험은 남성과 다르다. 예술은 이러한 경험에서 탄생하는 것이고, 진정성을 위해 이러한 경험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 여성의 예술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접근을 통해 역사에 대해 여성들이 깨달은 바를 무효화하고 위조하는 것이다. 즉 여성 문화의 역할 중 하나는 언제나 예술과 삶, 사고와 감각, 자연과 문화를 통합하는 것이었다는 점 말이다. 우리는 남성의 자연 지배가 생태학적 재해, 공해, 물 부족, 기아, 과잉 인구, 민족주의, 군국주의, 탐욕으로 이끌었음을 자각하며, 자연과 문화가 갈라진 지점이 어디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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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다시 레이놀즈 계수의 가장 나아간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레이놀즈 계수가 20만이 넘어가면, 그러니까 저도 이게 어떤 속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뒤에 남겨지는 것은 이제 와류도 아닌 그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개별적인 움직임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가속화된 형태의 와류, 질서가 힘을 잃고 흩어진 엔트로피가 높아진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선형적 모델도 회전 모델도 아닌 일종의 노이즈적 시간 모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극히 실재적인 현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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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원시적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이해한 것은 자연이란 것은 아주 긴 시간 단위 안에서는 이와 같은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시간 모델의 형태라는 것을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시간 모델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와 같은 선형성의 서사보다는 그것 자체에 대한 감각이 우선했을지 모릅니다. 적극적으로 합성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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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선형적 시간 모델이 인간이 발명한 인공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우리는 선형적 시간 모델을 자연스러운 인지의 체계로 받아들인 이후 자연 상태의 시간 모델, 즉 무한한 진동의 순간을 청취하는 법을 잊은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 모델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베르그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순간들의 연결로서의 시간보다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운동성 그 자체로서의 시간 모델을 말합니다.

수학적 방정식이 표현하는 것은 항상 완성된 사실일 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지속과 운동 자체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좁은 간격을 취하더라도 수학이 자리잡는 곳은 항상 양 끝점이므로, 그 사이의 간격 자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끊임없이 변하며 모든 것은 진행 중에 있고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사상하고 한 사물을 그에 대응하는 동일한 말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이 항상 동일하며 불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상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말은 순간순간 변하는 개인의 섬세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덮어 버린다. 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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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에 대한 전제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무한속도 개념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오스. 자신의 무질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윤곽이 잡혀 가던 모든 형태가 흩어져 버리는 무한 속도에 의해 정의. 그것은 무가 아니라 잠재적인 것에 해당하는 진공인데, 이 진공은 모든 가능한 입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공속성도 준거도 귀결도 없이 나타나고 이내 사라지는 모든 가능한 형태들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탄생과 소멸의 무한 속도다. 변이한다는 사실 외에는 그 무엇도 연속적으로 존속하지 않는다. 카오스를 특징짓는 것은 규정들의 부재라기보다는 규정들의 윤곽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한 속도다. 즉 그것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하나의 규정으로의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두 규정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불가능성인데, 왜냐하면 하나의 규정은 다른 하나의 규정이 사라져버린 후에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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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재의 풍경에 대해서 곱씹어봅니다. 렘 콜하스는 정크스페이스라는 용어로 후기자본주의의 소비사회의 풍경을 통찰했습니다. 이 풍경은, 단적으로, 모든 것이 정체되고 끊임없이 쌓여만 가는 회전 운동 없는 거대한 쓰레기 산입니다. 미로에서 끊임없이 배회할 뿐인, 방향도 와류도 노이즈도 없는 퇴적의 장소에서 어떤 회전운동을 불러 일으킬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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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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