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전시 셔틀

보스토크 매거진 15호 오늘도 야근을 마치고에 수록 (2019년 5월 16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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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데이터, 디지털 : 전시기획의 어떤 관습들

이한범 우연이겠지만, 웹과 데이터를 주제로 서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동시에 전시가 열렸어요. 그 와중에 규모는 훨씬 작지만 세운홀에서 Degital – in your hands라는 전시도 열렸고 이게 어떤 현상일까 궁금했죠. 전시란 무언가에 대한 기획자의 반응이고 발언인데, 이정도 규모의 전시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은 일종의 담론적 상황이 아닐까 싶었고, 세 전시를 함께 놓고 살펴보며 과연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질문하고 싶었어요.

이기원 일단 저는 웹–레트로는 회고전에 가까운 것으로 봤어요. 한편으로는 초기 웹아트라는 건 자료나 문헌으로만 보고 들었던 것이라 미술 전시라기 보다는 박물관 보는 느낌으로 둘러봤던 것 같아요. 웹–레트로에서는 어떤 점이 흥미로우셨나요?

이한범 리플릿의 전시 맵에서 개별 작품의 웹사이트 주소를 기입해 둔 것은 재치가 있었어요. 웹 주소가 사실 이 작품의 정확한 장소니까요. 전시에 대한 감상으로는 체험은 되는데 어떤 작품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었죠. 그래서 저는 이게 그 당시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웹이라는 매체에 대한 믿음과 이해, 문화적인 감수성 같은 것들이 버무려진 아주 특수한 결과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이 전시의 작품들처럼 웹 아트라고 하는 것들은 이미지의 강도를 강조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 건 이미지보다는 인터페이스예요. 대다수의 웹 아트 작품의 인터페이스와 문화적 감수성을 저는 잘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상에 충실해지기에는 그 작품들은 미적인 자극이 떨어져요. 때문에 거기에 곧장 진입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김범 작가의 유틸리티 폴더 같은 작업은 웹의 인터페이스를 강조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서사와 이미지 형식의 보편성이 있어서 좋았어요.

이기원 웹아트라는 범주로 묶이는 작품들을 봤을 때, ‘웹’은 여기서 하나의 매체나 장치처럼 기능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의 웹은 이미 매체나 도구로 여겨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마치 전기처럼 없으면 일상에 큰 문제가 생겨버리는 상황이죠. 말하자면 생필품인데, 예컨대 전기를 사용해서 예술 작품을 만든다고 ‘일렉트릭 아트’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이제 ‘웹 아트’라는 말은 특정 시대의 특정한 작업을 지칭하는 표현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 작업에서 어느 부분을 지금의 관점에서 주의깊게 봐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혼란이 왔어요.

이한범 작품들간의 연계나 구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출품작 말고도 지금도 웹에 접속해서 볼 수 있는 웹아트 작업이 많거든요. 그중에서 왜 이들을 골라냈는가가 전시장에서는 잘 안 읽혔던 것 같아요. 한국의 웹아트에 집중하려 한 것 같지만 꼭 그런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이기원 웹아트의 전반적인 흐름을 다 살펴보지 못한 상황에서 전시를 보면 ‘이들이 웹아트의 대표작이다!’ 라고 오해할 만한 여지들이 있었죠.

이한범 이미 웹아트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많았고, 예를 들어 리좀(rhizome.org)은 2016년부터 진행한 ‘넷아트 앤솔로지’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지난 30여년 동안의 웹 아트 작품 100개를 엄선해 역사화했어요. 웹 아트에 대해 어떠한 자기 서사를 가지고 있는지가, 즉 이 전시만의 역사적인 관점이나 입장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가장 아쉬웠어요. 아카이브 섹션 벽면에는 사회사와 기술사, 문화사와 미술사를 병치시킨 타임라인이 크게 펼쳐져 있는데, 이러한 시각화 방식은 많은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요. 항목들간의 관계와 역학에 대한 논증 없이는 역사적 서술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오히려 이렇게 영역을 임의로 구분하고 선형성 안에서 사건을 병치시키는 건, 서로 멀리 떨어진 시공간을 이어보거나 숨겨진 힘의 작용을 발견하기 어렵게 만들거든요.

이한범 불온한 데이터는 일단 전시를 보는 것 자체가 조금 힘들었어요. 공간이 협소한데 작업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피로도가 엄청 높았어요.

