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바깥
전시장에 걸린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갔다. 그건 책장의 한 칸을 찍은 사진이었고, 눈이 가게 된 건 아마도 거기에 꽂힌 책 중 한 권의 책등에 선명하게 한자로 적힌 ‘朝鮮’이라고 하는 글자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 글자는 사진에서 유일하게 로마자가 아닌 글자였고, 또 유일하게 활판 인쇄로 찍힌 글자가 아닌 손으로 적힌 글자였다. 그러고 보면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글자는 책등 하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다른 글자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책등 상단에는 “N. Weber Im Lande der Morgen-stille” 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 책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책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노르베르트 베버라는 독일 베네딕도회의 신부가 1911년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와 약 4개월간 여행하며 텍스트와 이미지로 기록한 조선의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어를 조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진 속 책이 바로 그 책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사진 속의 책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지만 초판본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초판본은 1915년에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헤르더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사진 속 서가에는 한국에 관한 책들이 몇 권 더 보였다. 이 서가의 주인은 삶의 어느 구간에서 한국에 대해 조금 궁금해한 적이 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는 독일인 이었을테고. 눈길이 사진의 중앙에 머물다가 천천히 주변으로 맴돌아 나가기 시작하니, 베버의 책이 꽂힌 칸의 바로 아래칸에 한국어 책들이 꽂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등의 위쪽 끝부분만 조금 나왔지만, ‘삼’, ‘나’같은 한글이 보인다. 한글로 만들어진 책들의 제목이 뭘지, 무슨 책일지 나는 무척 궁금했지만 사진만으로는 알아낼 도리가 더는 없었다. 다만, 이 책장이 놓인 집 그 공간에는 어쩌면 독일인과 한국인이 함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적이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그것 말고는 구체적인 다른 무언가를 더는 알 수 없었다.
이 사진은 내가 장보윤의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의 전시장에서 비교적 읽어낼 것이 많았던 사진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내가 이미 무언가 조금 알고 있는 사물과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진들에 대해서라면 당장은 길게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덩그러니 놓인 하모니카, 읽을 수 없는 필기체 글자가 적힌 오래된 책의 첫 페이지, 가지런하고 단정한 유럽식 건축의 안팎, 어딘지 모를 도시의 풍경. 그리고 최근에 찍은 것 같지는 않은, 지난 시절의 사람들이 찍힌 오래된 사진들. 이 사진들의 피사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진이 비밀을 품고 있으니 비밀에 다가서라고, 다가서서 비밀을 풀어보라고 요구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가 어떤 사람의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진들이 모두 어떤 사람의 삶 혹은 사건과 관련됐을 법한 흔적들 혹은 남은 것들이라는 시간의 감각을 환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기억시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사라져 이제 더는 다가갈 수 없는지도 알려준다. 남은 것은 언제나 남은 것을 둘러싼 세계에 관한 하나의 암시이다.
그렇다고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가 서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이러저러하게 배치해보며 연관성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수사 현황판을 닮은 것은 아니었다. 장보윤의 재구성 작업이란 불확실하고 불투명했던 것을 선명하게 한다거나 잡히지 않던 것을 잡히도록 해주는 그런 종류의 물질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의지 속에서 대상의 불투명함을, 잡으려 할 때마다 뒤로 물러나 결코 잡히지 않는 불가능성을 다룬다고 하는 편이, 그리고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하는 픽션들을 길러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러니 사진들의 배치가 무엇을 재구성하고 있는가 묻기 보다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어떤 공간이 자라나고 있는지를 묻는 편이 낫다. 거기에는 차이들만이, 차이들 사이의 아주 좁은 간격들만이 놓인다. 사진을 보던 나의 눈길이 더 바깥으로 맴돌아 나갔을 때, 내게 보였던 것은 사진의 들뜸이었다. 액자로 프레이밍 된 사진들은 액자 속 패널에 부착되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평평하게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인쇄된 이미지와 배경 사이에는 아주 얇고 미묘하게 벌어진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눈길이 사진의 바깥으로 맴돌아 나간 것은 나의 의식적인 관람 과정이었다기보다는 그 공간의 존재감이 나의 눈길을 이끌고 갔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장보윤이 사진으로서 보여주는 사진적 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그 가장자리의 공간까지이고, 그곳이 무수한 이야기의 자리가 된다.
장보윤은 <밤에 익숙해지며>(2015)나 <다시 이곳에서: 마운트 아날로그>(2016)에서 그러했듯 언제나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곳에 자립할 수 있는 가능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는 일을 한다. 글을 쓴다고 했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투신하고 그곳과 얽혀 가는 일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떤 배움을 얻게 되는데, 그건 픽션 만들기에 있어서 몸의 이동, ‘그곳으로 감’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볼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보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미지-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만들어주는 텅 빈 자리의 픽션을 회복하기 위해 길 위에 있는 거라고. 나는 이것이 사진을 매체로 다루는 작가로서 장보윤의 예술적 실천이 가지는 독특하고 고유한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진으로 담거나, 사진의 배치를 통해 사진 바깥의 무언가를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 사진이 만드는 사진 바깥의 빈 공간에 자기 자신의 글쓰기로서 가능한 이야기를 실체화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공간을 채우고 서사를 구축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그 공간을 이루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의 간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자, 또 다른 이야기들의 출현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리 만들기의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작가는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설명한다. “파독 간호사에 대한 이해는 이미 우리 사회의 근현대사라는 거대 서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기록이 지금까지 연구되어 왔으나 동시에 이미 잊혀가고 있다. 하지만 공식화된 서사의 그림자에는 조각조각 나서 서로 이가 맞지 않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이 작업은 역사와 개인,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푸티지를 발견하거나 혹은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으면 했다. 물론 그것은 작업의 의도와 기획의 일부일 뿐 그 과정을 완성하는 것은 작업을 마주한 이들의 몫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기록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기록과 기억에 의한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불충분함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기록되고 기억된다면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겠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잊히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더 오랫동안 생각해왔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잊힘에 대해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건져 내는 일일까? 장보윤에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일인 것 같다. 그것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자리에서 여러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의 양식들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 어긋나고 합의되지 않는 경합들이 가능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을 말이다. 이것이 장보윤의 작업에서 픽션이라는 용어가 가진 중층적인 의미다.
