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Talking

앤디 워홀의 영화, 그리고 첼시의 소녀들

아라리오 뮤지엄 앤디워홀 30주기 기념 Warhole in Space

program

Section 1
안소연 독립 큐레이터 TALK

Section
IAB STUDIO TALK

Section
OKULO TALK & SCRE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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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희는 오늘 앤디워홀의 영화 스크리닝 프로그램의 기획을 맡은 오큘로의 이한범입니다. 간략하게 소개를 하자면, 오큘로는 영상예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비평지이구요, 작년 3월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총 네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저희는 영화와 미술을 오가며 글을 쓰고 기획을 합니다.

앤디 워홀은 주로 팝아트 미술 작가로 유명하지만, 사실 영상예술의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영화 감독입니다. 오늘 보여드릴 영화 첼시 걸즈는 한국에서 선보인 적이 거의 없던 작품입니다. 10년전에 리움미술관에서, 그리고 재작년에 DDP에서 앤디워홀 전시를 하면서 첼시 걸즈가 부대행사로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는 자막도 없었고 영화에 대한 별다른 소개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아라리오 미술관 측에서 많은 수고를 해 주신 덕분에 자막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선보일 수 있게 되었구요, 저희도 간단하게 영화에 대해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앤디 워홀이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63년입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기는 뜨거웠다. 프랑스에 누벨 바그가 있었다면, 미국은 또한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심지중 하나였습니다. 1960년 9월 28일, 23명의 독립 영화감독이 뉴욕에 모였고 그들은 이후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룹(New American Cinema Group)이라고 알려진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지지하고, 개인의 비전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영화를 강조했던 이들이 1962년 발표한 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거짓되고, 매끄럽고, 잘 만들어진 영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칠고 덜 다듬어졌지만, 살아있는 것을 원한다. 우리는 장밋빛의 영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피의 색으로 물들일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 그룹의 구성원이었던 에밀 드 안토니오니와 로버트 프랭크와 친하게 지냈고, 그룹의 주축인 조나스 메카스가 운영하던 필름메이커 시네마테크(Filmmaker’s Cinemateque)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영화에 급격한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입니다. 앤디 워홀이 이 그룹에 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모든 기존의 기술적 법칙에 반대하고, 오직 상업적인 영화관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말입니다.

이 시기의 작품이 앤디 워홀의 영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작품일텐데요, 자신의 연인이었던 존 지오르노가 자는 모습을 찍은 5시간짜리 잠, 그리고 키스, 8시간이 넘도록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점멸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엠파이어 등등입니다. 이 시기 영화의 특징이라면, 그는 주로 거의 항상 실제 삶의 모습을 다루었고, 편집을 하지 않았으며, 대본과 사운드가 없었습니다. 이는 앤디 워홀이 추구했던, “사물과 이것을 화면에서 보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었는데요, 주로 고정된 카메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구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한번 엠파이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장면이 8시간 이어지구요, 대체적으로 초기의 작업은 이러한 경향을 보입니다. 1966년 앤디 워홀은 요나스 메카스가 만드는 잡지 “필름 컬처”에서 매년 수상하는 독립영화상을 수상합니다. 조나스 메카스는 수상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앤디 워홀은 영화를 뤼미에르 시절의 기원으로 되돌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갱신하고 정화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영화가 모아놓은 내용과 형식의 특정한 요소를 버렸다. 그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가장 단순한 이미지를 렌즈에 담았다. 그는 예술가의 직관으로 사람들의 일상의 행동,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찍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세계는 영화의 색조 안에서 변화한다.”