이기원 말씀하신 것처럼 두 번째 공간(4전시실)은 너무 작품들이 붙어 있는 반면 첫 번째 공간(3전시실)은 넓고 유독 포토제닉한 작품들이 와 있었죠. 이런 맥락에서 전시장 입구에 도스 시절 느낌의 픽셀 깨지는 명조계열 한글 폰트로 전시 제목을 만들어서 걸어뒀잖아요. 전시 서문에는 빅데이터, 블록체인, 인공지능 이런 단어가 나오는데, 전시 관련 그래픽 디자인은 되게 저해상도 이미지나 폰트를 사용하는 걸 딱 짚어 문제다! 라고 말할 순 없는데, 이게 이 전시가 생각하는 ‘데이터’가 무엇인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긴 해요.

이한범 기획자가 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입장에서 작가들을 섭외했는지에서 모순이 있었다고 봐요. 어떤 작가들은 데이터 사회에 저항하는 전사들로 소환되는데, 어떤 작가들은 데이터 기술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고. 데이터에 대해 이런저런 면들을 두루 말하고 싶어서 작품 하나당 무언가를 표상하도록 역할을 부여한 것 같은데, 결국 이것이 이 전시를 전시가 아닌 박람회장으로 만들어버린 큐레토리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특히 사이먼 데니의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의문이었어요. 블록체인을 다루기는 하는데 아무 내용이 없고 그냥 짧은 기업 광고 영상같았거든요.

이기원 아주 단편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동안 봤던 모든 전시에서 3분짜리 영상을 저렇게 큰 스크린에 벤치까지 두고 봤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한범 그래서 저는 제가 모르는 이상한 위트나 조크가 있나 하고 유심히 봤는데 전혀 그런게 있지는 않았거든요. 적어도 하름 판 덴 도르펠의 레프트 갤러리 설명자 같은 경우에는 블록체인 시스템에 기반한 미학적 전략을 이야기하잖아요. 웹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작품을 어떻게 상품화시키고 이 상품을 어떻게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서 갤러리 시스템에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개념적인 자기 서사를 만드니까 블록체인 이야기가 작품으로 들어와도 설득이 되는 게 있었거든요.

이기원 저도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어서 전시된 다른 사례를 찾아봤는데, 저 영상은 다른 작품들과 같은 층위에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메인 작품과 함께 전시될 수는 있지만 저것 단독으로는 작업의 맥락을 전혀 보여줄 수 없어보여요. 이런 맥락에서 포렌식 아키텍처의 출품작도 조금 한 지점에 있어요. 포렌식 아키텍처의 핵심은 어떤 사건/사고와 관련된 사진이나 영상 기록들을 아주 광범위하게 가져와서 이를 기반으로 사건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시에 출품된 작업은 이들이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작업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끝으로 이번 전시에서 신작을 낸 김웅현, 김실비의 작품은 각각 어떻게 보셨나요?

이한범 김웅현의 작업은 콘셉트가 명확해요.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가상의 풍경이고 실제는 폐허라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공유하죠. 그리고 그게 전시의 성격과도 어느 정도 맞고요. 그런데 저는 그 작업이 어떤 기표들로만 이뤄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대사, 화면 속 무대, 이미지 등의 장치가 자꾸만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표상으로 노골적으로 반복되면서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김실비의 금융 – 신용 – 영성 삼신도도 비슷한 인상이었어요.

이기원 밤의 조우 경우에는 메인 스크린이 있고 난간 위에도 스크린이 하나 있죠. 그리고 스크린 앞엔 작품 속에 등장사는 사물들이 설치돼 있었는데, 이들이 영상의 이해를 돕거나 힌트를 주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서로 물음표로 맞물려버리는 느낌이었죠.

이한범 김웅현과 김실비의 두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건, 이들이 텍스트의 덩어리라는 거예요. 시각적인 리듬을 텍스트가 압도하는 거죠. 텍스트를 말하고 싶고 그걸 기의로 두면서 뭔지 모르겠는 상징들로 작품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아요.

