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의 시대: 세계 혹은 세상의 끝에서
세계 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전해 본다. 올가 토카르추크 재단의 프로젝트 중심에서 벗어나기(Ex-Centrum)를 소개하는 웹페이지에는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의 목판화 한 부분이 대표 이미지로 게시되어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세상 끝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한 방랑자다. 그는 마침내 세계의 경계에 다다랐고 그 경계의 구석에 난 구멍을 통해 그가 여정 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질서의 세계로 비집고 나가고 있다. 이미 알려진 것,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현실을 보기”를 제안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이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보인다. 모험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딘가로부터 떠나 목적지 없이 걷는 사람이라면, 약속된 질서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은 분명 어떤 의미로든 자극적일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중심에서 벗어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쓴 글에서, 이 그림이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탁월한 은유”라고 말하는데, 토카르추크가 말하는 현재 우리의 현실이란 바로 ‘축소된 세계’다. 유한성의 세계. 이렇게 커다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쩐지 때때로 세계가 너무 작고 좁게 느껴져서 지겹지는 않았던가? 어딘가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저 자동으로 돌아가는 보행기 위에 서 있을 뿐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미래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낙관적일 때가 한번도 없지는 않았는가? 말해지지 않은 신비한 존재감이 점점 더 옅어져 가지는 않는가? 그래서 깊은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히진 않았는가? 세계가 지금은 이러저러한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이내 구름처럼 감쪽같이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이 몸 한구석 어딘가에 남아있지는 않는가? 되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나야 할지는 도대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하진 않은가?
세계의 끝에서 바깥으로 나가려 분투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토카르추크는 우리에게 돌아서서 묻는다. “자,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토카르추크 자기 자신의 문학가로서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양한 유기체의 결합물인 전생명체(holobiont)로 재정의함으로써 “복합성, 다중성, 다양성, 상호 작용, 메타 공생”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고, “무한한 다채로움과 복잡성을 이해”하게 해 주며,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직조함으로써 세상을 통합적으로 이해-형성하게 해주는 [이야기]의 필요성, 즉 문학에 대한 역설이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용어와 연결의 방식들이다.1
세계 끝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전해본다. 인류학자 애나 칭은 폐허가 된 장소에서 삶을 꾸려 나가는 버섯이라는 생명을 관찰해온 결과, 다음과 같은 제안에 이른다.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오염을 통해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 변화하면 상호적인 세계와 새로운 방향이 창발할 수도 있다.”2 오염은 축소된 세계, 좁아진 세계, 유한해진 세계에서 우리가 바깥으로 나아가는 길을 더듬게 해주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다. 유념할 것은 ‘바깥’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머물던 땅을 버리고 새로운 미지의 땅을 개척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땅의 바깥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안락하게 머물게 해주고 보호해주던 그러나 동시에 절대적인 규율과 폭력의 장소이기도 한 집에 가깝다. 우리는 땅을 떠날 것이 아니라 집을 떠나야 한다. 또한 애나 칭이 힘써서 피력하는 것은, 오염이라는 것이 새로운 발명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 활동에 있어서 거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모든 존재는 오염의 역사를 수반한다. 순수성은 선택지에 없다.”3
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오염’이라는 말을 보고 듣는 순간 온갖 나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오염의 수행자이자 오염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염과 관련한 말들을 한번 나열해보자. 물들다, 얽히다, 침투하다, 얼룩지다, 스미다, 옮다, 모호하다, 흐리다, 시끄럽다, 불투명하다, 불안정하다…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이 없는 현상이지만 은연중에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말들이다. 우리는 빵이나 와인과 같은 오염의 신비한 결과를 환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뒤섞이고 모호한 존재를 혐오하고 배제하기도 한다. 오염에 익숙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둔다. 이득을 취할 것에 대해서는 오염의 과정을 은폐하거나 미화하고, 혐오하고 배제할 것에 대해서는 오염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비열한 편향성이 우리에게는 있다. 오염 그 자체는 분명 오랫동안 부정화되고 악마화된 개념이 틀림 없다. 왜 그럴까? 한 가지 대답은 근대적인 발전 모델인 자립과 진보가 부여한 가치다. 근대적인 세계에서 인간은 자립하는 존재를 추구한다. 스스로 선다는 것은 언뜻 성공 신화로 읽히지만, 그 이면을 보자면 이렇다. “개별자의 사리 추구에 기반해 생각하면 오염, 즉 오염을 통한 변형을 무시할 수 있었다. 자립적 개별자는 마주침을 통해 변형되지 않는다. 개별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마주침을 이용하지만, 그럼에도 마주침으로 변형되지는 않는다.”4 마주침을 여러 이익으로 전환하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변형을 감수하지 않는 것, 사실 이미 우리는 협업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허위를 지속해서 재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오염은 이름을 잃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텐데 말이다. 다른 한 가지 대답은 근대적인 지식의 체제다. 애나 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 학문은 근대인의 자만심을 공고히 해나가는 한편, 여러 갈래로 나뉘고 층을 이루고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를 형성하는 프로젝트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학자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억압하면서 특정한 삶의 방식을 확산시키는 행위에 도취되었기에, 그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은 무시했다.”5
우리가 오염된 것에 가지는 부정적 감정과 배타적인 태도는, 앎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나아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함의 방식으로 다가서서 그것과 함께하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해 온 인간적인 언어로는 충분히 잘 해명되지 못하고 언제나 이물감을 남겨두는 존재가 바로 오염된 것들이다. 그것은 언제나 상당히 복잡한 중층적인 존재고 우리가 관여하지 못했던 시공간을 경유했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단어를 하나하나 부러뜨려 놓는다. 우리가 훈련해온 기술과 다져온 영토들에 대한 상실의 공포 때문인지,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려는 충분한 용기를 내지 못했고 아주 적은 이들만이 그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기를 시도했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절충적인데, 나는 그러한 타협적 태도가 오히려 무언가를 더욱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오염된 것은 정말로 그것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고 그러므로 밀려나왔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그것은 집으로부터 밀려나는 것이지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집이 불탄다면?
오염의 시대란 중의적이다. 오염된 상태로서의 시대를 뜻하기도 하지만, 오염을 인식의 틀로서 혹은 이야기의 구조로서 도입해야만 하는 시대를 뜻하기도 한다. 이건 하나의 전망이다. 그것을 전망하려 할 때 실제로 어떤 노력과 기술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전망이 열어놓을 현실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또한 명확히 그려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고단한 것은 오염이라는 것은 하나의 주제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지식 실천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고 사용하기를 요구한다는 데 있다. 오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오염을 언어로서 감당하고 그 세계의 요동을 매개하는 것은 아주 지난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외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우리가 살아온 세계는 고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세계 끝으로 내몰아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레 이미 세계 끝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를 먼저 탐색하고 바깥을 모색하고자 한 선구자들의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사용해왔던 말들을 부수고 그 부스러기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골몰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세계 혹은 세상 끝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본다. 어슐러 K. 르 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에는 다른 세계를 만드는 환상-상상력의 작업, 세상을 다르게 만드는 정치-상상력의 작업 등 여러 방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중 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설적으로) 오래된 세계를 만드는 (발견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잊고 잃은 세계에의 언어에 대한 상상력.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 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 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