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사물의 힘을 따라서: 픽션의 실재를 픽션화하기

인디스페이스 비평기획 영화를 말하다

program

이승민이 한국인을 관두는 법을 말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두 얼굴”

이한범이 요석공주돌과 요정을 말하다
“사물의 힘을 따라서: 픽션의 실재를 픽션화하기”

김병규가 라오스백서를 말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기까지, 라오스백서의 ‘애매한’ 시간에 서서”

유운성이 수리세명성, 그 6일의 기록을 말하다
“행동에서 담론으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교훈”

손희정이 콩나물,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사라진 밤, 잘돼가? 무엇이든을 말하다
“여성감독 단편선: 여성감독이 만들면 다른가?”

나호원이 고치장미여관을 말하다
“수상한 나라의 앨리스: 장미여관, 또는 영화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영화관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나”

syllabus

임영주의 요석공주돌과 요정은 ‘돌’에 관한 영상 작품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발에 치일 만큼 흔한 물질일 뿐이라 여기기에 그 사물이 가진 힘은 지나치게 수행적이지만 종교적이라고 하기엔 부박하다. 작가는 그 사이 어드메에서 마치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목격담을 통해서만 사변적인 몸체를 드러내는 돌의 힘을 추적한다. 미신과 유사과학, 기묘한 사회 현상과 관련된 이미지와 이야기의 뒤를 좇으며 그것이 인간의 행동, 사고, 언어, 나아가 도시의 구축에 이르기까지 실재적 효력을 발휘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즉 세속적 신앙이 한국이라는 장소와 그 구성원을 어떻게 은밀히 운영하는지를, 반대로 한국의 세속성이 그 허구를 어떻게 강화하는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과 사물-이미지의 힘을 따라 나서는 여정이자 당대의 한국을 가시화하는 우회적인 민족지이다. 그리고 실재를 구성하는 허구에 대한 또 다른 무언가이다. ‘또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위해 우리는 픽션화하기 라는 방법 혹은 실천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볼 것이다. 이것은 임영주의 작업을 당대의 풍경 속에 기입하는 하나의 도구임과 동시에 그 풍경을 마주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요석공주​ Princess Yoseok​ | 2018 | 44분 | 드라마
요석공주. 정설과 속설 사이 귀신같은 인물. 신라 태종 무열왕의 딸이자 원효를 만나 설총을 낳았지만, 요석궁에 살았다 하여 이름 없이 그저 요석공주라 불리었다. 1500년 후, 길에서 낯선 이를 따라간 후로 이명을 듣게 된 여자(요석)와 천이통을 연마하기 위해 수련의 길에 오른 남자(원효)는 소요산에서 만나게 되는데…

돌과요정Rock and Fairy​ | 2016 | 46분 | 다큐멘터리
돌과 요정은 하늘에서 떨어진 돌의 힘을 믿거나, 사금을 요정님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돌을 찾아가는 여로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기반한 판타지물이다.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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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임영주 작가의 2016년 작품 <돌과 요정>, 그리고 작년 여름 개인전에서 선보인 <요석공주> 두 편의 영상 작품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임영주 작가는 영화 작가라기보다는 시각 예술가로, 오늘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영상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조각과 설치, 회화, 아티스트 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현합니다. 때문에 임영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안의 오디오-비주얼뿐만 아니라 스크린 바깥의 요소들에 대한 연결이 필요하죠.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임영주의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함께, 작가의 작품이 저에게 제기한 몇몇의 토픽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돌’이라는 사물이 생성하는 실재는 어떠한 픽션적인 힘을 가리키는가? 그 힘이 일종의 담론 혹은 지식의 한 형태라면, 그것은 작품을 통해 어떻게 다시 픽션화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의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의 결합에 대해서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대를 구조화하는 힘에 대한 당대적 주체의 서사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생산하는 지식이 어떻게 예술적 실천으로서 기능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돌과 요정>, <요석공주> 이 두 작품은 제가 임영주 작가의 작업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처음과 끝인데요, 즉 <돌과 요정>으로 작가의 작업을 알게 되었고, <요석공주>를 가장 최근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여러 개인전과 기획전, 비엔날레 등을 통해서 그 밖의 다른 작업들을 경험하며 작가의 작업 세계가 가진 미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고, 저는 이제 거칠게나마 임영주라는 작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임영주의 작업은 그가 주목하는 대상이 독특하고, 기괴할 정도로 과격하고 거칠며 문법적이지 않은 오디오-비주얼의 배치를 이용합니다. 한마디로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데요, 저는 이 어렵다는 것이 단지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돌과 요정>이 시작이었고 <요석공주>가 가장 최근의 경험이며 그 중간중간 작가의 여러 작품을 경험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저는 두 종류의 경험이 더 중첩되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가 임영주의 작업과 동시간대에 드러난 다른 작가들의 몇몇 작업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간 동안 그 작품들과 결부된 시공간, 즉 당대라고 하는 장소의 특수성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이 둘을 임영주의 작품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가져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작품을 구성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힘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힘의 영역에 기입되어 있는 주체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일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시공간적 특수성 속에서 작품을 어떻게 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시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 작품을 가능하게 한 힘을 추론하는 것, 그 추론을 다시 작가의 작품으로 피드백시켜 작가의 예술 실천이 당대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건데요, 작가의 개별 작품을 미학화시키고 내적으로 서사화시키는 것이 일종의 성좌를 그려 보는 일이라면,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문은 과연 무엇이 이 별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별자리의 배치를 만들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세계를 특수한 경로로 탐험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의미한 텍스트이자 가시적인 징후라는 믿음을 회복시키고, 그러한 예술 작품이라는 가시성을 운용하는 힘의 성질과 크기, 방향을 서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별자리가 그 비가시적 힘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즉 우리에게 어떠한 풍경을 내어 보여주는지, 어떠한 형상을 내어 보여주는지, 어느 방향을 일러주는지를 이해해보는 것입니다.

