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미술 아카이브: 부재하는 것을 공유하기 위하여

2022 세마피칭 기억하는 미술관, 기억하는 미래(서울시립미술관, 2022) 리뷰.


기억하는 미술관, 기억하는 미래는 “무엇이 미술 아카이브가되는가?”, “미술 아카이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두 개의 큰 질문 아래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 이 질문들은, ‘미술 아카이브’라는 것이 정체성의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아직 명확히, 혹은 규범적으로 정의되지 않았다는 어떤 불안과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되고자 하는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는 진술처럼 읽히기도 한다. 프로그램은 ‘미술, 정보, 기록의 주춧돌’, ‘미술아카이브의 안팎’, ‘서사와 기억, 그리고 제도’ ‘실천과 아카이브 사이에서’ 등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주제들을 구심점 삼아 이루어졌던 표면적인 논의보다 이 행사에서 중요하게 드러났던 것은 아카이브라는 독특한 장치 혹은 제도에 내거는, 말의 행간에 놓여 있던 기대 같은 것들이었다. 그 기대란,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것일 텐데, 아카이브는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장치가 될 수 있기도 하고,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 될 수 있기도 하고, 현실을 재인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장소가 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포지엄은 바로 이러한 기대와 전망에 기댄 제안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가능성의 말들을 엮어보려 한다. 하지만 먼저 하나 짚고 가려 한다. 여기에서 누락된 것은 아카이브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과 그것에 대한 입장 표명이었다. 미술 아카이브를 둘러싼 규범적 정의와 실천의 사례들이 침묵한 것은 실제로 그 아카이브가 현재에 어떠한 장치로서 작동하고 기능하고 있는가, 그 문화적 위치와 권력의 역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었다. 예컨대 지난 2020년 방혜진 평론가가 기획한, 동시대 시각예술에서의 내러티브의 문제를 ‘픽션’과 ‘아카이브’라는 관점에서 검토하기를 시도했던 프로그램 시체이거나 영광이거나: 내러티브x픽션x아카이브에서 유운성 평론가는 “오늘날 동시대 예술에서 미학을 대체한 것은 아카이브고, 내러티브를 대체한 것은 링크이고, 픽션을 대체한 것은 자기기술(self-description)이다.”라고 비판하며 오늘날의 예술 영역에 도입된 아카이브의 위상 자체를 문제시했다. 이런 입장에서라면 ‘미술 아카이브’라는 것의 제도적인 구축은 동시대 예술의 불길한 징후가 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아카이브 픽션: 시간을 분기시키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윤원화는 유운성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동시대 예술에서 아카이브라는 장치가 발휘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 숙고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언뜻 내비쳤는데, 그는 “하나의 ‘성과물’로서의 예술 작품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예술은 여러 가지 형태의 기록물, 정보의 집합, 데이터의 흐름으로 변형된다.”고 말하며 아카이브라는 존재로 인해 창작이 일종의 자기증명과 역사화라는 폐쇄회로에 갇히게 되는 상황, 그리고 창작의 시간보다 데이터가 더 큰 지위를 가지는 상황에 대해서 묘사했다. 이는 인물 중심, 성과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한 아카이브라는 체계 자체가 어떻게 현실을 재편하는가에 대한 제도 비판적 인식이며, ‘미술 아카이브’라는 제도가 자칫 이를 강화할 수 있음에 대해 우려했다. 현실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아카이브라는 것이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오로지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는 장치나 제도가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구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 현실의 힘을 가늠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을 점치는 말들은 그 힘 속으로 공허하게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필 또한 뉴뮤지올로지와 아카이브의 공공성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문화적 행위자, 지식 생산자, 역사 서술자로서의 미술관이 가지는 막강한 힘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수집-연구-전시-배움-공공-정보화의 과정을 통해 점점 지식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면서 시민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하며 제도가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했다. 그는 여기서 뉴뮤지올로지를 “미술관이 공공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식을 생산하고 구조화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미술관의 공공성과 중립성의 확보를 모색하는” 논의로 소개했다. 여러 발표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듯, 아카이브는 기본적으로 국가적 통치술의 한 방식으로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기에 아카이브에 스며 있는 권력에 대한 이와 같은 경계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기억 시대의 아카이브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조민지는 현대적 의미의 아카이브가 성립되고 발전되어온 국면을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아카이브가 국민의 권리임을 주장하며 시민 생활의 공공재로 자리매김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는 19세기 중반~1930년 사이를 법적 증빙의 시대로, 1970년대 이후를 사회적 자원으로서의 아카이브 시대로, 2010년대 이후를 참여와 협력을 위한 공동체적 기반을 위한 공유 기억을 아카이브의 본령으로 여기는 시대로 나누었다. 즉 아카이브는 국가 기록물의 개념에서 점점 더 시민사회에 침투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에 개입하는 것으로 변화해 간다. 당연히 선택되고 수집되는 기록물의 대상 또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한 것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화두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택과 배제’이며, 다른 하나는 아카이브의 ‘사용’이다. 이 두 화두는 모두 기존의 아카이브의 권력과 지위를 해체하고 거기에서 감춰져 있던 다른 무언가를 이끌어 내어 아카이브를 보다 더 시민사회에 결속시키기 위한 개념적 도구처럼 보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이 두 화두는 사실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이필은 “아카이브를 향한 강박적이고 반복적 욕망은 기억의 부재를 보상하려는 프로이트적 징후이며, 따라서 아카이브는 과거의 기억 그자체가 될 수 없다…아카이브는 오히려 부재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라는 데리다의 통찰을 소개하며 우리가 아카이브를 보면서 인식해야 할 것은 가시적인 자료들이 아니라 거기 없는 어떤 것들이라고 역설했다. ‘선택된 것’은 ‘배제된 것’을 동전의 양면처럼 가지고 있다. 나아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배제된 것’을 추정하고 판별하는 것은 ‘사용자’라는 주체다.