앤디 워홀이 팩토리를 연 것이 1964년이고, 워홀은 이때부터 66년까지 ‘스크린 테스트’라는 영상을 찍습니다. 팩토리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앉혀놓고 흑백 무성 롤 필름을 사용한 고정식 16mm Bolex 영상 카메라를 사용해서 3분짜리 영상을 이 기간 동안 무려 500여편을 찍습니다. 제가 이 사진을 보여드린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요, 이 Bolex 카메라는 보면 아시겠지만 크기가 아주 작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필름은 30미터짜리 롤인데, 이게 딱 3분 정도의 기록만을 할 수 있는 길이에요. 그래서 스크린 테스트 연작들이 다 3분정도의 길이죠. 앤디 워홀의 영화에 있어서 이 측면은 중요합니다. 그는 여타의 감독들, 심지어 실험영화의 작가들과도 달리 편집을 하지 않았습니다. 촬영을 시작해서 필름이 다 끝날 때까지 대상을 찍고 그것이 영화의 끝이 되도록 하는 것이에요. 이 사진을 보면 아까보다 좀 더 크기가 크죠? Auricon이라는 카메라인데요, 여기에는 30분짜리 필름이 들어갑니다. 이 카메라의 특징은 영상 이미지와 소리가 하나의 필름에 같이 녹화된다는 거예요. 영상과 소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그대로 담는다는 앤디 워홀의 영화적 태도를 생각해보면 섬세한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이 카메라를 보여드리는 이유는 오늘 볼 첼시 걸즈도 이 카메라로 찍었을거라 추측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또 분명 다른 요소들이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영국에서의 개봉을 위해 앨런 알드리지가 디자인한 포스터는 늘 대표적인 이미지로 따라다닙니다. 이 포스터의 여인인 클레어 셴스톤은 당시 16살밖에 안되었고, 이후 프랜시스 베이컨에 영향을 받은 미술가가 됩니다. 앤디 워홀은 이 포스터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고, 영화가 이 포스터만큼만 좋으면 한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첼시 걸즈는 앤디 워홀과 폴 모리세이가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앞서 보았던 초기의 영화들과는 다른 국면에 접어든 시점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966년 6월부터 9월까지 촬영해서 9월 15일 개봉했고, 고작 3000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영화는 워홀의 영화중에서도 꽤나 유명한데,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브로드웨이의 리젠시 극장처럼 제트족(여행을 많이 다니는 부자들)들이 바글바글한 상업 영화관에서 연이어 개봉하며 대단한 성공을 거둡니다. 그 파급력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비견할만했다고도 합니다. 1967년 이 영화는 앤디를 깐느 영화제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잭 크롤은 이 영화가 개봉하고 뉴스위크지에 이 영화를 “언더그라운드의 일리아드”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가 폴 모리세이에 의해 오염되기 전 앤디 워홀의 “마지막 예술 영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구분은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맨하탄의 첼시 호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하지만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서 찍기도 했다),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워홀의 수퍼스타(앤디 워홀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수퍼스타라고 불렀다)였습니다. 워홀은 그가 찍었던 필름들 중 12개를 골라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에피소드는 30분이었고,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필름의 길이 때문이었습니다. 30분짜리 12개의 길이는 7시간정도가 되었는데 듀얼스크린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한번에 보여줌으로써 러닝타임이 3시간 30분으로 줄었습니다. 이전의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워홀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면 재미있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에 따라 편집 없이 촬영했습니다. 사운드는 필름에 직접 녹음되었고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영화의 제목을 지을 때 모리세이와의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폴은 “첼시 호텔”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앤디는 그보다 덜 논리적인 “첼시의 소녀들”을 쓰길 원했습니다. 12개의 에피소드 모두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르네 리카르드만이 당시 이 호텔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강점은 주인공의 실제 삶을 스크린으로 가져오는 방식에 있습니다. 특별한 그 연기자의 성격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팩토리의 연기자인 테일러 미드는 이런 대본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매우 인간적인 혼합이었다. 워홀은 카메라 뒤에서 너무나 차분했고 너무나 맹렬히 조용했다. 그래서 마치 값비싼 정신 분석학자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에 대한 워홀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다음을 읽어 보자. “나는 특정 장면과 시간 조각을 골라내고 모으는 아이디어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과 같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든 실제 순간의 덩어리진 시간이었다…나는 단지 위대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이 평소에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고, 일정 길이의 시간동안 그들을 찍으면 그것이 영화가 되었다.”“워홀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실제 세계를 그대로 비추어내는 독특한 영화적 매체로 사용되었다면, 확실히 그것은 진정어린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불행한 그의 수퍼스타들은 모두 이후 짧고 불행한 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팩토리의 수퍼스타 중 많은 이들과 <첼시의 소녀들>의 주인공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으며, 그 스스로 위험하게 살거나 너무 일찍 충분히 살았다고 결정했습니다. 에디 세드윅은 1971년 최면제인 바르비투르 중독으로 사망했고, 72년에는 안드레아 펠드만이 자살했습니다. 캔디 달링은 에스트로겐을 너무 많이 먹어서 74년 5월에 죽었는데, 그 때 겨우 27살이었습니다. 재키 커티스는 몇 년 더 살았으나 1985년 여름 헤로인을 과다 복용해 명을 달리했다. 재키와 캔디의 친구이자 팩토리의 열렬한 방문객이었던 짐 모리슨은 이미 10년 전 파리에서 같은 이유로 죽었는데, 당시 그는 채 30살이 안되었습니다. 온다인과 니코 모두 에릭 에머슨과 같은 질병으로 죽었고, 잉그리드 수퍼스타는 1986년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몇몇은 잘 살아있습니다. 홀리 우드로운은 의미심장한 제목의 자서전 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첼시의 소녀들>에 대해 영화적인 독특함을 얘기할 때 가장 회자되는 것이 투채널 프로젝션입니다. 투채널로 프로젝션 하기로 한 것의 가장 첫 이유는 이 영화의 독특하고 서사적인 측면이 이해하기 쉽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운드는 한번에 하나의 화면의 것만 재생되어 소리와 화면간의 불일치가 생겨납니다. 또한 두 개의 프로젝터는 정확한 지시문이 있었지만 절대로 정확한 동기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매번의 관람은 다른 작품을 보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대본이랄 게 없는데다가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약에 취해 있기 때문에 이들이 하는 말은 영어 원어민이라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워홀을 제외한 모두가 약에 취해 있었기에, 대사가 있는지, 그걸 잊어버렸는지, 제대로 말하는지 아무도 잘 몰랐습니다. 동시에 두 화면이 나오고 그중 하나의 사운드만 나오는 듀얼 스크린은 관객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태로 남겨둡니다.