서두가 길었는데요, 사실 이렇게 좀 장황하게 얘길 하게 된건 오늘 이 프로그램이 ‘비평이 영화를 말하다’라는 기획이고, 이에 따라서 저는 비평이 말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임영주의 작품을 경유하는 저의 비평적인 입장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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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요정>의 마지막 부분에도 잠깐 삽입된 푸티지와 관련된 뉴스 보도.

합리적, 이성적, 윤리적, 또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뉴스에서 풍수지리학자의 말을 진지하게 인용하는 것이 사실 굉장히 기괴한 현상이지 않을까? 이것이 기괴한 이유는 뉴스라는 형식과 풍수지리학이라는 영역이 서로 다른 지식 체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에 대한 믿음은 뉴스라는 미디어의 형식을 통해 유포된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한데 섞여 들어가 실재를 구성하고 효과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가? 이 뉴스는 임영주가 주목하는 문제를 짧고 강렬하게, 그리고 명백히 표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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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뭔가 있는데 말이지>
한국 TV 드라마의 장면들을 확대하고 편집한 영상. 러닝타임 내내 하단에 ‘분명 뭔가 있는데 말이지’가 자막으로 떠 있다. 작가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에서 이와 같은 대사나 장면이 많이 나오고 또 서사적으로 중요하게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즉 드라마 안에서 인물이 그가 관찰한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함으로써 서사가 기괴한 방식으로 전개 될 개연성을 주는 것이다. “분명 뭔가 있는데”는 한국의 통속 드라마의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분명 뭔가 있지만 그것이 명백하지 않는 상태에 끌리는 임영주 자기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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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곳에서 ~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구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활동과 ~은 어떻게 일어나며, 이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올법한 문장에서 목적어를 빼자 이 문장은 금세 “분명 뭔가 있는데 말이지”와 같은 수준의 비과학적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에 들어갈 무언가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임영주의 작업을 추동하는 동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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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임영주가 2016년 제작한 일종의 아티스트 북이자 리서치의 결과물인 “돌과 요정 1: 괴석력”의 도입에 있는 장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에는 저희가 오늘 보았던 <돌과 요정>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포함하여 한국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돌과 관련된 비합리적이고 일상적인 신앙들에 관한 리서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돌 이외에도 바람에 관한 챕터도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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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작가의 소개를 한번 보겠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도중에 행동이나 사고를 멈추고 어떤 물체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물체의 어떤 능력이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 것인가

이 책은 이렇듯 물체(석石)에 대한 광범위한 질문을 시작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며 답을 유추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물체(석石)가 가진 물리력物理力과 사고력思考力이 인류라는 종種의 행동과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임영주, 『돌과 요정 1: 괴석력』, 201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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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석력 怪石力

“초상현상[超常現象, paranormal phenomena]중 하나.