이한범 Degital - in your hands 전시가 좋았던 건, 불온한 데이터에서의 아쉬운 부분과 상반되게 디지털 문화에 대한 위트 그 자체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기원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웹–레트로에서는 데이터가 하나의 매체로 기능했다면, 불온한 데이터에서는 데이터라는 방식이나 태도를 드러내려고 했죠. 그에 반해 Degital – in your hands는 이와 관련한 모든 걸 따로 끄집어내기보다는 하나의 환경으로서 기본값으로 두고 시작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한범 저는 작가 라인업이 재밌었어요. 활동의 방식이나 영역은 다르지만 다들 작업의 관심사와 결이 기술 문화와 어느 정도 연관된 측면이 분명한 작가들이었죠. 때문에 전시가 가진 문제 의식처럼, 기술을 다룬다는 작품과 미디어아트의 클리셰와도 같은 스펙터클의 풍경이 이 전시에는 없었어요. 가서 보니까 저는 좀 상쾌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디지털이 우리의 문화적 토양이라고 했을 때, 디지털이라는 문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수성 중 하나는 위트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기원 개별 작품들을 보면 각자 전시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이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공통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처럼 주어진 규칙을 나름의 위트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재미있었어요. 다만 저는 ‘주어진 규칙’ 자체에 다소 의문이 드는데, 굳이 왜 이 작품들이 팔리거나 팔아야 하는지가 명확히 이해되진 않았어요.

이한범 판매라는 규칙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작가마다 위트가 갈렸던 것 같아요. 황효덕의 IBY 시리즈는 일단 분홍색 돌 자체가 너무 갖고 싶게 만들어놔서 구입 문의를 했는데, 이미 팔렸고, 가격이 마이너스라 사가는 사람이 작가에게 돈을 받는 상품이라는 거에요. 전기를 써야 하는 작업이라 전기값을 대신 내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판매한다고 하더니 돈을 받고 사가는 것이라니, 교환관계를 어지럽힌 거죠. 이런 측면에서 황효덕은 인터페이스 자체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오브제를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원격으로 열선을 켤 수 있는 코드도 살 수 있는데, 사물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나누어 판매해서 사물을 둘러싼 기묘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거죠. 내가 사물을 소유하고 있는데 작동시키는 권한은 내가 아닌 다른 익명에게 있다. 무척 황당한 상황 같지만, 이 황당함 자체가 어쩌면 기존의 기술의 체계에 대한 비평같기도 했어요.

이기원 어쨌든 이 전시의 ‘판매’라는 룰이 있다고 했을 때, 황효덕 작가는 그 룰을 가장 잘 가지고 놀았던 것 같아요. 단지 유희적인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묘한 상황을 창출했다는 점이 유의미했다고 봐요.

이한범 언메이크랩도 기술이 가지고 있는 허점이나 이상한 부분에 집중을 했죠. 행복지수를 알려주는 얼굴인식 시스템이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하는 질문과, 행복의 지수를 보여주는 수치와 이미지간의 어떤 관계들을 탐구하면서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문화의 이상한 작동방식을 파고든다는 측면에서 흥미롭죠. 컴퓨터의 시각성이라는 것을 아주 구체적인 사례에서 추적한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고요.

이기원 행복지수를 알려주는 알고리즘에는 기본적으로 얼굴 인식 기술이 들어가 있고, 그 외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여러가지 첨단(?) 기술들이 개입됐을 거잖아요. 박사학위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연구해서 나온 성과가 돌고 돌아서 어디선가는 저렇게 활용되고 있다는게 되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전시 전반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면, 저는 이 전시가 ‘디지털’을 기본값으로 잡아두는 입장에서 전시를 꾸렸는데, 사실 그렇다면 굳이 전시 제목부터 ‘디지털’이란 단어가 들어갈 필요가 없진 않나 싶더라고요. 이한범 : 만약 전시를 같은 구성으로 제목이나 주제만 바꾼다면 디지털을 다루는 게 아니라 디지털 안에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게 훨씬 더 재미있는 기획일 것 같아요.

이기원 굳이 데이터나 디지털 같은 단어들을 제목으로 끌어오면서 생기는 장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걸로 인해서 김이 빠지거나 작품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들을 빼앗기는 느낌도 있어요. 불온한 데이터도 그랬지만 전시 제목때문에 개별 작품들의 해석까지 다 퉁쳐버리게 하기도 하잖아요.

이한범 그게 정확하게 전시기획의 안 좋은 관습이 발현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젊음’이라거나 ‘포스트-인터넷’이니 되게 큰 범주 같은 걸로 기획을 퉁치려는 거잖아요.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이 작업이 작동을 하고 이걸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생산적인데, 국내에선 그런 방식의 큐레토리얼 문화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작가나 작업들이 묻히고 퉁쳐서 이야기되고, 나아가 논의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악순환이 만들어지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