이본 라이너는 이 듀얼 스크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부 가장자리를 가진 듀얼 스크린 장치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큰 만족감을 얻었다. 나는 두 번째를 볼 때 하나의 스크린이나 나머지 하나를 보기보단 안쪽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안쪽 모서리는 또 다른 이야기, 문자의 또 다른 상호 작용을 묘사하고 프레임의 다른 부분보다 응축된 이미지를 포함하여 이미지가 가장자리와 얼마나 잘 겹쳐지고 또한 거기에 속박되어 있는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회화에서 친숙한 개념이긴 하지만, 요새의 회화에서는 유행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첼시의 소녀들>이 듀얼스크린을 사용한 워홀의 첫 영화는 아닙니다. 같은 해 <내외부공간>이 먼저 개봉되었고, <첼시의 소녀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앤디 워홀의 영화를 볼 때 가장 일반적으로 느끼게 되는 관람의 특징은 지루함입니다. 8시간이 넘는 <엠파이어>는 하늘을 배경으로 불이 깜빡이는 엠파이어 빌딩 이외에는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파멜라 리는 그의 저서 『시간 공포증』에서, 1960년대에는 이미 시간과 그것이 측정되는 것에 대한 강박적인 불편함, 즉 시간 공포증이 만연해있었다고 말합니다. 워홀이 그 대표적인 작가인 것입니다. 그가 시간 기반의 작업을 만드는 것은 시간에 묶인 존재에 대한 깊은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웨인 코스텐바움의 말에 따르면, 워홀이 그의 초기 영화에서 시간을 재배열한 것은 오로지 시간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워홀의 영화 앞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시간을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영화가 지루함의 경험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스틴 레메즈는 그의 이러한 영화가 에릭 사티의 ‘가구음악’과 마찬가지로 ‘가구영화’임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가구란 자신의 존재감을 강력해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듯, 나에게 간섭하거나 방해를 주지 않고 풍경처럼 그저 그대로 있는 것들을 뜻합니다. 앤디 워홀의 영화는 스스로 이러한 ‘가구영화’가 됨으로써, 스크린 앞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합니다. 스크린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관심을 제거해 버리도록 하는 일, 볼 수는 있지만 몰입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앤디 워홀은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1963년 <잠>에 관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아무 때나 들어오고 나갈 수 있습니다. 걸어다니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죠. 영화가 언제 시작하느냐는 질문은 영화를 보러갈 때 일반적인 질문입니다. 이 영화에 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군요. 언제나 시작한다고요.” 1975년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관객들 안에서 코메디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스크린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때보다 함께 모여 놀 때 더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앤디 워홀은 분산되고 집중하지 않는 관객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