괴석력은 물질, 특히 광물질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힘과 초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각각 괴[怪,odd] 석[石,rock] 력[力, force] 셋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동시에 괴석력 하나의 본질을 이르기도 한다. 인간의 능력이라 착각되는 수많은 현상들이 실제로 괴석력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을 시작으로 여러 현상의 연구를 통해 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

초상현상의 실험에서 실험체가 인간일 경우와 달리 실험체가 광물질일 경우 실험 내 변인의 통제와 조절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검증의 어려움을 넘어 수많은 현상들이 괴석력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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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대한 이와 같은 임영주의 입장,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진행한 작업의 방향에서 우리는 임영주가 상당히 유물론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물질 자체가 살아있고 물질을 움직이는 주권적 힘을 상정할 필요가 없는, 위로부터의 자연이나 정신에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를 자기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물질이라는 범신론자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급진주의적 유물론의 전통 위에 있다. 이러한 생기론적 관점에서 물질은 비로소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사물이 된다. 최근의 철학적 논의는 이를 신유물론, 새로운 유물론이라고 이름붙인다. 간단히 말해 물질성은 한낱 물질 그 이상이다. 테리 이글턴은 최근 저서 “유물론”에서, 이러한 신유물론이 실은 ‘늑대의 탈을 쓴 포스트구조주의’라고 설명한다. 즉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텍스트’가 결국 신유물론자들이 말하는 ‘물질’과 같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말을 부연하자면, 신유물론은 포스트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즉 인간이 세계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한다는 믿음을 의심하고, 인간과 자연계를 무차별적으로 휩쓰는 물질적 힘들을 지목함으로써 그 인본주의를 흠집 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신유물론이 노동과 자본이 탈물질화된 후기 산업자본주의의 본성과 무한히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환경과 잘 어울리는, 급진주의를 옹호하지 않는 관점이라고 비판하듯 그 정치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이러한 입장은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비판적이고 물질의 완강함을 옹호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임영주가 어떠한 유물론자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서 시작해 임영주가 어떠한 선택들을 해 나가는지를 짚어보는 것이다. 임영주의 작품을 유물론에 대한 논의로 수렴시키는 것도 어딘지 부당해 보이죠. 우리는 철학적 입장의 정치성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정치성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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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루고 있는 몇몇 사례들을 잠깐 보도록 하겠다. 이 사례들은 또한 개별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술술술 아파트>는 대구의 미래빌 4차 아파트를 취재한 작업인데, 풍수지리학상 음기가 강한 곳에 입지한 아파트 단지에 남근석을 세웠더니 조화가 맞아 임신이 잘되는 곳으로 유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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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으로는 촛대바위에 대한 조사가 있다.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사용되면서 동해의 랜드마크가 된 바위로, 특히 해가 바위의 머리에 꽂히는 해꽂이라는 키치적인 이미지로 유명하다. 임영주는 이것을 애국가라는 국가적 제의의 노래와 사람들이 생산해 내는 이미지의 구도적 특성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탐구한다. 말하자면 그 노래와 이에 따른 통속적 이미지의 재생산으로 인해 비로소 이 바위가 가시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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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는 돌과 요정1 괴석력 이후 돌과 요정 연작으로 두 번의 개인전을 진행한다.
하나가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 이고, 다른 하나가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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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 가 영상 작업이 중심이 된다면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는 회화와 조각 등 보다 물질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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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촛대바위의 풍경을 그린 임영주의 그림은 실은 그 자체로 키치적인 이미지와 그 구도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성기의 모양이다. 작가는 촛대바위를 찍은 이미지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양식과 소비의 패턴이 야동과 닮았음을 언급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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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껏 임영주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과 그에 따라 그가 오랜 시간동안 추적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번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픽션적인 것의 실재에 대한 의미를 한번 곱씹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픽션적인 것은 엄연히 존재(작동)하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냄새 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사물이나 상황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개념적으로 사실은 픽션적인 것이 허구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힘, 실재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힘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고, 정말로 그러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주제와 개념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임영주가 당대의 담론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특별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큰 범주 안에서 당대 한국의 미시적인 실재를 구성하는 픽션적인 것에 대한 감각은 동세대 시각예술 작가들의 작품이 펼쳐진 풍경 안에 명백히 기입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픽션적인 것이라는 것이 단 하나의 단일한 힘으로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세세한 결을 잘 따져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임영주의 관심이 그러했듯, 우리는 그 중에서도 기묘한 통속적인 믿음을 실재화하는 픽션적인 것에 집중한 사례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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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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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국민 매니페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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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솔, 크리크리 메리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라는 세속적인 기념일을 채우는 욕망을 B급 고어물의 형식으로 재생산한 작업. 이 작업에서 조야한 장식들과 가짜 신체의 장기들이 끝없이 부서지고 뒤섞이는데 그 조야함은 어느 순간 징그러움이 아닌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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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이 주목하는 실재란 과학적 지식 혹은 합리적 규칙의 작동과는 약간 어긋나 있지만 또한 그것과 겹쳐져 있는 통속적이고 비논리적인, 그러나 주체와 삶의 양태를 구체적으로 기획하는 특수한 힘이다. 