전시장에 놓인 책자 속 「블랙 베일」은 여러 실로 직조된 직물과 같은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크게 보면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 두 가지 다른 이야기로 짜여 있다. [기록하는 자]는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화자가 파독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고,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독자는 [기록하는 자]의 내용을 통해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흐름을, 작가가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또 전시장에 놓인 사진들이 어떤 편린들인지 천천히 이해해나갈 수 있다. [픽션 셀]은 다시 각각 주남, 경이, 인주, 한진이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쓴 각각의 다른 이야기로 나뉜다. 네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파독 간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네 인물의 이야기는 [기록하는 자]로서는 알지 못하거나 닿을 수 없는 삶의 구체성들로 부풀려져 있다. 조금 더 세심하게 말하면, 이 구체성들은 견고한 모든 것들이 아니라 견고하지 않은 모든 것들, 분위기나 감정, 흩어지는 말과 끊임없이 일렁이는 관계 같은 것들이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작가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 이외에도, 「블랙 베일」에는 여러 다양한 텍스트 파편들이 틈입해 있다. 그것은 대부분 인용된 텍스트들인데, 파독 간호사와 관련된 시대적인 자료도 있고 문학의 한 부분들도 있다. 이들은 여러 이야기들의 사이를 연결해주기도 하고, 이야기로부터 독자를 빼 내어주기도 한다. 내가 이 텍스트가 직물과도 같다고 한 이유는 각각의 부분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며 하나의 흐름을 찾아나기 때문이다.
[기록하는 자]의 이야기는 시작보다 더 이전의 시점부터 시작하고, 화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록, 어딘가로 더 멀리 떠날수록,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갈수록, 묻혀 있던 사물과 이미지들을 발견할수록 [픽션 셀]의 이야기는 더욱 내밀해진다. 그리고 이 픽션의 여정이 흘러감에 따라 이야기의 부분들은 단단히 얽힌다. 어느 순간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의 이야기가 허구나 실제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서사가 고조되어간다거나 이야기가 완성되어가는 것이기보다는 알 수 없는 깊이의 깊고 어두운 동굴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는 나아가지만 어두움은 끝이 없고 밝혀지지 않는다. “나는 파독 간호사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기록하는자]의 열여섯 번째 조각글)는 화자의 말은 이 여정이 이야기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장소를 정처없이 항해하며 그 세계의 조류를 따라 방랑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내가 「블랙 베일」이 직물같다고 말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지 않고 끊임없는 짜임으로만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사진들, 그리고 책과 함께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를 구성하는 영상 <블랙 베일 낭독 시리즈>는 [픽션 셀]의 내용과 닮은 스크립트를 낭독하는 두 연기자의 모습을 각각 촬영한 작업이다. 한 명은 독일에서, 다른 한 명은 인도에서 한국으로 와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 그들은 한국어를 잘 하지만 충분히 잘 하지는 않는다. 두 연기자는 모두 같은 스크립트를 낭독하며 그 옛날 한국에서 독일로 이주한 노동자의 삶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입한다. 그리고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차이이다. 글로 쓰인 텍스트는 같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연기자를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산출된다. [픽션 셀]이 네 명의 서로 다른 파독 간호사들을 통해 서로 다른 미시적인 삶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블랙 베일 낭독 시리즈>는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발화를 통해 차이들을 발견한다. 결국 작가가 사진의 가장자리에, 사진의 모서리에 붙어 있지만 결코 그것으로부터 멀지 않은 바깥에 놓으려고 했던 것은 무수한 차이들의 픽션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리는 작가 자신의 영토로만 남는 곳은 결코 아닐 것이다.
「블랙 베일」의 처음과 끝에는,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노르베르트 베버의 책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주남의 시점으로 쓰인 [픽션 셀]의 다섯 번째 조각글에 나오는데, 주남은 독일인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 남자가 이내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미망인으로 살게 된 사람이다. 여기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죽은 독일인 남편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그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샀다고 했다. 까만 머리의 검은 눈을 가진 나를 만날 것을 예견한 책이라며, 그는 그 책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어 보이곤 했다.” 다른 하나는 [기록하는 자]의 스무 번째 조각글에 나오는 것으로, 함부르크에서 만난 파독 간호사 양순 선생님과의 대화 중 그녀의 남편이 한국인 부인을 만나면서 생긴 관심으로 구하게 됐다며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는 장면이다. 전시장에 놓였던 사진의 진실은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이 질문은 아마도 여기서는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우선 그 사진의 바깥에, 적어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적어도 말이다.