이영남이 기록방법의 탈학습론을 통해 소개하고 제안한 것이 바로 아카이브를 이용한 시민들의 주체적인 이야기 생산 작업이다. 그는 우리가 종종 “아카이브가 읽기의 장소라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고 말하며, 아카이브를 통해 기록 기반의 이야기 만들기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기록증식”이라고 표현했는데, 기존의 기록 자료를 공공의 ‘무대’에서 참여하여 상연하고, 아카이브를 자신의 삶과 연결하고 기억을 꺼내오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말하자면 기록은 그것 스스로 귀하여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함으로써 공동체적 감각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자원인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열린 장소에서 구체적인 몸들의 연결을 통해 활성화되는 공동체와 공유의 감각은 일종의 ‘우애의 아카이브’로 표현된다. 그는 아카이브의 현재 위치를 ‘카산드라의 비극’으로 비유하기도 했는데, 진실을 말하지만 사람들의 믿음은 얻지 못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이다. 이는 아카이브 그 자체는 일종의 미완의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며, 여기서 아키비스트는 진실이 발화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설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하여야만 한다.

이들의 대화 가장 흥미로웠던 표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영남이 했던 말이다. “미술관은 너무 화려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상당합니다. 아카이브는 초라합니다. 아카이브는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는 시골의 섬 같습니다.” 미술 아카이브는 이 말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미술 아카이브라는 것이 이미 역사적으로 또 기존 지식에 기반해 형성된 제도를 통해 인준된 ‘화려한’ 것을 구심점 삼아 형성된다면, 그것은 기존 지식 체계를 강화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공동체의 감각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능동적 생산자, 공유의 일원으로서 시민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아카이브의 자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가시적인 그 자료를 남아있게 하고 존재하게 했던 힘의 작용들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AAA의 연구 디렉터 존 테인의 발표 컨텍스트, 대리자, 원본: 문서란 무엇인가?에서 미술 아카이브의 자료들을 ‘문서’로서, 그것을 분명히 예술 작품 자체와 구분하여 메타데이터로서 규정하며 끊임없이 확장하고 예술 작품 자체를 피드백하는 자기 삶의 존재로서 규정하는 것은 미술 아카이브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결정처럼 보인다. ‘문서’는 ‘예술’과 ‘작품’ 각각의 개념과 존재방식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 것이어야 한다.

윤원화는 아카이브를 “어떻게 서로 다른 시간들이 자라나는 장소로 상상할 수 있을까?” 물었다. 그는 아카이브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일부를 떼어낸 것”, “현재에 쓰이지 않는 정보를 미래를 위해 별도로 보관해 둔 것”, “조각나고 편집된 것”, “공간을 비워두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아카이브는 과거를 밝혀내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할당된 장소라는 이해방식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는 끊임없이 가장 최신의 현재를 데이터화 하는 백업을 아카이브와 대비되는 것으로 소개하며, 아카이브가 그저 과거를 보존하는 기억 장치로 남을 것이 아니라 일종의 픽션 생산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여기서 그는 아카이브를 통해 도출되는 두 종류의 픽션을 언급한다. 하나는 전혀 다른 바깥 세계를 향한 픽션이고, 다른 하나는 아카이브를 요구하는 현재의 조건 내부로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픽션이다. 이 두 픽션은 모두 아카이브에 종속된 주체가 아닌 아카이브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활용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윤원화는 이 생산적 주체로서 예술 작가들의 능력을 신뢰해보기를 제안한다.

프로그램 중간에 상영되었던 노송희, 윤지원 두 작가의 에세이 영화는 어쩌면 윤원화의 이 제안에 대한 매우 적절한 응답처럼 보였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남아 있는 자료들 사이를 배회하고 그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보여주지 않고 말해주지 않은 것을 환기시킨다. 이들의 작업은 아카이브란 남은 것을 공유하는 장소가 아니라 남지 않고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던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공유해주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어떤 존재는 침묵을 통해서만 등장하고 말해질 수 있다는 예술가들의 인식을 제도가 어떻게 수용하고 재생산할 수 있을까? 미술 아카이브가 신화를 구축하여 결국 일방향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되지 않고, 문서들을 통해 시민들 스스로 미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카이브는 그 시민들이 파편들 사이를 자유로이 걷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윤지원, 무제(현대|사진), 단채널 비디오, 13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