이렇게 많은 작업들이 동시적으로 내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픽션의 강도가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나에게 더 흥미를 주는 이유는 그러한 힘들 자체를 주요한 관심사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박찬경 작가와 양효실 교수가 쓴 임영주의 작가론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비극적이라기 보다는 희극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박찬경은 <임영주의 우주여행>이라는 글에서 “비극이 진지하고 심각한 목표에 대한 주인공의 어쩔 수 없는 실패나 희생을 통한 목표 달성을 보여준다면, 희극은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에 대한 주인공의 여러 오류에 주목한다”라고 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대안적 세계로서의 픽션이 아니라 오류내기로서의 픽션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규칙이나 믿음을 웃긴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믿음의 구조를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한국의 미술사에 있어서 그 이전 세대 또한 한국의 뒤틀린 근대성과 이데올로기에 주목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예술적 대응의 방식이 나온 것에는 그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 주체를 형성한 시대적 담론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에서 비롯된 서사 전략이라고 말이다. 잉마르 베리히만의 <제7의 봉인>에 등장하는 ‘죽음’은 함정식의 작업에서 점집에 늘어선 서울의 뒷골목을 미러볼을 들고 뛰어 다니고, 최윤은 통속적인 달력 이미지 위로 케이팝의 가사를 웅변하듯 외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재현이 아니라 본 떠내기를 통한 서사 비틀기이다. 그로 인해 원본은 한없이 가벼운 대상으로 재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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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임영주의 작업으로 돌아가 보자. 임영주는 언제나 두 개의 힘이 긴장되어 있는 상태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둘을 뒤섞지만 언제나 진실 혹은 원본보다는 그것의 실재적 효과를 가능하게 하는 체계에 집중한다. 백스크린이라 불리는 플라스틱 재질의 인공 바위. 이것은 아주 사실적인 사물이지만 동시에 아래에 붙은 캡션이자 제목의 문장에 의해 그렇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해 폭로한다. ‘그렇게 보인다’라는 것은 그렇게 믿게 만드는 어떤 다른 체계에 대한 암시이며, 이에 따라 눈에 보이는 대상은 사실적이지만 그 믿음을 관철시켜야 하는 일종의 게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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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인 <무드>는 보다 더 믿음의 현상에 집중한 작업으로, 믿음을 만드는 효과와 그 효과의 리얼리티를 다룬 작업이다. 긴급 재난문자의 사이렌 소리와 빗소리, 배경의 이미지 즉 분위기는 개인의 심리를 압도하며 불안의 정서를 실재로 강화시킨다. 이것은 미디어의 기술 효과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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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임영주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집중할 필요가 있다. 희극을 유발한 바로 그 서사 방식 말이다. 그것은 어느 하나의 지식 체계에 대한 지지나 비판에 치우치지 않고, 체계의 요소들을 한데 뒤섞는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요소들 간의 위계가 없는 데이터베이스적 규칙이 그 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세계에 대한 재서술의 방식으로서 맥락과 위치에서 요소들을 떼어 내고 다시 어딘가에 놓음으로써 현실에 대한 다른 허구적인 실재를 구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즈마 히로키가 일본의 전후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로서 오타쿠를 연구하며 주장한 데이터베이스의 소비 양식과 유사하며, 더 근본적으로는 리요타르가 1979년 서술한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거대 서사의 조락과 그에 따라 등장한 지식의 새로운 언어게임의 모델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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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돌과 요정으로 돌아가 보자.
<돌과 요정>은 언뜻 돌에 대한 믿음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같지만, 영상의 드라마는 그러한 주제 아래 균질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고 또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두’님은 갑자기 한국 인터넷의 역사에 대해서 얘기하는가 하면, 운석이 떨어진 진주 미천면 주민들은 작가에게 ‘보고 가면 어디 쓸데가 있나?’ 하고 말하며 서스펜스를 무화시킨다. 영화 감독 백종관은 이 작품에 대한 리뷰에서, 이 작품은 발화 주체를 특정하기 힘든 내레이션의 사용, 그리고 ‘확신’을 다루면서 이야기에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돌에 대한 믿음, 즉 확신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반추하는 기획을 진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믿음으로부터 비켜선 후 어둠 속으로, 더 근원적인 우주가 탄생한 지점으로 나아가도록 한다고 적확하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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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이야기 구성의 방식은 <요석 공주>에서 더 밀고 나아가진다.
요석공주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에 나오는 인물로, 원효와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이름 없는 공주다. 이처럼 이름 없는 인물이 관련된 상황은 완전히 과격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손상된 신경에 의해 들리는 방울 소리가 갑자기 사막의 바람 부는 배경으로 이어지고, 그 위에는 자신의 풀먹인 바지를 세계인들이 놀라워한다는 앙드레 김의 내레이션과 그 세계인 중 한명인 마이클 잭슨의 공연 영상이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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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자기 합정역에서 도를 아십니까 여인을 만나 따라간 여인은 즉석밥이 전자렌지에서 데워지는 2분동안 어딘가를 가게 되면서 요석공주가 되버린다. 그리고 갑자기 홍콩할매 귀신 괴담이나 500원짜리 동전과 관련된 인터넷 썰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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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요석은 갑자기 천이통 수련을 하다 만나고, 하룻밤을 지낸다.
임영주가 다시 만들어낸 요석공주 이야기는 이처럼 당대의 사회 안에서 둥둥 부유하고 있는 카더라 식의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널뛰듯이 배치하여 이어 놓는다. 비행기 활주로 장면에서 보았듯 텍스트와 사운드, 이미지는 서로간의 연관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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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임영주가 작품 곳곳에 심어 놓은 ‘문’이라는 미디어의 활용이다. 요석공주가 방 안의 허름한 옷장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들판과 홍콩할매의 가발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문의 차안으로 돌아왔을 때, 한복의 윗저고리를 입고 요석공주가 된 여인은 제사를 지내고 갑자기 배경은 계곡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임영주의 작품에서 문이란 것은 바로 실재와 실재를 널뛰며 허구를 생산하게 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 혹은 동굴의 우화가 제시하는 위계화된 세계의 구조나 실재계와 상상계의 구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문은 단지 네트워크를 위한 교점에 지나지 않으며, 그 네트워크는 자체로 픽션의 세계의 반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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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세계는 결국 허구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던 원효가 일상적인 등산객들의 세계와 함께 겹처지는 풍경으로 가시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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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교
가장 비약이 심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분명 뭔가 있는데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 장면이다. 가장 강력한 음모론은 서사의 맥락에서 안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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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풍경과 요석공주, 원효대사의 이미지가 중첩되서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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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이 떠다니는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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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없는 세계와 픽션화하기

결국 오늘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당대를 가동시키는 픽션적인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가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 그리하여 그 실재는 어떻게 재생산되는가에 있다. 당대의 시각 예술가들은 당대에 틈입한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 양자에 끼어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산을 더 많이 내려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에 의해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는 픽션적 힘은 가벼워지고 희화화되고, 그 가벼움 사이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돌출된다. 오늘날의 시각 예술가들은 그 이전의 세대들보다 우리를 옥죄는 그러한 근대적 지식체계에 대해 덜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예술적 전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일견 이것은 진지하지 않다고, 비판적이지 않다고, 또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고 폄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언제나 방법의 타당성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담론만이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고 그 이외의 것은 상상할수 없다고 주장하는 마크 피셔는,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으로 보일 때, 그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일 때 가장 강력하다고 말한다. 즉 실재를 명백한 실재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픽션과 그 바깥으 또 다른 픽션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없음의 구조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당대를 구성하는 힘의 실재가 사실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안의 텅 비어 있음을 보여줄 때, 그러니까 그것이 전혀 리얼한 것이 아니고 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낼 때 그 이데올로기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워 한다. 때문에 자명한 것으로 규범화시키지 못할 바깥의 이야기와 다른 지식의 체계들을 그 스스로의 내적 형식과 요소들의 재배치로 가리키게 될 때 그것은 한없이 가벼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